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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목(馬天牧, 1358년~1431년 3월 14일 (음력 2월 1일)은 태종의 심복으로 조선초 무신,정치가이다.자는 군련(君戀),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생에 추중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이었으며, 추중익대좌명공신숭록대부영돈령부사겸중추부사(翊戴佐命功臣崇祿大夫領敦寧府事兼中樞府事)였다. 사후 세종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綠大夫議政府領議政)으로 추증하였다. 묘는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 충정묘(忠靖廟)에 있다.

마천목
馬天牧
출생1358년
고려 장흥부 회령
사망1431년 음력 2월 1일
조선의 기 조선 전라도 장흥군
사인노환
성별남성
국적고려조선의 기 조선
본관장흥(長興)
별칭 군련(君戀)
시호 충정(忠靖)
경력병조 판서
직업무관, 정치가
작위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
부모아버지 : 마영(馬榮)
어머니 : 평산 신씨
배우자경주 이씨(慶州 李氏) 이빈(李彬)의 딸
자녀마승(馬勝)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충정공은 장흥의 속현이었던 회령 출신으로, 그가 태어난 시기는 공민왕 7년(1358)으로 정치적인 변화의 물결이 거센 무렵이었다. 마천목의 선대는 고려시대만 보면 4대 고조부 마희원(馬希援)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고 3대 고조부인 마중기(馬仲奇)는 1205년(고려 희종 원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1]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마천목은 장흥 마씨 11세손이다. 부인은 목사 이빈(李彬)의 딸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다.

마천목은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곡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어떻게 곡성으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머니가 평산 신씨였던 것으로 보아 곡성 지역과 연관이 있으며 그로 인해 곡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곡성 도깨비살

마천목의 효성은 어릴적부터 지극하고 간절하기로 유명하였고, 그런 깊은 효심이 도깨비를 감동시켰다는 섬진강 상류 두계천(杜溪川)에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 내려온다.

마천목이 곡성 오지면 당산마을로 이사를 왔는데 생활이 넉넉지를 못했다. 그러했기에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마천목은 섬진강에서 몸소 고기를 낚아서 부모를 공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 마천목은 강을 막아 고기를 잡으면 좋을 거라 생각을 하였으나 강이 너무 넓고 흐름이 급하였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강 쪽을 거닐다,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둥글게 생긴 돌이 푸르고 기이하여 주워왔다. 그 날밤 수천의 도깨비 무리들이 마천목을 찾아와,“우리는 강가에서 사는 범산의 도깨비들입니다. 대감께서 석양녘에 주어오신 돌이 바로 우리들의 대장이오니 돌려주시기 바랍니다.”이에 소년 마천목이 말하기를“내가 섬진강 두계천에 어살을 만들려하는데 너희들이 막아주면 너희 장수를 돌려주겠다.”하였다.

그리하여 도깨비들이 지은것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보존되어 내려오는 한국 최고(最古)의 독살, 혹은 살뿌리라고 한다.

고려말편집

힘과 무예가 출중하여 23세 때인 우왕 7년(1381)에 산원(散員)이라는 정8품 무반직을 받았다.

마천목은 무관으로서 활동하면서 정지(鄭地)를 따랐다. 정지(鄭地)는 고려말 특히 공민왕 후반부터 우왕, 창왕대에 걸쳐 활동하였던 무인으로서 전라도 나주 출신이었음으로 마천목이 군인으로 활동하고 관직 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정지(鄭地)는 공민왕대 말기에서 우왕대초에 걸쳐 전라도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왜구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마천목이 군인으로 발탁되고 무관으로 진출하는 데에는 정지(鄭地)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마천목이 정지(鄭地)를 따랐던 것도 그러한 관계에서 빚어졌을 수 있다.

조선 초편집

1381년(우왕 7) 산원(散員)에 초수(初授)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정안군(靖安君)을 도와 공훈을 세웠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399년(정종 1) 상장군(上將軍)이 된다.

