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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滿洲族, 만주어: ᠮᠠᠨᠵᡠ Manju) 또는 만족(중국어 간체자: 满族, 정체자: 滿族, 병음: Mǎnzú)은 퉁구스계 민족으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만주족의 선조는 말갈족여진족으로 역사적으로 발해국, 금나라, 청나라를 건설하였다.[5] 2000년, 중국에 1,068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주요 분포 지역은 동북 3성으로 7,185,46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랴오닝 성이 4,952,859명으로 가장 많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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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ᠮᠠᠨᠵᡠ
ᡠᡴᠰᡠᡵᠠ
Manchu noble ladies in 1900s.jpg
총인구
10,430,000
인구분포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10,410,585[1]
중화민국 중화민국 12,000[2]
홍콩 홍콩 1,000[3]
미국 미국 379[4]
언어
만주어, 중국어
종교
만주 샤머니즘, 불교, 중국 민간신앙, 천주교
민족계통
퉁구스족
근연민족 에벤크인, 나나이인, 오로첸인, 시버인, 우데게인
건륭제의 일등시위 후르차 바투루(만주어: ᡥᡡᡵᠴᠠ
ᠪᠠᡨᡠᡵᡠ
Hūrca Baturu) 장임보오(占音保, 만주어: ᠵᠠᠩᡤᡳᠮᠪᠣᠣ Janggimboo)
자금성에 있는 캰칭먼(乾淸門, 만주어: ᡴᡳᠶᠠᠨ
ᠴᡳᠩ
ᠮᡝᠨ
Kiyan Cing Men) 현판. 왼쪽에는 한문, 오른쪽에는 만문로 적혀 있다.
만주국의 국기

과거에는 만주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청나라 시대에 진행된 언어 전이 현상으로 인해 현재는 만주어의 사용 인구는 오히려 감소하여 소수에 불과하고, 거의 대부분 중국어를 사용한다.

현재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시버족은 건륭제 시대에 신강 영구 주둔군의 후손으로 만주팔기에 소속됐었지만 시버 쿠와란(錫伯營, 만주어: ᠰᡳᠪᡝ
ᡴᡡᠸᠠᡵᠠᠨ
Sibe Kūwaran)으로서 독자적인 군대 조직을 유지했고, 만주어와 만주 문자를 사용하였지만 완전히 만주화되지 않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목차

어원

'만주’의 어원을 밝히려는 시도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 결과 청 제국은 《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만주어: ᠮᠠᠨᠵᡠᠰᠠᡳ
ᡩᠠ
ᠰᡝᡴᡳᠶᡝᠨ  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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ᠪᡳᡨᡥᡝ
Manjusai Da Sekiyen-i Kimcin Bithe)를 편찬하면서 공식적인 견해를 만주라는 명칭이 문수보살(산스크리트어: मञ्जुश्री Mañjuśrī)에서 유래했다고 규정했다.[7]

1636년에 만들어진 《태조태후실록(太祖太后實錄)》을 순치조에 다시 베껴 쓰고 개수(改修)하여 《태종문황제실록(太宗文皇帝實錄)》의 체례에 따라 만문(滿文)·몽골문(蒙古文)·한문(漢文) 3종의 문본으로 나누어 쓰되, 삽도를 없애고 개칭한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과 《태조태후실록》을 근거로하여 1779년에 편찬된 청 제국 역대 왕조의 실록 중 오직 만문(滿文)·몽골문(蒙古文)·한문(漢文) 3종의 문자가 한 체로 모아져 있고, 또 삽도(揷圖) 82폭까지 덧붙여 《만주실록(滿洲實錄, 만주어: ᠮᠠᠨᠵᡠ ᡳ
ᠶᠠᡵᡤᡳᠶ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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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ju-i Yargiyan Kooli)》[8]에는 명나라가 만주를 오인하여 건주(建州)를 발음이 결과라고 하였다.[9][10]

만주족의 직계조상이 기왕에 흑수말갈(黑水靺鞨)로 된 이상, 그 추장은 "대막불만돌(大莫拂瞞咄)"이었다. 자의상의 해석으로는 대막불(大莫拂)은 다마파(大馬法, 만주어: ᡩᠠᠮ
ᠠᡶᠠ
Da Mafa)이니, 대부(大斧)·대로(大老)·노옹(老翁)·노조(老祖)라는 뜻이요, 만돌(瞞咄)은 추장이란 뜻이다. 역사자료를 참고하여 '대막부만돌(大莫拂瞞咄)'을 풀이하자면 곧 부락연맹의 대추장(大酋長)이란 뜻이다.[11] 만돌(瞞咄)은 Mandu를 나타내는데, 모두 추장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주라는 명칭도 이 만돌과 관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발해의 성(姓)인 대씨(大氏)도 이와 관계 있는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12][13]

일각에서는 만주가 man과 ju가 의 조합어라고 여기는데, man은 강경하다는 의미의 만주어 망아(만주어: ᠮᠠᠩᡤᠠ Mangga), ju는 강한 활을 의미하는 주(만주어: ᠵᡠ ju)이다.[14] 또, 파저강[15]의 다른 이름인 마저강(馬猪江)의 '마저'의 변음이라느니, 파저강의 또 다른 이름 포주강(蒲州江)의 포(蒲)자가 만(滿) 자와 비슷해서 오독한 결과라느니[16] 하는 수십개의 설이 분분하다.[17]

역사

후금의 두번째 군주인 홍 타이지가 1635년 음력 10월 13일, 조서를 내려 오랫동안 자신들을 지칭해온 용어였고, 누르가치가 통치하던 시기에도 건주여진을 가르키거나 해서여진까지 포함하는 여친의 총칭으로 빈번하게 된 용어인 주션(만주어: ᠵᡠᡧᡝᠨ Jušen)이라는 족명을 자신들과 상관없는 시버의 초오 머르건(만주어: ᠴᠣᠣ
ᠮᡝᡵᡤᡝᠨ
Coo Mergen)[주 1]의 후예를 이르는 망령된 족명이라 왜곡하여 금지하고, 족명을 만주(滿洲, 만주어: ᠮᠠᠨᠵᡠ Manju로 개칭했다. 이후 유권점 만주문자로 기록된 사료들에서 여진을 주션 대신 뉘즈(만주어: ᠨᡳᠣ‍ᡳ
ᡷᡳ
Nioi Jy)로 기재했다.

원문
天聰九年十月庚寅諭曰 「我國原有滿洲、哈達、烏喇、葉赫、輝發等名。向者無知之人,往往稱爲諸申。夫諸申之號乃席北超墨爾根之裔,實與我國無涉。我國建號滿洲,統緖綿遠,相傳奕世。自今以後,一切人等,止稱我國滿洲原名,不得仍前妄稱。」

— 청태종문황제실록

해석
천총(天聰) 9년(1635년) 10월 경인일에 유지(諭旨)하여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원래 만주와 합달 및 오라엽혁 및 휘발 등의 이름이 있었다. 이전에는 무지한 자들이, 왕왕 제신(諸申)이라 칭하였다. 대저 제신(諸申)의 호는 곧 석북(席北)의 초묵이근(超墨爾根)의 자손이니, 실로 우리 나라와 더불어 관계가 없다. 우리 나라는 만주(滿洲)라는 국호를 만들어, 한 갈래로 이어온 계통의 이어져 내려온 시간이 오래되었고, 혁세(奕世)에 대대로 서로 전하였다. 이제부터 이후, 일체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원래 명칭인 만주라 칭해야 할 것이며, 거듭 전의 망칭을 얻지 못하게 할지어다."

숭덕제가 밝힌 개칭의 이유는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이고, 그의 진짜 의도는 밝혀진 것이 없다. 일반적으로 주션이라는 용어의 이미가 변했기 때문에 이 명칭을 계속 족명으로 사용하기 어려웠다는 주장이 있는데, 본래 주션은 사회의 상류 계층인 '이르건(만주어: ᡳᡵᡤᡝᠨ Irgen)'과 노예인 '아하(만주어: ᠠᡥᠠ Aha)'의 중간에 있는 일반 인민을 가르키는 용어이기도 했고, 누르가치의 정복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포로가 된 수많은 일반 백성인 '주션'이 노예화되면서 주션이라는 의미가 담기게 되었으며, 따라서 만주로 족명을 개칭했다고 한다.[18]

하지만, 숭덕제여진족, 몽골족, 한족이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통일 전 다양하게 존재했전 여진을 융합시켜야 하는 이중의 고민을 맞게된 상황을 고려하면, 숭덕제는 주션이라는 명칭을 폐기함으로써 건주여진해서여진의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을 새로운 이름 이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는 학설도 있고[19], 일찍이 말갈 시대부터 관직 또는 족장의 칭호로서의 요소가 있었던 만주에서 유래한 이만주의 이름은 건주연맹의 적법한 족장으로서 그의 지위를 보여주는 작위였는데, 누르가치의 조상들이 1400년대에 이만주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후에, 명나라가 만주라는 작위를 전체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인했고 이후에, 숭덕제의 정책에 의해 법제화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학설도 있으며, 말갈 시대부터 족장을 가르키는 고대의 용어와 약간의 어원적 연관성이 있었던 만주를 국가 내의 지배민족 규정을 위해 차용했다는 학설도 있다.[20]

