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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인 1938년부터 1939년까지 나치 독일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사건을 가리킨다.

만주 사변 1931년
나치 독일의 설립 1933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935년–36년
라인란트 진주 1936년
스페인 내전 1936년–39년
방공 협정 1936년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오스트리아 병합 1938년
뮌헨 협정 1938년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39년 3월
영국-폴란드 군사 동맹 1939년 3월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1939년 4월
할힌골 전투 1939년 5월
강철 조약 1939년 5월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1939년 8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소련의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소련의 핀란드 침공 193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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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요구편집

1938년 3월 나치 독일오스트리아병합했다. 나치 독일은 독일인 다수가 거주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인 주데텐란트 병합을 노리고 있었다. 주데텐란트의 정치인인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친(親)독일계 정당인 주데텐란트 독일당은 독일인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서 자치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수 민족인 독일인은 고국인 독일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 정부에 정치적,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여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수립했다.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정부는 전쟁에 대해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랑스 정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위기를 해결하려 하였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방어에 협력해 줄 것을 요구했다. 1935년 프랑스와 소련은 나치 독일의 군사적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뮌헨 협정편집

유럽 열강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열강은 독일의 군사 능력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군이 독일 국방군보다 우세했지만 대규모의 재무장을 하고 있는 독일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독일군의 힘을 과장하여 유럽 열강과 전쟁을 했을 때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쟁을 피하자고 설득하였다. 무솔리니와 이탈리아는 전쟁에 대비되지 않았고 독일의 급성장에 대해 우려하였다. 독일 군부도 독일군의 실상을 알고 있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이용했다.

영국의 총리인 네빌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15일부터 9월 16일까지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를 만나 히틀러의 양보를 요구했다. 히틀러가 추가적 논의 없이는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영국은 내각과 프랑스에 주데텐란트 주민들의 주민투표 결과를 인정하도록 설득하기로 했다.

1938년 9월 22일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Georges Bonnet)는 런던에서 영국 외교관과 만나 주데텐란트의 인구 50% 이상을 독일에 보내는 것을 수용하기로 하는 합동 성명을 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9월 21일에 마지못해 수용하기로 했다. 이 제안은 히틀러의 성에 차지 않았고 9월 22일 고데스베르크(Godesberg)에서 히틀러를 만났을 때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는 독일에 합병되어야 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9월 28일까지 주데텐란트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새로운 제안을 했지만 영국 내각, 프랑스 정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체임벌린의 제안을 거부했다.

1938년 9월 23일 새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얀 시로비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1백만 명 이상에 달하는 완전히 무장된 군인들이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9월 24일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부분적 동원령을 내렸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체임벌린은 4강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전쟁을 피하려는 체임벌린의 생각에 따라 히틀러, 체임벌린, 달라디에와 무솔리니는 뮌헨에서 회담을 가졌다.

협상은 1938년 9월 29일에 접점에 다다랐다. 아돌프 히틀러와 네빌 체임벌린, 베니토 무솔리니와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뮌헨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은 고데스베르크에서의 제안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독일군은 1938년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의 점령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국제 기구는 다른 분쟁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제1차 빈 중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붕괴편집

1938년 9월 29일에 체결된 뮌헨 협정에 따라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대부분을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슬로바키아자카르파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치 지역임을 선언했다. 자카르파탸는 1938년 11월에 이름을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로 바꾸었다. 1938년 11월 2일에 있었던 제1차 빈 중재에 따라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체코슬로바키아의 남슬로바키아와 남자카르파탸(카르파티아 루테니아,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헝가리에게 양도했다.

이에 1938년 11월에 슬로바키아에 있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모든 정당(공산주의자를 빼고)이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흘린카의 슬로바키아 인민당 - 슬로바키아 국민통합당"을 결성하였는데 이 조직은 나중에 슬로바키아의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39년 1월에 슬로바키아 정부는 슬로바키아 국민통합당, '독일당'(Deutsche Partei, 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정당), '통합 헝가리당'(슬로바키아 내 헝가리인 정당) 외에 모든 정당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1939년 2월부터 나치 독일 사절들(이들은 체코의 일부 지역을 점령할 계획이었고 기본적으로 슬로바키아에는 관심이 없었음)이 공식적으로 슬로바키아의 정치인들을 설득하여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하도록 하였다. 1939년 3월 9일에 체코 군대가 슬로바키아를 점령하면서 티소는 총리직을 잃었다.

1939년 3월 13일 히틀러는 인내심을 잃고 티소를 베를린으로 (전 총리로서) 초대하여 그가 즉시 독일의 '보호'하에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하도록 강요하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독일이 헝가리로 하여금 (일부는 폴란드가) 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토를 병합하도록 두겠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티소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 에밀 하하와 슬로바키아의 총리 카롤 시도르에게 전화를 걸었으며 이들은 다음날 슬로바키아 의회를 소집하고 그렇게 결정하는 데 동의하였다.

1939년 3월 14일 슬로바키아 자치 정부의 수반이었던 요제프 티소가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나치 독일은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1939년 3월 14일에는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가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1939년 3월 16일에 헝가리가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합병시키면서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는 소멸되었다.

1939년 3월 15일 에밀 하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나치 독일의 보호국으로 규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멸되었다. 이 문서에는 사실상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39년 3월 15일에 독일군이 보헤미아, 모라바에 군대를 진주하면서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이 수립되었다. 1939년 3월 16일에는 독일군이 슬로바키아에 진주하면서 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