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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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허(만주어: ᠶᡝᡥᡝ Yehe, 한국 한자: 葉赫 엽혁)는 해서여진훌룬 구룬의 세력 중 하나로 현대 지린성 쓰핑 시의 관하와 청하로 불리는 여허강(葉赫河) 일대에 근거지를 두었다. 훌룬(忽剌, 만주어: Hūlun) 연맹은 울라(烏拉, 만주어: ᡠᠯᠠ Ula ), 호이파(輝發, 만주어: ᡥᠣᡳᡶᠠ Hoifa), 하다(哈達, 만주어: ᡥᠠᡩᠠ Hada), 여허(葉赫, 만주어: ᠶᡝᡥᡝ Yehe)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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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허의 시조인 싱건 다르한(만주어: ᠰᡳᠩᡤᡝᠨ
ᡩᠠᡵᡥᠠᠨ
Tumet Singgen Darhan)은 본래 투메드인이었으나 훌룬 구룬의 장(만주어: ᠵᠠᠩ Jang)의 나라 씨족을 정복하여 그 지역에 정착한 후 자신의 성씨를 투메드에서 나라로 바꾸었으며, 이후 여허강 유역으로 이주하면서 여허라고 일컫게 됐다.[1][2] 싱건 다르한 사후 여허의 수장은 아들인 시르커 밍가투(만주어: ᠴᡳᡵᡤᠠᠨᡳ Sirke Minggatu)가 계승했고, 시르거 밍가투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치르가니(만주어: ᠴᡳᡵᡤᠠᠨᡳ Cirgani)가 계승했다.[3] 치르가니는 1484년명나라로부터 탑로목등위야인여직도지휘(塔魯木等衛野人女直都指揮)로 임명되었다.[4] 명 초기에 탑로목위의 수장이었던 타엽(打葉)의 후손을 싱건 다르한의 후손이 대체한 것이다.[5] 그러나 치르가니는 16세기 초 명으로의 입공을 교란하여 차단했다는 이유로 명군에게 참살당했다.[6]

치르가니의 사후 그의 아들 추쿵거(만주어: ᠴᡠᡴᡠᠩᡤᡝ Cukungge)가 수장의 지위를 계승했고, 부친의 뜻을 이어 다른 여진 추장인 가합(加哈)과 연합하여 명나라의 변경을 자주 교란했다.[7] 1513년, 추쿵거는 명 조정의 회유를 받고, 부친의 지위를 인습하여 답로목위지휘첨사(榙魯木衛指揮僉事)가 되었다.[8] 1524년에는 그의 지위가 탑로목위여직도독(塔魯木衛女直都督)으로 승격되었다.[9] 그러나 추쿵거는 1551년 무렵 하다의 왕주 와일란에게 피살당하였고,[10] 여허는 하다에게 모든 칙서를 강탈당했다.[11]

추쿵거의 사후 그의 아들 타이추(만주어: ᡨᠠᡳᠴᡠ Taicu)가 수장을 계승했고,[12] 타이추 이후 그의 장남 타탄주(만주어: ᡨᠠᡳᡨᠠᠨᠵᡠ Tatanju)가 추쿵거를 죽이고 칙서를 강탈한 하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타탄주의 사후 그의 차남과 3남인[13] 칭기야누(만주어: ᠴᡳᠩᡤᡳᠶᠠᠨᡠ Cinggiyanu)와 양기누(만주어: ᠶᠠᠩᡤᡳᠨᡠ Yangginu) 제부를 정복하여, 각각의 성에 거주하니, 하다인들이 신속하였고, 형제가 마침내 모두 버일러를 자칭했다.[14]

명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李成梁)은 여허에게 칙서를 하사할 것을 허락하였고, 이에 1583년 1월 전후 칭기야누와 양기누는 통시를 하기 위해 진북관에 이르렀는데, 이때 개원의 관왕묘(關王廟)에서 양측이 충돌하여 두 버일러와 그 아들들인 올손패라(兀孫孛羅)와 합아합마(哈兒哈麻) 등이 모두 죽었다.[15][16]

칭갸누의 아들 부자이(만주어: ᠪᡠᠵᠠᡳ Bujai)와 양기누의 아들 나림불루(만주어: ᠨᠠᡵᡳᠮᠪᡠᠯᡠ Narimbulu)는 각각 부친의 지위를 계승했다. 이후 이성량은 거듭 군사를 이끌고 여허 구룬의 두카(만주어: ᡩᡠᡴᠠ Duka)과 니야한(만주어: ᠨᡳᠶᠠᡥᠠᠨ Niyahan)의 두 마을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1588년에도 나림불루의 성을 공격하였는데, 막대한 피해를 입고 회군하였다.[17]

