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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말말갈(粟末靺鞨)은 말갈의 한 부족으로, 종족적 계통에 대해서는 부여계 집단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1][2][3][주 1] 일반적으로 읍루·물길계로 인식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도 쌍이관 등 일부 부여계 속성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는 통형관을 지표로 하는 읍루·물길 문화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4][5][6] 말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수서 (역사서)》에서 불열말갈 동쪽 지방의 화살만 모두 돌촉(石鏃)인데, 바로 옛날 숙신씨의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금의 흥개호 부근과 소련 연해주 일대에 살던 불열부와 호실부 그리고 그 동북쪽에 살던 흑수부와 안거골부만이 숙신이고, 그 외의 말갈은 숙신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석촉의 사용여부는 철기문화의 전파정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불열 동쪽만 숙신씨였다고 보기는 어렵다.[7][주 2]

목차

문화편집

《수서》에는 속말부가 "고구려와 인접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속말말갈은 흑수말갈과 함께 말갈 7부 가운데 위치 비정상 논란이 가장 적은 집단이다. 속말말갈과 흑수말갈은 모두 거주지 인근의 강 이름에 따라 부명(部名)이 일컬어졌다. 즉 속말말갈은 속말수, 지금의 송화강가에 사는 말갈이라고 보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속말말갈의 유적지는 제2 송화강 유역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길림 영길(永吉) 양둔(楊屯) 대해맹(大海猛) 유적의 상층 문화층과 유수(楡樹) 노하심(老河深) 유적의 3기층, 그리고 영길 사리파(査理巴) 고분군 등이 있다. 이외에 길림시 북쪽 구태현(九台縣)의 송화강 서쪽 연안 상류 지역에서 발견된 산채(山寨) 7좌 유적이 있으며, 화전현(樺甸縣)과 덕혜현(德惠縣) 등 길림 인근 지역에서도 속말말갈의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양둔 대해맹 유적은 남북 길이 약 450m, 동서 너비 150m, 높이 약 10m 되는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남으로 30km를 가면 길림시가 있고, 서로 2km를 가면 제2 송화강이 나온다. 서북으로 500m 거리에는 영길현의 오라가진 양둔이 있으며, 북쪽은 대해소택에 임해 있다. 1971년 여름에 농부가 발견하여 그해 8월과 10월에 조사를 시작했고, 길림성 문물공작대, 길림시 박물과, 영길현 문화국의 고고학자들이 1979년 8월과 1980년 6~9월에 계속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발굴 결과 세 층의 문화 유적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유적의 하층은 서단산 문화 만기(晩期), 중층은 한대 문화, 상층은 말갈-발해 초기 문화에 해당된다. 목탄 연대 측정을 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1535±85년 전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즉 수말당초인 6~7세기경 유적으로 볼 수 있다.  양둔 대해맹의 상층 문화층에서는 모두 92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석광묘가 2기이고, 90기가 수혈토광묘였다. 토광묘의 형태는 장방형이 다수였고, 소수의 무덤은 정방형이거나 타원형인 것도 있었으며 일부는 불규칙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고분들 대부분은 천장이 파괴되어 있었고, 몇몇 무덤에서는 목관 흔적을 발견하였으나 다수의 무덤에는 장구(葬具)가 없었다. 매장 형식으로 보면 1차장을 한 것과 2차장을 한 것, 그리고 1·2차장을 합장한 것 등이 있었다. 한 무덤 안에 매장한 사람 수로 보면 1인장, 2인장, 다인장 등으로 다양했다.  출토 유물로는 여러 가지 도기와 옥벽(玉璧), 청동띠 장식품, 패식(牌飾), 철공구, 병기, 마구, 갑편 등 각종 생활 용구와 생산 공구, 그리고 무기와 장식품 등 다양한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부장품의 수량은 적게 묻은 곳에는 몇 점, 많이 묻은 곳에는 몇십 점으로 차이가 있었다. 부장품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도기였는데, 특히 단지가 많았고 대부분 피장자의 머리 위에 놓여 있었지만 일부 무덤에서는 발 쪽에 놓여 있기도 했다. 그 밖의 장식품과 의복 등은 피장자가 생전에 사용하던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 유적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유물로 개원통보(開元通寶)도 1점 나왔는데, 17호 무덤 피장자의 발 아래쪽에서 발견되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통형관(筒形罐)은 모두 다 진흙에 모래를 섞어 손으로 만든 전형적인 말갈관이었다. 그릇 표면은 마연했거나 혹은 돌림판에 돌리면서 다듬었다. 도기의 구연부와 경부에는 한 갈래 톱날 모양의 덧띠문으로 장식했다. 전형적인 말갈 도기인 중순관(重脣罐)도 있었다. 그릇의 복부는 각획문(刻劃紋), 압인파랑(壓印波浪), 둥근 점, 사선문, 비점(箆点)으로 구성된 사선, 능형문(菱形紋)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석광묘에서는 장년 남자의 인골과 단지, 철갑편, 철창끝, 활촉 및 나무와 방직품 천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다음으로 유수 노하심 유적은 제2 송화강 북안 송눈평원(松嫩平原)의 대파향(大坡鄕) 후강촌(後崗村) 남쪽에 있다. 유적은 북으로 유수현성과 30km 떨어져 있으며, 노하심촌의 남쪽 500 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유적 규모는 동서 길이 약 1000m, 남북 너비 약 150m 정도이다.   노하심유지는 1980년 7월 농민이 발견했다. 이해 9월과 다음해 5~7월까지 연속적으로 발굴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시대가 다른 세 개 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양둔 대해맹 유적과 동일하게 하층에는 서단산 문화, 중층에는 한대 문화, 상층에는 말갈-발해 문화가 분포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말갈-발해 문화 유적은 모두 37기의 고분으로, 그 중 7기는 석관묘, 6기는 토광수혈목관묘, 24기는 토광묘였다. 고분의 방향은 대다수가 동서 방향이었으며, 소수는 동남 혹은 서북 방향이었다. 1인장이 비교적 많고 2인장, 3인장이 비교적 적었다. 이 가운데 화장한 무덤도 6기가 있었다. 7기의 돌무덤 중 1기가 2인장이었고, 기타 무덤은 모두 다 1인장이었다. 어떤 무덤은 토광묘 무덤 앞머리나 뒷부분에 막돌을 쌓아 놓은 것도 있었다. 타원형 석관묘도 한 기 있었는데, 이것은 타원형 토광묘 안에 돌을 쌓아 만든 것이었다. 무덤 천장과 바닥에는 돌이 없었다.   30기의 토광묘 무덤 중 23기에는 아무런 장구가 없었다. 그 중 2인장, 3인 합장, 화장 무덤이 각각 한 기이고, 그 외는 모두 다 1인장이었다. 목관이 들어 있는 6기의 토광묘 무덤은 모두 다 1인장이었다. 그 중 5기가 화장 무덤이었다. 지금까지 목탄 흔적이 남아 있고, 관의 안팎에 불에 탄 붉은 흙과 타지 않은 인골이 남아 있었다. 무덤 형태를 보면 대부분 덮개와 바닥이 없었다. 어떤 무덤 바닥에는 자작나무 껍질을 깔아 놓았다. 부장품 중에서 도기의 대부분은 묘실의 머리맡 혹은 아래 부분에 놓여 있었으며, 쇠활촉, 띠고리 등 철기들은 대부분 묘실의 가운데 아래쪽에 있었다. 무덤 중의 인골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2차장인 것 같다.

