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한성부 성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역사적 도심

서울 도심(영어: Downtown Seoul) 또는 서울 도심부는 옛 한양도성 내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대한민국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을 일컫는 말이다. 2023년 기준으로 서울특별시청에서 관리하는 서울 도심의 행정계획상 경계는 종로구·중구 일대의 옛 한양도성 안 지역에 남대문·서대문·동대문 주변에 발달한 도성 밖 상업지역 일부를 포함시킨 것이며,[1]:5 이를 둘러싼 서울 종로구·중구·용산구의 3개 자치구(도심 3구)는 도심권이라 불린다.[2]:8

서울 도심
Downtown Seoul
서울 도심의 경관, 2015
서울 도심의 경관, 2015
Map
서울 도심의 행정계획상 경계
서울 도심은(는) 서울특별시 안에 위치해 있다
서울 도심
서울 도심
서울 도심의 위치
좌표: 북위 37° 34′ 20″ 동경 126° 58′ 37″ / 북위 37.5722099° 동경 126.9768146°  / 37.5722099; 126.9768146 (Downtown Seoul)
관할서울특별시
최신 행정계획서울도심 기본계획, 2023년[1]
면적
[2]:22
 • 총17.9 km2 (6.9 sq mi)
인구
 (2015년 기준)[1]:12
 • 총106,162

서울 도심의 역사는 1394년 세워진 조선의 수도 한성부의 도성 내부 지역을 일컫는 한성부 성내 또는 도성 안 지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성부 성내 지역은 육조거리, 운종가종각을 중심으로 관가와 상업지역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 내내 큰 구조적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이 공간은 청계천을 경계로 하여 북측의 종로구와 남측의 중구로 강제 분할되었는데, 이는 북촌에는 조선인들이, 남촌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한다는 고정관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년에 걸친 도성 안 공간의 유구한 역사는 종로구와 중구 경계에 걸친 도심부 지역을 일컫는 지명을 필요로 했다. 한국전쟁 시기에 미군은 이곳을 다운타운 서울이라 불렀으며, 전후 재개발을 거치며 이 지역은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서울 도심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해방 후 서울 도심은 서울의 유일한 중심업무지구로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중심지 역할을 맡았음에도, 현대적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과밀화가 심각했다. 1970~80년대의 도심 재개발은 주거와 상업지역이 혼재된 도심 경관을 균질한 업무지구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서울 도심 내 명문고교의 강남지역 강제이전은 당대 도심 재개발의 상징적 정책으로, 이는 도심의 주거수요를 억제하는 동시에 학교 및 정주인구가 떠난 공간에 업무용 마천루를 공급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며 관광수요를 끌어들이게 되자, 도심 재개발에는 문화경관의 복원과 보전이라는 새로운 화두가 등장했다. 1990년대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와 2000년대 청계천 복원은 그러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상징적 정책들이며, 정비를 거쳐 탄생한 광화문광장청계천은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국가적 랜드마크가 되었다.

현대에도 서울 도심은 모든 분야에 걸쳐 고르게 높은 중심성을 지니며 다른 어떤 곳에도 비할 수 없는 독특한 지리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서울 도심은 정치 1번지라 불리는 종로구를 품고 있으며, 6월항쟁촛불시위 등 현대사의 손꼽히는 범국민적 시위들이 개최된 공간으로서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의 정치사회적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또한 조선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고궁종묘 등 문화재 및 그 영향을 받아 세워진 박물관과 화랑들은 한국 고전문화의 중심지로서 서울 도심의 위상을 뒷받침한다. 한편으로 경제적 중심업무지구로서 서울 도심은 다른 업무지구들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의 임대료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금융, 법률, 언론 및 외국계 대기업 등이 주로 집적되어 있다. 서울 도심의 높은 종합적 위상은 오늘날에도 도심을 수많은 근로자, 시위대와 관광객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대한민국의 중심지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역사와 위상 편집

조선 시대 편집

 
18세기 말 실학자 위백규의 '한양도'는 당시 수도 한양의 도심부 상업지역이 운종가광통교종각 주변에서 교차하는 '丁자(T자) 형태'의 구조로 발전했음을 대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3]:54

서울 도심의 역사적 기원은 조선의 수도 한성부의 도성 안 지역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한성부는 유교적 도성(都城) 축조의 원리에 따라 한양 지역에 터 잡아 지어진 계획도시였다. 주례 고공기에 따른 '좌조우사 면조후시(左祖右社 面朝後市)'의 원칙은 조선의 한성부 건설에서 비교적 잘 준수된 것으로 평가되는데, 법궁인 경복궁에서 남측으로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종묘 제도(祖)에 따른 종묘가, 우측에는 사직 제도(社)에 따른 사직단이, 그리고 앞쪽에는 조정(朝)에 해당하는 육조가 놓인 육조거리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날 청와대 부지에 해당하는 경복궁의 뒷편이 북악산에 밀접하게 닿아 있었으므로 '후시' 즉 법궁의 뒷편에 시장(市)을 둔다는 원칙은 지켜질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궁궐의 뒷쪽이 아니라 앞쪽에 해당하는, 육조거리 남쪽의 보신각 근처에 운종가를 따라 공식적으로 허가된 시장인 시전을 두었는데, 이는 정치의 중심인 경복궁 및 육조거리와 이어지면서 조선의 도심부에 해당하는 정치 및 경제의 중심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4]:96–100

 
19세기 말 지리학자 김정호의 '경조오부도'는 당대에 한성부의 도시화가 도성 바깥 성저십리까지 뻗어나갔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대 도성 안 지역의 중심에 여전히 종각을 중심으로 하는 '丁자 형태'의 도심부 구조가 남아있었음을 보여준다.

운종가광통교시전 행랑이 종각을 중심으로 맞물린 丁자 형태의 상업지역이 육조거리의 관청가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탄생한 한성부 한양도성 내의 '성내'(城內) 또는 도성 안 지역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큰 전란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 이 도심부 구조의 견고한 내성은 옛 한성부 성내 지역의 도심부가 궁궐의 왕정이 아닌 사대부 관료들과 상업계층을 중심으로 성장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다. 궁궐은 도성 안 지역의 상징적인 중심일 뿐, 실제의 중심은 시장과 관청이었던 것이다. 이는 동시대 청나라수도(도성) 북경자금성이 차지하던 도성 내 중심적 위상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으로, 이에는 한양의 지반이 단단하여 전근대 공학으로는 옛 물길을 바꾸고 장방형의 도로를 정비하기 어려웠던 점, 조선은 유교적 통치이념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적 사고로부터 실질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점 등이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3]:54-57

한성부의 도시화는 18세기 후반 상업발달에 힘입어 한양도성의 경계를 넘어 도성 밖 성저십리 지역까지 빠르게 뻗어나갔다.[2]:16 오늘날 같은 지역을 일컫는 말로 비교적 널리 쓰이는 표현인 사대문 안은 조선 시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은 표현인데, 구한말과 식민통치기에 걸쳐 한양도성이 훼손되기 이전에는 ''(門)이라는 관념보다 '도성'(都城)이라는 관념이 한성부 성내 도심부와 그 바깥의 성저십리 지역을 구분하는 문화적 경계로써 더욱 뚜렷한 상징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서울 도심부를 일컫는 표현으로 널리쓰인 단어는 '도성 안'으로 풀이될 수 있는 '성중'(城中) 또는 '성내'(城內)였다.[5]:90–100

