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진저우의 야율초재 석상.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년 7월 24일(음력 6월 20일[1]) ~ 1244년 6월 20일(음력 5월 14일[1]))는 몽골 제국의 정치가이자 지식인으로 자는 진경(晉卿)이다. 학문이 뛰어나서 칭기즈 칸이 아낀 인물이다.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목차

성장과정편집

야율초재는 금나라 연경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좌전 - 양공이십육년(左傳 - 襄公二十六年)>에 나오는 "수초유재, 진실용지(雖楚有材,晉實用之)"라는 전고(典故)을 따라 아들 이름으로 삼았다.

모친의 영향으로 학문에 힘썼다. 야율초재의 어머니는 사람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면서 학문을 권했다.

행정가편집

금나라의 관리가 되었고, 1215년 칭기즈 칸중도를 함락시켰을 때 발탁되어 비치그치(Bichighchi, 書記)에 임명되어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우구데이 칸이 제위를 계승한 후 야율초재는 국책을 정하고 조의(朝儀)를 세웠으며, 중국 전통제도에 따라 다스릴 것을 주장하여 그의 의견을 국정에 많이 반영시켰다. 또한 군(軍)과 민(民)을 분리시켜 주군(州郡)의 장리(長吏)는 민정을 담당하고 만호부(萬戶府)는 군정을 총괄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야율초재는 몽골군이 금(金)의 변경을 함락시켰을 때 그의 지식을 귀하게 여긴 칭기즈칸에 의해 참모가 되었다. 그는 항복하지 않은 성민(城民)을 모두 학살하는 옛 제도를 폐지하자고 건의했다. 또 문화·교육의 진흥과 유학의 채택을 주장했다. 관직은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으며, 원대의 개국 규모는 그에 의해 많이 결정되었다.

저서로 《잠연거사집》(湛然居士集)을 남겼다. 또한 칭기즈 칸을 따라 서역 정벌에 나섰다가 후에 서역에서 약 6년을 머무르면서 각지의 길·마을·산천·산물과 도중에서 얻은 견문들을 기록하여 《서유록》(西遊錄) 1권을 지었다.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원문류』 권57,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