이 무덤들에서는 대부분 생활 용구와 무기가 출토되었다. 부장품은 약간 어설픈 수준이며, 종류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54점의 도기 그릇에서 52점이 도기 단지였다. 도기 질은 모두 다 모래를 진흙에 섞어서 손으로 빚어 만든 것인데, 그릇 모양이 좋지 않았다. 또 색깔은 주로 갈색과, 부연 빛이 나는 갈색, 혹은 붉은 갈색이었다. 그 외 부장품으로는 철기·동기·은·석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주로 활촉·띠고리·치레거리 등이었다.  노하심유적이 있는 유수는 제2 송화강과 가까운 곳으로 속말말갈 중심지와 매우 가깝다. 따라서 이 유적도 역시 속말말갈의 유적으로 보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런데 노하심유적에서는 다른 곳과 달리 석관묘가 확인되었다. 석관묘는 부여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사실 M24 석관묘는 M23 목관묘 아래에 있었으므로 시간상으로 보아 목관묘보다 빠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일단 상층 문화층에서 확인된 것은 분명하므로 이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유수나 양둔은 모두 부여 지역에 속했는데, 양둔 쪽에서는 석관묘가 발견되지 않았다. 곧 유수 대파 지역이 같은 속말말갈의 권역이었지만 영길에 비해 고구려의 문화적·정치적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길 사리파 고분군은 1987년부터 1988년까지 길림성 문물 고고학자들이 발굴했다. 사리파촌도 역시 제2 송화강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100리 가량 나가면 길림시이다. 무덤은 영길현 우라가린 사리파촌 남쪽으로 약 1km 되는 곳의 낮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언덕 아래에는 수포와 송화강이 서로 통한다.

