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만주족(滿洲族, 만주어: ᠮᠠᠨᠵᡠ Manju Aiman) 또는 만족(중국어 간체자: 满族, 정체자: 滿族, 병음: Mǎnzú)은 만주(중국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 연해주에서 발상한 퉁구스계 민족으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여진족의 후신으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계승하여 새로운 금나라를 건국하였고, 원나라의 전국옥새를 얻은 뒤 계승의 의미로 청 제국을 건국하였다. 본래 만주의 한자는 ‘滿珠’, ‘滿洲’ 등이 있으머, 만주어의 민족명 Manju의 차음이다. 만주족은 대대로 동북지역에 살았으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원인으로 지금은 거의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2000년, 중국에 1,068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주요 분포 지역은 동북 3성으로 7,185,46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랴오닝 성이 4,952,859명으로 가장 많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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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만주어: ᠮᠠᠨᠵᡠ
총인구
약 1,068만 명
언어
만주어, 중국어
종교
샤머니즘, 불교, 조상 및 하늘숭배
민족계통
근연민족 일본인, 류큐인, 한민족, 시버족, 나나이족, 오로크족, 울치족, 오로치족, 우데게족, 에벤족, 에벤키족, 네기달족, 오로첸족, 킬리족
건륭제의 만주족 시위 (1760)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에 있는 건청문(乾淸門) 현판. 왼쪽에는 한자, 오른쪽에는 만주문자로 적혀 있다.

과거에는 만주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청나라 시대에 진행된 만주어의 한화(漢化)로 인해 현재는 만주어의 사용 인구는 오히려 감소하여 극히 드물고, 거의 대부분 중국어를 사용한다.

기원편집

최초의 조상들은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살았던 숙신이었다.[2] 만주족들은 옛부터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튀르크인들에 정복되어 튀르크화와 혼혈화되었다. 이후 고구려가 만주족을 정복하여 복속시켜 물길,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후 고구려와 혼혈화되어 만주족은 고구려-여진 혼혈 종족으로서 이어지게 된다. 발해 말기인 901년에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고려 때 여진족이 고려에 복속되고 기미주가 되어 고려에 조공을 바쳤고 조선도 여진을 정복하여, 만주족은 항화야인으로써 폐사군 지역에 복속되어 조선을 종주국(宗主國)으로 대하며 조공을 바쳤다. 만주족의 성씨인 아이신 교로는 몽골인과 여진족의 혼혈 종족이다.

1586년 누르하치여진족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나라를 건국한다. 1635년 청 태종은 족명을 만주로 개칭하여, 여진족이라는 족명을 금지하였다.

어원편집

'만주’의 어원을 밝히려는 시도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 결과 청 제국은 《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만주어: ᠮᠠᠨᠵᡠᠰᠠᡳ
ᡩᠠ
ᠰᡝᡴᡳᠶᡝᠨ  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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ᠪᡳᡨᡥᡝ
Manjusai Da Sekiyen-i Kimcin Bithe)를 편찬하면서 공식적인 견해를 만주라는 명칭이 문수보살(산스크리트어: मञ्जुश्री Mañjuśrī)에서 유래했다고 규정했다.[3]

1636년에 만들어진 《태조태후실록(太祖太后實錄)》은 순치조에 다시 베껴 쓰고 개수(改修)하여 《태종문황제실록(太宗文皇帝實錄)》의 체례에 따라 만문(滿文)·몽골문(蒙古文)·한문(漢文) 3종의 문본으로 나누어 쓰되, 삽도를 없애고 개칭한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과 《태조태후실록》을 근거로하여 1779년에 편찬된 청 제국 역대 왕조의 실록 중 오직 만문(滿文)·몽골문(蒙古文)·한문(漢文) 3종의 문자가 한 체로 모아져 있고, 또 삽도(揷圖) 82폭까지 덧붙여 《만주실록(滿洲實錄)》[4]에는 명나라가 만주를 오인하여 건주(建州)를 발음이 결과라고 하였다.[5][6]

만주족의 직계조상이 기왕에 흑수말갈(黑水靺鞨)로 된 이상, 그 추장은 "대막불만돌(大莫拂瞞咄)"이었다. 자의상의 해석으로는 대막불(大莫拂)은 다마파(大馬法, 만주어: ᡩᠠᠮ
ᠠᡶᠠ
Da Mafa)이니, 대부(大斧)·대로(大老)·노옹(老翁)·노조(老祖)라는 뜻이요, 만돌(瞞咄)은 추장이란 뜻이다. 역사자료를 참고하여 '대막부만돌(大莫拂瞞咄)'을 풀이하자면 곧 부락연맹의 대추장(大酋長)이란 뜻이다.[7] 만돌(瞞咄)은 Mandu를 나타내는데, 모두 추장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주라는 명칭도 이 만돌과 관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발해의 성(姓)인 대씨(大氏)도 이와 관계 있는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8][9]