건주여진누르하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13벌의 투구와 갑옷으로써 거벙하고, 수년간의 노력 끝에 부조의 원수 투룬 성주 니칸 와일란의 세력을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숙수후(만주어: ᠰᡠᡴᠰᡠᡥᡠ Suksuhu)·후너허(만주어: ᡥᡠᠨᡝᡥᡝ Hunehe왕야·동오·저천(만주어: ᠵᡝᠴᡝᠨ Jecen) 등을 정복하자,[18] 여허의 국주인 나림불루와 부자이는 1593년 하다의 국주 멍어불루, 울라의 국주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 호이파의 국주 바인다리, 코르친 몽골의 옹가대와 망구스 그리고 밍안, 주셔리(만주어: ᡷᡠᡧᡝᡵᡳ Jušeri)의 우두머리 율렁거(만주어: ᠶᡠᠯᡝᠩᡤᡝ Yulengge), 너연(만주어: ᠨᡝᠶᡝᠨ Neyen)의 우두머리 서오원(만주어: ᠰᡝᠣᠸᡝᠨ Seowen) 및 석시(만주어: ᠰᡝᡴᠰᡳ Seksi)와 화친하고 9부 연합군을 결성하여 건주여진을 공격하였으나[19] 누르하치가 강을 따라 난 길이 좁고 험한 구러 산에서 매복하고 여러 장애물을 설치하고 적들을 유인한 탓에 연합군은 크게 패하였고, 그 과정에서 부자이는 낙마한 뒤 건주병 우탄에 의해 전사했다.[20][21]

부자이의 사후 동여허의 국주는 부양구(만주어: ᠪᡠᠶᠠᠩᡤᡡ Buyanggu)가 계승했다. 그는 1597년에 여동생 몽고 저저를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냈고, 동여허의 국주 나림불루는 자신의 동생 긴타이시의 딸을 다이샨에게 시집보내어 건주와 혼인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나림불루는 몽골 부족을 약탈한 건주의 무하랸을 사로잡아 몽골에 압송했고, 동생 긴타이시의 딸을 내 칼카의 자이사이에게 시집보냈으며, 울라의 부잔타이와 동맹을 맺어 건주와의 동맹을 파기했다.[22]

1603년 후반 몽고 저저가 위독하여 여허에 거주하는 모친을 만나보고자 하였고, 이에 누르하치는 사신을 파견하여 장모를 건주로 오게 하였는데 몽고 저저의 오라버니인 나림불루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이후 몽고 저저가 병사했다. 1604년 2월 초, 누르하치는 이 사건을 빌미로 여허를 침공하여 장(만주어: ᠵᠠᠩ Jang) 성과 아키란(만주어: ᠠᡴᡳᡵᠠᠨ Akiran) 성 및 7채의 여허인과 가축 2,000여 필을 노획했다.[23]

동여허의 나림불루는 1609년 병사했고, 그의 지위는 동생 긴타이시가 계승했다. 그와 부양우는 1613년 울라의 멸망으로 인하여 자국으로 망명한 국주 부잔타이를 건주로 송환하라는 누르하치의 요구를 세 차례나 거부했고, 이에 누르하치는 그해 10월 초 대군을 이끌고 여허를 재침공해 여허 구룬의 19개 성 내부를 파괴하고 우수 성(만주어: ᡠᠰᡠ
ᡥᠣᡨᠣᠨ
Usu Hoton)의 여허인 300여 호를 사로잡아 회군했다. 이에 긴타이시와 부양우는 명 조정에게 지원을 호소하여 조총병 1,000여 명을 원조받았다.[24]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여허는 조선과 함께 명군을 원조했으나 명군이 대패하자 회군할 수 밖에 없었다.[25] 그해 9월 누르하치는 요동을 침공한다는 소문을 퍼트린 뒤, 여허로 군사를 출병하여 그곳을 급습했고,[26] 9월 29일, 마침내 동여허가 함락당하여 수장 긴타이시는 밧줄로 목이 졸리는 방식으로 처형당했다.[27] 당일 서여허의 부양우도 항복하였고, 다음날 아침 그도 동일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28] 부양우의 동생인 부르항우(만주어: ᠪᡠᡵᡥᠠᠩᡤᡡ Burhanggū)를 비롯한[29] 다른 버일러들은 목숨을 구제했고, 누르하치는 여허인들은 노예로 삼거나 가족 단위를 해체하지 않은 채 그 병력을 그대로 팔기에 편입시켰다.[30]

이후 여허의 두 수도와 그 일대의 여허인들은 모두 허투알라 인근으로 사민되어 여허는 무인지대가 되었고, 여허의 두 수도밖에는 쑥들이 높이 자라 있었다. 서북쪽으로는 사막이 펼쳐져 있게 되었다.[31]

씨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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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허나라 할라(葉赫那拉氏, 만주어: ᠶᡝᡥ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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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he Nara Hala)는 만주족 나라 할라의 지파로 해서여진 여허의 국성이었다. 그 시조는 16세기 후반 투메드 몽골의 귀족인 싱건 다르한으로, 이후 그의 후손들은 훌룬의 나라 씨족의 부락을 정복한 뒤 자신의 할란(哈拉, Hala)를 투머트(만주어: ᡨᡠᠮᡝᡨ Tumet)에서 나라(만주어: ᠨᠠᡵᠠ Nara)로 고치고, 이후 강명을 연고로 여허(葉赫, 만주어: ᠶᡝᡥᡝ Yehe)라는 무쿤(穆昆, Mukūn)을 더하여 여허나라(葉赫那拉, 만주어: ᠶᡝᡥᡝ