1986년 10월 이 지역 농민이 땅을 가는 과정에서 1기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이에 따라 문물 고고부에서 발굴을 진행했다. 1987년에서 1988년까지 모두 45기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이중 3기는 석광묘였고 나머지는 모두 토광묘였다. 무덤에서 대량의 도기와 금속기 부장품 등 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배대갑문(背帶甲紋)의 개원통보 동전도 하나 출토되었다. 묘장 중의 목탄 측정에 의하면 그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1545±95년 떨어져 있으며 수륜교정 1480±105년이라고 한다.   무덤은 주로 언덕 서쪽에서 남북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무덤의 방향은 동서 방향이 많았지만, 일부는 남북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인골의 머리 방향은 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대부분이었고, 일부는 서남쪽으로 향한 것도 있었다. 이 가운데 석광묘는 크고 작은 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무덤 바닥에 백회를 바른 것도 있고, 자갈돌을 한 층 펴 놓은 것도 있다. 천장 부분은 흙으로 봉했다. 규모가 큰 무덤은 길이가 3m의 장방형에 가까운 것도 있다. 석광묘 가운데 한 기에는 목관이 매장되어 있었다.  다수를 점하는 토광묘는 거의 수혈식 장방형 무덤이다. 묘실에는 대부분 목관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많은 경우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관은 대체로 약간 가공을 거친 원목 혹은 판재였던 것 같다. 관 두께는 5~10cm 가량 되었고, 관 못을 사용하였다. 장구의 방향은 장방형으로 관 뚜껑과 바닥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관이라기보다는 곽으로 보는 것이 좀 더 합당한 것 같다고 한다. 곽의 결구를 볼 때, 단곽(單槨) 또는 변상(邊箱)이 있는 목곽분이었다. 다수를 점하는 단곽 무덤은 장방형 모양으로 네 벽은 판 널로 만들었는데, 변상이 있는 목곽은 단곽묘 앞 뒤에 상자를 덧붙여 부장품을 놓는 곳으로 하였다. 1인장, 2인장, 다인 합장 무덤이 있으며, 앙신직지장(仰身直肢葬)이 위주였고, 2차장도 적지 않았다. 화장한 무덤도 많았다.   대다수 무덤에 부장품이 들어 있었다. 출토 유물은 주로 도기, 동기, 철기, 옥기 등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장식품과 병기, 마구 등이 많았다. 부장품의 수와 양의 차이가 매우 큰 것이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많은 경우에는 백여 점 정도가 들어 있었지만, 어떤 무덤에는 부장품이 한 점도 없었다. 도기 숫자는 좀 적은 편이었다. 도기는 모두 진흙에 모래를 섞어 손으로 빚어 만들었는데, 주로 발굴된 기종은 통형관, 고복관(鼓腹罐), 장경호, 반구병(盤口甁), 염구모(斂口鉾) 등이다. 동기로는 대식(帶飾), 장식품 등이 있었고, 철기에는 칼·창·활촉·띠돈·말자갈·말등자 등이 있었다. 이외에 은기, 석기, 옥벽, 마노구슬, 유리구슬, 뼈비녀와 뼈구슬 등도 출토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 고분군은 모두 제2 송화강 연안 나지막한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출토된 유물의 성격이나 장제(葬制) 등에서 유사한 면이 많다. 모두 토광묘와 석관, 또는 석광묘가 함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토광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그리고 출토 유물의 종류나 도기의 기형도 비슷하다. 따라서 같은 6~7세기 속말말갈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이 밖에 속말말갈 유적에서 발견되는 눈에 띄는 공통점은 군사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이다. 양둔 대해맹을 비롯한 속말말갈 유적에서도 농기구류보다 무기류가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었다. 예를 들어 도, 검, 비수, 창, 화살과 갑옷, 마구 등이 나와 이미 비교적 완벽하게 무기 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 공구는 도끼·자귀·낫 등이 있었지만 그 양이 무기류에 비해 적었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세력 집단이었다는 것이 유물을 통해서도 입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문헌 자료에 의하면 속말말갈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면은 고고학적인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속말말갈의 유적에서 출토된 손잡이가 달린 단지(雙耳罐)는 고구려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 고분군에 존재하는 석광묘와 함께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잘 보여 주는 유물인 것이다.[8]