도성 안 지역이 조선 사회에서 지니는 지리적 위상은 본래 조선 전기에 그곳이 수도의 중심부라는 정치·외교·군사적 중심성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경제·문화적 중심성이 부각되었으며 그 중심성이 다른 모든 도시들을 압도할 정도였다는 점은 비교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6]:19-20 예를 들어 일본 에도 막부 시대에 제2도시 오사카는 제1도시이자 수도인 에도의 절반 정도 인구를 지니고 있었고 경제도시로서 기능을 수행했다. 반면 동시대 18세기 조선에서 제2도시 개성의 인구는 호구상 27,769명으로, 제1도시이자 수도인 한양의 인구가 호구상 189,153명이었던 것에 비해 20% 남짓에 불과한 인구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일본의 중앙집권적 지방행정체제가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갖춰짐으로써 수도의 중심성이 강하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다.[3]:37-40 한편으로 조선의 수도 중심성은 비슷하게 중앙집권적 체계가 갖춰진 동시대 중국에 비해서도 높은 수준이었는데, 이는 조선의 도시화율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매우 낮았으므로 조선의 국내 도시 간 위계에서 수도 한양이 지니는 상대적 위상이 오히려 더욱 컸다는 점에 기인한다.[6]:27-28 비교사적으로 조선의 낮은 도시화율을 설명하는 원인으로는 조선의 중앙집권적 지방행정체제가 실권 있는 지방 양반들의 조세저항에 부딪히며 도시화의 정체를 유발했다는 점, 유교적 이념으로 인해 상공업이 억제되었다는 점, 지형상 육상운송의 개선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 역시 민란을 두려워하여 열악한 도로사정을 방치했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7]:41

사실상 조선의 유일한 도시화 지역이자 고도화된 상업도시로서 한성부가 지니는 높은 상대적 위상은, 조선 후기에 한양과 그 밖의 지역을 서울(京)과 시골(鄕)로 구분하는 인식으로 이어졌다.[8]:156-159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가경 경오년(1810년)에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대에 서울과 지방이 지닌 문화적 간극이 드러나 있다[9]; "중국은 문명이 일반화되어 궁벽한 시골이나 먼 산구석의 마을에 살더라도 성인도 될 수 있고 현인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도성의 문(都門)에서 몇 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의 원시 사회가 되어 있으니, 더구나 멀고 먼 외딴 곳이야 말할 게 있겠는가? … 나는 지금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들에게 우선은 시골집에서 숨어지내도록 하였다만, 뒷날의 계획은 오직 서울의 십 리 안(王城十里之內)에서 거처하는 것이다. 만약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으로 깊이 들어가 살 수 없다면 모름지기 잠시 근교에 머무르며 과수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산이 좀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도심의 중앙(市朝之中)으로 들어가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10]

대한제국 시대 편집

 
1904년 무렵 Willard D. Straight(영어판)가 촬영한 경성시가(京城市街)의 경관.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로 뻗은 옛 서울 도심의 경관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의 칭제건원을 마칠 무렵, 고종종로구 인사동서울의 중심점 표지석을 세우고, 한성(漢城)을 '황성'(皇城)이라 이름바꾸어 불렀으며,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도성 안 도심부 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추가했다. 본래 한성의 도심부 북부 지역에는 서쪽에서부터 동쪽 방향으로 사직단, 경복궁, 창덕궁 및 종묘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이러한 왕실 공간을 침투할 수 없었던 도시화의 흐름은 그 공간 남쪽에서 좌우로 전개되었고, 그에 따라 운종가를 비롯하여 육조거리의 남쪽 끝에서 서대문동대문 방향의 좌우로 뻗어나가는 동서 방향축의 도심부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 오늘날 종로라 불리는 운종가시전과 서대문 바로 바깥의 서교(西郊) 지방 등의 상업적 번영은 이를 드러내는 좋은 예시다. 그러나 고종은 주된 법궁의 기능을 창덕궁, 경복궁에서 경운궁(오늘날의 덕수궁)으로 옮기고, 남대문 바깥에 근대적 철도를, 도성 안팍에 전차를 들여오면서 경복궁, 경운궁, 남대문을 잇는 남북 방향축의 도심부 구조를 황성에 도입했다.[11]:304–307 오늘날 세종대로에서 서울역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교통의 흐름은 대한제국기에 그 씨앗이 처음 뿌려졌던 것이다.[12]:75–76

일제 시대 편집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제작된 경성시가도는 오늘날의 서울 도심에 해당하는 범위를 경성시가(京城市街)라 불렀다.[13]

약 600년에 달하는 유구한 역사에 걸쳐 유기적인 도심부를 형성해 왔던 도성 안 지역은, 일본 식민통치기에 경성시가(京城市街) 또는 '경성 도심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는 1910년대에 한성부경성부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옛 성저십리 지역이 거의 대부분 탈락하고 한양도성 주변의 좁은 지역과 용산만을 포함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다시 경성부 범위가 옛 성저십리 지역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형태의 '대경성'으로 확장되기 전까지, 경성부는 도성 안 지역 및 용산만을 일컫는 매우 좁은 행정구역상 경계를 지니게 되었고, 이에 따라 '경성시가' 내지는 '경성 도심부'는 주로 용산을 제외한 옛 도성 안 지역을 일컫는 의미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11]:269

 
1928년 경성부청은 오늘날 서울광장에 해당하는 청사 앞 공간을 경성부의 도심(都心)으로 선언했다.[14]:142

1940년대 식민통치 말기에 경성의 도심부는 청계천을 기준으로 하여 종로구중구의 두 행정구역으로 분할되었다. 일본제국의 구(區) 제도 시행에 따른 분할은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기적인 도심부 구조에 큰 상흔을 남겼는데, 이는 종로구와 중구의 분할이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 짓는 민족차별적 인식에 의해 추동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상류층들은 궁궐과의 접근성이 높은 북촌에 주로 거주했으므로, 궁궐로부터 멀리 떨어진 남촌은 상대적으로 주거비용이 높지 않았고, 이에 구한말 일본인 거류민들은 남촌과 용산 지역을 중심으로 집단 거주지역을 형성했다. 따라서 식민통치기에 경성부내 일본인들은 북촌이 아닌 남촌을 중심으로 하는 개발정책을 요구했다. 중앙은행 역할을 맡은 조선은행, 증권거래소 역할을 맡은 조선취인소 등 식민통치기의 주요한 상업적 건물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혼마치'라 불린 청계천 이남 충무로 주변의 명동소공동 등에 자리잡은 것은 이러한 사정에 연유하고 있다. 반면 조선인들은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는 남촌의 지가를 감당할 수 없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더딘 북촌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는데, 1920년대에 지어져 오늘날까지도 관광지로 유명한 북촌 한옥마을은 이러한 경성부 도심 지역 내 차별구조를 상징하는 조선인 집단 거주지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15]:66–68 그러나 경성부가 현대적인 의미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했던 것은 아니므로, 실제로 통계상 관찰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분리거주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한번 형성된 심상지리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쉽게 바뀌지 않고 경성부의 지방행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11]:235–241