일각에서는 만주가 man과 ju가 의 조합어라고 여기는데, man은 강경하다는 의미의 만주어 망아(만주어: ᠮᠠᠩᡤᠠ Mangga), ju는 강한 활을 의미하는 주(만주어: ᠵᡠ ju)이다.[10] 또, 파저강[11]의 다른 이름인 마저강(馬猪江)의 '마저'의 변음 혹은 파저강의 또 다른 이름 포주강(蒲州江)의 포(蒲)자가 만(滿) 자와 유사하여 이를 혼돈한 결과라는 설[12] 등이 있다.

청말편집

"우리 조상들은 만주족에게 항복하길 거부하였다.
눈을 감고 격렬한 전투의 장면을,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쓰러진 시체가 땅을 덮은 모습을 상상해보라.
우리 조상들의 양심이 고결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손문孫文-

청 제국이 몰락하기 직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된 한족들의 만주족 혐오는 20세기 초 극에 달하였다.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천국운동, 청일전쟁, 의화단의 난으로 청 제국의 모순은 더욱 두드러지고 국토는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해졌으며, 중화라는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외세 침략과 민생고는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반란으로 이어졌고,그 칼끝은 만주족을 향하였다.

1895년, 그러니까 청일전쟁 발발 1년 후, 육호동(陸晧東)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모든 이유를 만주족 탓으로 돌리며 만주족 혐오에 앞장선다. 그는 만주족이 '혐오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또한 '청조를 몰락시키지 않고서는 중국이 어떠한 경우에도 부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주길 바란다.' 라고 덧붙였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추용은 <혁명군> 이라는 신문을 출간하며 글을 쓰기를, '중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만주족을 추방해야 하며, 만주 황제를 처형해야만 한다.' 비단 급진적인 혁명파뿐만 아니라, 1896년의 변법자강운동을 이끌었던 양계초 또한 중화제국을 멸망시킨 만주족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1912년을 전후하여 만주족 고관대직을 대상으로 한 폭탄테러가 성행했다. 이런 단편적인 사건들만 보더라도 한족들은 만주족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1911년,신해혁명이 발생한다. 선통 2년 10월 10일, 무한의 신군은 무기고를 점령, 또 다른 신군 3개 연대가 이들을 도왔다. 다음 날 혁명단체의 회원들은 한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무기고와 철공소를 장악하였으며, 12일에는 한구 부대 또한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청의 전복과 만주족의 소멸을 바라였다. 1911년 10월 22일, 신서의 혁명군에 의해 수백명에 달하는 만주인이 학살당한다.

한 영국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거리는 텅 비었고 사방에는 만주족의 시체가 즐비하며, 50구의 시신이 성문 밖의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반란군은 여전히 만주족을 사냥하고 있고, 만주족 800여 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의창에서도 만주족 여성과 아이들이 공개처형당하였다. 11월 서안에서는 약 2만 명의 만주인에게 식량 공급이 중단되었고, 이후 사흘간 혁명군은 쇠약해진 만주족을 도륙하였다. 당시 만주인들은 이미 최하층민으로 전락해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광기에 휩싸인 한족 혁명군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만주 지방으로 도망친 일부 운 좋은 만주족들이 아니라면, 그 대부분은 학살당하거나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끼니를 걱정하며 살게 되었다. 돈이 없으면 굶어죽었고, 돈이 많으면 혁명군들이 가산을 몰수하였기에 또한 굶어죽었다.그들은 인력거를 끌거나 곡예사, 똥지게꾼, 거렁뱅이, 매춘부가 되어 조상들의 화려한 영광을 억지로 망각한 채 살아야만 했다. 세자왕손이 성문동에서 죽고, 군주명부가 기원에 들어갔다. 어떻게든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청 황실의 골동품을 가소로울 정도의 헐값에 팔았다. 팔 물건조차 없는 일반 기하인들은 집도 먹을 것도 없이 야외에서 얼어죽어갔다. 가산이 억만에 이르렀다는 경친왕 혁광의 손자는 쓰레기를 뒤지는 처지가 되었다. 북경성 내의 칠천기녀는 대부분이 팔기자제였다.