ᠨᠠᡵᠠ
Yehe Nara)라 일컬었다.[32]

신해혁명으로 청 제국이 와해되었지만, 공화정이 실현되지 못하고 군벌의 통치가 뒤를 이었으며 민족 차별 정책이 수반되었다. 전국 각지의 주방팔기(駐防八旗)들은 서안·남경·항주·형주 등지에서 무고한 만주족 관병을 살해하는 사건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에 따라 만주인들은 어쩔 수 없이 한족(漢族)의 성씨로 바꾸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만주족이 많은 북경에서는 극히 현귀한 집안으로 족속과 성씨를 바꿀 방법이 없는 소수 이외에는, 일반적으로 상당수의 만주인들은 족속과 성씨를 바꾸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입에 풀칠하고 살 방도조차 찾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직장이나 일자리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33] 따라서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여허나라씨는 한성(漢姓)인 나(那), 엽(葉), 장(張), 나(羅), 소(蘇)로 가장했다.[34]

역대 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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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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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싱건 다르한(勝根打喇漢, Singgen Darhan)
  • 시르커 밍가투(石兒刻命剛兔, Sirke Minggatu)
  • 치르가니(奇里哈尼, Cirgani)
  • 추쿵거(出空格, Cukungge)
  • 타이추(太杵, Taicu)

서여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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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칭기야누(卿家奴, Cinggiyanu)
  • 부자이(布戒, Bujai)
  • 부양구(布羊古, Buyanggū, ? ~ 1619)

동여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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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기누(楊機奴, Yangginu)
  • 나림불루(納林卜祿, Narimbulu)
  • 긴타이시(金台石, Gintaisi)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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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滿州實錄》. 1779. 葉赫國始祖蒙古人姓土默特所居地名曰璋 滅呼倫國內納喇姓部遂居其地因姓納喇 後移居葉赫河故名葉赫 始祖星根達爾漢生席爾克明噶圖, yehei aiman i da mafa monggo gurun i niyalma. hala tumet. jang gebungge bade tehe hūlun i nara halai aiman be efulefi terei babe salifi nara hala oho amala yehe gebungge birai dalin de gurun tehe seme gurun gebu be yehe sehe damafa singgen darhan. 