다만 지방행정에 초점을 둔 경성부의 시각과 식민지 조선 전체의 경영을 초점에 둔 조선총독부의 시각이 언제나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경성부 일본인 거류민들의 지역적 요구사항을 넘어, 조선총독부 전체의 시각에서는 옛 조선의 주요한 정치문화적 경관을 흡수하는 것 역시 중요했기 때문이다. 경성부라는 지역을 관할하는 경성부 청사는 청계천 이남의 경운궁 앞에 지어진 반면, 식민지 조선 전체를 관할하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청계천 이북의 경복궁과 육조거리 사이의 공간에 지어졌다는 사실은 식민지 조선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에 벌어지는 정책적 관점의 차이를 잘 드러낸다. 이러한 차이는 궁극적으로 경성부 내 청계천 이남 지역의 본정(오늘날의 충무로)이 경제적 중심을, 청계천 이북 지역의 광화문통(오늘날의 세종대로 북측)이 정치적 중심을 상징하는 형태의 도시경관으로 이어지게 된다.[11]:329–334

대한민국 시대 편집

1950, 60년대와 한국전쟁 편집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당시 세종대로 부근을 미군이 촬영한 사진. 미군은 이 지역을 다운타운 서울(Downtown Seoul)이라 불렀다.

해방 후 서울 도심부는 5년만에 한국전쟁이라는 전례 없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비교적 큰 파괴 없이 경복궁, 종묘 등의 문화유산과 북촌 한옥마을 등의 옛 경관을 보존할 수 있었다. 도심부가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히 규명되어 있지 않은데, 이에 대해 서울 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서울시립대 손정목 교수는 서울 도심부가 폭격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에 관하여 확인되는 유일한 사료로써 1950년 당시 주일 한국대표부 공사였던 김용주의 회고록을 들고 있다.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이 맥아더 장군에게 도심부를 폭격하지 말아달라고 조언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한다.[16]:92–95

 
1950년 한국전쟁 무렵 미국 육군이 작성한 다운타운 서울(Downtown Seoul)의 지도

도심부가 한국전쟁의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축복인 동시에 난해한 과제를 남겼는데, 이는 조선시대부터 누적적으로 개발되어온 도심부의 혼잡한 지역구조가 거의 그대로 계속됨으로써 도시 재개발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랜 발달 역사 속에서 정리되지 않고 분산된 토지소유권들은 재개발의 큰 장애물이었고, 전후 50년대의 서울시청에는 이를 해결할 자원이 부족했다. 어려운 나라사정 속에서 차일피일 미루어지던 도심부 재개발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 중의 하나는 1960년대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방한으로 알려져 있다.[17] 옛 서울이 무질서한 난개발상태 그대로 외국 방송들에 보도되는 모습은 국내외 한국인들에게 큰 당혹감을 야기했고, 이때에 도심부 재개발은 비로소 국가적인 의제로서 떠오르게 되었다. 도심 재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60년대 후반부터 도입된 여러 법제와 도시계획들은 서울 도심 재개발을 위한 국가적 의지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대한민국은 아직 막 경제성장을 개시한 개발도상국으로서 도심부 재개발이라는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사업을 진행할 여력이 없었으므로 사업은 의제로만 거론될 뿐 본격적인 개발이 시도되지 못했다.[18]:111–112

1970, 80년대와 도심 재개발 편집

 
1977년 서울역 맞은 편에 대우그룹의 본사로 지어진 서울스퀘어 빌딩은 70년대 고도성장을 상징하는 서울 도심의 고전적 랜드마크 중 하나다.

서울 도심 재개발의 기회는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본격화된 뒤 8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1988년 하계올림픽은 서울 도심이 국가적 상징 장소로서 거듭나는 중요한 계기였다. 태평로코리아나 호텔, 퇴계로서울스퀘어, 세종로교보생명빌딩 등은 이 시대를 상징하는 도심 고층건물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18]:112–116

이른바 '남서울 개발'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강남여의도 지역의 대규모 개발사업은 서울 도심부의 재개발과도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 서울 도심 재개발의 주된 목표는 조선에서 대한제국, 식민통치기에 이르는 오랜 역사 동안 주거와 상업이 저층의 도시화 지역에 혼재되어 있는 무질서한 도심부 경관을 균질한 업무용 마천루 중심의 업무지구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1960~70년대에 유명했던 도심 내 종로3가, 무교동 일대의 환락가를 일소하는 정책은 저층부 상업지구를 전면적으로 철거 후 도로와 업무지구로 재개발하기 위한 정지작업의 측면이 있었다.[17]

그러나 서울 도심의 현대적 재개발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600년에 걸쳐 계속되어 온 도심부의 주거수요, 즉 정주인구들을 도심부 바깥으로 몰아냄으로써 저층 주거지역을 재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목표를 겨냥한 대표적인 사업이 바로 도심 내 명문고교들의 강남 이전이었다. 본래 서울 도심은 최초, 최고의 근대적 교육기관이 즐비한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이곳에 다니는 학생의 숫자를 줄임으로써 그 부양가족의 주거수요를 함께 감소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경기고휘문고, 서울고를 필두로 하여 시작된 도심 내 명문고교들의 강남 이전은 동시대에 시행된 고교 평준화 정책과 연결된 거대한 정책적 프로젝트였다. 고교 평준화 정책은 고등학교 진학 과정에서의 입학시험 실시를 금지했고, 반드시 정해진 학군 내에서만 무작위 추첨을 거쳐 고등학교에 배정되도록 하는 제도변화를 도입했다. 이는 경기고, 휘문고 등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명문고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서는 입학시험을 준비시킬 것이 아니라 그 주변으로 이사를 가서 추첨권을 얻어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교 평준화 정책 및 명문고교의 강남 이전에 추진력을 받은 중산층 중심의 대규모 인구이동은 도심부의 급격한 인구감소와 도심 재개발의 성공 및 강남지역의 성장으로 이어졌다.[19]:25–28 한편으로 고교들의 이전에 따라 도심부에 남은 학교부지들의 공간 그 자체도 서울 도심의 재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 이전한 고등학교들이 남기고 간 부지의 전체 규모는 약 27헥타르에 달했고, 이들 중 상당 부분은 1980년대에 오피스빌딩으로 재개발되었다. 1976년에 종로구 계동에서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동한 휘문고등학교 부지를 1986년에 재개발한 현대그룹의 계동사옥은 그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12]:78

