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용
이장용(李藏用, 1201년 ∼ 1272년 2월 28일(음력 1월 28일))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처음 이은 이인기(李仁祺), 자는 현보(顯甫), 호는 낙헌(樂軒)[1], 본관은 인천이다. 이자연(李子淵)의 6대손이다.[2]
생애
편집1220년(고종 7) 문과에 급제해[1] 서경사록(西京司錄)으로 나갔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교서랑(校書郎)·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국자감대사성(國子大司成)·승선(承宣)에 임명되었고[2], 1253년(고종 40) 국자시(國子試)를 주관하여 김중위(金仲偉)·김명(金命) 등 98명을 선발했다.[3]
1256년(고종 43)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258년(고종 45) 정당문학(政堂文學), 1260년(원종 1)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차례로 승진했고, 같은 해 수태위(守太尉)·감수국사(監修國史)·판호부사(判戶部事)가 더해졌다.
1262년(원종 3)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이듬해 수태부(守太傅)·판병부사(判兵部事)·태자태부(太子太傅)로 승진했다.
1264년(원종 5) 몽골에서 원종(元宗)의 입조(入朝)를 요구했을 때 재상들이 모두 하나같이 머뭇대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이장용만이 홀로 이를 받아들일 것을 굳게 주장해 관철시켰고, 본인도 원종을 따라 몽골에 갔다.
이 때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과 사승상(史丞相)을 입 다물게 하여, 몽골 땅에서 해동현인(海東賢人)으로 칭송받았다.
귀국한 후 원종을 잘 수행한 공으로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로 승진하고, 경원군개국백(慶源郡開國伯)에 봉해졌으며,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더해졌다.
1267년(원종 8) 몽골이 병부시랑(兵部侍郞) 흑적(黑的) 등을 고려에 보내 일본(日本)을 입조하게 만들라는 지시를 전달했는데, 이 때 은밀히 흑적을 설득해 이를 중단시키도록 했고[2], 같은 해 동수국사(同修國史) 류경(柳璥), 수찬관(修撰官) 김구(金坵)·허공(許珙)과 함께 신종(神宗)·희종(熙宗)·강종(康宗)의 3대 실록 편찬을 시작했다.[4]
이듬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진했고, 같은 해 개경 환도를 주장했다가 김준(金俊)과 그 일당의 반대에 부딪히자, 여름에는 개경, 겨울에는 강화도로 번갈아 가며 머무르자는 타협책을 내놓아 반대 의견을 무마시켰다.
같은 해 임연(林衍)이 김준을 죽이고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이듬해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킬 때 이장용은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이에 순응했고, 원종이 복위한 후인 1271년(원종 12) 참지정사 최영(崔瑛)과 함께 파면되었다.
이듬해 72세로 졸하자 유언을 따라 화장되었으며, 1275년(충렬왕 원년) 문진(文眞)이란 시호를 추증받았다.[2]
저술
편집『선가종파도 禪家宗派圖』를 저술하고 『화엄추동기 華嚴錐洞記』를 윤색(潤色)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
평가
편집『고려사』는 이장용에 대해 그의 열전에서 이렇게 평했다.
“ | 풍의(風儀)가 아름다웠고 성품이 총명했으며, 경사(經史)를 많이 읽어 음양(陰陽)·의약(醫藥)·율력(律曆)에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문장을 지으면 청경(淸警)하고 우섬(優贍)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