역사편집

속말말갈은 생활조건을 찾아 끊임없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속성에 기인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그 배후에는 돌궐 세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583년 돌궐이 격파되자 속말말갈을 공격하였고,[9] 따라서 속말말갈 궐계부의 만돌[10]과 그의 동생 돌지계는 홀사래부(忽賜來部)·굴돌시부(窟突始部)·열계몽부(悦稽蒙部)·월우부(越羽部)·보호뢰부(步護賴部)·파해부(破奚部)·보보괄리부(步步括利部) 등 8부의 정예병 수천여 명을 이끌고, 부여성 서북으로부터 부락을 거느리고 관새를 향하여 수나라에 내부하였다.[11][12] 돌지계 집단이 이탈한 6세기 후반 개황연간(581~600)에는 고구려가 이통하 유역의 농안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여 속말부 전체를 복속시킨 것으로 추정하며, 속말부 거주지를 중심으로 설치된 북부여성주는 고구려 서북방에서 북방 종족을 견제하고 지배하는 중요 거점으로 활용되었다.[13]

돌지계가 거느린 8부가 수나라에 투항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 동안 옛 부여 지역을 지배해오던 속말말갈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고, 지금의 길림시를 중심으로 송화강 중류 지역에 속말말갈이 분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참고해보면 고구려의 북진으로 이통하 유역에 진출하였던 속말말갈은 북류 송화강 유역 동쪽으로 그 세력이 축소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4]

속말말갈이 돌지계 세력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15] 오소고부(烏素固部) 등 돌지계 세력과 구분되는 속말말갈의 부명(部名)도 찾아진다.[16] 《수서》를 보면 속말부는 매양 고구려를 노략질하였지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세력처럼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도 있었다.[17] 속말부 자체가 하나의 통일된 부(部)가 아니라 수십 개의 작은 부로 이루어진 총체였던 것이다.[18] 고구려가 598년 말갈을 이끌고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하였는데, 이때의 말갈은 돌지계의 이탈 이후 고구려에 복속한 속말말갈이다.[19] 634∼635년 무렵 오소고(烏素固) 부가 당나라로 망명한 사건도 수당교체기에 고구려와 돌궐 간에 다시 속말말갈을 놓고 분쟁이 발생한 결과로 파악된다.[20]

고구려의 내분으로 인해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이 투항할 때 거란과 말갈병을 거느렸는데, 이때의 말갈병은 요동 방면에 인접한 속말말갈일 가능성이 높으며, 연남생이 이적과 함께 평양으로 직공하였을 때에도 당연히 휘하의 거란과 속말말갈병을 동원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멸망 이후 이들은 당군에 편입되었을 것이다.[21]

고구려 멸망 이후 안동도호부의 통제 하에 고구려 유민을 무마해야 할 보장왕이 681년 고구려 부흥을 위해 말갈과 모반을 도모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보장왕이 통모한 말갈은 말갈제부 가운데 요동지역에 근접한 속말말갈일 가능성이 높다. 속말말갈은 말갈제부 가운데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다른 말갈제부와 달리 해체되지 않고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반당투쟁에 나섰던 고구려 유민들의 일부가 이곳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한편, 모반의 결과 고구려유민의 강제 이주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보장왕과 통모하였던 속말말갈의 경우도 강제 이주되었는데, 이때 걸걸중상·대조영 부자와 걸사비우가 영주로 강제 이주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22] 속말말갈이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전한 이유는 우선 남생 휘하의 속말말갈 병사가 고구려 멸망 이후에 당군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당나라는 송화강 유역의 속말말갈 지역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희박하였기 때문이다.[23]

속말말갈 지도자편집

같이 보기편집

노트편집

  1. 쑨진지는 ‘말갈은 하나의 민족도 심지어 하나의 종족도 아닌, 예맥, 숙신, 고아시아 3개 종족의 일부 부락군 및 부락연맹을 포괄하는 이름이라 하였고, 불열 서쪽의 백돌부(伯咄部), 속말부, 백산부 등은 예맥족에 속하고, 불열 동쪽의 호실부(號室部), 안차골부(安車骨部), 흑수부는 숙신족에 속하고, 군리(郡利)는 지금의 길야크족, 굴열(窟說)은 쿠릴족으로 고아시아족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2. 李仁哲, 6~7世紀의 靺鞨 >   Ⅱ. 6세기 勿吉의 盛衰와 靺鞨 7種, 42쪽, 수당대에는 속말 말갈, 백산말갈, 흑수말갈 등이 중국과 직접 접할 기회가 많아서 중국측에서 이들을 확실히 구분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종족을 말갈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각주편집