  2. 홍 저오; 오르타이; 쉬유완멍; 푸민 (1744). 《팔기만주씨족통보22. 九有蒙古人星根迂區漢者原姓土然特初滅庖倫國所店張池之納利姓部據具地田姓納瑜氏後遷枚素赫河岸遂號兼赫區星根連匿漢主席兩克明鳴回席爾元明唱圓生齊同喘尼齊固當兀生柏孔格補孔格止太什太什生子二長曰清住碧次曰楊吉著几弟二人綏服蒙赫諸部各店城國人皆稱為貝勒明萬膺十工午為寧迷伯李戍梁所訪枝害清住碧于布泰楊吉絮于納林布祿各醒具父為貝勒杖復典明和好及納林布祿弟全台石布泰子布揚古嗣為貝勒 
  3. 《滿州實錄》. 1779. singgen darhan de banjihangge sirke minggatu sirke minggatu de banjihangge cirgani cirgani de banjihangge cukungge 
  4. 《憲宗純皇帝實錄》 258. 1491. ○庚戌海西塔魯木等衞野人女直都指揮的兒哈你等泰寧等衞都督孛羅遣頭目火兒嗔火兒嗔:抱本火作大。等并自來都督僉事等官撒因孛羅等各來朝貢馬及貂皮賜宴并衣服綵叚等物有差 
  5. 이훈 (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78~82쪽. ISBN 9788994606514. 
  6. 《武宗毅皇帝實錄》 103. 1525. ○兵部奏海西衞夷人竹孔〔革〕漢籍按:據北平圖書館藏晒藍本補。等四人聽撫入貢輒求陞襲并給印與敕從之則示弱不從則興怨臣等會廷臣議以為竹孔革之父的兒哈你本的兒哈伱本:廣本伱作價,抱本作你。榙魯木衞指揮僉事以入寇被殺今竹孔革既悔罪歸順宜免勘暫准襲其父職以敕付遼東鎮廵官鎮巡官:廣本巡作守。收貯俟一年以上不擾邊境方許給之老鼠乃留舊無職事未可輒授宜於常賜外量加賞賚亦以五年為期無所侵犯鎮廵官議奏加哈义暨其子逞得革等求易賜敕恐冒名而來未可輒易宜令鎮廵官勘實如無職事亦如亦如:影印本亦字不明晰。老鼠乃留例詔如議仍令大通事省諭各夷知之 
  7. 高文德 (1995년 12월). 《中国少数民族史大辞典》. 1769쪽. 
  8. 《武宗毅皇帝實錄》 103. 1525. ○兵部奏海西衞夷人竹孔〔革〕漢籍按:據北平圖書館藏晒藍本補。等四人聽撫入貢輒求陞襲并給印與敕從之則示弱不從則興怨臣等會廷臣議以為竹孔革之父的兒哈你本的兒哈伱本:廣本伱作價,抱本作你。榙魯木衞指揮僉事以入寇被殺今竹孔革既悔罪歸順宜免勘暫准襲其父職以敕付遼東鎮廵官鎮巡官:廣本巡作守。收貯俟一年以上不擾邊境方許給之老鼠乃留舊無職事未可輒授宜於常賜外量加賞賚亦以五年為期無所侵犯鎮廵官議奏加哈义暨其子逞得革等求易賜敕恐冒名而來未可輒易宜令鎮廵官勘實如無職事亦如亦如:影印本亦字不明晰。老鼠乃留例詔如議仍令大通事省諭各夷知之 
  9. 《武宗毅皇帝實錄》 107. 1525. ○庚子海西塔魯木衛女直都督竹孔革等三百七十八人來朝貢馬賜宴及綵幣襲衣絹鈔有差 復除都察院右副都御史王時中原職 總理河道侍郎李瓚屢疏引疾乞休不允 翰林院侍讀湛若水言臣以經術事 陛下嘗讀易至屯否二卦屯者陰陽始交而難生君臣欲有為而未遂此則 陛下登極下詔時然也否則陰陽隔而不通內外離而不孚 陛下自視今日於此卦何如哉夫屯而不濟必至於否否而不濟則將來有不可勝言者一二年間天變地震山川崩湧人飢相食報無虛月夫聖人不以屯否之時而緩親賢之訓明醫不以深痼之疾而廢元氣之劑今元氣之劑急親賢是已願以賢大臣為之統領博求明先王之道者日侍文華講磨 聖學疏下所司 調右軍都督府掌府事鎮遠侯顧仕隆掌中府事提督三千營如故 
  10. 薛柏成 (2005). 《叶赫那拉氏家族史研究》. 吉林文史出版社. 25~48쪽. ISBN 9787807021636. 