한편으로, 당시 정부는 강남과 여의도를 단지 고급 주거단지 내지는 베드타운으로 재개발하는 것만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나름대로의 자족적인 경제기능을 부여하기를 원했다. 이에따라 강남의 테헤란로, 영등포의 여의도 등에는 업무지구로서의 성장을 기대하는 여러 정책적 개발혜택이 부여되었다. 대법원 및 서울지방법원 청사의 서초 이전, 국회의사당의 여의도 이전 등은 그러한 정책적 의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시기 동안에 서울 도심은 중심업무지구로서의 고차원적 기능을 견고하게 발전시켜나갔는데, 이는 당시에 행정부 기능이 도심에 집적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본래의 풍부한 역사적 중심성으로 인해 재개발된 오피스빌딩들에 국내외 대기업들이 더 가파르게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차원적 중심성은 강남, 여의도 등 다른 업무지구에 비해 오늘날에도 서울 도심만이 지니는 독특한 성질로 평가받고 있다.[20]:29–30

1990, 2000년대의 재발견 편집

 
2004년 무렵부터 종로구와 중구 사이의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생태친화적 선형하천공원으로 복원된 청계천은 서울 도심의 현대적 경관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80년대의 도심 재개발은 서울 도심의 정주인구를 줄이고 그 빈 공간을 균질한 업무지구로 재편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1985년에 종로구 주민은 265,342명이었지만, 그 숫자는 2005년에 154,043명으로 줄었다. 약 42%가 감소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구의 주민 숫자는 같은 시기 동안 208,085명에서 126,679명으로 줄었들었다.[12]:85 70년대 시작된 도심 재개발 정책은 90년대까지도 큰 변화 없이 계속되어왔는데, 이 시기 동안 서울 도심에 지어진 상징적 건축물로는 SK서린빌딩종로타워(각 1999년 완공)가 있다.[18]:311-316

그러나 21세기를 앞둔 서울 도심에는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의 개발 압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접어들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 인식이 증진되었고, 그에 따라 서울을 향한 관광산업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특별시청이 1394년 한양 천도를 기준으로 600년의 역사를 기념한 1994년의 '정도 600년 기념사업'이나, 유네스코가 서울 도심 북쪽에 자리한 두 상징적 문화유산인 종묘창덕궁을 각각 1995년,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서울 도심의 개발방향이 문화경관의 보존과 재발굴에도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 중요한 전환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는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와 남산을 비롯한 내사산 기슭에 자리한 난개발지역 철거 등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조선 시대로부터 유래되는 도심부의 옛 문화경관을 다시 발굴하고 새롭게 보존해나가려는 초창기 시도들 중의 하나였다.[18]:253-254 한편으로 2005년 완성된 청계천의 복원은 전통문화 뿐만 아니라 생태적 측면의 도시경관 재발견에도 큰 영향을 끼친 21세기 서울의 랜드마크 사업이었다. 복원 당시 청계천은 인공하천으로서의 불안한 정체성과 이를 가로지르는 옛 다리 복원의 역사적 정확성 등에 관련하여 다양한 논란을 겪었지만, 복원 후 10년간 약 1억 9천만명의 방문객을 끌어들이며 서울 도심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등장했다. 2014년 기준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한 서울특별시청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청계천은 고궁, 남산타워, 광화문에 이어 서울 전체를 상징하는 4번째 시설로 선정되었고,[21] 2022년 4분기 기준 청계천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소비하는 외식업 이용장소로 조사되었다.[22]

의미와 용례 및 경계 편집

1987년 도심재개발사업 대상지역
2000년 4대문 범역 경계도면
2016년 서울도심 범역 경계도면

서울 도심이라는 명칭은 법률로써 정해진 행정구역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지명행정계획을 통해 정착된 것이므로 구체적인 범위에는 어느 정도의 탄력성이 있다. 다만 1970~80년대의 '도심 재개발사업' 대상지 범위, 2000년대부터 이어져 온 여러 도심부 행정계획상의 용례 들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지명으로서의 '서울 도심'이라는 표현은 기본적으로 한양도성종로구중구의 도심부를 일컫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일반인들은 '서울 도심'이라는 표현을 서울 한양도성 안 지역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서울특별시 내부'를 강조해서 일컫는 단어처럼 잘못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단일한 중심지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도심'이라는 개념을 '업무지구'의 개념과 혼동하거나,[23] 단순히 도시화 지역 전반을 일컫는 '도시' 내지는 '도시지역' 등의 개념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24]

지명으로서의 '서울 도심'이 본래의 의미가 잘못 사용되는 또 다른 원인은 한국어에서 '도심'(都心)이라는 표현이 고유명사로서의 지명의 일부를 이루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점에 있다. 이는 타 언어권과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서양에서는 한국어 '도심'과 대응하는 뜻의 '다운타운'(미국 영어: downtown), '이넨슈타트'(독일어: innenstadt), '센트레빌'(프랑스어: centre-ville) 등의 표현이 고유명사로서의 지명의 일부를 이루는 경우를 자주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행정구역에 붙여진 고유한 지명이며, 인네레슈타트는 그 이름 자체가 오스트리아 제1행정구역의 이름이다. 이에 따라 지명으로서의 '서울 도심'에 대응하는 영단어 다운타운 서울(영어: Downtown Seoul)은 오히려 영어권 화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한양도성 내 광화문, 종각, 시청 및 서울역 주변의 도심부를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되어 있다.[25]

행정계획으로서의 '서울 도심'의 경계는 옛 식민통치기의 경성 도심부 상업지구, 1960~80년대에 이어져 온 서울 도심부 고도제한지구 등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져 온 도심 계획들은 서울 도심을 주거와 상업지구가 혼재된 무질서한 구시가를 철거하고 균질한 중심업무지구로 재개발하는 동시에, 그곳의 전통적인 문화경관을 보전해야 한다는 대립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들은 주로 서울 전체의 마스터플랜인 도시기본계획의 일부로서 추진된 것으로, 서울 도심만을 특정하는 행정계획은 아니었다.[26]:43–44

구체적으로 '서울 도심'만을 특정하여 그 경계를 정하는 행정계획이 도입된 것은 2000년대의 일이다. 서울 도심만을 특정하여 다루는 최초의 도시계획은 2000년 시행된 '서울 도심부 관리 기본계획'으로,[27] 이는 그 후 2004년 시행된 '청계천 복원에 따른 도심부 발전계획',[28] 2007년 시행된 '도심재창조 종합계획',[29] 2015년 시행된 '역사도심 기본계획',[2], 2023년 시행된 '서울도심 기본계획'[1] 등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2000년대부터 2015년대까지의 행정계획들은 서울 도심의 범위를 종로구 교남동, 사직동, 종로1·2·3·4가동, 종로5·6가동, 창신1동중구 광희동, 명동, 소공동, 신당동, 을지로동, 회현동의 11개 행정동으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이는 옛 경성에서부터 이어져 온 상업지구 중심의 도심 재개발을 염두에 둔 것이다. 반면 2015년의 도시계획은 서울 도심의 범위를 위 11개 행정동에 한양도성 내 지역 전체를 추가하는 넓은 범위로 확장하였는데, 이는 서울 도심의 역사문화적 경관보존 측면을 강조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30]:134–135

 
'서울도시기본계획'은 1997년부터 서울을 5개의 생활권으로 나누고 있는데, 도심 생활권은 그 중에서 종로구, 중구, 용산구를 일컫는 표현이다.