이듬해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정안군의 선봉이 되어 크게 공헌,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녹훈되면서 전(田) 80결(結), 노비 8구, 은품대(銀品帶) 1요(腰), 표리(表裏,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던 옷의 겉감과 안감) 1단, 말(丘馬, 司僕寺에서 기르는 궁중용 말) 1필, 구사(丘使, 공이 있는 신하에게 임금이 내리는 관노비, 扈從 업무담당) 3명, 직배파령(直拜把領, 임금이 공신에게 특별히 딸려준 군사) 6명을 하사받고, 회령군(會寧君)에 책봉되면서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승진하였다. 그에게 내려진 공신녹권과 교서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마천목좌명공신녹권(馬天牧佐命功臣錄券)

1408년 11월에 회령군겸중군총제(會寧君兼中軍摠制), 이듬해 9월 감순청(監巡廳) 재직중에 전리(典吏) 고을귀(高乙貴)를 초달(招撻)하여 치사(致死)한 사건으로 사헌부의 청죄(請罪)를 받았으나 태종의 배려로 곡성(谷城)에 유배됨에 그쳤고, 그해 10월에 십일도도절제사(十一道都節制使)를 설치하면서 전라도도절제사에 복직되었다.

1411년 1월 각위절제사(各衛節制使)를 설치하면서 용기시위사절제사(龍騎侍衛司節制使)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전라도병마도절제사판나주목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判羅州牧使)로 파견되었으며, 1414년에 장흥군(長興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16년에는 도총제(都摠制)에 개수되었다가 곧 우군부판사(右軍府判事)가 되어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고, 1418년 2월에 내시위절제사(內侍衛節制使)가 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좌우패(左右牌)를 좌우금위(左右禁衛)로 개편하면서 우금위절제사가 되었다.

1420년(조선 세종 2년) 정헌대부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병조판서 때 상소한 성보론(城堡論)에서 조선 초기에 처음으로 북방 6진(鎭)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1421년(세종 3) 명나라에 가서 조선의 승인에 공을 세워 태상왕(太上王)이 낙천정에서 치하연(致賀宴)을 베풀었다.

1423년 9월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었다.

1424년 3월 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곡성현으로 하향, 곧 어머니상을 치렀으며, 1428년 7월 장흥군에 복직되었다.

1429년 연로를 이유로 치사를 청하였으나 도리어 보국숭록대부(정1품)에 승진하여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영돈녕부사겸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2] 성품이 광심(廣深)하고 순근(醇謹)하며, 무략이 있어 시위와 국방에 공헌이 있었다.

사후 관직 및 사건편집

사후 영의정추증되고, 화산서원(禾山書院)·충현사(忠顯祠)에 배향되었다.[3]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 마천목(馬天牧)이 졸하였다...부음(訃音)을 아뢰니 (세종이)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으며, 내사(內史)에게 명하여 가서 조문하게 하고, 쌀·콩 아울러 3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로 내렸다. 또 예관에게 명하여 치제(致祭)를 내리니,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신하로서 큰 공로가 있어 이미 시종(始終) 변함이 없었으니, 나라에는 상전(常典)이 있는지라 오직 휼전(恤典)을 특히 더하노라. 생각하건대, 경은 흉금(胸襟)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천성이 순수하고 행검(行檢)이 독실한데다가, 외적을 막는 재능이 뛰어나고 계략(計略)의 지혜 또한 구비하였으니, 실로 군왕의 우익(羽翼)이요, 국가의 주석(柱石)이라 이를 만하도다.우리 태종(太宗)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사졸(士卒) 속에서 경(卿)을 발탁하사 군기(軍機)를 맡기시니, 경은 과연 대의(大義)를 따르고 사(私)를 잊었으며, 충성과 노력을 다하여 위험이 절박했던 그날에 창업(創業)을 도와 이루었고, 창졸간에 일어난 변란을 다스려 나라를 바로잡았던 것이니, 경의 충성, 그 용맹은 의당 산하(山河)에 맹세하고 이정(츺鼎)에 새겨야 할 것이로다. 누차 총제(摠制) 직에 등용되고 인하여 장흥군(長興君)에 봉하니, 그 임용(任用)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사랑과 대우 또한 갈수록 후하여져 부덕한 내가 즉위함에 이르러서도 간성(干城)같이 의중(倚重)해 왔도다. 드디어 치사(致仕)하고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원하였고, 곧 질병에 걸려 직사(職事)를 사양하기에, 부원군(府院君)의 숭품(崇品)으로 승진시키고 만년의 휴양을 바랐더니, 이 무슨 갑작스런 부음(訃音)이란 말인가. 아득한 저 하늘이 이 한 원로마저 남겨 두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마음 아프도다. 이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전(致奠)하고 영령(英靈)에 고하여 나의 심회를 펴보는 바이노라. 아아, 슬프도다. 기뻐도 슬퍼도 정의는 같은지라 어찌 경의 옛 공적을 잊으며, 유명(幽明)을 달리 했어도 이치는 일반이니 나의 지극한 이 회포를 살피리라 믿노라."

