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춘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윤봉춘(尹逢春, 1902년 3월 23일 ~ 1975년 10월 2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영화배우이며, 본관은 파평, 호(號)는 금원(琴園)이다.
윤봉춘 尹逢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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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2년 3월 23일![]() |
사망 | 1975년 10월 21일![]() | (73세)
직업 | 영화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영화연출가, 영화 기획가, 영화 촬영감독, 영화 편집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각색가 |
활동 기간 | 1927년 ~ 1975년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
학력 | 경성 연희전문학교 중퇴 |
친척 | Charly Juratovav(사위), 류우현(사위) 임성자(며느리), 윤대근(친손자) 윤소영(친손녀), 김승용(손녀사위) 윤경아(친손녀), 오현경(사위) Larry Bush(사위), 이옥진(며느리) 윤형(친손자), 윤민희(친손녀) |
자녀 | 윤태옥(장녀), 윤태심(차녀), 윤삼륙(장남), 윤소정(삼녀), 윤태희(사녀), 윤태병(차남) |
수상 | 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학력편집
생애편집
윤봉춘은 1902년 3월 23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1918년 회령신흥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그는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에서 징역 6개월을 복역하였다.
1921년에는 북간도 명동중학을 졸업했으나 1923년 대한독립군 활동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이후 1927년 나운규의 영화 《들쥐》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으며, 1930년에는 《도적놈》으로 영화 감독에 데뷔하였다.
1942년까지 작품 활동을 하다가 친일 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 가입 제의를 받자, 이를 거부하고 영화 활동을 전면 중단함과 동시에 낙향하며 야인으로 지냈다.
1945년 광복 후 활동을 재개한 그는 《윤봉길 의사》, 《유관순》, 《고향의 노래》, 《다정도 병이런가》, 《영원한 내 사랑》, 《인생대학 일년생》 등의 영화를 연출하였으며, 1963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죽은 후 1993년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생전 죽마고우였던 故 나운규와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소속편집
- 前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학력편집
직계 가족 및 친척 관계편집
주요 작품편집
- 《들쥐》 (1927년) - 윤봉춘의 영화 배우 데뷔 작품
- 《잘 있거라》 (1927년)
- 《금붕어》 (1927년)
- 《사랑을 찾아서》 (1928년)
- 《옥녀 (玉女)》 (1928년)
- 《사나이》 (1929년)
- 《벙어리 삼룡》 (1929년)
- 《승방비곡》 (1930년)
- 《도적놈》 (1930년) - 윤봉춘의 영화 감독 데뷔 작품
- 《큰 무덤》 (1931년)
- 《오몽녀》 (1937년)
- 《도생록 (圖生錄)》 (1938년)
- 《신개지 (新開地)》 (1942년)
- 《삼일혁명기》 (1947년)
- 《윤봉길 의사》 (1947년)
- 《유관순》 (1947년)
- 《애국자의 아들》 (1949년)
- 《백범 국민장 실기》 (1949년)
- 《고향의 노래》 (1954년)
- 《처녀별》 (1956년)
- 《논개》 (1956년)
- 《다정도 병이런가》 (1957년)
- 《영원한 내 사랑》 (1958년)
- 《인생대학 일년생》 (1959년)
- 《한말풍운과 민충정공》 (1959년)
- 《진주탑》 (1960년)
- 《황진이의 일생》 (1961년)
- 《여인천하》 (196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