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저십리
성저십리(城底十里)는 조선 시대 당시 한성부에 속한 성외(城外) 지역으로, 한성부 도성으로부터 4km(10리) 이내의 지역이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강북구·동대문구·마포구·서대문구·성동구·성북구·용산구·은평구·여의도 일대와 종로구·중구 일부, 광진구 일부, 중랑구 면목동이 이에 해당한다.
역사편집
통일신라 때 한산주(漢山州)의 일부였다가 고려 때 양주의 일부가 되었으며, 현재 서대문구의 일부와 용산구 일대는 문종 때 남경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조선이 건국하여 한양이 도읍으로 지정되었고, 한양도성이 준공되는 등 새 도읍의 기틀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도성 안의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태종 때에 와서는 성내의 채소 경작을 금할 정도였다.[1] 1424년이 되자 흥인지문과 광희문 바깥 지역을 한성부에 편입시켜 동부(東部) 숭신방(崇信坊)·창인방(昌仁坊) 및 남부(南部) 예성방(禮盛坊)·성신방(誠身坊)으로 정하였고, 집터로 삼을 수 있게 하였다.[2][3] 이렇게 성 밖으로의 인구 이동이 증가하면서, 결국 1461년 2월 27일 모든 성저십리 지역이 한성부에 편입되었다.[4] 이후로도 홍제천 이서 지역과 중랑천 이동 지역 일부가 성저십리에 편입되면서 한성부 행정구역이 추가 확장되기도 하였다.
한일합방으로 1911년에 한성부 전역이 경기도 경성부로 개편되자 기존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 방(坊)들은 경성부 산하 면(面)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에 일제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대개편하면서 사대문 안과 용산구 서부지역(특히 한강로, 경부선, 서울역 인근) 및 마포 일부 동부지역과 종로구 숭인동, 창신동 일대만 경성부에 남기고, 경성부에 속했던 옛 한성부 성저십리의 대부분 지역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켰다. 이후 1936년에 용산 동부와 마포 나머지 지역(상암동 제외), 여의도, 성북구 일부 지역(정릉천 이남), 서대문구 일부 지역이 경성부에 재편입되고, 1949년에 옛 성저십리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됨으로써 서울로 대부분 환원되었다.
특징편집
사대문 안인 한양 성내지역과 다르게 상주 인구가 상당히 적었으며, 성묘, 벌목 등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의 그린벨트’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조선 정부는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종 이후에 한양 외곽에 금표(禁票)를 여러 개 설치하였으며, 성저십리의 경계이기도 하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성저십리의 경계로 북쪽은 북한산, 남쪽은 한강 노도(露渡), 동쪽은 양주 송계원·대현(大峴)[5]·중랑포(中浪浦)·장안평, 서쪽은 양화도(楊花渡)·덕수원(德水院)[6], 모래내[沙川]를 따라 난지도(蘭芝島) 부근까지였다. 현재로 치면 한강(용산포구)-마포-불광동-북한산-우이천-미아리-중랑천을 잇는다. 참고로, 성저십리보다 좁은 성저오리(城底五里)의 범위는 마포-부암동-정릉-종암동-청량리-왕십리-한남동 일대였다고 한다.
도성 내 지역뿐만 아니라 성저십리 지역에도 한성부 산하의 방을 두었다. 현재의 마포구 일부에는 서강방(西江坊), 용산구 일대와 마포구 동부에는 용산방(龍山坊), 종로구 창신동, 숭인동 및 성북구 서부, 강북구 일부에는 숭신방(崇信坊), 종로구 부암동, 구기동, 평창동 일대 및 은평구에는 상평방(常平坊), 서대문구 일대와 마포구 일부, 여의도에는 연희방(延禧坊), 서대문구 일부에는 반송방(盤松坊), 동대문구와 성북구 동부에는 인창방(仁昌坊), 성동구 일대에는 두모방(豆毛坊)을 두었다.
