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우왕

우왕(禑王, 1365년 7월 25일(음력 7월 7일) ~ 1389년 12월 31일(음력 12월 14일))은 고려의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 10월 30일(음력 9월 25일) ~ 1388년 7월 11일(음력 6월 8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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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禑王
지위
고려의 제32대 국왕
재위 1374년 9월 25일 ~ 1388년 6월 8일 (음력)
전임 공민왕
후임 창왕
이름
왕우(王禑), 모니노(牟尼奴)
이칭 신우(辛禑), 여흥왕(驪興王), 전폐왕(前廢王)
별호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신상정보
출생일 1365년 7월 7일(1365-07-07) (음력)
출생지 고려 개경부
사망일 1389년 12월 14일(1389-12-14) (24세) (음력)
사망지 고려 교주강릉도 강릉부
부친 공민왕
모친 반야
배우자 근비 이씨
자녀 창왕

개요편집

공민왕과 시녀 반야(般若)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일곱 살 때 입궁하여 할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 공원왕후)에게 양육되었다. 이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중 왜구의 약탈로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하였으며, 친명적인 신진사대부가 성장하여 권문세족과 대립하였다. 명나라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위화도에서 회군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이후 처형되었다.

우왕의 재위 기간 중, 최무선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을 제조하였으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인쇄한 불교 서적인 《직지심체요절》이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되었다.

생애편집

탄생과 가계편집

1365년(공민왕 14년) 7월 7일, 공민왕(恭愍王)과 비첩인 반야(般若)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모니노(牟尼奴)인데, '석가모니의 종(奴)' 이라는 뜻이다.

어머니 반야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신돈(辛旽)의 여종으로 신돈이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쳤는데, 이로 인해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훗날 이성계신진사대부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다. 우왕의 탄생과 혈통에 관한 의혹은 곧 우왕의 폐위와 죽음으로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고려사》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편찬된 모든 관찬사서는 우왕을 신돈반야의 자식으로 규정하고 있다.[1][2]

치세편집

입궁과 즉위편집

1371년(공민왕 20년), 일곱 살이 될 무렵에서야 비로소 입궐하여 명덕태후전에서 자랐다.[3] 1373년(공민왕 22년) '(禑)'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작되었다.[4]

1374년(공민왕 23년) 9월, 공민왕홍륜최만생 등에 의해 시해되자, 열 살의 나이로 이인임의 후원을 받아 즉위하였다.[5] 당시 명덕태후경복흥 등은 우왕이 아닌 다른 왕실 종친 중에서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 하였으나, 이인임의 뜻에 따라 열 살의 우왕이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의 우왕은 나이가 어려 이인임과 명덕태후의 섭정을 받았다.

이에 앞서 공민왕은 우왕의 어머니를 반야가 아니라 예전에 사망한 궁인 한씨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는데[6], 우왕은 즉위 후에 궁인 한씨를 순정왕후(順靜王后)로 추존하였다.

1376년(우왕 2년) 3월, 우왕의 생모인 반야는 한밤중에 명덕태후의 처소에 들어와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내가 실제로 주상(우왕)을 낳았는데 어째서 한씨(순정왕후)를 어머니라고 합니까?" 하며 따졌는데, 이를 들은 명덕태후에 의해 쫓겨나 옥에 갇혔으며, 결국에는 이인임에 의해 임진강에 던져져 죽임을 당했다.[7]

국정 파탄과 난행편집

1374년(우왕 즉위년) 10월, 북원의 사주를 받은 충렬왕의 현손인 탈탈불화(脫脫不花)가 스스로 고려왕이라 주장하며 고려의 왕위를 요구했으나, 이인임 등이 군사를 보내 탈탈불화의 입국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즉위 초기 할머니인 충숙왕명덕태후(공원왕후)가 섭정을 하였다. 즉위 초반의 우왕은 경연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다.[8] 그러나 태후가 승하한 이후부터 술과 여색, 사냥 등 주색잡기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였으며, 마침내 국력과 명운을 쇠진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