만주국편집

1931년에 일제만주국 괴뢰 정부를 수립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아이신기오로 푸이)를 황위에 앉힌다. 이 때 이미 만주에서 한족의 인구가 만주족의 인구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만주족들 사이에서도 이 계획은 민족적 반향을 얻지 못했다. 만주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사라졌으며 만주국의 강역은 잠시 중화민국에게 넘어갔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문화편집

언어편집

주로 퉁구스어족에 속하는 만주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현대에는 만주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인구는 수천 명으로 일부고[13],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극히 드물어 10명에 불과하다.[14]

부쿠편집

 
건륭제가 참관한 부쿠 경기에서 부쿠 중인 만주인들.

부쿠(만주어: ᠪᡠᡴᡠ Buku)는 만주족의 레슬링으로, 만주족이 가장 중시하는 격투기이다.[15] 청대 궁정에는 '선포영(善扑营)'을 설치해 부쿠병 200명을 선발하고, 등급별로 1등, 2등, 3등으로 나누었다. 역사적으로도 강희제가 부쿠병으로 오보이를 생포했다는 설이 있었다[16] 부쿠는 만주어로 '레슬러'라는 뜻으로 몽골어 '부케'(몽골어: ᠪᠦᠺᠡ Böke)[17]에서 유래했다. 청대 문헌에 의하면, '포고지희(布库之戏)', '연포고(布库戏)', '요포고(演布库)', '요각(撩脚)', '녹저(角抵)', '양박(相扑)' 등의 별칭도 있다.[17]

만주족 씨름의 역사는 여진족의 '발리속희(拔里速戏)'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리속희은 몽골식 격투기인 부케와 큰 차이가 없다. 때 만주 지역에 거주했던 여진인들은 몽골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부쿠도 그중 하나였다. 후금 시기에는 통치자가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부쿠를 대대적으로 시행했다.[18] 청 황제는 매년 승덕피서산장이나 북경 원명원 고산수장루 앞에서 몽골 각부와 경기를 했다. 중화민국 이후 부쿠는 중국식 레슬링에 녹아들어 그 가장 중요한 구성 부분이 되었다.[19]

매 사냥편집

만주인의 역사적인 전통으로, 만주인들은 전통적으로 매사냥에 관심이 있다. 큰 송골매(만주어: ᡧᠣᠩᡴᠣᡵᠣ Šongkoro)는 만주인의 매 사냥 사회에서 가장 높이 평가된다. 청대에는 공물로 황실에 숑코로를 바치면 상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닝구타에 매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큰 기지가 있었다. 북경의 만주족도 매 사냥을 즐겼는데, 만주인의 매 사냥에 비하면 오락에 가깝다. 북경의 황실부에도 전문 매 사냥꾼이 있었다. 그들은 황제가 매년 가을 사냥을 나갔을 때 뛰어난 매를 제공했다.[20] 오늘날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만주 전통 매 사냥이 행해지고 있다.[21]

종교편집

17세기에 만주인들이 중국을 정복한 후 그들은 널리 중국의 민속 종교를 채택했지만, 샤머니즘 전통은 여전히 영혼 숭배, 토템 숭배, 악몽에 대한 믿음, 박애주의자들의 절정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22] 청의 통치자들은 종교를 몽골인이나 티베트인과 같은 다른 세력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의 본래 신앙인 샤머니즘에는 사실상 특권이 없었다. 청궁의 샤머니즘 사당 외에, 만주 신앙을 숭배하기 위해 세워진 사원은 북경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만주 지역에서 샤머니스트와 라마파의 경쟁 소식은 있었지만, 만주인 황제는 라마파들이 샤머니스트들을 박해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이는 샤머니스트들의 엄청난 좌절과 불만으로 이어졌다.[23]

불교편집

여진인들은 10~13세기 발해, 고려, 거란 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16~17세기 만주인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청 황제는 항상 "붓다"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들은 티베트 불교에서 만쥬시리로 여겨졌고 높은 업적을 남겼다.[24] 그러나 불교는 통치자들에 의해 몽골인과 티벳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것은 청 왕조의 평범한 만주족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25]

몽골인들의 티베트 불교 신앙은 만주인들에게 경멸로 비쳐졌는데, 홍 타이지는 그것이 몽골의 정체성에 파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홍 타이지는 사석에서 "몽골 왕자들이 몽골어를 버리고 있으며, 그들의 이름은 모두 라마들을 모방하고 있다"고 말했다.[26] 만주인들도 홍 타이지와 사실상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는 티베트 불교를 믿지 않았고 개종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사실 "임상"과 "거짓말"이라는 용어는 홍 타이지에 의해 티베트 불교의 라마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홍 타이지는 티베트인들과 몽골의 종교에 대한 믿음을 이용하기 위해 불교를 후원했다.[27]

 
옹화궁에 위치한 라마설.

