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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은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이다. 소중화 사상이란 중화사상이라는 사상을 외국 국가가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중화사상에서 중국 한족(漢族)들이 자신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고 주변국가들을 이민족으로 본 것처럼 자신들만이 문명국이며 주변의 이민족의 국가들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한족의 중국 왕조를 이상화하기도 하였다. 중화사상이란 것은 일단 한족(漢族)이 먼저 시작했으나 소중화사상에 대해 얘기할 땐 소중화라는 것은 외국 국가들 (조선, 일본 등)이 자신들의 민족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고 외국 민족들은 외부 민족으로 보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중국 왕조의 경우에는 이민족들이 중국인(漢族)들을 정복하여 세운 정복왕조의 역사가 매우 길기 때문에 한족들의 경우 이민족에 복속된 백성들로서 이민족들의 지배를 흔쾌히 받아들여 받들며 지배자들인 이민족들에게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문화를 가진 한족 문화를 쓰기를 권장하였고 중국인들을 정복한 이민족들도 중국 한족(漢族)들이 사용한 문자 문화와 여러 문화들을 흡수하며 중화 사상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이민족이나 주변국가들이 중화를 자처하는 일 그리고 중화라는 표현 자체가 민족을 지칭하는 것 보다는 자신들이 문명 국가라는 인식의 자민족 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즉 이민족들이 중국인들을 지배하고 통치하면서 한족을 이상화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지배자들인 이민족들이 자신들의 출신과 민족적인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자민족적 중심주의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과 일본, 베트남과 같은 소중화사상을 가지던 나라에서도 이민족의 정복왕조들과 한족들의 중화사상을 비슷하게 따라하여 자국이 가장 문명화되어 있고 외국 민족들은 덜 문명화되어 있다고 여기게 된다. 중국인 한족 국가인 명나라가 여진족인 청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자 조선은 이전 소중화사상에서 자신들의 문명보다 낮았던 청나라의 여진족을 천시하고 자신들이 가장 문명국이라는 중화라는 생각을 계승한다. 이는 한국, 일본, 베트남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청나라와의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목차

나라별 중심 천하관편집

한국편집

고조선 이후 성립된 삼국 시대의 각 국은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중국 왕조들과 무역을 시도하였다. 특히 중국이 남북조 시대일 때는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북조와 후연, 북위 등과 전쟁을 하여 정복활동을 시작하였고 백제는 남조와의 무역을 통해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며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고 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왜국의 공격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고나서 부터 또한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나서부터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고구려는 백제를 백잔(百殘) 신라를 신민(臣民), 동이(東夷)등으로 표현하는 등의 자국의 문명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볼 수 있다.

삼국이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과정에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등 고구려, 백제를 병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고 당나라를 물리쳤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만주 지역에 성립된 발해는 당나라에 거리를 두 독립 국가로서 이어져갔다.

이처럼 고대 국가들도 자신들의 문명이 가장 높고 이민족들은 문명이 낮은 것으로 보는 사상이 있다.

조선 때부터 조선의 신하로 있는 여진족의 문명은 낮게 보고 조선의 문명을 높이 평가하며 일본을 "동이"(東夷)라고 표현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국인들을 유린하고 건국한 청나라는 예전부터 조선에 속하여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조선이야말로 중심이자 문명국가라는 사상의 계승자라고 생각하여 소중화를 자처하였다.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을 예전에 조선의 신하로 생각하여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화사상을 내세울 때 이념적으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며 자신의 혈통을 관련없는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명나라의 인물들을 가져다가 소급하여 족보 제작도 조선 중기 이후 많아졌다.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외국과의 교류를 막기도 하였다. 중화 사상이란 자신들만의 문화를 제일시 하며 다른 문화와 외국 민족은 천시하여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쇄국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편집

고대 일본편집

일본은 히미코 때 중국으로부터 왜왕의 지위를 하사받은 기록이 보이며, 중국 사서인 송서,남제서,남사서등에는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등 왜의 5왕이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의 중화사상을 인정했다기 보다는 무역을 하면서 일방적 책봉을 받은 것이다.

쇼토쿠 태자 이전에는 한반도의 문화를 대대적으로 수용하였다. 쇼토쿠 태자가 제도를 고대 율령제국가으로 개혁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의 왕조들과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이 시기에 중국문물의 도입과 함께 다이카 개신으로 소중화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쇼토쿠 태자는 수나라 양견에게 " 서쪽의 황제" "동쪽의 황제"라는 편지를 보냈었다. (천황 칭호의 사용 등) 이러한 소중화사상이 엿보이는 기록이 일본서기로 일본서기는 자국(야마토 조정)을 천하의 중심으로 서쪽의 신라와 백제 대해서는 서번국(西蕃國;서쪽의 야만국), 야마토 조정에 복속하지 않은 당시 일본열도의 이족(異族)집단인 북쪽의 에미시에게는 蝦夷(털이 많은 오랑캐의 뜻)라는 표현을 썼다. 이들 蕃, 夷등은 중국왕조들이 주변국들에게 붙이던 멸칭들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다이카 개신으로 인해 왕의 명칭이 "오오키미"에서부터 "덴노"(천황)으로 변한다. 정효운은 2006년 논문에서 일본서기가 편찬된 덴무 천황(天武天皇) 무렵부터 서서히 일본의 독자적인 세계관이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일본은 왜나라라는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였으며(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따르면 670년, 구당서에 따르면 702년 이전),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격인 천황이라는 호칭도 이 무렵부터 사용되었다[1].

정효운은 이어 일본서기 이후에 만들어진 속일본기가 일본식 소중화사상에도 계승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몬무 천황(文武天皇)과 쇼무 천황(聖武天皇) 대의 기사에는 야마토 정권에 편입되지 않은 일본 열도 내의 국가들이나, 신라발해를 자신들의 번국(蕃國)으로 인식하는 표현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명나라가 명나라 남쪽을 유린하는 북로남왜 시절에 왜구를 통제하기 위해서 아시카가 요시미쓰(1368~1394 재위)에 일본국왕 원의만(日本国王源義滿)라는 칭호를 일방적으로 하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시카가는 별 감흥이 없었고 왜구는 끊이지 않았다. 이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임진왜란)할 때 명나라 침략을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베트남편집

베트남 지역은 중국과 떨어져 있지만, 한나라 때에는 한나라에 속해 있었다. 베트남이라는 국명 역시 사마천의 사기 등에 나오는 월(越. 비엣)에서 비롯한 것이다. 중국의 중화사상이 베트남에 전파됨에 따라 베트남에서도 소중화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청나라가 중국인들을 지배한 이후 베트남의 여씨 왕조 역시 자신들이 중화 사상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소중화 사상을 보였다. 여씨 왕조의 군주들은 자신들이 청나라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면서, 주변 국가들에게 자신의 "베트남 문명" 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베트남의 후기군주들은 대내적으로 황제의 호칭을 썼다.

참고 문헌편집

  • 정효운, 《고대 한·일 국가와 타자인식》, 신라문화 28집, 2006 - 한국과 일본의 소중화사상의 기원 연구

각주편집

  1. 정효운, 2006에 따르면 천황이라는 호칭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682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