1380년(우왕 6년) 1월, 명덕태후의 훙서 이후에는 사실상 이인임이 섭정으로 실권을 휘둘렀다. 1383년(우왕 9년) 친정(親政)을 선언하였으나 이인임이 국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을 독점하며 측근들과 함께 온갖 부정 부패 및 비리를 일삼았고 우왕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파국적인 국정 운영을 이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우왕은 무뢰배들과 어울려 장난을 일삼고, 사냥과 주색을 탐닉하며 방탕하게 행동하였는데, 이 시기에 나라 안팎으로 왜구가 출몰하여 백성들이 크게 고통스러워 하였다. 최영이성계는 이런 왜구들을 토벌하면서 공을 세워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후 우왕은 최영, 이성계와 힘을 합쳐 이인임을 제거하였으며, 임견미염흥방을 비롯한 권문세족들을 처형하였다. 권문세족들이 제거됨에 따라 신흥무인세력신진사대부들이 성장하였다. 우왕은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 영비(寧妃)로 책봉하고 국구로 대우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왜구의 침입과 격퇴편집

충정왕 때부터 본격화된 왜구의 침입은 공민왕을 거쳐 우왕 시대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고려-몽골 전쟁 이후 100여년간 안정을 되찾던 고려는 본격적으로 왜구의 약탈에 시달리게 되었다.

1374년(우왕 즉위년), 밀양을 침입한 왜구는 다음해에는 경양현(慶陽縣)에 쳐들어왔으며 낙안(樂安)과 양광도의 해안가에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의와 임견미, 이성계, 최영에게 왜구를 토벌하게 하였다.

홍산 대첩편집

1376년(우왕 2년), 홍산(鴻山, 충청남도 부여군)에 침입한 왜구는 최영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앞서 전라도를 침공한 왜구가 북상하자, 최영은 우왕에게 참전할 것을 청했으나 왕은 최영이 연로함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영의 굳은 결의에 마침내 허락하였고, 승리를 하고 돌아오자 재추들을 이끌고 교외에서 최영을 맞이하였는데, 그 의장 행렬이 마치 황제의 사신을 영접하는 예식과 같았다.[9]

천도 논의편집

1377년(우왕 3년), 왜구들의 기세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또다시 고려를 내습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1월, 합포의 회원창(會原倉)을 습격하여 군량미를 약탈한 것을 시작으로, 신평현(新平縣, 충청남도 당진시)과 경양, 착량을 공격하여 군함을 불태웠다. 이에 군사를 보내어 싸웠으나 패퇴하자, 우왕은 개경을 버리고 수도를 옮기려 하였다. 우왕은 개경이 해안가와 가까워 왜적이 쉽게 침략할 수 있음을 이유로 들며 내륙으로 천도하려 하였으며, 철원에 궁성을 축조할 것을 명하였으나 최영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무산되었다.[10] 우왕은 재위 기간 중 여덟번 천도할 뜻을 내비치었는데, 이중 1377년 한 해 동안에만 여섯번을 주장하였다.[11]

10월,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여 화약을 사용해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였다.[12]

1377년 한 해 동안 경상도, 전라도, 양광도를 비롯해 강화도가 습격당하고, 강화도의 병사 천여명이 포로로 잡혔을 뿐만 아니라, 서북면 일대의 영강, 장연, 안악, 삼화현도 습격당하였다. 이외에도 해주, 옹진, 온수, 함열현이 왜구의 침략을 받았다. 이 한 해에 전 국토가 왜구에 의해 초토화 되었다.

진포해전과 황산 대첩편집

1380년(우왕 6년), 매년 지속되어온 왜구의 규모가 거대화 되면서 조정 또한 국방을 강화하고 본격적인 반격에 돌입하였다. 8월, 왜구는 50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진포(鎭浦) 앞바다에 출몰하였는데 김사혁나세, 심덕부,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 수군에 의해 격퇴되었다.[13]

9월에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황산(荒山, 전라북도 남원)을 침략한 왜구를 토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무렵의 왜구는 노략질만을 일삼던 해적이 아니라 군대의 규모를 갖춘 연합체로 성장하였는데, 고려 해안을 침략한 수군과 내륙을 습격한 군대가 연합하여 세를 키웠다. 왜구를 이끈 아지발도(阿只抜都)[14]는 이성계와 이지란에 의해 사살되었다.[15] 고려군의 공세에 왜구는 궤멸하였고 남은 무리들은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이후에도 정지(鄭地)가 이끄는 수군이 남해현 관음포에서 왜적을 물리친 관음포 전투를 비롯하여,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에 이후 왜구는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고려가 입은 물적피해와 인적피해는 상당하였다.

