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북경 소재 마오둔 고택 앞마당에 세워진 마오둔 동상
마오둔
마오둔의 동생 심택민(沈澤民)
심택민의 아내 장금추(张琴秋)
북경 소재 마오둔 고택
저장성 가흥 소재 마오둔 고택
저장성 가흥 소재 마오둔 고택과 붙어있는 마오둔의 모교이자 현재 마오둔의 기념관인 입지서원(立志書院)
상해 다륜로 문화명인가 마오둔의 발도장

마오둔(茅盾, 모순, 1896년 7월 4일 - 1981년 3월 27일)은 중화인민공화국소설가이자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학가, 평론가, 공산주의 문학 공작자이다. 자는 안빙(雁氷)으로, 본명은 심덕홍(沈德鴻), 별명은 심안빙(沈雁氷), 필명은 마오둔(茅盾, 모순)이다. 저장성 가흥(浙江省 嘉興) 출신이며, 마오쩌둥 집권기간에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목차

생애편집

신문학 작가이자 항미원조 혁명 문예 작가였다. 1896년 청조 저장성 가흥에서 태어났으며 1914년 중화민국 시기에 북경대학교 문과(文科) 예과반에 들어간 뒤 소설과 비평을 발표했고 1920년 5월 천두슈의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를 거쳐 1921년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5년 '프롤레타리아트 예술론'이라는 평론을 내놓았다. 1921년부터 '공산당', '소설월보' 등 문예 전선에서 첫 당원으로 공산 혁명 문학 진지 확보에 나섰고 상하이 상무인서관 편집원으로 일하면서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아 직원 파업을 지도했다. 덩중샤, 취추바이 등의 당조직 주축 간부가 일하던 상하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1926년에는 선전 공작의 주축으로 마오쩌둥의 비서를 맡았다. 1927년 중국 공산당난창봉기추수봉기가 실패된 후는 검거를 피하여 1928년 7월 일본 제국으로 피신했다가 1930년 4월 상하이로 귀국하였다. 랑손(郞損), 현주(玄珠), 방벽(方璧), 지경(止敬), 미명(微明), 심명보(沈明甫) 등의 여러 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주로 국민당 통치 지역과 조계지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코민테른의 좌익작가 연맹에서는 취추바이 밑에서 집행 서기를 맡았으며, 이른바 '국방문학(國防文學) 논전'에서는 '민족 혁명 전쟁의 대중 문예'를 주장하여 중일 전쟁에 즈음해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을 병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좌익 작가 연맹의 해체가 강압된 후에는 상하이, 창사, 우한, 광저우 등지의 혁명 지도 일선에서 공산당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 신강에 건너간 뒤 1940년에는 옌안에 세워진 루쉰 예술학원을 방문해 가르쳤다. 그 후 충칭, 홍콩 등지에서도 비밀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소련 공산당의 대외 문화 공작자 교류의 일환으로 아내 겸 공산당원이었던 쿵더즈(孔德沚)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한 후 1947년 4월 상하이로 귀국했으며 1949년 1월 국공 내전의 승리를 맞아 베이핑으로 이동하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에는, 마오쩌둥비서 직을 다시 맡았고, 저우양, 궈모뤄 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문학공작 노선의 주요 지도부의 구성 부분이 되어, 대약진 운동 등을 비롯한 정치적 운동에 가담하였다.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 1949년 ~ 1965년), 초대 중국작가협회 주석(1949년 ~ 1981년)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 마오쩌둥소비에트 연방 방문을 직접 수행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홍위병과 사인방의 공산당 탄압 간부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사인방의 정치적 보호를 받았다. 사망 직전에 후야오방에게 공산당 당적 회복 청원서를 제출하여, 1921년 이후로 문화대혁명 전까지의 중화인민공화국 간부로서의 경력과 활동 등을 인정받아 공산당원 당적을 회복하였다. 중국 인민들에게서 거둔 거액의 인세 수입을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에 기탁하였다. 1981년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 부 : 심영석(沈永錫)
  • 모 : 진애주(陳爱珠)
    • 부인 : 공덕지(孔德沚, 쿵더즈) - 공산당원


저술편집

초창기 소설 작품으로 1927년의 '환멸' 등이 있으며, 좌익 작가 연맹 시기인 1932년 중국 농촌 혁명의 지도일환으로 쓰여진 '농촌 삼부작', 1933년에 내놓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도시 혁명 소설 '자야' 등이 알려졌다. 1948년에는 소련 방문 체험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소련견문록'을 출판하였다. 중공 정부 성립 후로는 중공 혁명 문학 운동의 지도 공작에 집중하였으며, 남긴 평론으로는 1950년 '재북경 문학공작자 선언', 1958년 '약진 중의 동북', 1960년 '사회주의 약진의 시대를 반영해 사회주의 시대의 약진을 추진하라' 등이 있다.