새로 만들어진 만주는 과거의 주션이 이름만을 달리 한 것이 아니었다. 만주는 팔기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그에 소속된 주션, 즉 건주여진해서여진 그리고 동해여진의 일부를 가리켰다. 따라서 팔기에 속하지 않은 동해여진의 다수는 여진의 일부였지만 만주족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되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는 과거의 여진과 범주가 달라진, 팔기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공동체였다.[21] 만주는 과거의 여진과 범주만이 아니라 속성도 달라졌다. 만주의 업종은 채집, 수렵, 유목, 임업 등에서 전업 군인으로 변화했다. 만주는 과거의 여진처럼 문화적으로 복합적이지 않았고, 국가가 선포한 기준, 즉 혈통, 팔기에 대한 의무 등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되었다.[22]

 
왕얀 퉁기

만주족은 팔기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공동체였기 때문에, 팔기에 새로 편입되는 병력이 생기면 만주의 범위도 확장되었다. 만주팔기에 편입되는 자격이 반드시 과거의 여진인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숭덕제는 1634년부터 1640년까지 흑룡강 유역의 광대한 지역을 원정했고, 투항시킨 소론(索倫, 만주어: ᠰᠣᠯᠣᠨ Solon)[23], 어웡키, 오로촌, 다구르동해여진의 일부를 만주팔기의 일부로 편제했다. 즉 여진과 함께 북방 퉁구스 계통의 이민족이 만주로 편입된 것이다. 이 때 팔기에 편입된 이들은 “새로운 만주”라는 의미로 신만주(新滿洲, 만주어: ᡳᠴᡝ
ᠮᠠᠨᠵᡠ
Ice Manju)라고 불렸다. 이들 신만주를 제외한 본래의 만주는 자연스럽게 구만주(舊滿洲, 만주어: ᡶᡝ
ᠮᠠᠨᠵᡠ
Fe Manju)로 불리게 되었다. 만주의 외연 확장은 이후에도 일어났다. 명나라를 점령하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1644년 이후 전투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병력의 충원이 잦았고, 청 제국은 필요한 병력을 자신들의 고토인 만주지역에서 찾았다. 강희 시기인 1671년부터 1677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만주지역에서 1만명 이상의 허저와 쿠야라(庫雅喇, 만주어: ᡴᡴᡡᡟᠠᡵᠠ Kūyara)[24][25] 성인남성을 팔기로 편입시켰고[26][27], 1714년에는 삼강 유역의 허저족을 삼성협령어문을 설치하면서 팔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28] 또한, 흑룡강 유역에서 포로로 잡은 러시아인도 팔기 만주로 편입되었으며,[29] 건륭 연간의 팔기한군 출기 정책을 통틀어 한군 기인의 규모가 약 60% 감소하였을 것으로 추산되고, 그 중 절반은 출기 강제 정책의 영향으로 판단된다.[30] 더불어 위구르 무슬림과 티베트인으로 구성된 니루가 새로 조직되어 만주팔기로 편입되었다.[31] 이처럼 만주족은 필요에 따라 융통성있게 외연을 확장해갔다.[27]

청 제국의 팔기는 단지 만주로만 구성되었던 것이 아니라, 팔기만주, 팔기몽골, 팔기한군 등 세 가지 하위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좁은 의미의 만주족이란 대체로 팔기만주만을 가리키지만, 18세기 말 이후가 되면 만주족이란 곧 팔기만주, 팔기몽골, 팔기한군 등을 모두 포함하는 기인에 대한 통칭이 되었다. 20세기 초 기족(旗族)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기도 하였다.[32]

대내외적으로 체제에 대한 위협 요소가 산재하던 청 제국 말기, 만주족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주 중심 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 입헌군주제 중 중국의 현실에 적합한 입헌체제의 구성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주족 지식인 및 관료, 만주친귀(滿洲親貴) 집단이 각기 의견을 개진한 결과 군주 중심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결정하였다. 이에 만주족 지식인들은 단체 결성 및 여론 형성을 통해 자구책 마련 및 근대화를 역설하며 입헌체제에 걸맞는 ‘공민(公民)’으로의 변화를 추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쑨원의 혁명세력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청말 만주족 무인들.

신해혁명 이후 공화국 체제로 중국의 국체가 변혁되면서, 만주족은 '공화국 국민’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신해혁명은 정치체제의 비폭력적 근대화 과정이었으며, 이는 혁명세력과 만주족의 타협으로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지배층으로의 경험 위치 역량을 어느 정도 보전할 수 있었던 만주족은 각종 단체를 결성하여 자신들의 활로를 주체적으로 개척하고자 하였다. 황실 종친들은 종사당(宗社黨)을 중심으로 청 제국의 부활과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내세우며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독자세력화를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실질적인 근거지의 부재와 일본 외교정책의 변화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공화정체에 순응하고자 하는 만주족은 만족동진회(滿族同進會)를 중심으로 북양정부의 정책에 대응하여, 만주족의 정치적 지위 보장과 생계문제 해소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기지몰수(旗地沒收) 정책을 위시한 북양정부의 만주족 약화정책과 만주족의 정치권력화 실패로 인해 만주족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은 점차적으로 축소되어갔다.[33]

국민당 정권 수립 이후 만주족에 대한 의도적 방기(放棄) 정책이 지속되어 공화국 체제로의 순응을 목표하던 만주족 단체의 활동 역시 위축되었다. 그러나 만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만주족들은 팔기련의회(八旗聯誼會)로 불리는 소형 집회방식을 통해 꾸준히 자신들의 권익활동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공산당에 가담하여 몽골, 장족과 같은 소수민족으로서의 지위 확보 및 국민당 정권에 대한 투쟁에 나섰다.[33]

만주국과 국민당 정부가 모두 실패한 후,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은 1952년 국민당에 지배적이었던 한족 우월주의를 비판하면서 만주족을 소수민족으로 공식 인정했다.[34] 공산당 정부는 만주족에 대한 처우 개선을 시도했다.[35] 국민당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의 조상을 숨겨왔던 일부 만주족은 1950년대부터 만주족 캐릭터를 그의 허구적 작품에 포함시키기 시작한 작가 라오서와 같이 그들의 조상을 기꺼이 드러내게 되었다.[36]1982년에서 1990년 사이에 만주족의 공식 명수는 4,299,159명에서 9,821,180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여 중국 최대의 소수민족[37]이 되었으나, 이전에 한족으로 등록된 사람들을 만주족으로 공식 인정을 신청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장은 서류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38] 1980년대 이후 랴오닝성, 지린성, 허베이성, 헤이룽장성 등에 13개 만족 자치현이 설립되었다.[39]

1980년대 문화대혁명 이후의 개혁 이후 중국 정부와 학자, 사회 활동가들 사이에서 만주 문화와 언어의 문예 부흥은 괄목한 성과를 거두었다.[40] 이 시기 한족 사이에 관심도 확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41] 현대 중국에서 만주 문화와 언어 보존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추진되고 있으며, 만주족은 다시 한번 중국 내에서 가장 사회경제적으로 발달한 소수민족 중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42] 만주족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거의 차별을 받지 않지만, 극단적인 한족주의자들 사이에 반만주주의(Anti-Manchuism) 정서가 남아 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이 만주족에 점령당했다는 등 만주족에 대한 음모론에 동조하는 한푸운동(漢服運動) 참가자들에게 특히 흔하다. 따라서 만주족은 중화민국 통치하에서 받은 박해와는 대조적으로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있다.[43]

종족성 논의

파멜라 크로슬리(Pamela K. Crossley)는 팔기제와 기인들의 정체성 연구에 초점을 맞추어 청 제국 초기 만주, 몽골, 조선, 한족을 비롯해 여러 부족이나 종족들이 팔기에 편입될 당시에는 만주족의 정체성이 미약했고, 1630년대 청 제국의 설립과 함께 형성되었던 만주족의 정체성은 청대에 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44] 우선 파멜라 크로슬리는 만주족의 종족적 정체성이 애초부터 존재했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는 초기의 만주족은 종족 집단이라기보다는 일군의 부족에 지나지 않았으며, 만주족의 정체성은 후대에 청 황실의 통치 이념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종족이라는 용어로 초기의 만주족을 지칭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45] 반면 마크 엘리엇(Mark C. Elliot)은 만주족의 종족적 정체성은 만주족의 여러 제도에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팔기라는 군사·행정 제도가 명의 한족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바꾸어 말하면, 마크 엘리엇은 청이 만주족의 종족주권을 유지한 진정한 민족주의 제국이었다고 본 것이며, 파멜라 크로슬리는 만주족 문화나 정체성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았고, 만주족의 종족 집단이란 것은 그 국가가 성장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했다고 본 것이다.[46][47] 윌리엄 T. 로(William T. Rowe)는 만주족의 종족 정체성은 유전학적으로 운명 지어진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불명확하고 협상될 수 있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청의 정복 조직'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몽골인, 한족 군인 그리고 만주족 등과 같은 종족 정체성을 그들의 구성원에게 배정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러한 배정은 생물학적 실체보다는 정치적 편의에 입각한 것이라는 평가이다.[48]

 
말을 타고 사냥하는 건륭제. 건륭제는 만주의 전통에 커다란 가치를 두고, 만주어, 승마술, 궁술, 그리고 사냥을 보전하고, 팔기 내에서 종족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만주 백성들의 지리적·계보적 기원을 밝혀내고, 종족적인 서사시 《성경부》를 저술하기 위해 노력했다.[49] 만주인의 개념은 그의 의식 형상 위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45]