한편으로 '수도'와 이를 둘러싼 '수도권'의 관계처럼, 서울 도심권이라는 용어는 '서울 도심'을 둘러싼 지역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97년부터 지금까지 서울특별시 전체를 아우르는 마스터플랜인 '서울도시기본계획'은 서울의 25개 자치구를 5개의 생활권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 중 '서울 도심권' 또는 '도심 생활권'은 종로구, 중구, 용산구의 세 자치구(도심 3구)를 일컫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31]:149

자연지리 편집

지형과 지질 편집

2016년 기준 서울 도심의 행정계획상 면적은 17.9제곱킬로미터로 서울특별시 전체 면적의 약 2.9%에 해당한다.[2]:22 지질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중생대 흑운모 화강암이며, 서울 도심은 한양도성과 이를 휘감은 낙산·인왕산·남산·북악산 등 내사산(內四山)에 둘러싸인 분지이므로, 내사산에서 도성을 거쳐 중심부로 향할수록 지세가 낮아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내사산으로부터 유래하는 작은 물길들이 청계천으로 모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물길이 예로부터 형성되어 왔으며, 이 물길들은 옛 서울의 하부 행정구역을 이루는 자연경계로 기능했다. 한편 물이 땅에 스며드는 정도를 나타내는 토양침투율은 도심 내 지역 중에서 청계천 이북 지역이 낮은 반면 이남 지역이 높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청계천 이북의 종로 일대에 물길을 곧게 형성하는 반면, 이남의 중구 일대에 구불구불한 실개천을 형성하며 토질을 상대적으로 질퍽하게 만드는 현상을 초래했다. 청계천 이남의 남촌 지역을 부르는 옛 명칭 중 '진고개'는 이처럼 땅이 질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32]:131-134

그러나 옛 물길들은 근대적 도시화 사업, 특히 공중위생의 개선에 큰 장애가 되었으므로 일제 시대에 식민정부는 옛 물길 대부분을 지표 아래로 옮기는 하수개수 사업을 오랜 기간에 걸쳐 추진했다. 그러나 재정상의 문제로 인해 수계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식민정부는 물길을 따라 지하에 상하수도관을 짓고 땅으로 덮은 뒤 그 위에 도로를 내는 형태로 하천 사업의 대부분을 수행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서울 도심의 도로망이 옛 물길의 구조와 결합하는 역사적 구조로 이어졌다.[32]:143-145

기후 편집

서울특별시(서울 기상관측소, 종로구 송월동 1-1)의 기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연간
최고 기온 기록 °C (°F) 14.4
(57.9)
18.7
(65.7)
25.1
(77.2)
29.8
(85.6)
34.4
(93.9)
37.2
(99.0)
38.4
(101.1)
39.6
(103.3)
35.1
(95.2)
30.1
(86.2)
25.9
(78.6)
17.7
(63.9)
39.6
(103.3)
평균 일 최고 기온 °C (°F) 2.1
(35.8)
5.1
(41.2)
11.0
(51.8)
17.9
(64.2)
23.6
(74.5)
27.6
(81.7)
29.0
(84.2)
30.0
(86.0)
26.2
(79.2)
20.2
(68.4)
11.9
(53.4)
4.2
(39.6)
17.4
(63.3)
일 평균 기온 °C (°F) −2.0
(28.4)
0.7
(33.3)
6.1
(43.0)
12.6
(54.7)
18.2
(64.8)
22.7
(72.9)
25.3
(77.5)
26.1
(79.0)
21.7
(71.1)
15.0
(59.0)
7.5
(45.5)
0.2
(32.4)
12.8
(55.0)
평균 일 최저 기온 °C (°F) −5.5
(22.1)
−3.2
(26.2)
1.9
(35.4)
8.0
(46.4)
13.5
(56.3)
18.7
(65.7)
22.3
(72.1)
22.9
(73.2)
17.7
(63.9)
10.6
(51.1)
3.5
(38.3)
−3.4
(25.9)
8.9
(48.0)
최저 기온 기록 °C (°F) −22.5
(−8.5)
−19.6
(−3.3)
−14.1
(6.6)
−4.3
(24.3)
2.4
(36.3)
8.8
(47.8)
12.9
(55.2)
13.5
(56.3)
3.2
(37.8)
−5.1
(22.8)
−11.9
(10.6)
−23.1
(−9.6)
−23.1
(−9.6)
평균 강수량 mm (인치) 16.8
(0.66)
28.2
(1.11)
36.9
(1.45)
72.9
(2.87)
103.6
(4.08)
129.5
(5.10)
414.4
(16.31)
348.2
(13.71)
141.5
(5.57)
52.2
(2.06)
51.1
(2.01)
22.6
(0.89)
1,417.9
(55.82)
평균 강수일수 (≥ 0.1 mm) 6.1 5.8 7.0 8.4 8.6 9.9 16.3 14.7 9.1 6.1 8.8 7.8 108.6
평균 강설일수 7.1 5.1 2.8 0.2 0.0 0.0 0.0 0.0 0.0 0.0 2.3 6.4 23.9
평균 상대 습도 (%) 56.2 54.6 54.6 54.8 59.7 65.7 76.2 73.5 66.4 61.8 60.4 57.8 61.8
평균 월간 일조시간 169.6 170.8 198.2 206.3 223.0 189.1 123.6 156.1 179.7 206.5 157.3 162.9 2,143.1
가능 일조율 52.3 53.6 51.0 51.9 48.4 41.2 26.8 36.2 47.2 57.1 50.2 51.1 46.4
평균 자외선 지수 2 3 5 7 8 9 10 9 7 4 3 2 6
출처: 대한민국 기상청 (평년값: 1991년~2020년, 극값: 1971년~현재)[33][34][35]

서울 도심의 기온, 강수량 등 기상정보는 대외적으로 서울을 대표하고 있는데, 이는 도심 내 종로구 송월동에 1932년 설치되어 이듬해부터 운영을 개시한 근대적 기상관측소인 '서울 기상관측소'가 서울 전체를 대표하는 기상관측소로 계속하여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36] 이 관측소 주변의 옛 기상청 터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2020년에 기상청 산하의 국립기상박물관으로 재편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서울 전체를 대표하는 관측소로서 변함 없이 정보를 생산하고 있다.[37] 이와 같은 서울의 대표 관측정보에 의하면 2020년 기준 서울 도심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12.8도, 연평균 강수량 1,417mm이고,[38]:II-5(73) 남부지방의 난대성 기후와 북부지방의 냉대성 기후의 중간적 성격을 나타내며 비교적 사계절이 뚜렷하다. 서울 도심은 내사산 일대의 녹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강남, 여의도 등 한강 이남 도시화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섬 현상이 덜한 편이다.[39]:30-33