건륭제가 티베트 불교를 믿은 것은 몽골인들이 겔룩파달라이 라마판첸 라마의 추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1792년 북경 옹화궁 티베트 불교 사원에 '라마설(喇嘛說: 라마에 관한 설명)'이라는 제목의 기석 위에 놓였고, 건륭제는 또한 그것이 "약자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연장하려는 우리의 정책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겔룩파를 후원하게 되었다.[28]

티베트 불교 신자들을 실질적인 이유로만 지지한다는 이 설명은 티베트, 몽골, 만주, 한문으로 '라마설' 기석을 새긴 건륭제의 이 정책에 대한 한 총리의 비판을 빗나가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그는 "겔룩파를 후원함으로써 몽골인들의 평화를 유지한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므로, 우리는 이 (종교)를 지키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어떠한 편견도 보이지 않고, (원대에 행해진) 티베트 사제들에 대한 훈계를 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29][30]

민속 종교편집

만주인들은 청대의 거의 대부분 동안 중국 민속 종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조상 숭배를 위해 그들이 봉헌한 신들은 사실상 한족의 신들과 동일했다. 관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31] 만주인들은 입관 전부터 관우를 존숭해 왔고, 명의 구원자이자 계승자를 자처한 그들에게 관우 신앙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인민에게 지속시킬 수 있는 훌륭한 기제였다.[32] 옹정제는 12세기 금군에 맞서 싸운 남송의 명장 악비를 신앙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관우를 대대적으로 현창했다.[33] 이에 따라 관우는 국가를 보호하는 신으로 여겨져 만주족의 성실한 숭배를 받았다. 그들은 그를 '관노야(关老爷)'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금기시되었다.[31] 관우 신앙은 티베트 불교와도 결합되어, 관우는 야무다가를 모신 북경 옹화궁의 서측 건물인 아만달알루(雅曼达嘎楼) 안에 아들 관평(關平)과 그의 부장으로 가공된 주창와 함께 합사되었다.[34] 그 외에 만주인들은 한족들과 마찬가지로 재록신(竈王神)과 조군(灶君)을 숭배했다. 몽골과 티베트의 여러 신들에 대한 숭배도 보고되었다.[31]

카톨릭편집

 
허셔리 하라의 잉롄즈(英敛之, 1867~1926)가 교황 비오 11세 등의 지원을 받아 개교한 대만 신베이 푸런 카톨릭 대학(구 북경 천주교 대학) 1949년에 폐교되어 북경에 남아있는 부지와 기존 건물은 베이징 사범대학 계속교육학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청대에는 만주인 카톨릭 신자도 상당히 많았다. 1650년대에 최초의 만주인 카톨릭 신자들이 나타났다.[35] 옹정 연간 호쇼이 간친왕(和硕郑亲王, 만주어: ᡥᠣᡧᠣ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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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šoi Ujen Cin Wang) 덕패(德沛)는 세례명이 '조셉'인 카톨릭 신자였다. 그의 아내도 세례를 받고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얻었다.[36] 호광복건양자강 하류 지역에서 지방 관료의 귀감으로 명상을 얻었던 덕패는 옹정제가 기독교 선교를 금지했던 1720년대 이후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이어가면서 선교사의 과학을 익히는 데에도 전념했다.[37] 동시에 도로이 버이러 수누의 아들들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38][39] 가경 연간의 퉁헝샨과 퉁란은 만주인 카톨릭 신자였다. 이러한 만주인 카톨릭 신자들은 청 황제들에 의해 박해와 개종을 강요받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38]