크로슬리는 태평천국 시기에 많은 만주인 공동체들이 파괴되고 19세기 말 주방팔기에 대한 청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이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한 이후, 일부 만주족 공동체가 계속 존재하고 점차 자신들을 ‘만주족’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만주족의 종족적 실체에 대한 증거로 볼 수 있지만, 그 이전에는 국가가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의 기준, 예를 들면, 만주어를 말하고 쓰는 것, 무술을 익히는 것, 소집되고 봉급을 받으면서 군대에 복무하는 것, 주방 안에 거주하는 것을 강력하게 강제했고, 기인들 대부분이 이런 요구를 회피하거나 혹은 거부할 수 없었다는 증거는 무수히 많으며, 이를 실천할 경우에는 포상도 주어졌기 때문에 종족적·공동체적 연대감이 존재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나아가 그러한 상황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결국 이러한 속성이 사라지고 일부 만주족 공동체가 자신들의 문화적·사회적 에너지를 지켰을 때에만 만주족은 종족으로서의 특질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50]

문화

만주족의 민속문화에는 만주 지역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축적된 애니미즘, 샤머니즘을 비롯한 문화원형이 담겨 있다.[51]

성씨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满洲氏族通谱, 만주어: ᠵᠠᡴᡡᠨ
ᡤᡡᠰᠠᡳ
ᠮᠠᠨᠵᡠᠰᠠᡳ
ᠮᡠᡴᡡᠨ
ᡥᠠᠯᠠ
ᠪᡝ
ᡠᡥᡝᡵ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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ᠪᡳᡨᡥᡝ
Jakūn Gūsai Manjusai Mukūn Hala be Uheri Ejehe Bithe
)》

하라(哈拉, 만주어: ᡥᠠᠯᠠ Hala)는 본래 혈연관계를 가진 동일 성씨의 각 가정으로 구성된 씨족 공동체였다. 한 하라에 속한 사람들은 동일한 씨족명칭을 가지는데, 동일한 선조를 숭배하고, 종족의 규정을 준수해야 하며, 씨족 내의 혼인을 엄격히 금한다.[52] 무쿤(穆昆, 만주어: ᠮᡠᡴᡡᠨ Mukūn)은 가족 공동체를 말하는데, 하나의 하라는 다수의 무쿤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의 무쿤은 두 개 이상의 하라에 동시에 속할 수 없다. 또한 무쿤은 자급자족의 독립경제 단위이며, 생산수단을 공유하여 공동생산, 공동소비를 했다.[53] 최초의 하라와 무쿤은 뚜렷하게 구분되었는데 이후 씨족 조직이 와해됨에 따라 하라는 점차 성씨로 변하였다. 비록 씨족이 성씨로 변하였지만 사람들은 하라라는 명칭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가족인 무쿤 앞에 하라를 덧붙여 하라무쿤(만주어: ᡥᠠᠯᠠ
ᠮᡠᡴᡡᠨ
Hala Mukūn)이라는 말이 출현하게 되었다.[54] 즉, 금나라 여진족의 성씨를 계승한 하라는 씨족에서 만주족의 성씨를 의미하게 되었고,[55] 무쿤은 씨족이 아닌 성씨의 지파를 표시하는 명칭이 되었다.[56] 사실 무쿤은 하라와 무쿤 두 개의 용어 중에서 더 오래된 단어이고, 원래 혈연집단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단어가 아니었다. 하라는 후일 무쿤의 연맹을 지칭하게 되었고, 청대에 무쿤은 종족 또는 확대된 가정을 가르키는 일번적인 단어가 되었다. 반면 하라는 한 종족의 이름을 공유한 사함들 전체를 언급할 때 드물게 사용하는 단어였다. 여진어의 모극(謀克, 여진어:   Moumukə)는 근세 만주어 무쿤의 원형이었고, 협동하는(후대에는 친족) 집단을 의미했다.[57]

건륭 연간에 편찬한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满洲氏族通谱, 만주어: ᠵᠠᡴᡡᠨ
ᡤᡡᠰᠠ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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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kūn Gūsai Manjusai Mukūn Hala be Uheri Ejehe Bithe
)》에 의하면 만주씨족은 무려 1114개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이름난 가문으로는 구왈갸 하라(瓜爾佳氏), 뇨후루 하라(鈕祜祿氏), 슈무루 하라(舒穆祿氏), 타타라 하라(他塔喇氏), 교로 하라(覺羅氏), 나라 하라(那拉氏)가 있다.[58]

역사상, 여진족은 한성(漢姓)을 사용하는 관습이 있었다. 금나라 때 "완안은 왕(王), 오고론(烏顧論)은 상(商), 흘석렬(紇石烈)은 고(高), 여해렬(女奚烈)는 낭(郎), 포찰(蒲察)은 이(李)"라는 기록이 있다.[59] 그러나 청 제국은 만주족 성씨가 한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주 성씨에서 한족식 성을 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발각되면 군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60]

청대 만주족은 일상에서 자신들의 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이름만을 사용했다. 심지어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만주족의 성명을 기록하거나 불러야 할 때에도 역시 성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이름만을 기록하거나 불렀다. 청대에 만주족의 성은 족보에만 기록되어 전해지는, 박제화 된 상징이었다.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은 원인은, 그들이 국가를 세우기 전에 씨족 단위로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 거주하고 그들의 생활 범위가 그 집단을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했던 당시의 영향이 청대 내내 지속된 때문이었다.[61]

이후 팔기제를 통해 대대적으로 여진의 조직을 재편했어도 장구한 시간을 존속해온 씨족은 살아남았다. 그 원인은 팔기제의 기층 단위인 니루(만주어: ᠨ᠋ᡳᡵᡠ Niru)를 편제할 때, 과거의 하라무쿤이나 가샨(만주어: ᡤᠠᡧᠠᠨ Gašan)을 단위로 했기 때문이었다. 누르가치의 정복전에 강력히 저항하다 복속된 여진인은 기존의 조직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구성원을 산산이 흩트려서 여러 니루에 배속시켰지만, 그 외에 다수의 여진인은 과거의 혈연조직과 지연조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니루로 편입되었다. 하나의 혈연집단의 사람 수로 하나의 니루를 만들 수 있으면 그렇게 했고, 대개 씨족장인 하라다(姓長, 만주어: ᡥᠠᠯᠠ
ᡩᠠ
Hala Da)나 무쿤다(族長, 만주어: ᠮᡠᡴᡡᠨ
ᡩᠠ
Mukūn Da)를 니루의 수장인 니루어전(牛彔额真, 만주어: ᠨ᠋ᡳᡵᡠᡳ
ᡝᠵᡝᠨ
Niru-i Ejen)으로 임명했다. 하나의 지연집단 내에 몇 개의 혈연집단이 있고 이를 합쳐서 하나의 니루를 만들면 대개 촌락장인 가샨다(鄉長, 만주어: ᡤᠠᡧᠠᠨ
ᡩᠠ
Gašan Da)를 니루어전으로 임명했다. 다시 말해 씨족은 여진인이 팔기로 편제된 후에도 그 영향을 받지 않고 니루 속에서 존속되었다. 결국 팔기제가 만들어진 후에도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나지 않은 것이다.[61]

청대 모든 니루에는 니루를 총괄한 니루어전 외에 씨족사회의 제도였던 하라다가 존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해혁명 후에도 일시 지속되었을 정도로 생명력이 질겼다. 청대에 기인이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니루어전이나 하라다에게 보고하고 등기했다. 만주족은 엄격한 족외혼제를 유지했다. 시간이 지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일족(만주어: ᡠᡴᡠᠨ Uksun)의 사람들이 서로를 모르게 되었고 전적으로 하라다의 성씨(姓氏)에 대한 지식에 의존했으며 결혼할 때에 반드시 하라다의 소개에 의존하여 족내혼의 발생을 방지하였다. 만주족은 청 제국이 망한 때까지 전원이 니루 내에 있었다. 즉 씨족시기부터 전해내려 온 혈연집단과 지연조직 내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청대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은 원인이었다.[61]

성명

수명성

 
자라풍아(扎拉丰阿, 만주어: ᠵᠠᠯᠠᡶᡠᠩᡤᠠ Jalafungga)

만주족에게는 일상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는 관행과 이름의 첫 음을 마치 성처럼 사용하는 독특한 관행이 있었다. 예컨대 청 중기의 관원인 나단주(那丹珠, Nadanju)는 사람들로부터 나대인(那大人)이라고 불렸다. ‘나대인’이라는 호칭을 보면 그의 성이 ‘나’인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성은 ‘교르차(만주어: ᡤᡳᡠᡵᡮᠠ
ᡥᠠᠯᠠ
Giorca)’였다. 마찬가지로 동치 연간의 고관이었던 뇨후루씨(鈕祜祿氏, 만주어: ᠨᡳᠣᡥᡠᡵᡠ
ᡥᠠᠯᠠ
Niohuru Hala)의 자라풍아(扎拉豐阿, 만주어: ᠵᠠᠯᠠᡶᡠᠩᡤᠠ Jalafungga)는 자대야(扎大爺)로 불렸다. 이름의 첫 음인 ‘자’가 ‘대야(大爺)’라는 존칭의 앞에 붙어 마치 성처럼 쓰였던 것이다. 청 제국의 마지막 군주 푸이(溥儀, 만주어: ᡦᡠ ᡳ Pu I)의 동생인 푸계(溥傑, 만주어: ᡦᡠ ᡤᡳᠶᡝ Pu Giye)는 말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푸 라오[溥老]라고 불렸다.[62]