인구, 주거와 교육 편집

서울 도심에 거주하는 인구는 1985년 인구총조사 기준 203,093명에서 2015년 인구총조사 기준 106,162명으로 전체적인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1]:12 이에 따라 2015년 기준 서울 도심의 인구밀도는 제곱킬로미터 당 5,931명으로 서울 평균(16,365)에 비해서도 낮을 뿐만 아니라 뉴욕 맨해튼(18,529), 도쿄 도심3구(11,275) 등 해외 대도시의 도심부에 비해서도 인구밀도가 낮은 편이며, 종로구·중구 일대는 직주근접 인구가 도심 내 취업자 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적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서울 도심의 낮은 인구밀도는 1970년대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되어 온 도심 주거수요 억제 정책에 기인한 것이다.[1]:35 인구수의 감소는 주택환경의 노후화와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2018년 주택산업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종로구·중구·용산구의 도심 3구는 서울 전체에서 준공 30년을 넘은 주택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기록된바 있다.[40]

도심부의 정체된 인구숫자는 1970년대 시행된 강남 지역으로의 중등교육기관(중학교·고등학교) 강제이전 정책에도 불구하고 도심부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온 전통 있는 몇몇 사립 교육기관들마저 도심권 바깥으로 이전하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44년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개교한 계성여자고등학교는 2016년에 계성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성북구 길음뉴타운으로 이전하였으며, 1945년 종로구 인사동에서 개교한 풍문여자고등학교는 2017년에 풍문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강남구 보금자리지구로 이전했다.[4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울 도심은 구한말부터 설립된 전통 있는 교육기관들이 자리를 지티면 공간의 역사성을 유지하고 있다. 종로구 삼일대로의 서울교동초등학교(1894년 관립교동소학교로 설립), 종로구 혜화로의 경신중·고등학교(1885년 언더우드학당으로 설립) 등은 개교 이래 지금까지도 도심 내에서 변함 없이 같은 장소를 지키고 있는 상징적인 교육기관들이라고 할 수 있다.[42]:8

정치와 시위 편집

 
1987년 서울 광장에서 열린 6월 항쟁은 민주화 투쟁 중 사망한 고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

조선 시대의 경복궁육조거리에서부터 이어져 온 정치적 중심지로서 서울 도심부의 역할은 식민통치기의 조선총독부 청사경성부 청사를 통해 근대적으로도 더욱 확대되어 왔으며, 이는 해방 후에도 주요 행정부 시설과 언론사, 해외 각국의 대사관들이 같은 곳에 집결하면서 서울 도심의 정치사회적 위상을 더욱 끌어올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거의 대부분의 시위들은 정치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 서울 도심 내 서울광장광화문광장과 이를 잇는 세종대로 주변에서 개최되었는데, 그에 해당하는 예로는 부민관(옛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작된 1960년 4·19 혁명, 서울광장에서 개최된 1987년 6월 민주 항쟁,[43]:6-12 광화문광장에서 개최된 2014년 세월호 추모 집회와 2016~2017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탄핵 반대 시위 등을 들 수 있다.[44]:75-81

 
1996년 열린 제15대 총선에서 종로 선거구이명박(신한국당), 노무현(민주당) 등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당대의 정치적 거물들이 맞붙은 장소다.

서울 도심의 정치사회적 위상은 이른바 "정치 1번지"라고 불리는 종로 선거구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선거구로서의 종로 지역은 단순히 그 행정구역상의 일련번호가 1번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상징을 이어오고 있다는 측면에서 해방 후에 정치 1번지라는 별명을 지니게 되었다.[45] 이러한 정치적 위상은 이후 종로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정치적 경합 지역(스윙 스테이트)으로서의 성질을 획득하며 더욱 고도화된다. 1980년대에는 고도개발의 수혜를 얻은 강남 지역, 2020년대에는 대통령실 이전으로 인한 용산 지역 등이 '신(新) 정치 1번지' 등을 자처하기도 하였으나, 이들 지역은 민심의 변화를 대표하는 정치적 경합 지역으로서의 역사와 성격이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정치적 중심지로서 종로의 위상을 압도하지 못했다.[46] 또한 정치인들 스스로에게도 종로구는 해방 후 윤보선, 노무현, 이명박 등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지역구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종로구는 2024년에 단독 선거구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며 서울 도심 내 민심을 상징하는 정치 1번지로서의 역사성을 이어오고 있다.[47]

서울 도심의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위상은 국제정치의 현장인 외교공관들의 입지에서도 확인된다. 수도 서울의 외교공관들은 거의 대부분이 도심권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이 집적된 공간은 도심권 내에서도 주로 세종대로 일대와 용산구 한남동 일대의 두 그룹으로 나뉜다. 두 그룹을 비교해 볼 때, 서울 도심 내 세종대로 일대에는 대한민국에 대해 전통적으로 큰 외교적 영향력을 보여온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영국 등 강대국 및 경제규모가 큰 서유럽 국가들의 공관들이 밀집해 있는 반면, 용산구 한남동 일대 공관들은 주로 아프리카, 동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등 세종대로 일대에 비해 경제력이 낮은 국가들이 밀집해 있다는 지리적 특징이 있다.[48]:391-393 두 지역 간의 차이는 외교공관들의 지리적 집적이 시작된 시기에 연유한다. 광화문, 정동 등 도심 세종대로 일대의 외교공관 밀집지역은 구한말부터 형성되어 온 전통적인 외교지구인 반면, 한남동 일대는 대한민국이 북한과 고강도의 체제경쟁을 벌이던 1970년대부터 수교국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공관을 집단적으로 유치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뒤늦게 형성된 외교단지이기 때문이다. 70년대부터 한남동 일대에 외교공관들이 집중적으로 유치된 원인은 서울 도심 내부에 비해 지가가 저렴하다는 점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 홍보한 결과로 알려져 있다.[49]

경제와 산업 편집

 
종각역 부근 종로1가사거리에서 세종대로사거리 방면으로 바라본 종로의 2020년 아경. 도심부 고도제한을 받는 중층의 업무용 빌딩들이 길가에 빼곡하게 들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업무지구로서 서울 도심은 서울 CBD(Seoul Central Business District) 또는 서울 도심권 등의 명칭으로 불리며 강남 업무지구(Gangnam Business District, GBD), 여의도 업무지구(Yeouido Business District, YBD)를 비롯한 3대 업무지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문화적 중심성을 지니고 있다.[50] 이러한 수도 서울의 중심지로서 서울 도심의 상징성은 다른 업무지구들에 비해 외국계 기업 및 금융기관 등이 서울 도심에 모여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5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도심은 문화경관 보전으로 인해 강력한 고도제한 등 개발규제를 받고 있으므로 업무용 빌딩의 공급이 수요에 비해 매우 부족한 상황인데, 이에 따라 서울 도심의 평당 오피스(사무실) 가격은 다른 업무지구들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서울 도심의 평당 명목 임대료는 10만원을 돌파하여 다른 업무지구들 사이에서도 가장 높은 상황이다.[52] 이처럼 서울 도심에는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대기업들만이 진입할 수 있으므로, 도심 내 근로자들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2023년에 서울 도심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월평균 소득은 종로구 기준 426만원, 중구 기준 404만원인데, 이는 각각 전국 1위 및 3위에 해당한다. 2위는 여의도가 포함된 영등포구로서 월평균 415만원을 기록하였으며, 서초구(392만원)와 강남구(390만원)가 각각 4위, 5위를 기록하였다.[53]

다만 서울 도심은 태생적으로 여러 문화재들 사이의 좁은 부지에서 강력한 규제 하의 재개발을 통해 성장한 만큼, 협소한 지역 내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SK그룹 등 거대 기업집단의 본사와 금융, 법률, 언론 등의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산업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넓은 평야에서 지속적으로 상업용, 업무용 건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강남 지역에 비해서는 경제력의 총량이 밀리는 것으로 평가된다. 2021년 기준으로 서울 도심을 이루는 두 자치구인 종로구중구의 총 지역 내 GDP(GRDP)는 각각 35조원과 61조원인데, 이는 서울 25개 자치구 중 각각 5등과 2등에 해당한다. 총 GRDP를 기준으로 한 서울 내 순위에서 1위는 강남구(77조원)가, 3위와 4위는 영등포구(44조원) 및 서초구(38조원)가 차지하고 있다.[54]

금융 편집

 
중구 소공동에 자리한 한국은행은 서울 도심 금융가를 상징하는 기관 중 하나다.

