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승
심우승(沈友勝, 1551년 ~ 160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공신이다. 자(字)는 사진(士進), 호는 만사(晩沙), 봉군호는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 본관은 청송이다.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의 문하생이다. 경기도관찰사로 재직 중 순직했다.
심우승
沈友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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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부원군 (靑溪府院君) |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51년 |
출생지 | 조선 |
사망일 | 1602년 |
사망지 | 조선 |
국적 | 조선 |
배우자 | 증 정경부인 순흥 안씨 |
종교 | 유교(성리학) |
심우승 沈友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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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51년 조선 |
사망 | 1602년 조선 |
성별 | 남성 |
국적 | 조선 |
별칭 | 자(字)는 사진(士進), 아호는 만사(晩沙). |
학력 | 1580년(선조 13년) 별시문과에 급제 |
직업 | 호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호성공신 |
작위 |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 |
종교 | 유교(성리학) |
부모 | 아버지 : 심전(沈銓, 경기도 관찰사, 증영의정, 청파부원군(靑坡府院君)) 어머니 : 증 정경부인 전의 이씨(全義 李氏) |
배우자 | 증 정경부인 순흥 안씨(順興 安氏) |
자녀 | 2남 1녀 양자 : 심액(沈詻, 심우준의 아들, 이조판서, 청송군(靑松君)) 심보(沈譜, 박천군수) |
상훈 | 호성공신 2등 |
가계
편집- 기묘명현 심달원의 손자이고, 경기도 관찰사 증 의정부영의정 청파부원군 심전의 아들이다. 심우선, 심우준의 동생이고, 심우단의 형이다. 조선개국공신 청성백 심덕부(靑城伯 沈德符)의 7대손이다.
-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청송군(靑松君) 심액(증이조참판 심우준의 아들)의 양부이다. 또한, 허균의 처 외삼촌이다.
- 남인 산림(南人 山林), 세자시강원 진선, 공조참의, 증이조참판, 청안군(靑安君) 심광수와 종친부 전부, 증이조참판 심광사의 양조부이다.
-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친정 6촌 동생으로, 서인(西人)의 종주 심의겸(沈義謙)은 그의 6촌 형이었다.
-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 이요의 처외할아버지가 된다.
생애
편집고봉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심의겸 등 그의 가까운 친척은 서인이 되었으나, 그는 퇴계 이황의 문인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동인의 당원이 되고, 그의 후손들은 남인 당원이 되었다. 1572년 스승 기대승이 죽자 그는 기대승의 만사를 직접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스승 기대승에 대해 그는 도학의 종통 전수받지 못했지만, 말씀을 생각하니 감회만 깊네(學道傳心未 思言感懷多)라고 폄하하였다.
누이의 손자 이민구에 의하면, 가문의 명망이 있었지만 그는 유교의 예법을 철저히 지켰다 한다. 1573년(선조 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80년(선조 1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조정랑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 공로로 봉렬대부로 승진했다.[1] 그 해에, 사간원 헌납을 역임했다. 1588년 예조의 서리에게 태형을 가했다가 일이 잘못되어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2] 그뒤 성균관 직강으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진주사(陳奏使) 정곤수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후,[3] 사헌부 지평이 되고, 1593년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의 원군이 평양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평양성을 수복하자, 선조는 명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 정곤수와 심우승의 공이라고 여겨, 심우승을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4] 통정대부에 임명된 뒤[5]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곧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6]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지내고, 1595년 승문원 부제조를 거쳐,[7] 1596년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어 조정의 재정이 어려워져 곳간이 비게 되었는데, 그가 부임하고 곳간을 채우게 되자 서애 유성룡은 그에게 곳간의 업무를 맡기고 그를 중용했다. 1597년 호조참판이 되었다.[8]
그 당시, 한양에 주둔한 명나라 병사들의 행패가 심하였지만, 아무도 말 한마디 못하는 실정이었는데, 마침 명나라의 경리 양호가 심우승에게 명나라 병사들의 행패를 물어보니, 심우승이 그 실정을 사실대로 수백자를 써서 양 경리에게 보여주니, 양 경리는 심우승을 추켜세웠으나, 선조는 심우승을 파면시킨다. 양 경리가 선조에게 심우승을 다시 복직시키라고 요청하자,[9][10] 그는 명나라 장병들의 폐해와 패악질을 양호 경리에게 그대로 전달하되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 높이 평가되었다.