푸계는 본래의 성인 ‘아이신 교로(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Aisin Gioro)’보다 김(金, Jīn)이라는 한성(漢姓)을 주로 썼으나[63], 주위 사람들은 그를 ‘김로’ 혹은 ‘애신각라로(愛新覺羅老, Ài xīn jué luó lǎo)’로 부르지 않고, 이름의 첫 음인 ‘푸(溥, 만주어: ᡦᡠ Pu)’를 성처럼 불렀던 것이다.[64]

만주족의 이런 독특한 방식의 관행을 중국 학계에서는 ‘수명성(隨名姓)’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수명성’의 관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1644년 만주족이 중국 내지에 진입한 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만주족이 본래의 성을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으면서, 성을 관직이나 존칭의 앞에 두어 부르는 한인의 관습에 적응한 결과 ‘수명성’의 관행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단, 수명성은 관행이었을 뿐 대대로 계승되어야 할 규범적인 강제력이 부가된 것은 아니었다.[64]

이중 이름

수명성이 만주족의 한족 지배 과정에서 나타난 관행이었다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여진족이 국가를 수립하고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가기 전까지 나타났던 ‘이중(二重) 이름’의 작명 관행이 있다. 이중 이름이란 두 개의 단어가 조합되어 만들어지는 이름이다. 일례로 아이신 교로 신화상 조상인 부쿠리 용숀(博克里雍順, 만주어: ᡴᡡᡵᡳ
ᠶᠣᠩᡧᡠᠨ
Bukūri Yongšon)부터 이중 이름이다. 이 이름의 의미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또 다른 사례로 만주족의 샤먼의 이야기인 《니샨 사만이 비트허(만주어: ᠨᡳᡧᠠᠨ
ᠰᠠᠮᠠᠨ ᡳ
ᠪᡳᡨᡥᡝ
Nišan Saman-i Bithe)》에 나오는 아이의 이름인 서르구다이 퍙구(色爾古岱篇古, 만주어: ᠰᡝᡵᡤᡠᡩᠠᡳ
ᡶᡳᠶᠠᠩᡤᡡ
Sergudai Fiyanggū)가 있다. 퍙구(篇古, 만주어: ᡶᡳᠶᠠᠩᡤᡡ Fiyanggū)는 ‘막내’라는 뜻이고, 서르구다이는 의미를 알 수 없다. 이 아이의 아버지 이름은 발두 바얀(만주어: ᠪᠠᠯᡩᡠ
ᠪᠠᠶᠠᠨ
Baldu Bayan)인데, 바얀은 ‘부자(富者)’라는 의미이고 발두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누르가치가 거병한 초기에 그의 숙적이었던 니칸 와이란(만주어: ᠨᡳᡴᠠᠨ
ᠸᠠᡳ᠌ᠯᠠᠨ
Nikan Wailan)도 이중 이름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니칸(만주어: ᠨᡳᡴᠠᠨ Nikan)은 ‘한인(漢人)’을 가리키는 만주어이고, 와이란은 한어인 외랑(外郎)이 만주어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와이란은 그 원형인 ‘외랑(外郞)’의 의미를 볼 때 관직명처럼 보이지만 인명으로도 사용되었다. 해서여진 하다(哈達, 만주어: ᡥᠠᡩᠠ Hada)의 창시자인 왕주 와이란(旺住外蘭, (만주어: ᠸᠠᠩᠵᡠ
ᠸᠠᡳ᠌ᠯᠠᠨ
Wangju Wailan) 역시 ‘와이란’이 포함된 이중 이름이었다.[65]

이러한 이중 이름은 만주족의 초기 역사에서 나타나며 17세기 전기에 국가를 수립한 후부터는 점차 사라진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이중 이름은 만주족의 작명 관행이라기보다 여진족의 관행이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이중 이름이 만주족의 국가 수립과 길항관계에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66]

언어

편의상의 여진어는 여진족이 활동했던 12~16세기까지 기록된 자료에 나타난다. 여진어와 만주어 두 언어는 아마 방언적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진어와 만주어를 비교해보면 이 두 언어는 많은 부분 닮아 있어서 여진어를 만주어의 직전 선대 언어라고 보아도 좋으며, 16세기 후반 시작한 만주어를 좁은 의미의 만주어라고 한다면, 12~16세기의 여진어를 포함하여 만주 지역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전 언어들을 넓은 의미의 만주어라고 부를 수 있다.[67]

19세기 이후, 대부분의 만주인들은 표준 중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만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68] 현대에는 만주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인구는 수천 명으로 극히 적고[69],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더욱 적어 약 10명에 불과하다.[70] 흑룡강성 푸위현 다워얼쭈-만쭈-커얼커쯔쭈향 싼자쯔촌(三家子村, 만주어: ᡳᠯᠠᠨ
ᠪᠣᠣ ᡳ
ᡤᠠᡧᠠᠨ
Ilan Boo-i Gašan)에 살고 있는 70~80대의 고령의 노인들이 아직도 꽤 유창한 만주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만주어를 모국어로 하는 마지막 세대다. 이들은 1680년경 러시아가 침입하여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이주해온 만주인의 후손들이다.[71] '싼자쯔'란 명칭은 이 마을의 주요 성씨가 지씨(計氏, 만주어: ᡤᡳᠪᡠᠴᡠ
ᡥᠠᠯᠠ
Gibucu Hala), 타오씨(陶氏, 만주어: ᡨᠣᡥᠣᡵᠣ
ᡥᠠᠯᠠ
Tohoro Hala), 멍씨(孟氏, 만주어: ᠮᠣᠯᠵᡝᡵᡝ ᡥᠠᠯᠠ Moljere Hala)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72][73]

1980년대부터 정부, 학자, 사회 활동 사이에서 만주어의 부활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74] 최근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정부의 도움으로 많은 학교들이 만주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75][76] 중국 여러 곳에서 만주어를 구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만주어를 자유롭게 가르치는 만주족 자원봉사자도 있다.[77][78][79][80] 수천 명의 비만주족도 이러한 플랫폼을 통해 만주어를 익혔다.[81][82]

현재 시베리아만주 일대에 남아 있는 어원어, 어웡키어, 솔론어, 네기달어, 나나이어, 윌타어, 울치어, 우디허어[주 2], 오로치어 등도 만주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들이지만, 이 언어들도 거의 절멸되었거나 절멸 위기에 처해 있다. 다만 중국 서부 신장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버어는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만주어의 방언으로 볼 수 있다.[83] 18세기 청 제국은 방언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문화적인 비공식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정책을 취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만주어 자체는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부수적인 방언이 있었다.[20]

만주어는 특히 한국어와 아주 가까운 언어다. 만주어가 한국어와 유사한 것은 현재까지 약 250개 어휘가 있고, 이는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더 많이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84]

의상

만주족의 복식은 여진인들의 전통을 답습하여 초기에는 백색이었다.[85] 수렵 생활의 필요에 따라 남녀 모두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으며, 입관 이전 시기에는 가죽을 위주로 이용했으나, 중국을 정복한 뒤에 단, 클립, 가죽, 면 네 가지 재질로 구분되었다. 만주족의 포복의 특징은 주로 라운드넥, 좁은 소매, 옷자락 꼬임, 옷의 연결, 좁은 소매 앞쪽에 반달 모양의 소매를 연결한 것으로, 말발굽을 닮았다. 평시에는 소매를 걷어올리고 작전을 수행하거나 사냥을 할 때 내려놓고 겨울에는 추위를 막는 역할도 한다. 여자의 두루마기 스타일은 남자들과 대체로 같지만 장식이 많이 있다. 만주족은 보통 두루마기 위에 배꼽까지 오는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기마작전 때 입었기 때문에 두루마기라 불렀고, 민소매는 말집이나 조끼라고 불리며, 주로 팔기군의 군복이었다.[86] 중국 동북의 만주족이 모여 사는 지역이나 일부 전통 명절의 경축 행사에서도 여전히 전통 의상을 입은 만족 사람이 흔하다.[87]

다른 북방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만주인 남자의 전통 머리 스타일도 땋은 머리였다. 차이점은 만주족 머리 스타일은 머리 뒷 부분만 남기고 주위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른 뒤 머리채를 땋는다는 점이다.[88] 만주족의 변발은 청의 치발령에 따라 중원의 다른 민족에게까지 확산됐다.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 변발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만주족 여자들도 어린 시절에는 남자처럼 머리를 깎았고, 양식도 대체로 같았다. 성인이 된 후,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는데, 모양이 매우 많으며, 머리가 두 개인 것이 그 중 가장 보편적이다. 머리를 머리 위로 묶고 두 가닥으로 나눠 한 쪽씩 상투를 땋은 뒤 뒤쪽 여발을 연미형의 긴 쪽 상투로 만들어 평소 가로 약 30cm, 세로 2-3cm 크기로 꽂는다. 중요한 경우에는 깃발을 달아 길이가 약 30cm, 너비가 10cm 정도 되고, 대부분 청소단 등이 된다. 함풍 이후 두 개의 머리 모양은 점점 높아지고, 연미도 점점 커져서, 새로운 머리인 '대래날개'로 변하게 되었고, 대래날개는 마치 여섯 번 부채면을 두른 관으로, 대부분 구리를 뼈대로 하였다.[87]

 
괴피모를 쓰고 아이를 엎고 있는 미국의 중국인 남성.