하였다.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하니, 위험한 속에서도 어려운 것을 사양치 않는 것을 충(忠)이라 이르고, 관후(寬厚) 화평하며, 착한 이름을 지니고 세상을 마친 것을 정(靖)이라 한다.[4]

설성(雪城)에 얽힌 일화편집

전남 강진군 병영면은 조선초에 전라병영이 있던 지역이라 하여 마을 이름도 병영이라 하는데,지로·삼인·하고리 등 여러 마을이 인접해 있는 면소재지로 800여가구가 소 도읍을 이루고 있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전라도 최대의 군사주둔지였다.

조선시대 지방군제는 관찰사가 겸임하는 본영과 병마절도사가 관장하는 병영이 있었는데 전라도 본영은 전주에 있었고 병영은 오늘날 일개 면이 된 본군 병영면에 있었던 것이다.처음 전라도 병영광주에 있었으나 1417년(태종17년) 강진으로 옮겼는데 이것은 이 무렵 국내 사정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옮겨가는 과도기로서 상당히 혼란했던 탓으로 왜구들의 침략이 잦아 연안 가까이 군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전라도 병영의 초대 절도사는 마장군으로서, 그는 병영의 병마절도사의 영을 옮기는 일을 맡았다. 산으로 둘러 싸여 천혜의 요새를 이룬 수인산 허리에 도착해 이 일대를 둘러보며 성터를 잡기 위해 눈여겨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쉬고 있었다. 하루는 문득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백발노인이 앞에 나타나 활을 내놓으면서 활을 당겨 보라 하므로 활을 받아 시위를 당겼다. 시위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잠깐 졸고 있는 틈에 꿈을 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꿈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꿈에 화살이 날아간 자리를 찾아간 즉 이상하게도 그곳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마장군(馬將軍)이 이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동헌(東軒)이 앉을 만한 곳이었다. 그는 이곳을 병영의 중심으로 작정하고 성의 넓이를 요량해 보았으나 또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장군은 이 곳에서 하루 밤을 지냈는데 밤새 눈이 수북히 쌓였으나 동헌 자리를 중심으로 성터 안만은 눈이 쌓이지 않았다. 그는 「옳거니, 신이 내게 성곽 둘레를 알려준 것이다」며 병사들을 시켜 튼튼한 성(城)을 쌓아 올렸다.

이 같은 연유로 전라병영은 일명 雪城이라고도 한다.

가족 관계편집

  • 조부 : 마치원(馬致遠)
    • 부 : 마영(馬榮)
    • 모 : 평산 신씨(平山 申氏)
    • 장인 : 목사 이빈(李彬)
      • 부인 : 경주 이씨(慶州 李氏)
        • 아들 : 마승(馬勝)-경주부윤,숭정대부
        • 며느리 : 정경부인 덕수 이씨(貞敬夫人 德水 李氏)
        • 아들 : 마전(馬腆)
        • 아들 : 마반(馬胖)
        • 아들 : 마춘(馬椿)
        • 딸 : 장흥 마씨(長興馬氏)

관련 문화재편집

  •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 : 1417년(태종 17년)에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하여 1895년(고종 32년)까지 전라도의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였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397호.[5]
  • 마천목좌명공신녹권 - 보물 제1469호
  • [화산서원] - 경북 의성군 단촌면 소재
  • 강진 충정사 -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13호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