왜구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최영이성계를 비롯한 신흥무인세력들이 백성들에게 신망을 받으며 그 세력이 성장하였다.

요동 정벌과 폐위편집

요동 정벌편집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철령(鐵嶺, 강원도 회양군 · 안변군)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통보하였다.[16]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니, 원을 계승한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명은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16] 최영은 반발했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그해 4월, 최영과 우왕은 공민왕 대에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요동을 점령했던 일을 상기시켜 요동을 공격하여 정벌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요동 정벌을 반대하면서 4가지의 이유를 들었다.[17]

소(小)로서 대(大)를 거역하는 것이 첫째 불가하고,
여름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둘째 불가하고,
온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하러 가면 왜적이 그 틈을 노릴 것이니 셋째 불가하고,
지금은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눅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을 것이니 넷째 불가합니다.
 
이성계, 〈4불가론〉

그러나 우왕과 최영요동 정벌의 강행하였다.

4월 3일, 우왕은 직접 평양에 머물며 군사 징발을 독려하고, 좌군과 우군을 정비하였으며 압록강의 부교(浮橋)를 설치하는 것을 지휘하였다. 전국의 승도를 징발하여 요동정벌군을 편성하여 최영을 총도통사, 이성계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우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정하게 하였다. 4만여명의 군대가 평양을 떠나 요동으로 진격하려 할 때, 우왕은 정작 최영의 출장을 막고 자신의 곁에 남아 보호해줄 것을 청하였다.[18]

위화도 회군편집

4월 18일, 요동정벌군이 평양을 떠난 후, 우왕은 계속해서 서경(西京, 평양)에 머물며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부벽루에 올라 몽고 음악을 들었다.[19] 4월 21일에는 명나라의 연호인 '홍무(洪武)'를 폐지하고 몽고의 복장을 입도록 하였다. 우왕이 개경을 비운 사이 왜구남포 앞바다에 위치한 초도(椒島)를 침략하였다.[20]

한편 요동 정벌을 위해 북진하던 요동정벌군은 5월이 지나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는데, 예상했던 대로 장마가 시작되어 장대비가 쏟아지고 압록강이 불어 익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군대는 도하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군량미는 떨어지고 탈영병이 속출하였다. 이성계와 여러 장수들은 진군을 멈추고, 조정에 현재의 상황을 보고하고 장마와 군량미의 문제 등으로 인해 더이상의 진군이 불가하므로 회군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그대로 요동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하였다.[21]

5월 22일, 이성계는 명령에 불복하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였다.[22] 당시 성주(成州, 평안남도 성천군)의 온천에 머물고 있던 우왕은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말머리를 돌려 회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대동강을 건너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성난 군사들을 회유하였다.

개경을 점령한 이성계 일파는 최영의 군대를 물리치고 최영을 내어줄 것을 청한 뒤, 고봉현으로 유배보낸 뒤 이후 처형하였다.[23] 우왕은 군사들을 다독이며 한편으로는 이성계를 급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24]

1388년 6월 8일, 우왕은 마침내 이성계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로 쫓겨났다.[25] 우왕의 뒤를 이어 아들인 (昌)이 즉위하였다.

최후편집

1388년(창왕 즉위년), 창왕은 전왕인 우왕을 강화도에서 경기도 여흥(驪興, 경기도 여주시)으로 옮겼으며, 최영을 처형하였다.

1389년(창왕 1년),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신돈의 자손이므로 왕위에 있을 수 없다며 창왕을 폐위시키고, 신종의 7대손 정창군(定昌君, 공양왕)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1389년(공양왕 원년) 11월, 우왕은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12월 14일, 처형되었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을 신돈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형관들에게 자신이 왕씨 후손임을 증거로 윗옷을 벗어 겨드랑이의 비늘 같은 것을 내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후편집

우왕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신돈의 아들로 기록되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국왕 열전이 아닌 반역 열전에 실리고, 신우(辛禑)라 칭해졌다. 조선 태종 때에는 우왕을 여흥왕(驪興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시신은 여주군 길천면 대왕리(현 여주시 흥천면 대당리) 산에 매장되었다.