  1. 권오중(1980), 「말갈의 종족계통에 관한 시론」, 『진단학보』 49, 21쪽.
  2. 박노석(2013),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수서』 「말갈전」을 중심 으로-」, 『만주연구』 15, 114쪽.
  3. 孫進己·馮永謙(1989), 『東北歷史地理』 제2권, 黑龍江人民出版社, 163~164쪽.
  4. 송기호(2003),「속말말갈의 원류와 부여계 집단문제」,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문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5. 盧泰敦(1985),「渤海國의 住民構成과 渤海人의 族源」,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역사학회, 272쪽.
  6. 김락기,(2013), 『고구려의 동북방 경역과 물길 말갈』, 경인문화사, 11쪽.
  7. 李仁哲, 6~7世紀의 靺鞨 > Ⅱ. 6세기 勿吉의 盛衰와 靺鞨 7種, 41쪽
  8.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438~479쪽. ISBN 9788990699305. 
  9. 日野開三郞, 1950, 「隋唐に歸屬せる粟末靺鞨人突地稽一黨」,『史淵』45; 1991,『日野開三郞 東洋史學論集 15 東北アジア民史(中)』(三一書房), 293쪽.
  10. 북사》,《신당서》등에 따르면, 말갈의 추장을 대막부만돌이라고 하는데, 《책부원귀》에서 돌지계의 형으로 언급되는 만돌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고, 일부 학자들은 만주와 어원이 동일하다고 추측하고 있다.
  11. 《太平寰宇記》卷七十一 河北道二十 隋北蕃風俗記云, 初開皇中, 栗來靺鞨與髙麗戰不勝, 有厥稽部渠長突地稽者, 卒忽賜來部·窟突始部·悦稽蒙部·越羽部·步護賴部·破奚部·步步括利部, 凡八部勝兵數千人, 自扶餘城西北, 齊部落向關内附, 處之柳城, 乃燕都之柳城在燕都之北. 煬帝大業八年, 為置遼西郡, 并遼西懐遠瀘河三縣, 以統之, 取秦漢遼西郡為名也. 唐武徳元年, 改為燕州總管府, 領遼西瀘河懐遠三縣. 其年廢瀘河縣. 六年, 自營州南遷寄治於幽州城内. 貞觀元年, 廢都督府, 仍省懐遠縣. 開元二十五年, 移治所于幽州北桃谷山. 天寳元年, 改為歸徳郡. 乾元元年, 復為燕州.
  12. 《太平寰宇記》卷六十九 宋樂史撰 河北道十八 幽州 幽都縣十二鄉. 舊縣即薊縣地. 今邑治薊西界. 按郡國縣道記云, 建中二年, 於羅城内廢燕州廨置在府北一里. 其燕州本國, 因栗末靺羯首領突地稽.) 當隋開皇中, 領部落歸化, 處之於營州界. 煬帝八年, 為置遼西郡, 翊地稽為太守, 治營州東二百里汝羅城. 後遭邊冦侵抄, 又寄治于營州城内. 唐武徳二年, 改遼西郡為燕州, 仍置總管. 六年, 自營幽徙居幽州城内, 歴代襲燕州刺史. 建中初, 為朱滔所破滅, 尋州廢, 立此縣于故城.
  13. 김락기,(2013), 『고구려의 동북방 경역과 물길 말갈』, 경인문화사, 175쪽.
  14. 李仁哲, 6~7世紀의 靺鞨 > Ⅱ. 6세기 勿吉의 盛衰와 靺鞨 7種, 43쪽
  15. 송기호(2011), 『발해 사회문화사』,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88~97쪽.
  16. 김락기(2013), 『고구려의 東北方 境域과 勿吉 靺鞨』, 景仁文化社, 137~140쪽.
  17. 이정빈 (2018), 《6세기 중·후반 요서말갈(遼西靺鞨)과 돌궐·고구려》 동북아역사논총, 29쪽.
  18. 河上洋, 渤海の地方統治體制ー一つの試論として , 東洋史硏究 42-2, 1983; 임상선 편역, 《발해사의 이해》
  19. 김종복(2005), 《고구려 멸망 전후의 말갈 동향》, 동북아역사논총, 173쪽.
  20. 日野開三郞, 1950,「隋唐に歸屬せる粟末靺鞨人突地稽一黨」,『史淵』45; 1991, 『日野開三郞 東洋史學論集 15 東北アジア民族史(中)』(三一書房), 320∼321쪽.
  21. 김종복(2005), 《고구려 멸망 전후의 말갈 동향》, 동북아역사논총, 181~182쪽.
  22. 김종복(2004),「발해의 건국과정에 대한 재고찰」,『한국고대사연구』34, 304쪽.
  23. 김종복(2005), 《고구려 멸망 전후의 말갈 동향》, 동북아역사논총, 182~1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