만주족은 모자를 쓰는 전통이 있어 어릴 때부터 모자를 썻다.[89] 계절에 따라 따뜻한 모자, 차가운 모자 두 종류가 있는데, 모자 꼭대기에는 붉은 술이 있다.[90] 중국을 정복한 후 명의 육합모를 흡수했는데, 속칭 '과피모(瓜皮帽)'라고 한다. 그 밖에도 펠트 모자, 풍모, 피모(皮帽), 이투(耳套) 등 다양한 형태의 모자가 있다. 신발의 경우, 청대 만주족 남성 착화, 천신 또는 짚신[91], 동북 지방에서는 올랍(靰鞡)이라는 신발을 신는데, 그것은 풀과 소가죽 또는 사슴 가죽의 틈새를 이용해 만들어 졌다.[92] 만주족 여자의 신발은 보통 바닥과 바닥, 두 종류가 있는데, 플랫은 대부분 각구, 겹, 면이 있고, 높은 신발은 주로 밑창에 따라 말발굽, 화분, 원보저로 나뉜다. 또 하나의 슬립온이 있는데, 수놓은 신발이라고도 하는데, 굽 면에서는 기화보다 얇아 걷기 편하다.[93]

만주족 여자들은 '일이삼겸(一耳三钳)'의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데,[94] 건륭 연간에 일이오겸으로 발전하였다.[95] 오늘날까지도 고령의 만주족 여성들에게서 일이삼겸의 차림새를 만나볼 수 있다.[96]

수렵

부족 시기 여진인의 생산은 지역에 따라 상이하지만, 대체로 농경과 수렵과 어로와 채집을 병행하는 혼합 경제였고, 그 가운데서도 수렵이 중요했다. 17세기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수립한 시기부터 점차 농경의 비중이 커져 갔지만, 수렵은 여전히 여진인의 주요 산업이었다.

국가를 수립한 후에도 수렵은 생산활동의 일부로서 중요했고, 군사훈련의 방식으로서도 중요했다. 또한 부족 시기를 막 벗어나 신생 국가의 통치자가 된 누르하치와 지배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일환으로서도 중요했다.[97]

누르가치는 여진을 통일한 후 농경을 장려하고 확대해나갈 때도 수시로 수렵을 주도하여 시행했다. 더나아가 홍 타이지는 1630년에 심양 일대에 성경위장(盛京圍場)이라고 불린 대규모 위장(圍場, 만주어: ᠠᠪᠠ
ᡥᠣᡳᡥᠠᠨ
Aba Hoihan)을 설치했다. 성경위장은 그 내부에 작은 수렵장 백여 곳이 산포해 있었고, 개간이나 백성의 허가받지 않은 수렵이 엄금되었다. 성경위장을 설치한 목적은 그곳에서 잡은 짐승의 고기와 가죽을 왕실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또한 수렵을 통해 팔기병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려는 전략적 목적도 크게 작용했다.[98]

무란위장

1681년 강희제는 카라친과 옹니우트의 수령들로 부터 수렵 터를 헌납받았다. 무란위장이 설립된 것이다. 무란위장의 규모는 둘레가 1,300여리(10리=5km), 동서 300여리, 남북 200여리였다. 위장은 동쪽으로 카라친 영토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차하르, 남쪽으로는 승덕부(承德府), 북쪽으로는 바린과 케식텐에 접하고, 동북으로는 옹니우트와 접했다. 이 지역은 산림이 울창하고 작은 하천들이 밀집되어 흐르고 온대기후에서 서식하는 수많은 동식물이 분포했다. 무란위장의 주위에는 40개의 감시초소(카룬)를 설치해서 일반 백성들의 접근을 막았다. 무란위장은 지형과 동식물의 분포를 기준으로 67개(나중에는 72개)의 작은 사냥터로 다시 세분되었다. 청 제국의 군주는 엄청난 규모의 수렵단을 이끌고 거의 격년으로 이곳에 와서 대규모의 포위수렵을 시행했다.[99]

무란위장의 포위수렵에 대해서는 아이신 교로의 종실인 조련(昭槤)의 《소정잡록(嘯亭雜錄)》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조련에 의하면 무란위장의 수렵은 일반적으로 내지의 만주족 뿐만 아니라 무란위장과 가까운 카라친 등에서 동원된 천여명의 몽골인도 참여했다. 포위수렵은 전 인원을 5개의 부대로 분할하여 길게 날개를 펼친 형태로 진행되었다. 5개 부대의 가운데에는 중군(中軍, 만주어: ᡶᡝᡵᡝ Fere)이 위치하고 황색 깃발로 지휘표식을 삼았다. 중군을 기점으로 부대를 좌익과 우익의 두 익(翼, 만주어: ᠮᡝᡳᡵᡝᠨ Meiren)으로 나누고 각기 홍색과 백색 깃발로 지휘표식을 삼았다. 양익의 끝에는 다시 각기 두 부대가 배치되었는데 이 끝부분 부대를 만주어로 우투리(만주어: ᡠᡨᡠᡵᡳ Uturi)라고 했다.[100]

다섯 개의 부대는 숲을 둘러싸고 포위열을 만들어 나아갔다. 이렇게 포위망을 형성해가는 단계를 아담비(만주어: ᠠᡩᠠᠮᠪᡳ Adambi)라고 했다. 포위열의 양 끝의 두 우투리가 황제가 자리잡고 있는 곳[看城] 앞에서 만나면서 완전한 포위망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를 우투리 아참비(만주어: ᡠᡨᡠᡵᡳ
ᠠᠴᠠᠮᠪᡳ
Uturi Acambi)라고 했다. 이렇게 우투리 아참비한 포위망의 둘레는 숲의 크기에 따라 30리, 50리, 70리로 다양했다.[101]

우투리 아참비한 후에 우투리의 병사들은 모자를 벗고 채찍질을 하며 ‘말라가’라고 외쳤다. 말라가는 몽골어로 모자를 가리킨다. ‘말라가’를 몽골인만 외쳤는지 만주인도 똑 같이 몽골어로 ‘말라가’라고 외쳤는지 알 수 없으나, 몽골어 ‘말라가’에 해당하는 만주어는 ‘마하라’(만주어: ᠮᠠᡥᠠᠯᠠ Mahala)로서 양자의 의미와 발음에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수렵 현장에 조선인이 있었다해도 이들의 ‘말라가’가 모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눈치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몽골어 ‘말라가’와 만주어 ‘마하라’에 해당하는 조선어 역시 음과 의미가 유사한 ‘마흐레’였기 때문이다.[102]

‘말라가’라는 고함 소리가 중군에 세 번 전달되면 중군은 포위망이 완전히 만들어졌음을 알고 깃발로 포위망을 압축할 것을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말의 귀를 잇대고, 사람의 어깨를 잇댈” 정도로 포위망을 바짝 좁히면 비로소 활을 쏘아 짐승을 잡기 시작했다.[102]

수천명의 병력이 5개 부대로 분할하여 광범위한 지역에서 본부의 깃발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포위망을 형성하고 활을 쏘는 것은 곧 군사훈련이었다. 조련이 평한 것처럼 만주족의 포위수렵은 한나라당나라의 황제가 황실 수렵터인 상림(上林)이나 여산(驪山)에서 수렵했던 것과는 달랐다. 만주족의 수렵은 오락이 아니고 군사훈련이었던 것이다.[102]

음식

만주·퉁구스 어계 민족들은 대흥안령 산맥 속에서 수렵, 채집 및 유목생활을 하면서 부분적으로 농경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거주하는 자연환경과 기후의 영향을 받은 식재료를 많이 활용하였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음식 정체성을 갖고 있다. 만주족은 원래 농업과 수렵, 채집 등 여러 가지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업환경을 기반으로 오곡을 비롯한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 등을 많이 먹는다. 만주족 고유 음식문화 속에는 여진족의 전통과 북방 지역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청대 중엽에 만들어진 만주족의 만한전석(滿漢全席)은 중국 최대 규모의 고전적인 음식에 속한다. 만주족이 청 제국을 지배하면서 주류 문화가 되어 널리 퍼진 결과다. 오늘날에도 청 황제가 먹었다 하여 만한전적을 전문적으로 하는 음식점이 있을 정도다.[103]

 
잘 차려진 훠궈

만주족의 화과(火鍋)는 중국 전역에서 많은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화과는 일종의 샤브샤브 요리에 해당한다. 화과(화궈)라는 말은 구리, 주석 등으로 만든 둥근 모양의 그릇을 뜻한다. 원래 돼지고기나 쇠고기, 양고기를 끓는 물에 데워 먹는데, 주로 돼지고기를 끓는 물에 담가 익혀 먹는다. 중국 전역에 서 애용할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화과 요리점이 많이 생겼다. 중국 전역에서 많이 먹다보니 각 지역의 특성이 가미되어 냄비에 육수를 붓고 채소, 면류, 고기 등을 끓여 먹기도 한다.[103]