우왕이 묻힌 곳은 왕이 묻혔다 하여 대왕리라 하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 때 대당리로 바뀌었는데, 대당리의 자연부락으로 청당이부락 남서쪽에 있는 대왕이부락 마을 뒷산에 우왕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구전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 개국 세력에 의해 신돈의 아들이자 반역자로 매도되었으므로 능은 방치되었다.

혈통 논란편집

우창비왕설편집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우왕과 그의 아들인 창왕공민왕이 아닌 역적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으로, 우왕 · 창왕 부자는 왕씨가 아니므로 위주(僞主, 가짜 임금)로 일컬어졌으며, 우왕과 창왕의 치세기는 위조(僞朝)로 폄하되었다. 이후 조선에서 편찬한 모든 관찬사서는 우왕을 신돈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는 우왕의 치세를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편목인 세가(世家)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烈傳)에 넣었고, 성과 이름 또한 신우(辛禑)라 적고 있다. 우왕 및 창왕이 공민왕의 혈통인가 신돈의 혈통인가에 대한 진위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데, 다만 신돈의 혈통이라 기정사실화되고 역사에 기록된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이 우왕과 창왕의 폐위를 정당화하려는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26]

정몽주를 비롯한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온건적인 신진사대부들 또한 우왕과 창왕의 신씨(辛氏)설에 동조하여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정몽주는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는 데는 가담하였다. 이들은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단정지었다.[27]

후대의 평가편집

조선 후기 국학의 발달로 고려 말년의 기사에 대한 사료 비판과 함께, 우왕과 창왕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루어졌다. 우왕 부자가 《고려사》의 반역열전에 실린 것에 대해 성호 이익은 《강목(綱目)》에서 진시황(秦始皇)이나 동진(東晉) 원제(元帝)의 사례를 들며 두 황제 모두 사가들에 의해 전왕의 자손이 아닌 것으로 단정되었지만 위호(位號)는 떼어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는데, 우왕이 공민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것도 아니고 공민왕으로부터 아들로 인정받아 아비로써 물려주고 자식으로써 이어받은 것인데 반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인지, 신씨인지에 대해서 유보하는 입장을 취하기는 하였지만, 창왕이 즉위한 뒤 경연에서 윤소종이 창왕에게 "상왕(上王)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는 총명(聰明)이 학문으로 향하셨으나" 라고 말하는 부분을 들며, 폐위되고도 창왕이 즉위했던 당대에는 상왕이라는 칭호로 존숭받은 점은 우왕이 신씨라는 설에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왕씨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우왕은 적후를 두지 않고 '구비삼옹주(九妃三翁主)'라 불리는 9명의 왕비와 3명의 옹주 등 12명을 비빈을 두었다. 이는 조모인 명덕태후 홍씨가 죽은 뒤 차출한 것이다.

그러나 우왕이 폐위된 뒤 창왕의 생모인 근비 이씨현비 안씨, 우왕의 유배지에 동행한 영비 최씨명순옹주를 제외한 나머지 비빈들은 폐출되었으며[28],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 하여 위주(僞主: 가짜 임금)로 폄하됨에 따라 우왕은 반역열전에 수록되고 비빈들은 《고려사》 후비전에 입전되지 못하였다.

   고려 제32대 국왕       우왕 禑王    출생 사망
1365년 7월 25일 (음력 7월 7일)
  고려 개경부
138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4일) (24세)
  고려 교주강릉도 강릉부

부모편집

생몰년 부모 비고
공민왕 恭愍王 1330년 - 1374년 충숙왕 忠肅王
공원왕후 홍씨 恭元王后 洪氏
 제31대 국왕 
법모 순정왕후 한씨 順靜王后 韓氏 생몰년 미상 한준 韓俊
한씨 韓氏
명덕태후이인임에 의해
우왕의 생모로 공표됨
반야 般若   ?   - 1376년 미상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다 처형됨[7]