  11. 李澍田 (1986). 《海西女真史料》. 吉林文史出版社. 285쪽. 
  12. 《滿州實錄》. 1779. cukungge de banjihangge taicu 
  13. 額騰額 (1823). 《葉赫那蘭氏八旗族譜》. 
  14. 《滿州實錄》. 1779. cinggiyanu yangginu yehei aiman be gemu dahabufi ahūn deo emte hoton de tehe manggi hadai gurun niyalma ambula dahame jihe tereci cinggiyanu yangginu enculeme beile oho 
  15. 《滿州實錄》. 1779. 明萬歷十二年寧遠伯李成梁受哈達國賄 以賜敕書為由誘清佳努揚吉努至開原關王廟並所帶兵三百皆殺之 
  16. 明史》. 1739. 北關淸佳砮、楊吉砮素仇南關。 王台沒,屢侵台季子猛骨孛羅,且藉土蠻、暖兔、慌忽太兵侵邊境。其年十二月, 巡撫李松使備禦霍九皋許之貢市。 清佳砮、楊吉砮率二千餘騎詣鎮北關謁。 松、九皋見其兵盛, 譙讓之,則以三百騎入。松先伏甲於旁, 約二人不受撫則砲舉甲起。頃之,二人抵關,據鞍不遜, 松叱之, 九皋麾使下,其徒遽拔刀擊九皋,並殺侍卒十餘人。於是軍中砲鳴,伏盡起,擊斬二人並其從騎,與清佳砮子兀孫孛羅、楊吉砮子哈兒哈麻盡殲焉。 成梁聞砲, 急出塞, 擊其留騎,ㅠ斬首千五百有奇。 余眾刑白馬, 攢刀, 誓永受約束,ㅠ乃旋師。 錄功, 增歲祿二百石, 改前廕指揮僉事為錦衣衛指揮使。方成梁之出塞也, 炒花等以數萬騎入蒲河及大寧堡。 將士防禦六日, 始出塞 
  17. 《滿州實錄》. 1779. 淸佳努子布齋揚吉努子納林布祿各繼父位 後李成梁復率兵攻克都喀尼雅罕二寨漢兵亦損傷甚多 成梁又於戊子歲率兵攻納林布祿東城失利而回, cinggiyanu beilei jui bujai yangginu beilei jui narimbulu gurun be ejelefi beile oho tereci daiming gurun i wan lii han i lii ceng liyang yehei gurun i juwe beile be wafi uthai cooha gaifi yehei gurun be dailame genefi duka niyahan gebungge juwe gašan be afame gaiha tere afara de coohai niyalma ambula koro bahara jakade uthai cooha bederehe wan lii juwan ningguci suwayan singgeri aniya lii ceng liyang geli cooha gaifi yehei gurun be dailame genefi narimbulu beilei tehe dergi hecen be kafi afame coohai niyalma ambula koro bahafi afame muterakū cooha bederehe 
  18. 閹崇年 (2006). 《努爾哈赤傳》. 北京出版社出. 291~295쪽쪽. 
