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신종
신종(神宗, 1144년 8월 11일 (음력 7월 11일) ~ 1204년 2월 15일 (음력 1월 13일)은 고려 제20대 국왕(재위: 1197년 ~ 1204년)이다. 휘는 탁(晫), 자는 지화(至華),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경공정효대왕(敬恭靖孝大王) 묘호는 양릉(陽陵)이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의 다섯째 아들이자 의종과 명종의 막내동생이다.
![]() 高麗 神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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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
고려의 제20대 국왕 | |
전임 | 명종 (明宗) |
후임 | 희종 (熙宗) |
섭정 | 최충헌(崔忠獻) 1197년~1204년 |
이름 | |
휘 | 왕탁(王晫) 초명 왕민(王旼) |
이칭 | 지화(至華) |
묘호 | 신종(神宗) |
시호 | 경공정효대왕(敬恭靖孝大王) |
신상정보 | |
출생일 | 1144년 8월 11일[1] |
사망일 | 1204년 2월 15일[2] | (59세)
왕조 | 고려 왕조(高麗 王趙) |
가문 | 개성(開城) |
모친 | 공예왕후 (恭睿王后) |
배우자 | 선정왕후(宣靖王后) |
자녀 | 희종(熙宗) 양양공(襄陽公) 효회공주(孝懷公主) 경녕궁주(敬寧宮主) |
종교 | 불교(佛敎) |
생애편집
신종은 평량공(平凉公)에 봉해진 뒤 최충헌 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으며 1198년,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었고 관서(關西) 민가의 안대(安碓)를 금지하였다. 같은 해 만적의 난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에는 명주(강릉)와 동경(경주), 뒤이어 진주와 전주, 합주(합천) 등지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1199년에 최충헌이 문무관의 인사행정을 도맡았는데 이로부터 모든 실권은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같은 해에 수양장도감(輸養帳都監)과 오가도감(五家都監)을 두었다. 1202년에 탐라(제주도)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소부소감(少府少監)인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郞將) 이당적(李唐積)을 안무사(安撫使)로 보내어 평정하였다. 1204년 등창이 심하여 태자에게 양위하였다. 시호는 경공정효(敬恭靖孝)이며 능은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양릉(陽陵)이다.
고려 문종과의 관계편집
의종, 명종, 신종은 문종의 4대손이면서, 문종-숙종-예종-인종으로 이어져, 문종의 서자인 양헌왕의 아들이자 손자인 강릉공 온(江陵公 溫)은 의종의 비인 장경왕후, 명종의 비인 광정왕후, 신종의 비인 선정왕후의 친정아버지가 된다.
가계편집
고려 제20대 국왕 | 신종 정효대왕 神宗 靖孝大王 |
출생 |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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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4년 8월 11일 (음력 7월 11일) 고려 개경 정궁 |
1204년 2월 15일 (음력 1월 13일) (59세) 고려 개경 덕양후 사저 |
부모편집
생몰년 | 부모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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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인종 仁宗 | 1109년 - 1146년 | 예종 睿宗 문경태후 이씨 文敬太后 李氏 |
제17대 국왕 |
모 | 공예왕후 임씨 恭睿王后 任氏 공예태후 恭睿太后 |
1109년 - 1183년 | 임원후 任元厚 진한국대부인 이씨 辰韓國大夫人 李氏 |
왕비편집
시호 | 생몰년 | 부모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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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왕후 김씨 宣靖王后 金氏 | ? - 1222년 | 강릉공 江陵公 왕온 王溫 김씨 金氏 |
왕자편집
이름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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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희종 熙宗 |
영 韺 | 1181년 - 1237년 | 선정왕후 김씨 | 성평왕후 임씨 成平王后 任氏 | 제21대 국왕 |
2 | 양양공 襄陽公 | 서 恕 | 생몰년 미상 | 미상 |
왕녀편집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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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효회공주 孝懷公主 | 1183년 - 1199년 | 선정왕후 김씨 | 하원공 河源公 왕춘 王瑃 | |
2 | 경녕궁주 敬寧宮主 | 생몰년 미상 | 회안공 淮安公 왕정 王侹 |
신종이 등장한 작품편집
각주편집
전임 명종 |
제20대 고려 왕 1197년 - 1204년 |
후임 희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