서부편집
현재의 의주로 주변을 제외하고는 전지역이 거의 개발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산악과 구릉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불광천, 모래내(沙川), 봉원천, 만초천 등이 구릉 사이를 흐르고 있어 그 연변에 부분적으로 농경지가 형성되고 있었을 뿐이다. 반송방(盤松坊)은 당시 지방 도시로서는 매우 큰 곳이었던 개성, 평양과 통하는 교통의 길목이었고, 중국으로 내왕하기 위해 출발하던 지점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다른 성저십리 지역과 달리 인가가 조밀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분주하였다.[7]
조선 후기 | 현재 | |
---|---|---|
방 | 구(區) | 동(洞) |
반송방 | 종로구 | 무악동, 행촌동, 홍파동, 송월동, 평동, 교남동, 교북동, |
중구 | 충정로1가 | |
서대문구 | 충정로2가, 3가, 천연동, 냉천동, 현저동, 옥천동 | |
연희방 | 서대문구 | 북아현동, 대현동, 대신동, 봉원동, 신촌동, 창천동, 연희동, 북가좌동, 남가좌동. |
마포구 | 성산동, 중동, 노고산동, 망원동, 합정동, 동교동, 서교동, 상암동. | |
은평구 | 수색동, 증산동 | |
연은방 | 서대문구 | 홍제동, 홍은동 |
은평구 | 녹번동, 응암동, 신사동, 구산동, 역촌동, 대조동, 갈현동, 불광동, 진관동, 구파발동 |
현행 행정구역편집
조선말기 기준편집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숭인동, 창신동
-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황학동
- 서울특별시 성북구 일원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대부분 지역 (장안동 제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일원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일원
- 서울특별시 성동구 대부분 지역 (성수동 제외)
- 서울특별시 마포구 대부분 지역 (상암동 일부(난지도) 제외)
- 서울특별시 은평구 대부분 지역 (진관동 제외)
- 서울특별시 강북구 대부분 지역 (우이동 일부 제외)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성 축조 이후 한성부 훈창계로 편입 추정)
1895년 한성부 편입 (추정)지역편집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군자동, 능동, 화양동, 자양동 일부(구 노유동)
-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일부 및 도봉구 쌍문1동에 속하는 우이천 서부지역 (추정)
1910년 기준편집
1911년 당시 경성부 전도[8]를 참고하였다.
참고 문헌편집
- 최완기, 1997, 《한양》, 서울: 교학사.
- 고양시사편찬위원회, 2005, 《高陽市史》, 고양: 고양시사편찬위원회.
- 네이버 지식백과 지명편 (https://terms.naver.com/list.nhn?categoryId=2281)
각주편집
- ↑ 《태종실록》 태종 21권 11년 6월 2일, 성안에 채마전을 두지 못하게 하고 남산 기슭에 집 짓는 것을 금하다. 국사편찬위원회 Archived 2017년 3월 20일 - 웨이백 머신
- ↑ 《세종실록》 세종 24권 6년 4월 18일, 한성부에서 도성 안에 새로운 집터를 설정할 것을 아뢰다. 국사편찬위원회 Archived 2017년 3월 20일 - 웨이백 머신
- ↑ 《세종실록》 세종 26권 6년 11월 14일, 동대문과 수구문 밖의 땅을 집터를 원하는 자에게 주도록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Archived 2017년 3월 20일 - 웨이백 머신
- ↑ 《세조실록》 세조 23권 7년 2월 27일, 한성부에서 서울의 오부 밖의 성저 십리를 각 부에 분속시킬 것을 건의하다. 국사편찬위원회 Archived 2017년 3월 20일 - 웨이백 머신
- ↑ 지금의 우이천
- ↑ 지금의 응암동
- ↑ 최완기 (1997년 3월 10일). 《한양: 그곳에서 살고 싶다?》 초판. 서울: (주)교학사. 264쪽.
- ↑ 1911년 당시 경성부 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