후비편집

작호 이름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제1비    근비 이씨 謹妃 李氏   
왕대비 王大妃
고성 미상 이림 李琳
변한국대부인 홍씨 卞韓國大夫人 洪氏
창왕의 생모
왕비 영비 최씨 寧妃 崔氏 동주 최영 崔瑩
은씨 殷氏
최영의 서녀
의비 노씨 毅妃 盧氏 석비 釋婢 장연 노영수 盧英壽
복안택주 福安宅主
근비 이씨의 궁녀[29]
태종의 후궁 소빈 노씨의 고모
숙비 최씨 淑妃 崔氏 용덕 龍德 최천검 崔天儉
    명선옹주 明善翁主[30]
의비 노씨의 궁녀
안비 강씨 安妃 姜氏 강인유 姜仁裕
정비 신씨 正妃 申氏 평산 신아 申雅
덕비 조씨 德妃 趙氏
숙녕옹주 肅寧翁主
봉가이 鳳加伊 조영길 趙英吉
이인임의 여종
선비 왕씨 善妃 王氏 개성 왕흥 王興     우왕 사후 유은지에게 재가[31]
현비 안씨 賢妃 安氏 죽산 안숙로 安淑老 공민왕정비 안씨의 조카
옹주 화순옹주 和順翁主 소매향 小梅香 미상 기생 출신
명순옹주 明順翁主 연쌍비 燕雙飛
영선옹주 寧善翁主 칠점선 七點仙   ?   - 1420년

왕자편집

이름 생몰년 생모 비고
1    창왕 昌王    창 昌 1380년 - 1389년 근비 이씨 제33대 국왕
공양왕 원년(1389년) 처형됨


우왕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고려사절요》 권33, 신우4, 우왕 14년(1388년) 6월 6일 (무신)
    공민왕(恭愍王)은 일찍이 아들이 없는 것을 근심하였으므로 마땅히 종실(宗室)의 어진 자를 구하여 후사로 삼았어야 했지만,

    신돈(辛旽)의 아들을 취하여 몰래 궁중에서 기르며 죽은 뒤의 계책으로 삼아 끝내 그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고, 우왕 또한 황음하고 난폭하여 자신이 망가지고 왕실도 무너졌다.

    아아, 우왕은 진실로 논하기에 부족하다고 해도 공민왕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었던가.

  2. 고려사》 권46, 세가 권제46
    "신우(辛禑, 우왕)가 왕위를 훔쳐 차지한 그 때 이미 왕씨(王氏)는 없어졌다.

    (중략)

    정치가 혼란으로 치달으니 민심은 절로 이반되고 천명이 스스로 떠나 결국 왕씨의 5백 년 종사(宗社)는 홀연 끊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3. 고려사》 권43, 세가 권제43, 공민왕 20년(1371년) 7월 18일 (무진)
    모니노를 태후전에 들어와 살게 하다
    모니노(牟尼奴)를 소환하여 태후전에 들어와 살게 했다.
  4. 고려사》 권44, 세가 권제44, 공민왕 22년(1373년) 7월 6일 (을사)
    모니노를 강녕부원대군으로 삼다
    모니노에게 (禑)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봉하니, 백관이 하례하였다.

    정당문학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 대사성 정추(鄭樞) 등을 우왕의 사부로 임명하였다.

  5. 고려사절요》 권29, 공민왕4, 공민왕 23년(1374년) 9월 25일 (정해)
    이인임이 태후의 뜻을 어기고 우왕을 세우다
  6. 고려사》 권44, 세가 권제44, 공민왕 23년(1374년) 9월 15일 (정축)
    죽은 궁인 한씨(韓氏)의 아버지 한준(韓俊) · 조부 한평(韓平) · 증조부 한통(韓通)을 면양부원대군(沔陽府院大君)으로 추증하였고, 외조부 한량(韓良)을 면성부원대군(沔城府院大君)으로 삼았다.

    왕이 강녕대군(江寧大君, 우왕)을 한씨가 낳은것처럼 거짓으로 칭했기 때문이었다.

  7. 고려사》 권133, 열전 권제46, 우왕 2년(1376년) 3월
    왕의 생모라고 주장하는 반야를 처형하다
    반야(般若)가 밤에 남몰래 태후궁에 들어가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내가 실제로 주상(우왕)을 낳았는데, 어째서 한씨(순정왕후)를 어머니라고 합니까?”라고 하니, 태후(명덕태후)가 쫓아냈다.