양호가 그의 복직을 권고하여 선조는 그를 복직시켰다. 1598년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었다.[11] 한성부 우윤으로 재직 중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1601년 강원도 관찰사[12],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13] 그가 경기감사로 있을 때, 생각하기에 큰 고을도 있고 작은 고을도 있는데, 부역(賦役)은 편중되어서 지방관들이 매번 자기들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 조달하여, 중간에 아전들과 지역 유지, 토호들이 빼먹고 그 편의를 독점하는 것을 봤다. 그는 이런 세금 조달로 작은 고을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여겨, 경기도의 전답 전체를 파악하고, 전, 답을 측량하여 결수(結數)로 나눈 다음, 길이와 넓이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세금, 부역 할당을 균등하게 할 것을 상소하여 실현시키니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드디어 이 방법을 따라 관례로 삼게 됐는데, 갑자기 직무중 사망했다.
사후
편집가족 관계
편집- 심달원 (승문원 판교, 증이조판서)
- 심전 (沈銓, 경기도 관찰사, 증영의정, 청파부원군(靑坡府院君))
- 부인 : 증 정경부인 전의 이씨 - 이한(李翰)의 딸
- 심우선 (장수현감)
- 부인 : 파평 윤씨
- 심양 (사헌부 감찰)
- 심광한 (증이조참판)
- 심상 (심광사의 아들, 사간원 정언, 증이조판서)
- 심광한 (증이조참판)
- 심양 (사헌부 감찰)
- 심우준 (진사, 증이조참판)
- 부인 : 증 정부인 죽산 박씨
- 부인 : 증 정부인 은진 송씨
- 심우승 (沈友勝, 호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호성공신 2등, 증영의정,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
- 부인 : 증 정경부인 순흥 안씨(順興 安氏)
- 심액 (沈詻, 심우준의 아들,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청송군(靑松君), 기로소)
- 부인 : 정경부인 안동 권씨(安東 權氏) - 병조판서 권징(權徵)의 딸
- 심보 (沈譜, 무과 박천군수)
- 심광숙 (沈光淑, 무과 만호)
- 심륜 (沈棆, 첨지중추부사)
- 심득망 (沈得望, 무과 첨절제사)
- 심륜 (沈棆, 첨지중추부사)
- 심광숙 (沈光淑, 무과 만호)
- 심우단 (사헌부 감찰)
- 부인 : 수원 최씨
- 심선 (단천부사)
참조
편집- ↑ 《선조실록》25년(1592) 6월 29일 10번째 기사
- ↑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7월 23일 2번째기사
- ↑ 《선조실록》25년(1592) 12월 8일 2번째 기사
- ↑ 《선조실록》26년(1593) 1월 11일 4번째 기사
-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월 1일 11번째기사
- ↑ 《선조실록》26년(1593) 1월 26일 3번째 기사
- ↑ 《선조실록》28년(1595) 7월 20일 4번째 기사
- ↑ 《선조실록》30년(1597) 7월 29일 1번째 기사
- ↑ 《선조실록》30년(1597) 9월 30일 1번째 기사
- ↑ 《선조실록》30년(1597) 10월 2일 2번째 기사
- ↑ 《선조실록》31년(1598) 1월 27일 4번째 기사
- ↑ 《선조실록》34년(1601) 7월 5일 4번째 기사
- ↑ 《선조실록》34년(1601) 10월 5일 2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