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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니 요리히사

쇼니 요리히사(일본어: 少弐 頼尚, 에이닌(永仁) 2년(1294년) ~ 겐토쿠(建徳) 2년/오안(応安) 4년(1372년) 음력 12월 24일)는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부터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까지 활약한 규슈(九州)의 무장이다. 쇼니 씨(少弐氏) 제5대 당주 쇼니 사다쓰네(少弐貞経)의 아들로, 승려로써 출가한 뒤 법명을 바이케이혼쓰(일본어: 梅渓本通 바이케이혼츠[*])이라 하였다.

겐코(元弘) 3년(1333년)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타도 운동(겐코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찬동해 아버지 사다쓰네를 따라 규슈의 호조 씨(北条氏) 세력이던 하카타(博多)의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 호조 나가토키(北条英時)를 멸했다.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겐무 신정(建武新政)에서 이반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규슈로 내려오자 요리히사는 다카우지를 맞이하기 위해 아카마세키(赤間関)로 나아갔고, 그 와중에 왕실을 지지하던 기쿠치 다케토시(菊池武敏)나 아소 고레타다(阿蘇惟直, 고레나오)에게 다자이후(大宰府, 후쿠오카현 후쿠오카 시)를 공격당해 아버지 사다토키를 잃었다.

겐무(建武) 3년(1336년) 요리히사는 아시카가 세력과 함께 지쿠젠 국(筑前国) 다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기쿠치 씨를 격파하고, 다시 교토로 향하는 다카우지를 따라 기나이(畿内)까지 갔다. 다카우지를 따른 은상으로써 요리히사는 지쿠젠 국과 부젠 국(豊前国), 히고 국(肥後国), 쓰시마 국(対馬国) 등의 슈고(守護)직을 받았다.

아시카가 씨에서 다카우지와 다다요시(直義) 사이의 형제 대립이 발생하고(간노의 소란), 조와(貞和) 5년/쇼헤이(正平) 4년(1349년)에 다다요시의 양자인 다다후유(直冬)가 규슈로 달아나자 요리히사는 딸을 주어 다다후유를 옹립하고 규슈의 아시카가 세력이었던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와 싸웠으나, 다다후유가 몰락하는 바람에 영지 대부분을 몰수당하고 만다.

이보다 앞서 남조(南朝)는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였던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을 세이쇼쇼군(征西将軍)으로 삼아 규슈에 보냈는데, 구쓰나 씨(忽名氏)나 다니야마 씨(谷山氏) 등의 지원 아래 시마즈 씨(島津氏)를 격파한 가네요시 친왕은 남부 규슈로 들어가 기쿠치 씨의 환영을 받았다. 요리히사는 이번에는 남조와 동맹을 맺고 잇시키 씨를 협격, 이를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공통의 적이었던 잇시키 씨가 사라진 뒤 요리히사는 다시 가네요시 친왕 세력과 적대하게 되었고, 엔분(延文) 4년/쇼헤이 14년(1359년) 쇼니 씨는 기쿠치 다케미쓰(菊池武光) 등 세이쇼쇼군 지지 세력과 지쿠고 강(筑後川)에서 벌인 싸움에서 패하고(지쿠고 강 전투), 2년 뒤에 요리히사는 다자이후의 아리토모 산성(有智山城)으로 쫓겨났다.

겐토쿠 2년/오안 4년(1371년) 12월 24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78세.

아들로 다다스케(直資), 후유스케(冬資), 요리즈미(頼澄)를 두었다.

여말 왜구편집

고려 말기인 충정왕(忠定王) 2년 경인(1350년)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왜구(倭寇)의 고려 침공에 대해, 당시 고려 조정으로부터 왜구의 본거지로 지목되고 있던 쓰시마 섬(對馬島)의 슈고다이(守護代) 소 쓰네시게(宗經茂)를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다자이후(大宰府)의 슈고(守護) 쇼니 요리히사가 배후에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영에 따르면 충정왕 2년에 해당하는 경인년(1350년)에서 1년 전인 1349년 9월에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서자이자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양자로써 규슈로 들어온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전통적으로 규슈 지역을 통솔해왔던 쇼니 씨와 충돌하게 되었고, 쇼니 요리히사는 아시카가 다다후유의 대대적인 공세에 맞서 병량미 확보를 위한 교두보가 필요했던 차에 다자이후 휘하에 있던 쓰시마 소 씨가 병량미 확보를 위해 고려 해안의 조운선을 노린 것이 경인년 왜구의 정체였다고 주장하였다.

전임
쇼니 사다쓰네
제6대 쇼니 씨 당주
후임
쇼니 다다스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