    이인임(李仁任)이 반야를 하옥시키고 대간과 순위부에서 합동으로 치죄하게 하니,

    반야가 새로 건축한 중문(中門)을 가리키면서 부르짖기를,

    “하늘이 내 원한을 안다면 이 문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사의(司議) 허시(許時)가 그 문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문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허시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사람들이 자못 그것을 괴이하게 여겼으나, 결국 반야를 임진강에 던지고 그 친족인 판사 용거실(龍居實)을 참형에 처했다.

  8. 고려사절요》 권31, 신우2, 우왕 6년(1380년) 1월 6일 (무술)
    명덕태후 홍씨가 훙서하다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 洪氏)가 훙서하였다. 전날 저녁 태후가 우왕(禑王)의 손을 잡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왕위를 전해온 것이 장차 500년이 됩니다.

    대저 임금은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원하건대 왕께서는 대의를 살피거나 큰일을 결정할 때에 반드시 시중 경복흥(慶復興) · 이인임(李仁任), 판삼사 최영(崔瑩) 및 여러 재상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삼가 감정에 이끌려서 멋대로 행하지 마십시오.

    또한 임금의 거둥은 반드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니, 자주 교외에 나가 놀면서 유람하는 것을 일삼아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9. 고려사》 권113, 열전 권제26, 최영(崔瑩)
    최영이 홍산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10. 고려사》 권113, 열전 권제26, 최영(崔瑩)
    최영이 왜구를 피해 천도하려는 것에 반대하다
    수도가 해안과 가까우므로 왜적의 침구를 우려한 나머지 내륙지역으로 천도하고자 하여 왕이 가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후환을 두려워해 모두 천도에 찬성했으나, 최영만은 군사들을 징발하여 개경을 고수하는 전략을 진언했다.

    그러나 우왕이 최영의 전략을 받아들이지 않고 철원(鐵原)에 궁성을 축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최영이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수도를 옮긴다면 농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왜구들이 침략해 올 마음을 충동질하게 되어 나라가 더욱 수세에 몰릴 것이니 올바른 계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태후(명덕태후)의 거처만 철원으로 옮기시고 전하께서는 이곳에 머물면서 진무하셔야 합니다.”

    우왕이, “태후께서 거처를 옮기시는데, 내가 어찌 홀로 머물 수 있겠는가?”라고 난색을 표하자,

    최영은, “태후께서는 연세가 이미 많으시므로 만약 뜻밖의 변고가 생기면 기거가 더욱 어렵게 될 것입니다.”고 설득했다.

    우왕이 옳은 말이라 여겨 천도는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영 [崔瑩]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11. 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아세아문화사, 1980.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의 황도 개경』, 창작과비평사, 2002, 50쪽.
  12. 고려사》 권133, 열전 권제46, 우왕 3년(1377년) 10월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설치하다
    10월, 비로소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했는데, 판사 최무선(崔茂宣)의 말을 따른 것이다.

    최무선이 원나라의 염초 기술자인 같은 마을 사람 이원(李元)을 잘 대우하여 몰래 그 기술을 묻고, 가동(家僮) 몇 명으로 하여금 익혀 시험해 본 후 마침내 왕에게 건의하여 설치하였다.

  13. 고려사》 권134, 열전 권제47, 우왕 6년(1380년) 8월
    김사혁과 나세 등이 공주 · 진포 등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왜구공주(公州)를 침입하자, 김사혁(金斯革)이 공격하여 4급(級)을 베었다.

    나세(羅世) · 심덕부(沈德符) · 최무선(崔茂宣) 등이 진포(鎭浦)에서 왜구와 싸워서 이기고 사로잡혔던 334인을 되찾았으며, 김사혁은 남은 왜구들을 임천(林川)에서 추격하여 사로잡았고 46급을 베었다.

  14. 아기바투(阿其拔都), 아기발도(阿其拔都)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15. 태조실록》 1권, 총서 66번째 기사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 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관군(官軍)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16.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53페이지
  17. 고려사》 권137, 열전 권제50, 우왕 14년(1388년) 4월 1일 (을사)
    이성계가 요동 공벌의 4불가론을 주장하다
  18. 고려사》 권113, 열전 권제26, 최영(崔瑩)
    여러 장수들과 함께 평양을 출발하면서 최영이 말하기를,

    “지금 대군(大軍)이 장도에 올랐는데 만약 한 달을 끌게 되면 대사(大事)를 성공할 수 없으니 신이 가서 독려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우(辛禑, 우왕)가 말하기를, “경이 가면 누구와 더불어 정사를 다스리겠는가?” 라고 하였다.

