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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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간왕(靖簡王, 1021년 음력 8월 25일 ~ 1069년 윤11월 4일)은 현종의 넷째 아들로, 고려 전기의 왕족, 문신이며 추존 제후왕이다.[1] 생전의 작위는 개성국공(開城國公), 평양공(平壤公)이었다. 훗날 왕으로 추존되고 정간(靖簡)의 시호를 받았다. 본관은 개성(開城)이고, 본명은 왕기(王基)이다.[2]
정간왕
靖簡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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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의 왕자 | |
고려의 추존 제후왕 | |
이름 | |
휘 | 왕기(王基) |
시호 | 정간(靖簡) |
작호 | 평양공(平壤公) · 개성국공(開城國公) |
신상정보 | |
출생일 | 1021년 8월 25일(음력) |
출생지 | 고려 개경 연덕궁 |
사망일 | 1069년 11월 4일(음력) | (48세)
부친 | 현종 |
모친 | 원혜왕후 김씨 |
배우자 | 미상 |
자녀 | 왕진 · 왕거 · 낙랑공 왕영 · 정의왕후 |
생애
편집1021년(현종 12년) 8월 25일, 현종과 원혜왕후의 아들로 연덕궁에서 태어났다. 덕종, 정종의 이복동생이며 문종의 친동생이다.
1031년(현종 22년) 홍인숭효광덕공신 수태위 겸 상서령(弘仁崇孝光德功臣 守太尉兼尙書令)에 임명되고 개성국공(開城國公)에 봉작되었다. 1034년(정종 즉위년) 수태보(守太保)로 임명되었다.
수태보 임명 책문
- 본지(本枝)를 굳게 하여 영원히 이어가게 한 것은 역대의 좋은 계책[令猷]이고,
- 보옥(寶玉)을 나누어 줌으로써 친족의 우애를 돈독히 한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규범이니,
- 이러므로 척리(戚里)에게 높은 작위를 책봉하여 왕가(王家)를 지키는 울타리[藩屛]로 삼는다.
- 이미 으뜸가는 공로가 있거든 제왕이 내리는 총애[寵數]을 더해 준다.
- 아아! 너 왕기는 왕손[靈源]으로 태어나 큰 그릇으로 이름이 났으며
- 충정의 뜻을 돈독히 하여 몸을 부지런히 하여 나랏일을 보좌하고 있다.
- 이에 구석(九錫)을 내려주는 규범을 따르고 삼공(三公)의 자리를 주며,
- 진기한 물품과 아울러 관복[命服]도 내린다.
- 이제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어 예를 갖추어 책명(冊命)을 내려 너를 수태보로 삼으니,
- 나머지 품계(品階)와 훈작(勳爵)은 아울러 이전의 것과 같이한다.
- 나의 큰 가르침[丕訓]을 체화(體化)하여 힘써 정성을 다하도록 하라.
문종 즉위 후에 평양공(平壤公)으로 진봉되었다. 문종 즉위 초에 평양공이 병에 걸리자 문종은 직접 어의를 보내 병을 돌보게 하였다. 1049년(문종 3년) 수태사(守太師) 겸 내사령(內史令), 1061년(문종 15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1069년(문종 23년) 윤11월 4일 병으로 사망하였다.[3] 그의 딸 정의왕후 왕씨는 순종의 왕비가 되었으므로 순종의 장인이 된다.[4][5] 사후 정간왕(靖簡王)으로 추증되었다.
1072년(문종 26년), 교위(校尉) 거신(巨身) 등이 평양공 생전에 문종을 폐하고 평양공 왕기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모반사건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평양공의 아들인 왕진이 해남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