더 보기편집

각주편집

  1. (http://www.chinabang.co.kr/minzu/man.htm Archived 2006년 8월 26일 - 웨이백 머신 중국의 어제와 오늘)
  2. Huang, P: "New Light on the origins of the Manchu.", page 239-282.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vol 50, no.1 1990 Retrieved from JSTOR database July 18, 2006
    http://www.jstor.org/
  3. 阿桂等 (1988). 《《满洲源流考》》. 辽宁民族出版社. 2쪽. ISBN 9787805270609. 
  4. 佟永功, 「功在史冊, 滿語滿文及文獻」, 『圖文幷茂的〈滿洲實錄〉』
  5.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 其國定號滿洲,乃其始祖也 南朝誤名建州。
  6. 《만주실록(滿洲實錄)》, 其國定號滿洲乃其始祖也【南朝誤名建州】
  7. 趙展, 《對皇太極所謂諸申的辨正》
  8. 馮繼欽,「靺鞨族共同體類型及其特征初探」『北方文物』1986
  9. 童萬崙,「白山靺鞨族考」『北方文物』1986
  10. 《族称manju词源探析》,长山作,刊载于《满语研究》, 2009년, 1쪽
  11. 청대 동가강(佟佳江, 만주어: ᡨᡠᠩᡤᡳᠶᠠ
    ᡠᠯᠠ
    Tunggiya Ula)
  12. 陳鵬, 「“滿洲”名稱述考」, 『民族研究』, 2011, 제3기
  13. “China News (originally Beijing Morning Post): Manchu Classes in Remin University (Simplified Chinese)”. 2017년 9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10월 8일에 확인함. 
  14. “UNESCO Atlas of the World's Languages in Danger”. 2015년 10월 27일. 
  15. 金启孮; 凯和 (2006). 《中国摔跤史》. 内蒙古人民出版社. 142쪽. ISBN 9787204088096. 
  16. 赵翼; 姚元之 (1997). 《檐曝杂记·竹叶亭杂记》. 中华书局. ISBN 9787101017489. 
  17. 金启孮; 凯和 (2006). 《中国摔跤史》. 内蒙古人民出版社. 118쪽. ISBN 9787204088096. 
  18. 金启孮; 凯和 (2006). 《中国摔跤史》. 内蒙古人民出版社. 119~121쪽. ISBN 9787204088096. 
  19. 金启孮; 凯和 (2006). 《中国摔跤史》. 内蒙古人民出版社. 152쪽. ISBN 9787204088096. 
  20. 刘小萌 (2008). 《清代八旗子弟》. 辽宁民族出版社. 92, 106~107쪽. ISBN 978-7-80722-563-8. 
  21. “보관된 사본” 新华网吉林频道.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3월 18일에 확인함. 
  22. 金启孮 (2009). 《金启孮谈北京的满族》. 中华书局. 98~106쪽. ISBN 9787101068566. 
  23. 金启孮 (2009). 《金启孮谈北京的满族》. 中华书局. 95쪽. ISBN 9787101068566. 
  24. The Relation of Manchu Emperors and Buddhism (simplified Chinese)
  25. 金启孮. 《金启孮谈北京的满族》. 中华书局. 95쪽. ISBN 9787101068566. 
  26. Wakeman Jr.(1986),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1권 , p. 203.
  27.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Pt. 1 ; The Ch'ing Empire to 18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8. 64~65쪽. ISBN 978-0-521-24334-6. 
  28. Ruth W. Dunnell; Mark C. Elliott; Philippe Foret; James A. Millward (2004). 《New Qing Imperial History: The Making of Inner Asian Empire at Qing Chengde》. London: Routledge/Curzon. 123~124쪽. ISBN 9780415320061. 
  29. Donald S. Lopez(1999), 《Prisoners of Shangri-La: Tibetan Buddhism and the West》, p. 20.
  30. Patricia Ann Berger(2003), 《Empire of Emptiness: Buddhist Art and Political Authority in Qing China》, University of Hawai'i Press, p. 35.
  31. 金启孮. 《金启孮谈北京的满族》. 中华书局. 95쪽. ISBN 9787101068566. 
  32. 이훈 (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370~371쪽. ISBN 9788994606514. 
  33. 이훈 (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372쪽. ISBN 9788994606514. 
  34. 이훈 (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375쪽. ISBN 9788994606514. 
  35. 刘小萌 (2008). 《清代八旗子弟》. 辽宁民族出版社. 183쪽. ISBN 978-7-80722-563-8. 
  36. 刘小萌 (2008). 《清代八旗子弟》. 辽宁民族出版社. 184쪽. ISBN 978-7-80722-563-8. 
  37. William T. Rowe (2009). 《China’s Last Empire : The Great Qing》. History of Imperial Chin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ISBN 9780674066243. 
  38. 刘小萌 (2008). 《清代八旗子弟》. 辽宁民族出版社. 184쪽. ISBN 978-7-80722-563-8. 
  39. “National Qing History Compilatory Committee: Sunu Research (simplified Chinese)”. 《historychina.net》. 2013년 6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6월 6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편집

  • 이성호 (1985년). 《古代 滿洲族의 硏究》. 淸州大學校. 
  • 김재선 (1998년). “韓民族과 滿洲族의 淵源 연구(The study of the origin of Han people and Manju people)”. 《大眞論叢》. Vol.6. 
  • 徐大錫 (1992년). “한국 신화와 만주족 신화의 비교 연구”. 《古典文學硏究》. Vol.7. 
  • 임계순(任桂淳) (2000년). “청사 -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淸史- 滿洲族이 통치한 中國)”. 《中國史硏究》. Vol.11 (No.1).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