  19. 《滿州實錄》. 1779. 癸巳年 九月內 葉赫國主布齋納林布祿 哈達國主蒙格布祿 烏拉國布占泰【滿泰弟也】 輝發國主拜音達哩 嫩河蒙古科爾沁國主翁阿岱莽古明安 錫伯部 卦勒察部 珠舍哩路主裕楞額 訥殷路主搜穩塞克什 九國兵馬會聚一處分三路而來 
  20. 선조실록》 189권, 만력 33년 7월 16일 무자 2번째 기사, ○平安兵使成允文馳啓: "滿浦僉使洪有義馳報: ‘據使事知譯官, 歸順胡人處, 善辭探問則 「建州 衛胡人, 或知或不知, 而北邊藩胡, 被擄於老酋來者 曰:『忽溫酋名夫者卓古, 或稱夫者漢古, 或單稱卓古、漢古, 【卓、漢二音, 胡人傳語, 或不相似而然。】 年可四十, 體中、面暫縛, 悍勇無雙。 與老ㆍ少酋、羅里等, 尋常通使講好, 而以二女妻之。 然而, 卓古與羅里, 所居地方稍近, 兩酋原爲四寸兄弟, 最爲親厚。 今次潼關之捷, 卽爲來報于老酋, 老酋使其手下可信人, 往問接戰形止, 俘獲多寡, 而時未回程。』」 僉使, 於癸未年間, 始聞鍾城有忽賊之變, 自是入寇, 殆無寧歲。 僉使欲知忽溫、如許、建州衛三酋, 連和與否, 訪問於胡人, 頗得其詳。 今之所聞, 又如此則夫者卓古之爲忽溫酋, 似爲分明。 大槪前日所聞, 如許酋 羅里ㆍ忽溫酋 卓古等, 往在癸巳年間, 相與謀曰:「老可赤本以無名常胡之子崛起爲酋長, 合倂諸部, 其勢漸至强大。 我輩世積威名, 羞與爲伍。」 不意合兵來攻老酋, 期於蕩滅之際, 老酋得諜大驚, 先使精兵, 埋伏道傍, 又於嶺崖, 多設機械, 以待。 而沿江峽路阻隘, 故敵兵不得成列, 首尾如長蛇, 而至老酋之兵, 所在放石, 兵馬塡江而死者, 不知其數後軍驚潰, 先鋒悉爲老酋所獲。 於是, 羅里兄夫者戰死, 忽酋 卓古, 亦被擒而來, 老酋解縛優待, 拘留城中, 作爲少酋女壻。 老酋欲爲遠交近攻之計, 始乃遣還卓古, 卓古雖以不殺爲感, 而其慙憤之心, 久而猶存。 今之通信, 實爲外親內忌。 羅里痛其兄夫者之死, 銳意報復, 至今兵連禍結。 三酋雖有鼎立之勢, 而其中老酋, 似爲孤危。 今者卓古爲小酋之壻, 相通締結, 不無其事。 在我防備, 不可小忽。’"
  21. 《太祖武皇帝實錄》. 1636. 太祖曰: 「爾眾無憂,我不使汝等至於苦戰。 吾立險要之處, 誘彼來戰, 彼若來時, 吾迎而敵之, 誘而不來, 吾等步行, 四面分列, 徐徐進攻。 來兵部長甚多, 雜亂不一, 諒此烏合之眾, 退縮不前, 領兵前進者, 必頭目也, 吾等即接戰之, 但傷其一二頭目, 彼兵必走。 我兵雖少,並力一戰,可必勝矣。」 次日平明起兵。 夜黑兵先攻黑機革城未下, 是日又攻, 時太祖兵到, 陣於古勒山險要之處, 與黑機革城相對, 令諸王大臣等各率固山兵分頭預備。 布陣已完, 遣厄一都領兵一百挑戰, 夜黑見之遂不攻城, 收兵來敵。 滿洲兵一戰殺九人,夜黑兵稍退。 有布戒、 金台石及廓兒沁三貝勒, 領兵合攻一處,時布戒先入, 所騎之馬被木撞倒, 有滿洲一卒【名吾談】, 即向前騎而殺之, 其兵大敗。 夜黑貝勒等見布戒被殺, 皆痛哭, 一其同來貝勒等大懼, 並皆喪膽, 各不顧其兵, 四散而走。 明安馬被陷, 棄鞍赤身, 體無片衣, 騎驏馬脫出。 太祖縱兵掩殺, 屍滿溝渠, 殺至哈達國釵哈寨南吾黑運之處。 是夜結繩攔路,殺敗兵甚眾。 
