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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기(일본어: 太平記, たいへいき 다이헤이키[*])는 일본의 고전문학 중 하나이다.

전 40권으로, 남ㆍ북조 시대를 배경으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 천황의 즉위부터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멸망, 겐무 신정(建武新政)과 그 붕괴 후의 남북조 분열, 간노(觀應)의 소란(擾亂)과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의 사망 및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賴之)의 간레이(管領) 취임까지(1318년-1368년경까지의 약 50년간)의 일들을 소재로 한 군담소설이다. 이마가와가본(今川家本), 고활자본(古活字本), 세이겐인본(西源院本) 등의 여러 종류가 있다. 제목인 '태평(太平)'이란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붙여졌다고 생각되며, 원령 진혼적인 의의가 있음도 지적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목을 '태평기'를 칭한 소설이나 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애매함을 피하기 위해서 《고전태평기(古典太平記)》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목차

작가와 성립시기편집

작가와 성립 시기는 불명이지만,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의 『난태평기(難太平記)』에 호쇼지(法勝寺)의 에이진 상인(恵珍上人, 엔칸円観)이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에게 30여 권을 보여주었다는 기사가 있으며, 고다이고 천황의 사망이 묘사된 21권까지의 부분이 엔칸, 겐에(玄慧)등 아시카가 막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지식을 지닌 인물들을 중심으로 14세기 중엽까지 편찬되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이 고지마 법사(小島法師, 고지마 다카노리와 동일 인물로 추정)등의 손에 의해 증보개정되고, 늦어도 14세기 후엽(1370년경)까지는 총 40권의 《태평기》가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光)나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수정에 관여하였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이밖에 혹은 남조 측의 인물이 남조 측에 대한 진혼의 의미를 두고 썼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바사라(ばさら)」라 불리는 당시의 사회 풍조나 하극상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쓰여 있다.

구성과 내용편집

구성편집

현재 유포된 《태평기》는 모두 전40권으로 되어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16세기경에 사라져버린 22번째 권은 남은 앞뒤 21권과 23권에서 소재를 찾아내어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3부 구성으로 고다이고 천황의 즉위에서 가마쿠라 바쿠후의 멸망까지를 그린 제1부(권1~11), 겐무신정의 실패와 남북조 분열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사망까지가 2부(권12~21), 남조측 원령(怨靈)에 의한 무로마치 바쿠후의 내부 혼란을 그린 제3부(권23~40)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말한 「권22의 누락」이지만, 현재 전해지고 있는 종류 중에서 권22가 있어도 내용 그 자체는 권23~24의 내용을 사용하고 있어서 결론적으로 권22는 누락된 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원인으로서는, 천황이나 무가측에 대해 어울리지 않은 게 쓰여 있어서 삭제되었다고 생각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내용편집

전체 구상은 유교적 대의명분론과 군신론, 불교적 인과응보론에 기조를 두고 여기에 송학(宋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작중 고다이고 천황은 "덕이 없는 천황"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는 수사사업으로서 편찬하였던 《대일본사》에서 "천황 친정을 노렸던 고다이고야말로 정통 천황이다!"라고 주장했다. 그가 제창한 미토학(水戶學)은 훗날 막부 말기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 더 나아가 태평양 전쟁 전의 황국사관(皇國史觀)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중반의 고다이고 천황의 죽음이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죽음 장면과 비슷하게 처리된 점 등 곳곳에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때때로 이야기의 흐름에서 벗어난 고전에서의 인용이나 각색도 많다.

영향과 자료적인 가치편집

영향편집

《태평기》는 중세 시대부터 모노가타리승(物語僧)의 '태평기 읽어주기'를 통해 구전되었고, 초등 학문의 교과서 역할이나 에도 시대에는 '강담'이라 불리는 이야기의 한 종류로 자리잡게 된다. 이미 무로마치 시대에 《태평기》의 영향을 받은 많은 군담소설이 유행했다. 아코(赤穂) 번(藩)의 아사노(淺野) 집안의 가신이 기라 요시나카(吉良義央)를 살해한 겐로쿠 아코 사건(元祿赤穂事件)이 일어나자, 다케다 이즈모(竹田出雲) 등에 의해 《태평기》의 엔야(塩冶) 한칸(判官)의 이야기에 가탁해 《가나테본(仮名手本) 츄신구라(忠臣藏)》로서도 만들어지는 등 일본의 근세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센고쿠 시대의 무장들 사이에서는 《태평기》를 병법의 측면에서 포착해 다양한 논평을 더한 글도 생겼는데, 이는 에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사들에게 필수적인 병법서가 되었다.

일본의 남ㆍ북조 시대는 고대사처럼 천황가의 혈통과 관련된 시대였으므로, 황국사관 아래서 '역신(逆臣)' 다카우지나 '충신(忠臣)' 마사시게 등으로 이미지가 고정화된 《태평기》가 소설이나 영화, TV드라마 등의 자료로 작품화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한 풍조에 대항해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는 전후에 「사본(私本) 태평기」를 통해 무로마치 바쿠후의 창립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그때까지의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해석으로 남북조 시대를 소설화했다. 1991년에는 이 '사본 태평기'를 원작으로 한 NHK 대하 드라마 '태평기'가 방송되었다.

자료적인 가치편집

《태평기》가 성립된 당대를 살았던 이마가와 사다요는 1402년에 지은 '난태평기'에서 내용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이마가와가 무로마치 바쿠후의 중진이었던 점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세에서는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대일본사》편찬의 참고자료로 삼기도 했지만,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도쿄대학 교수였던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는 《태평기》의 자료적 가치를 부정했다. 또한 《태평기》에서만 나오는 남조측의 무장 고지마 다카노리(児島高德)의 실존 여부를 둘러싸고 이를 부정하는 시게노 야스쓰구(重野安繹)나 보다 신중한 자료 비판을 요구하는 카와다 오코(川田甕江)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시게노=진보적, 가와다=보수적이라는 사상적 대립에 이유를 찾는 견해에는 잘못이 있다). 현대에는 동시대의 일기 등 다른 1급 자료와의 내용비교를 통해 역사적 자료로서 연구되고 있다.

태평기를 그린 작품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