    최영이 굳게 청하자 신우가 말하기를,

    “경이 가면 과인 역시 가겠다.”라고 하였다.

    (중략)

    최영이 재삼 요청하기를,

    “전하께서는 경성으로 돌아가십시오. 노신(老臣)이 여기에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신우(우왕)가 말하기를,

    “선왕(공민왕)께서 시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라도 경과 함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면서 좌·우군도통사(左·右軍都統使)가 글을 올려 회군을 요청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두 도통사가 있으니 스스로 와서 아뢰는 것이 옳다. 군사를 물리자는 말을 감히 내 입으로 하지 못하겠다.”라고 하였으며, 신우 역시 듣지 않고 진군하기를 독촉하였다.

  19. 고려사》 권137, 열전 권제50, 우왕 14년(1388년) 4월
    왕이 부벽루에서 몽고음악을 듣다
    우왕이 대동강(大同江)에 가서, 부벽루(浮碧樓)에 호악(胡樂)을 늘어놓고 직접 호적(胡笛)을 불었다.
  20. 고려사》 권137, 열전 권제50, 우왕 14년(1388년) 4월
    왜적이 초도를 침략하다
    왜구초도(椒島)를 침입하였다.

    이때 경성(京城)의 장정들이 모두 종군하느라, 노약자들만 남아 있었는데 매일 밤 봉화가 여러 차례 올라가니 경성이 비어 있고 인심이 위태롭고 뒤숭숭하여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지경이었다.

  21. 고려사절요》 권33, 신우4, 우왕 14년(1388년) 5월 13일 (병술)
    우왕과 최영이 좌우군도통사의 회군 요청을 거부하다
  22. 고려사절요》 권33, 신우4, 우왕 14년(1388년) 5월 22일 (을미)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다
  23. 태조실록》 1권, 총서 85번째기사
    최영의 군사를 진압하고, 최영을 고봉현으로 귀양보내다
  24. 고려사절요》 권33, 신우 4, 우왕 14년(1388년) 6월 6일 (무신)
    우왕이 이성계 등을 급습하는데 실패하고 폐위당하다
  25. 고려사》 권137, 열전 권제50, 우왕 14년(1388년) 6월 8일 (경술)
    왕이 영비와 함께 강화로 떠나다
    여러 장수들이 영비(寧妃)를 내보낼 것을 청하니, 우왕이 말하기를,

    “만약 영비를 내쫓으면 나도 함께 나가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원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지키며 우왕에게 강화(江華)로 갈 것을 청하였다.

    우왕이 어쩔 수 없이 나서며, 채찍을 잡고 안장에 기대어 말하기를,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구나.”라고 하였다.

    좌우에서 모두 엎드려 눈물을 흘리기만 하고, 이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영비 및 연쌍비(燕雙飛)와 함께 회빈문(會賓門)을 나와 강화로 향하니, 백관들이 국보를 받들어 정비전(定妃殿)에 두었다.

  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왕 항목
  27.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6페이지
  28. 고려사》 권137, 열전 권제50, 창왕 즉위년(1388년) 6월 9일 (신해)
    왕의 어머니인 근비를 왕대비로 높여 책봉하고 전(前)왕의 왕비와 옹주를 모두 쫓아내다
  29. 고려사》 권134, 열전 권제47, 우왕 7년(1381년) 12월
    禑納謹妃宮人釋婢, 寵愛之, 書雲副正 盧英壽之女也.
    우왕이 근비(謹妃)의 궁녀인 석비(釋婢)를 들여다가 총애하였는데, 석비는 서운부정(書雲副正) 노영수(盧英壽)의 딸이었다.

    노영수는 위원현(威遠縣) 사람으로서 애초에 장녕공주(長寧公主)가 데려온 사람이었다.

  30. 1386년(우왕 12년) 처형됨
  31. 태종실록》 6권, 태종 3년(1403년 명 영락(永樂) 1년) 윤11월 15일 (무오)
    우왕의 비였던 왕흥의 딸을 아내로 삼은 통례문 판사 유은지가 귀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