 
사치마

만주족은 사치마(薩其瑪, 만주어: ᠰᠠᠴᡳᠮᠠ Sacima)라는 과자를 즐겨 먹는다. 사치마는 만주족의 전통 과자로 청 제국을 건국한 이후 궁중에서 주로 먹던 과자다. 한국강정과 비슷한 과자에 해당한다. 계란과 물을 밀가루와 잘 섞어 반죽을 하여 만든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가늘게 썬 후 기름에 튀긴다. 이때 물엿, 참깨, 호박씨 등을 섞는데, 이렇게 하여 식은 것을 적당한 크기로 썰면 된다. 사치마 역시 청 제국 이후 중국 전역에서 각광받았다. 또한 사치마는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민족들이 명절에 즐겨 먹는 과자이기도 하다. 만주족은 평소에는 검소하게 차려서 먹는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또한 손님을 귀하게 여겨 손님이 집을 방문하면 잘 대접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103]

만주족은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데, 돼지고기로 국을 끓이고, 배추를 섞어서 구수하게 먹는다. 자신들이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돼지고기는 손님 접대에 반드시 동반된다.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것은 만주족이 유목이나 이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정착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03] 사슴고기 역시 만주족 전통음식 중 하나로, 찌거나 구워 먹는 등 여러 방식이 있다. 북경 인근의 만족은 사슴고기를 구이로 다시 먹는 관습이 있다.[104]

부쿠

 
건륭제가 참관한 부쿠 경기에서 부쿠 중인 만주인들.

부쿠(만주어: ᠪᡠᡴᡠ Buku)는 만주족의 레슬링으로, 만주족이 가장 중시하는 격투기이다.[105] 청대 궁정에는 '선포영(善扑营)'을 설치해 부쿠병 200명을 선발하고, 등급별로 1등, 2등, 3등으로 나누었다. 역사적으로도 강희제가 부쿠병으로 오보이를 생포했다는 설이 있었다[106] 부쿠는 만주어로 '레슬러'라는 뜻으로 몽골어 '부케'(몽골어: ᠪᠦᠺᠡ Böke)[107]에서 유래했다. 청대 문헌에 의하면, '포고지희(布库之戏)', '연포고(布库戏)', '요포고(演布库)', '요각(撩脚)', '녹저(角抵)', '양박(相扑)' 등의 별칭도 있다.[107]

만주족 씨름의 역사는 여진족의 '발리속희(拔里速戏)'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리속희은 몽골식 격투기인 부케와 큰 차이가 없다. 때 만주 지역에 거주했던 여진인들은 몽골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부쿠도 그중 하나였다. 후금 시기에는 통치자가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부쿠를 대대적으로 시행했다.[108] 청 황제는 매년 승덕피서산장이나 북경 원명원 고산수장루 앞에서 몽골 각부와 경기를 했다. 중화민국 이후 부쿠는 중국식 레슬링에 녹아들어 그 가장 중요한 구성 부분이 되었다.[109]

빙희

 
기인들의 빙희

만주 지역은 결빙기가 길다. 자연히 만주족은 눈과 얼음 위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길었고, 때로는 오락과 전투가 얼음 위에서 이루어졌다. 《만문노당》(滿文老檔, 만주어: ᡨᠣᠩᡴ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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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gki Fuka Sindaha Hergen-i Dangse)은 1625년 음력 정월 2월에 개최된 대규모 빙상 경기의 광경을 전하고 있다. 이 날 누르가치는 만주, 몽골, 한군팔기의 여러 버이러들과 관원들과 그들의 부인들까지 이끌고 얼어붙은 태자하 위에서 대규모 빙상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버이러들은 시위들, 병사들과 함께 얼어붙은 강 위에서 공중에 던져진 공을 먼저 잡는 자가 이기는 경기를 진행했고 우승자에게는 상금이 주어졌다.[110]

남자들의 축구가 끝난 후에는 부인들이 나와서 빙상 달리기 시합을 했다. 누르가치와 그의 부인들은 얼음 위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고, 여진족 선수 여성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서있다가 출발 신호와 함께 중앙의 골인지점을 향해 뛰었다. 골인지점에는 금과 은을 20냥, 10냥씩 묶어서 18곳에 놓아두고 선착순으로 고액을 잡게 했다.여진족 여성들의 달리기가 끝난 후 몽골 타이지들의 부인들의 달리기가 이어졌고 그 후에는 몽골의 소(小) 타이지들의 부인들의 경주가 이어졌다. 몽골 부인들의 상금은 만주 부인들보다 약간 적었다. 등수 안에 들지 못해서 상금을 획득하지 못한 부인 선수들에게도 소액의 상금이 주어졌다. 누르가치는 경기를 관람하면서 얼음 위에 미끄러져 나뒹구는 부인 선수들을 보며 크게 웃었다. 이 빙상 달리기를 묘사한 만문 기록에서 만주어로 ‘달리다’라는 의미의 '수점비'(만주어: ᠰᡠᡷᡠᠮᠪᡳ Sujumbi)라는 단어를 쓰고 얼음위에서 '활주하다'는 의미의 ‘니숨비'(만주어: ᠨᡳᠰᡠᠮᠪᡳ Nisumbi)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선수들은 스케이트화를 신지 않고 일반 신발로 달렸던 것으로 보인다.[110]

이런 빙상 경기는 오락을 위한 것만이 아니고 전투훈련을 겸한 것이었다. 누르가치는 전시에 썰매로 이동하는 속도전 부대를 운용하기도 했으며, 겨울에 북방으로 정복전을 갈 때에는 병사들에게 톱니가 달린 나무신을 신도록 해서 행군 속도를 높이기도 했다. 《청어적초(清語摘抄)》의 기록에 의하면 누르가치의 휘하 장군인 비고렬(費古烈)이 지휘한 부대는 스케이트화를 신고 하루에 7백리(약 350km)를 달렸다고 한다. 때로는 결빙된 바다 위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만주실록》(滿洲實錄, 만주어: ᠮᠠᠨᠵᡠ 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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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ju-i Yargiyan Kooli) 권8의 기록에 의하면 누르가치가 1626년, 명나라의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자 산해관의 명나라 군대는 후금을 측면 공격하기 위해 해로를 통해 영원성에서 남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각화도(覺華島)라는 섬으로 이동하여 집결했다. 각화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는 얼어붙은 바다 위에 군영을 세우고 얼음을 잘라서 참호를 만들었다. 결국 후금의 장수 우너거(만주어: ᡠᠨ᠋ᡝᡤᡝ Unege)의 부대가 공격하여 결빙된 바다 위의 전투는 명군의 패배로 종식되었다.[110]

1644년, 만주족이 중국으로 진입한 후 황제가 주최하는 빙상 운동은 누르가치 시기 팔기의 고위층 남성과 여성을 모두 동원한 대규모 대회보다는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전통은 계속 유지되다가 청 제국의 전성기인 건륭기에 빙상 운동도 전성기를 맞았다. 청 제국의 군주들은 매년 겨울, 대개 음력 12월 8일에 북경 자금성의 서쪽 옆에 있는 태액지(太液池)에서 팔기인의 빙상 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이를 ‘빙상의 오락’이란 의미로 ‘빙희'(冰嬉, 만주어: ᠨᡳᠰᡠᠮᡝ
ᡝᡶᡳᡵ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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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sume Efire Efin)라고 불렀다. ‘빙희’라는 말은 청 제국 이전부터 중국에서 ‘빙상 오락’을 의미하는 말로 있어왔지만, 청대에 만주족 군주가 개최한 빙희는 좀더 특수하고 특별했다. 청대의 빙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형식을 갖춘 일종의 빙상 전투훈련이자 군주의 참관 하에 진행된 빙상 사열이었다. 청대에 빙희는 ‘국속'(國俗)으로 일컬어졌고 청조의 법규집인 《대청회전(大淸會典)》에 그 격식이 기록되었다. 다시 말해 빙희는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화된 행사였다.[110]

빙희는 매년 겨울 음력 12월 8일 경에 주로 북해(北海)에서 열렸다. 빙희를 개최하기 전날 밤에 검사관이 북해의 얼음이 단단하게 얼었는지 검사했다. 빙희에 스케이트 선수로 선발된 팔기 병사들의 수는 팔기의 각 기에서 200명씩, 총 1600명 정도였다. 이들은 팔기 가운데 자신이 소속된 기의 색과 일치하는 색의 옷을 입고 무릎에는 보호대를 대고 스케이트 날이 장착된 가죽 스케이트화를 신었다. 당시의 스케이트화는 단순해서 나무판 아래에 살짝 휘어진 형태의 강철 칼날을 붙이고 가죽신 아래에 묶으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빙판 위에는 세 개의 문이 설치되었다. 이 문은 깃발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문(旗門)이라고 불렸다. 기문의 도리에는 알록달록 선이 그려진 구체가 매달려 있었다. 이 구체는 선수들이 스케이팅을 하면서 을 쏘아 맞추어야 할 표적이었다. 빙판의 한쪽에는 군주의 화려하고 거대한 썰매가 있었다. 이 썰매가 일종의 사열대인 셈이다. 군주의 썰매 주위에는 팔기의 고위 관료들이 사열단으로 도열해 있었다.[111]