서울 도심을 상징하는 산업 중 하나는 금융이다. 현재에도 한국은행이 자리한 중구 소공동은 본래 인접한 명동의 증권시장과 함께 본래 한국의 월스트리트라고 불렸던 곳이다. 1922년 명동에 설립된 경성주식현물시장은 1970년대에 여의도 개발과 함께 증권거래소가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명동과 소공동 일대를 한국의 대표적인 금융가로 만들어 왔으며, 식민통치기에 옛 조선은행 주변에 모여 있었던 주요 대형은행들의 본사는 오늘날에도 한국은행 주변에 밀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55] 명동과 소공동의 금융중심지로서의 위상은 증권거래소 이전이 완료된 1990년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는데, 이는 국내 증권사들이 당시에 개발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업무지구로서 여의도의 기능에 상당기간 의구심을 품어왔기 때문이다. 여의도가 명동 및 소공동을 제치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금융가로서의 위상을 지니며 한국의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3저호황에 이어 자본시장 자유화가 이루어진 1990년대 중반 이후였다.[56]

오늘날에도 금융가로서의 기능은 여의도 뿐만 아니라 서울 도심에도 분산되어 있는데, 이는 여의도의 금융산업이 국내 증권사자산운용사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서울 도심에는 은행, 보험신용카드업과 외국계 증권사 등이 고르게 분포하고 있으며, 금융위원회, 예금보험공사, 한국은행 등 주요 금융 규제기관들 또한 도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서울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서울 내 전체 금융기관 중 40%가 여의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구성은 국내 증권사, 자산운용사 및 투자자문사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은행업의 경우 국내 은행은 서울 내 13개 업체 중 8개 업체가, 서울 내 53개의 보험사 중에는 29개 업체가, 8개의 신용카드사 중에는 7개 업체가 서울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 진출한 89개의 외국계 금융기업 중에서는 79개 업체가 모두 서울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57]:20-22 외국계 금융기관들의 도심 선호는 매우 두드러진 현상인데, 이는 특정 산업군에 치우치지 않은 종합적인 중심업무지구이자 역사문화적 중심지로서 서울 도심의 독특한 성격에 대한 외국계 기업들의 선호가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58] 한편으로 2010년경부터는 미래에셋, 대신증권 등 국내 증권사들 상당수가 여의도를 떠나 명동 등 옛 도심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서울 도심에 은행, 보험사 등 증권사의 고객이 몰려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 도심의 업무용 빌딩 공급이 크게 제한되어 있어 도심에 투자하는 것이 여의도에 비해 사업성이 좋다는 측면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9]

법률 편집

서울 도심을 상징하는 또 다른 독특한 산업군은 법률, 그 중에서도 대형로펌이다. 202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4대 대형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1973년 창립), 법무법인 광장(1977년 창립), 법무법인 태평양(1980년 창립), 법무법인 세종(1983년 창립)은 모두 서울 도심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서울 도심에서 창립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는 대법원 및 옛 서울지방법원(현재의 서울중앙지방법원)과 그에 대응되는 대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현재의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해방 후부터 1995년 강남 개발 차원에서 서초구로 청사를 옮기기 전까지는 모두 중구 서소문동 등 서울 도심 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민주화 이후 설립된 헌법재판소 역시 1993년부터 종로구 재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같은 위치에 계속되고 있다. 1970~80년대에 시작된 대형로펌들은 이러한 역사를 반영하여 모두 서울 도심에서 창립되었으며, 특히 도심 내에서도 광화문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60]

1990년대에 대법원과 서울지방법원이 서초구로 자리를 옮겼음에도 이를 따라 서울 도심에서 강남 지역으로 자리를 옮긴 이력이 있는 법률회사는 4대 대형로펌 중 법무법인 태평양 뿐인데, 이는 그 무렵부터 이미 대형로펌들의 수익구조가 일상적인 소규모 소송이 아니라 대기업 및 외국계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는 법률자문과 대관업무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률회사의 산업체 총 규모는 도심에 비해 강남 지역이 크지만, 손꼽히는 규모의 대형로펌들은 그 주된 수익창출원인 자문 및 대관업무 수행에 있어 행정부, 언론사 및 다양한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들이 고르게 밀집해 있는 업무지구로서의 환경이 필요했으므로 서울 도심에서 계속 업무를 수행해왔다.[61] 반대로 대형로펌 중에서도 일상적인 송무에 특화된 로펌들은 법원에 가까운 서초구 등 강남 지역 일대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로펌별 수익구조의 차이는 1990년대에 강남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던 법무법인 태평양이 2020년에 종로구 공평동으로 복귀하도록 만들었다.[62]

언론 편집

 
사진 좌측에 자리한 상아색 고층 빌딩이 1986년 서울 도심 태평로에 세워져 국내 저널리즘을 상징하고 있는 '프레스센터'다.

오랜 세월 집적되어 온 언론사들은 서울 도심의 고차원적 중심성을 나타내는 지표로서의 산업 중 하나다. 식민통치기 조선의 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경성일보는 1914년 지금의 서울특별시청 청사 터에 자리를 잡았고, 그 뒤를 이어 설립된 수많은 신문사들은 시청과 중앙청(옛 총독부 청사)을 둘러싼 도심 공간에 들어서게 되었다.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사옥에 한 차례 화재를 겪고 1924년에 사옥을 옮겼는데, 이 자리는 오늘날 '프레스센터'로 알려진 신문회관 건물의 터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프레스센터는 관훈클럽, 한국기자협회, 외신기자협회 등 주요 저널리즘 단체가 들어선 도심 내 저널리즘의 상징적인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있다.[63]

서울 도심 지역 내에 집적된 언론사들의 오랜 역사성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2020년 한국기자협회의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 3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언론사 27곳 중 18곳이 종로구 및 중구 등 서울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태평로(현재의 세종대로)를 따라 늘어선 조선일보, 동아일보광화문 인근의 연합뉴스, 중구 정동길에 자리한 경향신문 등은 도심 내 언론사들의 오래된 역사를 상징하는 업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서울 도심에는 신문사뉴스통신사들이 집적되어 있을 뿐 방송사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방송사들이 1980년대에 뒤늦게 성장한 새로운 미디어 산업으로써 이미 경제적 집적화가 고도로 진행된 서울 도심의 높은 지가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방송사들은 중앙정부로부터의 정책적 배려에 힘입어 당시 막 개발 중이던 여의도에 둥지를 틀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새로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마포구의 디지털 미디어 시티로 옮겨가고 있으나, 도심으로 진입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3대 일간지 중 중앙일보는 2020년에 본사를 디지털 미디어 시티로 옮겼는데, 이는 같은 그룹에 속한 방송사인 JTBC와의 집적효과를 염두에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64]

문화와 관광 편집

 
세종대로를 따라 광화문광장 앞에 자리한 세종문화회관은 서울 도심을 상징하는 공연장이자 전시장 중의 하나다.