평가편집

현대 중국 최고의 장편소설 작가로 평가되는 마오둔(茅盾)은 1896년 저장(浙江)성 통상(桐鄕)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선더홍(沈德鴻, 심덕홍), 자는 옌빙(雁氷, 안빙)으로 마오둔은 1927년 9월 『환멸(幻滅)』을 발표할 때 최초로 사용한 필명이다.

마오둔은 1916년 베이징(北京) 대학 예과를 수료한 후 1921년 '사실주의 문학과 인생을 위한 문학'을 이념으로 표방한 '문학연구회'의 결성에 참여했고, 문필 활동과 더불어 1921년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 때부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글들과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문학 이론들을 발표했다.

그 후에도 정치 활동과 문학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식(蝕)』, 『무지개』, 『자야』, 『부식(腐蝕)』, 『서리 내린 붉은 잎은 이월달의 꽃과 같구나』 등의 작품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1949년 중국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중화전국문학예술가협회'의 부주석과 '중화전국문학공작자협회'의 주석으로 활동했고, 또한 문화부 장관직을 맡았다. 이 기간에는 창작보다는 평론 활동에만 치중하였다.

1966년 문화 대혁명으로 문화부 장관직에서 해임된 후 1976년 4인방이 몰락할 때까지의 기간에는 확인된 공식 활동이 없다.

— 마오둔 <茅盾>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 22., 김민나, 김장환, 김하림, 김혜경, 박난영, 상기숙, 서광덕, 서은혜, 양회석, 오태석, 위행복, 유숙자, 이세동, 장정해, 전형준, 정영호, 정장식, 이숙인, 이욱연)[1]


마오둔 문학상편집

마오둔 문학상은 그의 유언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화궈펑 이후의 정권에 의해 1977년부터의 소설을 대상으로 하여 1982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장편 소설 문학상 수상이 이뤄지며 초기에 선정된 장편 소설에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등에 관한 주제가 담긴 작품이 포함된다.[2]


근대 중국의 6대 작가편집

  • 루쉰(魯迅, 노신)
  • 궈모뤄(郭沫若, 곽말약)
  • 마오둔(茅盾, 모순, 본명 : 沈德鴻, 심덕홍, 별명 : 沈雁氷, 심안빙)
  • 바진(巴金, 파금, 본명 : 李堯棠, 이요당)
  • 라오쉬(老舍, 노사, 본명 : 舒庆春, 서경춘)
  • 차오유(曹禺, 조옹, 본명 : 萬家寶, 만가보)


마오둔 고택과 입지서원편집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No. 3-13)

마오둔(茅盾, 모순, 1896년 ~ 1981년) 고거(故居)는 베이징(北京, 북경)과 저장성 자싱시(嘉兴市, 가흥시) 현급 퉁샹시(桐乡市, 동향시) 우전(乌镇, 오진) 2개소가 있으며 베이징 고거(北京 故居)는 둥청구(东城区, 동성구) 교도구(交道口) 남대가(南大街)에 위치하며 마오둔(茅盾)이 1972년 이후 거주한 곳으로 1985년 3월 27일 정식 개방되었다. 우전 고거(乌镇 故居)는 마오둔(茅盾)이 출생하고 성장한 곳으로 1988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우전 고거(乌镇 故居)는 면적이 600㎡이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앞뒤 2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 건물은 3칸의 단층 건물로 모순의 침실, 서재, 손님맞이 공간 등으로 사용되었다. 뒤편의 후원은 1934년 마오둔(茅盾)이 직접 설계한 서양식을 모방한 일본식 건물이다. 동쪽은 마오둔(茅盾)의 모교(母校)인 입지서원(立志書院)과 접하고 있다. 입지서원(立志書院)은 현재 마오둔 기념관(記念館)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마오둔(茅盾)의 소학시대 문물과 자료를 수장하고 진열하고 있다.

— 마오둔 고거 <茅盾故居> (중국행정구획총람, 2010. 8. 1., 황매희 편집부)[3]


같이 보기편집

참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