빙희가 시행되는 날 아침에 군주가 호수에 도착하여 썰매에 자리잡고 앉으면 사방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빙희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면 황제의 썰매로부터 2~3리 떨어진 호숫가에 세워진 큰 깃발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여명의 선수들이 일제히 전속력으로 황제에게 활주해왔다. 이것이 당시 ‘창등'(搶等)이라고 불렸던 스피드 스케이팅이었다. 이들의 활주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자력으로 급정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군주 측근의 시위(侍衛)들이 이들을 잡아서 정지시켜주었다. 선수들은 활주를 멈춘 후에 군주에게 무릎꿇고 절을 했다. 우승자와 준우승자에게는 군주가 포상을 했다.[111]

빙희에는 스피드 스케이팅인 창등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피겨스케이팅에 해당하는 ‘창구'(雜技)와 빙상 축구인 ‘잡기'(搶球)도 종목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피겨 스케이팅에서 선수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은 그림에서 보이듯이 등에 자신의 소속 기(旗)의 깃발을 묶은 기수(旗手)와 활을 맨 사수(射手)로 나뉘었다. 빙희가 시작되면 기수와 사수가 한명씩 번갈아가며 빙판으로 나아가 기문을 향해 활주하면서 각종 기술을 시연했다. 선수들은 피겨 스케이팅을 펼치면서 기문에 매달린 구체를 표적으로 활을 쏘았다. 만주족이 말을 타며 활을 쏘는 것을 만주어로 냠냠비(騎射, 만주어: ᠨᡳᠶᠠᠮᠨᡳᠶᠠᠮᠪᡳ Niyamniyambi)라고 했다. 피겨 스케이팅의 활쏘기는 욱상의 ‘냠냠비’가 얼음판 위로 옮겨 온 것이었다. 피겨 스케이팅에서 우수한 스케이팅 기술과 활쏘기 능력을 선보인 자는 스피드 스케이팅과 마찬가지로 포상을 받았다.[111]

가경기 이후 빙희는 건륭기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과 전투훈련으로서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점차 황실의 오락성 겨울놀이로 쇠퇴해갔다. 동시에 황실과 만주족의 빙희 문화가 차츰 민간으로 유행되어갔다. 서태후 시기에 황실의 후비(后妃)들과 왕부(王府)의 부인들 사이에 썰매타기가 유행이었는데 썰매의 호화스러움이 심했다. 일반 백성들도 호화스러운 썰매는 아니었지만 썰매를 즐기게 되었다.[111]

청대 만주족의 스케이팅 관습은 1911년, 신해혁명과 함께 청 제국이 와해된 후에도 여전히 겨울철 오락으로 유지되었다. 신해혁명 후에 중화민국의 북경시민이 된 만주족은 겨울이 되면 종종 조양문(朝陽門)에서 출발하여 얼어붙은 수로를 따라 활주하여 이갑(二閘)을 지나 로하(潞河)로 진입해서 북경의 동남쪽 교외 통주(通州)까지 가서 그곳 특산인 삭힌 두부를 한 사발 사들고 북경으로 돌아오곤 했다. 북경시내에서 통주까지 거리가 대략 20km 정도이니까 빙상으로 마라톤을 즐긴 셈이다. 청대에 매년 빙희가 열렸던 북해(北海)는 청 제국이 멸망한 후 1925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겨울이면 스케이팅을 즐기는 북경시민들로 북적이게 되었다.[111]

매 사냥

만주인의 역사적인 전통으로, 만주인들은 전통적으로 매사냥에 관심이 있다. 큰 송골매(만주어: ᡧᠣᠩᡴᠣᡵᠣ Šongkoro)는 만주인의 매 사냥 사회에서 가장 높이 평가된다. 청대에는 공물로 황실에 숑코로를 바치면 상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닝구타에 매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큰 기지가 있었다. 북경의 만주족도 매 사냥을 즐겼는데, 만주인의 매 사냥에 비하면 오락에 가깝다. 북경의 황실부에도 전문 매 사냥꾼이 있었다. 그들은 황제가 매년 가을 사냥을 나갔을 때 뛰어난 매를 제공했다.[112] 오늘날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만주 전통 매 사냥이 행해지고 있다.[113]

종교

17세기에 만주인들이 중국을 정복한 후 그들은 널리 중국의 민속 종교를 채택했지만, 샤머니즘 전통은 여전히 영혼 숭배, 토템 숭배, 악몽에 대한 믿음, 박애주의자들의 절정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114] 청의 통치자들은 종교를 몽골인이나 티베트인과 같은 다른 세력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의 본래 신앙인 샤머니즘에는 사실상 특권이 없었다. 청궁의 샤머니즘 사당 외에, 만주 신앙을 숭배하기 위해 세워진 사원은 북경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만주 지역에서 샤머니스트와 라마파의 경쟁 소식은 있었지만, 만주인 황제는 라마파들이 샤머니스트들을 박해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이는 샤머니스트들의 엄청난 좌절과 불만으로 이어졌다.[115]

불교

여진인들은 10~13세기 발해, 고려, 거란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16~17세기 만주인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청 황제는 항상 "붓다"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들은 티베트 불교에서 만쥬시리로 여겨졌고 높은 업적을 남겼다.[116]그러나 불교는 통치자들에 의해 몽골인과 티벳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것은 청 왕조의 평범한 만주족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117]

몽골인들의 티베트 불교 신앙은 만주인들에게 경멸로 비쳐졌는데, 홍 타이지는 그것이 몽골의 정체성에 파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홍 타이지는 사석에서 "몽골 왕자들이 몽골어를 버리고 있으며, 그들의 이름은 모두 라마들을 모방하고 있다"고 말했다.[118] 만주인들도 홍 타이지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는 티베트 불교를 믿지 않았고 개종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실 "임상"과 "거짓말"이라는 용어는 홍 타이지에 의해 티베트 불교의 라마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홍 타이지는 티베트인들과 몽골의 종교에 대한 믿음을 이용하기 위해 불교를 후원했다.[119]

 
옹화궁에 위치한 라마설.

건륭제가 티베트 불교를 믿은 것은 몽골인들이 겔룩파달라이 라마판첸 라마의 추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1792년 북경 옹화궁 티베트 불교 사원에 '라마설(喇嘛說: 라마에 관한 설명)'이라는 제목의 기석 위에 놓였고, 건륭제는 또한 그것이 "약자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연장하려는 우리의 정책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겔룩파를 후원하게 되었다.[120]

티베트 불교 신자들을 실질적인 이유로만 지지한다는 이 설명은 티베트, 몽골, 만주, 한문으로 '라마설' 기석을 새긴 건륭제의 이 정책에 대한 한 총리의 비판을 빗나가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그는 "겔룩파를 후원함으로써 몽골인들의 평화를 유지한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므로, 우리는 이 (종교)를 지키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어떠한 편견도 보이지 않고, (원대에 행해진) 티베트 사제들에 대한 훈계를 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121][122]

민속 종교

만주인들은 청대의 대부분 동안 중국 민속 종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조상 숭배를 위해 그들이 봉헌한 신들은 사실상 한족의 신들과 동일했다. 관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123] 만주인들은 입관 전부터 관우를 존숭해 왔고, 명의 구원자이자 계승자를 자처한 그들에게 관우 신앙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인민에게 지속시킬 수 있는 훌륭한 기제였다.[124] 옹정제는 12세기 금군에 맞서 싸운 남송의 명장 악비를 신앙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관우를 대대적으로 현창했다.[125] 이에 따라 관우는 국가를 보호하는 신으로 여겨져 만주족의 성실한 숭배를 받았다. 그들은 그를 '관노야(关老爷)'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금기시되었다.[123] 관우 신앙은 티베트 불교와도 결합되어, 관우는 야무다가를 모신 북경 옹화궁의 서측 건물인 아만달알루(雅曼达嘎楼) 안에 아들 관평(關平)과 그의 부장으로 가공된 주창와 함께 합사되었다.[126] 그 외에 만주인들은 한족들과 마찬가지로 재록신(竈王神)과 조군(灶君)을 숭배했다. 몽골과 티베트의 여러 신들에 대한 숭배도 보고되었다.[123]

카톨릭

 
허셔리 하라의 잉롄즈(英敛之, 1867~1926)가 교황 비오 11세 등의 지원을 받아 개교한 대만 신베이 푸런 카톨릭 대학(구 북경 천주교 대학) 1949년에 폐교되어 북경에 남아있는 부지와 기존 건물은 베이징 사범대학 계속교육학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청대에는 만주인 카톨릭 신자도 상당히 많았다. 1650년대에 최초의 만주인 카톨릭 신자들이 나타났다.[127] 옹정 연간 호쇼이 간친왕(和硕郑亲王, 만주어: ᡥᠣᡧᠣ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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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šoi Ujen Cin Wang) 덕패(德沛)는 세례명이 '조셉'인 카톨릭 신자였다. 그의 아내도 세례를 받고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얻었다.[128] 호광복건양자강 하류 지역에서 지방 관료의 귀감으로 명상을 얻었던 덕패는 옹정제가 기독교 선교를 금지했던 1720년대 이후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이어가면서 선교사의 과학을 익히는 데에도 전념했다.[129] 동시에 도로이 버이러 수누의 아들들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130][131] 가경 연간의 퉁헝샨과 퉁란은 만주인 카톨릭 신자였다. 이러한 만주인 카톨릭 신자들은 청 황제들에 의해 박해와 개종을 강요받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130]