  22. 《太祖武皇帝實錄》. 1636. 丁酉年,夜黑、兀喇、哈達、輝發, 同遣使曰: 「因吾等不道, 以至於敗兵損名, 今以後, 吾等更守前好,互相結親。」 於是夜黑布羊古妹欲與太祖為妃,金台石女欲與太祖次子帶善貝勒為妻。 太祖乃備鞍馬盔甲等物以為聘禮,更殺牛設宴, 幸白馬削骨, 設酒一杯, 肉一碗, 血土各一碗, 插血會盟。 四國相繼而誓曰: 「自此以後,若不結親和好,似此屠牲之血, 蹂踏之土, 剮削之骨而死。 如踐盟和好, 食此肉, 福壽永昌。」 誓畢,太祖亦誓曰: 「汝等應此盟言則已, 不然, 吾待三年, 果不相好,必統兵伐之。」 后蒙古得罪, 太祖命木哈量伐之,獲馬四十匹, 時納林卜祿背盟, 將所獲盡奪之, 仍擒木哈量送與蒙古。 又將金台石之女與蒙古胯兒胯部戒沙貝勒結親。 其布占太亦因與夜黑通,將滿太妻都都庫氏所玩銅錘,遣使送與納林卜祿。 又將滿洲所屬斡兒哈部內按褚拉庫、內河二處酉長落吞、剛石吞、旺吉諾三人許獻夜黑, 請其使而招服之。 
  23. 《太祖武皇帝實錄》. 1636. 是年,中宮皇后疾篤, 思母一會, 太祖遣人至夜黑往請, 后兄納林卜祿阻之, 止令家人南太來。 太祖曰: 「我未獲罪於舅,前掠我護卜插寨,后復率九國兵來侵我, 汝夜黑、哈達、兀喇、輝發, 因前加兵侵我, 曾自任其非, 各許互相結親, 宰白馬已當天盟誓, 今汝夜黑背前盟, 將我所聘之女另與蒙古, 今爾妹病篤永訣之際, 欲母一見, 汝不容相會, 是與我斷好矣。 既如此, 我何必諱言, 自今後, 兩家已成敵國, 我將築城汝地, 日為仇殺。」 言訖, 令南太回。 九月內, 中宮皇后薨。 后姓納喇, 名孟古姐姐, 乃夜黑楊機奴貝勒之女, 年十四適太祖。 其面如滿月, 丰姿妍麗, 器量寬洪, 端重恭儉, 聰穎柔順, 見逢迎而心不喜, 聞惡言而色不變, 口無惡言, 耳無妄聽, 不悅委曲讒佞輩, 吻合太祖之心, 始終如一毫無過失。 太祖愛不能舍,將四婢殉之, 宰牛馬各一百致祭, 齋戒月余, 日夜思慕痛泣不已, 將靈停於院內, 三載方葬於念木山。 於是太祖恨夜黑不令母子相會之仇,遂於甲辰年正月初八日率兵往攻。 十一日,至夜黑國二城,一曰張,一曰阿氣郎,俱克之,收二城七寨人畜二千餘,即班師。 
  24. 《太祖武皇帝實錄》. 1636. 太祖遣使如夜黑國,言: 「布占太陣中被擒應伏誅, 吾養之, 連妻以三女, 因與我為仇, 故怒而征之, 乃破其國, 身投汝地, 當獻與我。」 如此遣使三次, 夜黑國金台石、布羊姑貝勒不與。 太祖於九月初六日, 領兵四萬征夜黑。 時有逃者, 將聲息預聞於夜黑,夜黑遂收張、吉當剛二處部眾, 獨兀蘇城有痘疫, 未曾收去, 太祖兵至, 圍兀蘇城, 招諭之曰: 「城中軍民, 降則已, 不然必攻取之。」 城中人曰: 「若養之則降,況汝師眾如林, 不絕如流, 盔甲鮮明, 如三冬冰雪, 吾等焉敢抗拒?」 言訖, 守將散談、胡石木二人開門出降, 叩見。 太祖以金盔賜酒, 將所戴東珠金佛帽並衣賜之。 其張城、吉當剛城、兀蘇城、押哈城、黑兒蘇城、何敦城、胯布七拉城、俄及塔城, 大小共十九處, 盡焚其房谷, 遂收兀蘇降民三百戶而回。 是時, 金台石、布羊姑使大臣譖太祖於萬曆皇帝曰:「哈達、輝發、兀喇已被盡取矣, 今復侵吾地, 欲削平諸部, 然後侵汝大明, 取遼陽為都城, 開原鐵嶺為牧地。」 萬曆皇帝信之, 遣使來謂太祖曰: 「自今汝勿侵夜黑國,若肯從吾言, 是存我體統, 若不從吾言, 后必有侵我之日。」 遂遣游擊馬時楠、周大歧, 帶槍炮手一千, 衛夜黑二城。 太祖聞之, 修書曰:「吾國興兵, 原為夜黑、哈達、兀喇、輝發、蒙古、實伯、刮兒恰九國, 於癸巳年會兵侵我, 上天罪彼, 故令我勝。 於時, 殺夜黑布戒, 生擒兀喇布占太。 至丁酉年, 復盟, 宰馬歃血, 互結婚姻, 以通前好。 后夜黑負盟, 將原許之女悔親不與,布占太乃吾所恩養者, 因與我為仇, 伐之, 殺其兵, 得其國, 彼身投夜黑, 又留而不發, 故欲征之。 吾與大國, 有何故乃侵犯乎?」 書畢, 親齎詣撫順所。 於二十五日, 至一曠野處, 名古勒, 卯時日出, 兩傍如門, 青紅二色祥光垂照, 隨行不已。 太祖一見, 遂率眾拜之, 其光乃止。 二十六日辰時, 至撫順所, 游擊李永芳出三裡外迎之, 馬上拱揖, 接入教軍場, 將書與之, 不移時即還。 