서울 도심은 '미술 1번지'라 불리는 종로구를 품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종로구·중구·용산구 등 도심 3구의 도심권은 서울에서 가장 많은 공연장과 전시장이 밀집해 있는 문화예술의 중심지이다. 또한 서울 도심은 종묘, 창덕궁 등 문화유산과 청계천 등의 현대적 도시경관은 물론, 남대문시장광장시장 등 다방면의 상점가를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어 국내외 서울 관광객들의 가장 주된 행선지로 기능하고 있다.

예술문화 편집

 
2013년 경복궁 동측의 옛 종친부 터와 국군기무사령부 건물을 정비하여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서울 도심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전시관 중의 하나다.

도심권의 예술문화 시설은 양적인 측면에서 서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집적도를 보이고 있다. 2015년 서울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서울특별시 전체에서 공간을 차지하는 문화유산의 약 53.1%(173개소),[65]:39-41, 공연시설의 약 48.6%(245개소)[65]:84-85, 박물관·미술관·화랑·경매소 등 전시시설의 약 51.4%(332개소)가 도심권에 밀집되어 있다. 다만 공연시설의 객석 수를 기준으로 할 때 서울 전체에서 도심권은 약 32%만을 점유하고 있는데, 이는 대학로를 중심으로 소규모 예술시설들이 주로 집적되어 있기 때문이다.[65]:184-185

여러 예술문화 중에서도 미술의 중심지로서 서울 도심의 역사는 기록상 조선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90년 문인 강이천이 지은 한경사(漢京詞)에는 "한낮 광통교 기둥에 울긋불긋 걸렸으니, 여러 폭의 비단은 병풍을 칠 만하네. 근래 가장 많은 것은 도화서의 솜씨로다. 많이들 좋아하는 속화(俗畵)는 산 듯이 묘하도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늦어도 그 무렵에는 청계천 광통교를 주변으로 상업화된 미술 시장이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66]:200-202 일제 시대에 들어 미술 시장은 서양화 등 당대의 최신 미술조류가 아닌 한국의 고전 동양화와 고미술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남촌 지역, 그 중에서도 중구 명동을 중심으로 고미술품 거래가 번성하였다.[66]:215-218 해방 후 고미술품 시장은 중구 명동을 넘어 종로구 인사동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종로구 인사동이 오늘날 널리 알려진 '화랑가'로서의 경관을 갖추게 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1970년 문을 연 '현대화랑'을 시작으로 이 무렵부터 종로구 인사동에 고미술품 뿐만 아니라 동시대 미술품을 다루는 화랑들이 줄지어 들어서기 시작했다.[66]:245-246

1970년대 형성된 인사동 중심의 화랑가는 점차 지리적 분화가 이루어져 인사동 뿐만 아니라 삼청동·평창동 등으로 뻗어나갔다. 오늘날 인사동의 화랑들은 주로 고미술을, 삼청동의 화랑들은 주로 현대미술을 취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67] 2020년대에도 미술 1번지로서 종로구의 위상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등 국내 최정상의 미술관과 아트선재센터, 가나아트센터, 갤러리현대(옛 현대화랑), 국제갤러리 등 인사동·삼청동·평창동에 밀집한 유명 화랑들로부터 뒷받침되고 있다.[68]

관광, 시장 및 상권 편집

서울 도심의 풍성한 문화자원은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지리적 중추로 기능하고 있다. 닐슨코리아의 조사에 의하면 2017년 한해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이 찾은 장소 상위 10곳 중 서울 도심에 위치한 명소는 7곳으로, 명동이 전체 1위를 기록했으며, N서울타워(2위), 경복궁·창덕궁·덕수궁·창경궁(3위), 동대문시장(6위), 인사동·삼청동(7위), 동대문디자인플라자(8위), 남대문시장(10위) 등이 그 뒤를 이었다.[69] 2020년대부터는 종로 광장시장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며 서울 도심 내 관광산업 성장에 새로운 거점으로 떠올랐고, 이에 영향을 받은 주변 종각역, 익선동 등 상권이 서울 도심 내 외국인 관광수요를 함께 견인하고 있다.[70] 한편 외국인 관광객들의 서울 내 행선지는 국적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2023년 서울관광재단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주로 서울 도심 내의 익선동, 북촌한옥마을, 광화문광장을 찾은 반면, 일본인들은 동대문 동묘시장과 남산공원을 찾았고, 중국인들은 청와대와 동대문 경동시장을 찾았다.[71]

교통 편집

 
서울 지하철은 종로구와 중구에 노선과 역사가 밀집해 있는데, 이는 서울의 가장 전통적인 업무지구이자 관광지인 서울 도심을 향하는 교통수요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서울 도심은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중심업무지구이자, 정치사회적 주목을 받는 시위가 열리는 명소이고, 동시에 풍성한 역사를 지닌 고궁과 박물관 및 화랑이 즐비한 관광지다. 사회 전 분야에 걸친 서울 도심의 중심성은 예로부터 도심의 교통난을 극심한 수준으로 높여왔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 서울 도심은 지하철 1호선2호선을 개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인 승용차 속도가 시속 12km 수준으로 오히려 하락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로교통의 흐름을 저해하는 오래된 전차를 철거하고 고가도로를 늘리며,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확충하는 여러 정책들이 도입되었다. 오늘날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집중적으로 지어져 있는 광화문역, 시청역, 종로3가역, 을지로3가역, 서울역 등의 지하철역들은 그러한 노력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72]:151-156

1970년대부터 서울 도심의 업무지구 기능을 강남과 여의도에 분산하는 동시에 도로를 정비하고 대중교통을 늘리는 여러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면서, 도심의 교통난은 오늘날 상당히 완화된 수준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서울 도심은 여전히 서울에서 가장 교통체증이 극심한 지역으로 남아 있다. 2023년 서울특별시청의 조사에 의하면, 종로구에 위치한 우정국로종로는 각각 평일의 평균 도로속도가 시속 17.5km, 18.0km 수준인데, 이는 서울의 6차로 이상 도로 중에서 가장 교통혼잡이 심한 도로 1위와 2위에 해당한다.[73] 종로구 우정국로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중구 남대문로는 서울 도심의 교통체증을 현재진행형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 중 하나다. 이 도로는 서울 도심으로 출근하는 통근자들이 탑승하는 지역간 광역버스들이 주로 통과하는 지역으로, 통근 시간대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파가 버스 정류장 앞에 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74]

명소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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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