더 보기

각주

  1. 《中国2010年人口普查资料(上中下)》 [Data of 2010 China Population Census]. China Statistics Press. 2012. ISBN 9787503765070. 
  2. 中華民國滿族協會. 《www.manchusoc.org》. 
  3. “Research”. 《Ethnicity Research (《民族研究》) 》 (중국어) (1–12): 21. 1997. 
  4. Census 2000 PHC-T-43. Census: Table 1. First, Second, and Total Responses to the Ancestry Question by Detailed Ancestry Code: 2000
  5. 孟森. 《清史讲义》. 中华书局. 7~8쪽. ISBN 9787101069457. 
  6. (http://www.chinabang.co.kr/minzu/man.htm 중국의 어제와 오늘)
  7. 阿桂等 (1988). 《《满洲源流考》》. 辽宁民族出版社. 2쪽. ISBN 9787805270609. 
  8. 佟永功, 「功在史冊, 滿語滿文及文獻」, 『圖文幷茂的〈滿洲實錄〉』
  9.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 其國定號滿洲,乃其始祖也 南朝誤名建州。
  10. 《만주실록(滿洲實錄)》, 其國定號滿洲乃其始祖也【南朝誤名建州】
  11. 趙展, 《對皇太極所謂諸申的辨正》
  12. 馮繼欽,「靺鞨族共同體類型及其特征初探」『北方文物』1986
  13. 童萬崙,「白山靺鞨族考」『北方文物』1986
  14. 《族称manju词源探析》,长山作,刊载于《满语研究》, 2009년, 1쪽
  15. 청대 동가강(佟佳江, 만주어: ᡨᡠᠩᡤᡳᠶᠠ
    ᡠᠯᠠ
    Tunggiya Ula)
  16. 陳鵬, 「“滿洲”名稱述考」, 『民族研究』, 2011, 제3기
  17.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4쪽. ISBN 9788994606514. 
  18. 이훈 (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5쪽. ISBN 9788994606514. 
  19. 이훈 (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5~156쪽. ISBN 9788994606514. 
  20. Pemela Kyle Crossley (1997). 《The Manchus》. Peoples of Asia Book 3. Wiley-Blackwell. ISBN 978-0631235910. 
  21. 이훈 (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6쪽. ISBN 9788994606514. 
  22. Pemela Kyle Crossely, A translucr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i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194쪽
  23. 牛素嫻(2006), 清初的「索倫」諸部 소론(索倫, 만주어: ᠰᠣᠯᠣᠨ Solon)은 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소론어를 사용하는 어웡키족의 한 갈래로 어웡키족, 다우르족, 오로촌족의 총칭이기도 했다.
  24. 萬侖, 1987, 淸代庫雅喇滿洲硏究 民族硏究 , 96~97쪽, 쿠르카(庫爾喀, 만주어: ᡴᡡᡵᡴ᠋ᠠ Kūrka)와 쿠야라(庫雅喇, 庫雅拉, 苦雅拉, {{llang|mnc|ᡴᡴᡡᡟᠠᡵᠠ)는 같은 부족을 가르키는 다른 이름이며, 이들은 원말명초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의 후예로 청대에 훈춘으로 이주한 뒤, 팔기에 편입되어 '쿠야라 만주'로 불리었다.
  25. 增井寬也, 1989, クルカKūrkaとクヤラKūyala-淸代琿春地方の少數民族 立命館文學 514쪽, 쿠르카와 쿠야라는 다른 부족인데, 쿠르카는 숭덕 연간에 얀추 지방(炎楮地方)에 거주하다가 순치 연간에 훈춘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가르키는 반면, 쿠야라는 얀추와 혼춘 지방에서 멀리 우수리 강 상류에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지칭했다. 강희 10년에 이르러 쿠르카는 대부분 혼춘을 떠났고, 대신 우수리강 유역의 쿠야라가 길림 우라의 주방 팔기에 편입되어 '쿠야라 만주'로 분류되어 훈춘에 배치되었다. 훈춘의 쿠야라 만주가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명칭대로 쿠르카라고도 불리면서 쿠르카와 쿠야라가 같은 부족으로 여겨졌지만,실제로 많은 쿠야라 중에 훈춘에 거주하는 쿠야라만이 쿠르카라고 불린 것이다.
  26. 劉小萌, 「關於淸代“新滿洲”的幾個問題」, 『滿族研究』, 1987年 第3期.
  27.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7쪽. ISBN 9788994606514. 
  28. 한중관계연구소(2017) ,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청아출판사』 2장(『허저족의 기원과 역사』), 59쪽
  29.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216쪽. ISBN 9788937484940. 
  30. 황해윤 (2015). 《乾隆年間의 八旗漢軍 出旗 정책과 그 영향 》 (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ii~iii쪽. 
  31.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216쪽쪽. ISBN 9788937484940. 
  32.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107~108쪽. ISBN 9788937484940. 
  33. 정세련 (2014). 《中國 國體變革期 滿洲族 團體의 政治活動, 1901-1924》 (PDF) (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54~59쪽. 
  34. Edward J. Rhoads (2000). 《Manchus and Han: Ethnic Relations and Political Power in Late Qing and Early Republican China, 1861–1928》. University of Washington. 277쪽. ISBN 9780295980409. 
  35. Edward J. Rhoads (2000). 《Manchus and Han: Ethnic Relations and Political Power in Late Qing and Early Republican China, 1861–1928》. University of Washington. 276쪽. ISBN 9780295980409. 
  36. Edward J. Rhoads (2000). 《Manchus and Han: Ethnic Relations and Political Power in Late Qing and Early Republican China, 1861–1928》. University of Washington. 280쪽. ISBN 9780295980409. 
  37. Edward J. Rhoads (2000). 《Manchus and Han: Ethnic Relations and Political Power in Late Qing and Early Republican China, 1861–1928》. University of Washington. 282쪽. ISBN 9780295980409. 
  38. Edward J. Rhoads (2000). 《Manchus and Han: Ethnic Relations and Political Power in Late Qing and Early Republican China, 1861–1928》. University of Washington. 283쪽. ISBN 9780295980409. 
  39. Patrick Fuliang Shan, "Elastic Self-consciousness and the reshaping of Manchu Identity," in Ethnic China: Identity, Assimilation and Resistance, (Lexington and Rowman & Littlefield, 2015), pp. 39–59.
  40. 《满族简史》, 中国少数民族简史丛书(修订本), 民族出版社, 2009, pp. 209, 215, 218–228.
  41. “Eras Journal – Tighe, J: Review of "The Manchus", Pamela Kyle Crossley”. 2011년 3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6월 7일에 확인함. 
  42. Poston, Dudley. 《The Population of Modern China》. Plenum Press. 595쪽. 
  43. Kevin Carrico, A State of Warring Styles
  44. Pamela Kyle Crossley, The Manchus (Wiley-Blckwell, 2002), p.6.
  45. Pamale Kyle Crossley(2009), “The Influence of Altaicism on East Asian Studies,” Berkeley-KU Forum on East Asian Cultural Studies 학회 발표문(Seoul), pp. 23~25 참조.
  46. Mark C. Elliot, The Manchu Way.
  47. 기세찬(2017), 《신청사 연구사 분석을 통한 담론의 함의》, 군사연구 제144집, 육군군사연구소.
  48. William T. Rowe (2009). 《China’s Last Empire : The Great Qing》. History of Imperial Chin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0~11쪽. ISBN 9780674066243. 
  49. Pamela Kyle Crossley, A Translucent Mirror.
  50. Pemela Kyle Crossley (2008). 《A Reserved Approach to ‘New Qing History’》. Unpublished manu-script. 
  51. 마크 C. 엘리엇, 이훈·김선민 역,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2009, 355쪽
  52. 한중관계연구소,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청아출판사』 4장(『사회조직과 지도자의 역할』), 2017, 81쪽
  53. 한중관계연구소,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청아출판사』 4장(『사회조직과 지도자의 역할』), 2017, 83쪽
  54. 한중관계연구소,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청아출판사』 4장(『사회조직과 지도자의 역할』), 2017, 85쪽
  55. 金启孮 (2009). 《金启孮谈北京的满族》》. 中华书局. 109쪽. ISBN 9787101068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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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1. 초오 머르건이 어떤 사람인가는 예전부터 하나의 수수께기였으며, 겨우 그가 시버부의 지도적인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현재, 요령성 와방점시(遼寧省瓦房店市)에서는 몇 년 전에 동강 향라 마교사원촌(東崗鄕喇嘛廟村) 관명을가(關明乙家) 소장의 시버 구왈갸 하라의 "조병록(調兵錄)"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 서문에서 어옥군한(御玉軍汗)의 아들이 작묵이근(綽墨爾根)이라고 하였다. 고증을 해 보았더니, 어옥군한(御玉軍汗)은 곧 니아합제(尼雅哈齊)인데, 그는 소완(蘇完, 만주어: ᠰᡠᠸᠠᠨ Suwan)을 떠난 뒤에 시버으로 가서 을 칭했다. 그의 아들이 작묵이근(綽墨爾根)으로, 아비의 한위(汗位)를 계승하여 시버의 저명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2. 우디허어는 북퉁구스 어계의 어웡키어,라므트어와 남퉁구스어계의 나나이어, 만주어의 중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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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