  25. 陸戰史硏究普及會(1967), «明と淸の決戰», 東京.
  26. 姜弘立. 《別錄》. 8월 19일 누르가치가 군마를 거느리고 가서 여허[北關]을 함락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그는 오랑캐 사이에 떠도는 말이 10월 보름 때에 요동으로 향하겠다 하더니 군사를 동원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여허로 향했던 것입니다. 여허에는 본래 두 개의 성이 상대하여 있는데, 하나는 긴타이시[金台石]가 지키고, 하나는 부양구[白羊古]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27. 満文老檔》. 1778. gintaisi beile be futa i tatame waha. 
  28. 満文老檔》. 1778. jai cimari. ahūn buyanggū beile be futa i tatame waha. 
  29. 満文老檔》. 1778. deo burhanggū beile be ujifi. ini efu amba beile de buhe. 
  30. 満文老檔》. 1778. han i mujilen umai daljakū onco ofi. yehe i beise i nenehe ehe be gūnihakū. beise ambasa be gemu ujihe. yehe i juwe hoton i amban ajigen beise be gemu ujifi. yehe gurun i ehe sain niyalma be. gemu yooni boigon be acinggiyahakū. ama jui ahūn deo be faksalahakū. niyaman hūncihin be delhebuhekū. gulhun yooni gajiha. hehe niyalmai etuhe etuku i ulhun jafahakū. haha niyalmai jafaha beri sirdan be gaihakū. meni meni booi ulin tetun ai jaka be. gemu meni meni ejen tomsome bargiyafi gaiha. 
  31. 世子侍講院. 《瀋陽日記》 6. 
  32. 弘昼等 (2002). 《八旗满洲氏族通谱》. 辽海出版社. 280쪽. ISBN 9787806691892. 
  33. 金啓孮,《滿族歷史與文化簡編》, 327쪽
  34. 赵力 (2012). 《《满族姓氏寻根词典》》. 辽宁民族出版社. 406쪽. ISBN 9787549702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