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
윤두서(尹斗緖, 1668년 6월 28일(음력 5월 20일) ∼ 1715년 12월 21일(음력 11월 26일))는 조선의 화가이다. 자는 효언, 호는 공재·종애, 본관은 해남이다. 그의 생전 주요 거주지는 한성과 전라도 해남이었다.
![]() 尹斗緖 | |
---|---|
![]() | |
예술가 정보
| |
별칭 | 호(號)는 공재(恭齋), 호재 |
출생 | 1668년 6월 28일![]() |
사망 | 1715년 12월 21일![]() | (47세)
직업 | 문인, 화가 |
국적 | 조선 |
분야 | 서화 |
부모 | 윤이석(부), 청송 심씨 부인(모) |
배우자 | 전주 이씨 부인 |
자녀 | 윤덕희(장남) 윤덕렬(차남) |
친척 | 외증조부 : 심액(沈詻, 1571년~1654년) 외조부 : 심광사(沈光泗, 1620년~1671년) 외육촌 : 심득경(沈得經, 1673년~1710년) 손녀 : 윤소온(尹小溫, 1730년~1770년) 증손자 : 윤경(尹憬, 한의업 종사) 외증손자 : 정약전(丁若銓, 1758년~1816년) 외증손자 : 정약종(丁若鍾, 1760년~1801년) 외증손자 : 정약용(丁若鏞, 1762년~1836년)[1] |
주요 작품
| |
영향
|
생애편집
윤선도의 증손이며, 윤이후의 넷째아들이다 숙종 때(26세) 진사에 급제하였다. 당쟁이 심하던 시기였기에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며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1]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특히 인물·동식물 등의 그림에 뛰어났다. 조선 후기의 화단의 선구자로 지목받으며,[1]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겸재 정선(謙齋 鄭歚)과 함께 조선의 ‘3재(三齋)’라 불린다. 작품으로 〈노승도〉, 〈산수도〉, 〈자화상〉 등이 있다. 서화뿐만 아니라 유학, 천문지리, 수학, 병법 등 각 방면에 능통한 실학적인 태도는 가풍으로 전해졌다.[1]
작품편집
보물 제1488호 《심득경 초상》
산수화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
초상화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
도석인물화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
지도편집
《동국여지지도》
풍수에 대한 관심으로 <동국여지지도>, <일본여도> 등 회화식 지도를 만들었다.[1]
화보편집
<고씨화보>, <당시화보>와 같은 다양한 화보를 통해 남종화 및 작화 방법론의 유행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1]
문화재편집
보물 제1488호 《심득경 초상》
- 해남윤두서고택 - 대한민국 중요민속문화재 제232호
가족 관계[2][3]편집
윤두서는 윤선도의 셋째 아들 윤예미의 아들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직후 종손 윤이석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 증조부 : 윤선도(尹善道)
- 할아버지 : 윤인미(尹仁美)
- 외조부 : 심광사(沈光泗, 1620년 ~ 1671년) - 종친부 전부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됨, 이조판서 청송군 심액(靑松君 沈詻)의 차남, 청계부원군 심우승(靑溪府院君 沈友勝, 1551년 ~ 1602년)의 손자
- 외증조부 : 심액(沈詻, 1571년 ~ 1654년) - 이조판서 · 판의금부사 · 청송군(靑松君)
관련편집
각주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 ↑ 가 나 다 라 마 바 국립광주박물관 기획전시 공재 윤두서 서거 300주년 기념 공재 윤두서(2014.10.21~2015.01.18.) 팜플렛
- ↑ “최초 천주교 순교자 윤지충과 정약용”. 오마이뉴스. 2007년 3월 19일. 2011년 9월 23일에 확인함.
- ↑ “천주교 첫 순교자 尹持忠의 최후진술과 기적”. 해남윤씨 광주 종친회. 2004년 10월 21일. 2011년 9월 23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디지털 장서각] 1717년 윤덕렬(尹德烈) 등(等) 간찰(簡札)
- ↑ [특별전 <공재 윤두서>http://gwangju.museum.go.kr/sub3/sub2_view.do?s_seq=122&type=null&page=null Archived 2014년 12월 31일 - 웨이백 머신 국립광주박물관 홈페이지 http://gwangju.museum.go.kr/ Archived 2007년 12월 17일 - 웨이백 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