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조선)
예종(睿宗, 1450년 1월 23일(음력 1월 1일) ~ 1470년 1월 9일(음력 11월 28일), 재위 1468년 ~ 1470년)은 조선의 제8대 국왕이다. 본명은 황(晄), 본관은 전주, 자는 명조(明照) 또는 평남(平南). 묘호는 예종이며 시호는 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이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1468년에 즉위했으나 1년 6개월만에 사망하였다.
예종
睿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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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능인 창릉 | |
제8대 조선 국왕 | |
재위 | 1468년 9월 7일 ~ 1469년 11월 28일 (음력) |
즉위식 | 수강궁 중문 |
전임 | 세조 |
후임 | 성종 |
조선국 왕세자 | |
재위 | 1457년 12월 15일 ~ 1468년 9월 7일 (음력) |
즉위식 | 경복궁 근정전 |
전임 | 의경세자 (덕종) |
후임 | 왕세자 융 (연산군) |
이름 | |
휘 | 이황(李晄) |
별호 | 해양대군(海陽大君) |
묘호 | 예종(睿宗) |
시호 | 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 (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
능호 | 창릉(昌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300-91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50년 1월 1일(음력)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수양대군 저택 |
사망일 | 1469년 11월 28일(음력) | (19세)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미당 |
부친 | 세조 |
모친 | 정희왕후 윤씨 |
배우자 | 장순왕후 한씨 · 안순왕후 한씨 |
자녀 | 3남 2녀 (3남 2녀)
인성대군 · 제안대군 · 현숙공주 · 혜순공주 · 성종(양자) |
생애
편집탄생과 세자 책봉
편집1450년(세종 32년) 1월 1일, 세종의 둘째 아들인 왕자 수양대군(세조)과 낙랑부대부인 윤씨(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으며, 형인 의경세자가 1457년(세조 3년) 9월에 훙서하자 같은해 12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60년(세조 6년) 한명회의 딸 한씨(장순왕후)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세자빈 한씨는 1461년(세조 7년) 11월 30일,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며칠뒤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 3년상을 마친 후인 1463년(세조 9년) 새로이 세자빈을 맞이하지 않고 간택 후궁인 한백륜의 딸 소훈 한씨(안순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즉위와 치세
편집1468년(세조 14년) 9월 7일, 병환이 깊어진 세조의 선위로 수강궁(壽康宮) 중문(中門)에서 19세에 즉위하였다. 상왕으로 물러나게 된 세조는 다음날인 8일에 승하했다. 즉위는 했으나 어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행한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1] 또한 선왕 세조가 만든 원상제도가 시행되어 실권은 없었고, 사실상에 정책을 결정한것은 세조때의 공신들인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파들 이었다.[1]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468년에 남이의 옥 사건이 일어났다. 1469년에는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에서 일본과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고, 그 외에도 병영에 딸려 있는 논과 밭을 일반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매관매직을 통해 공신들이 전횡을 일삼자 분경(奔競)을 금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2][3]
사망
편집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경국대전》이 완성되었으나 이를 반포하지 못한 채 1469년 12월 31일 (음력 11월 28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 에 자미당(紫薇堂)에서 승하하였다. 사인은 봉와직염의 악화로 인한 패혈증으로 추정된다. 묘호는 예종 자신의 유지에 따라 예종(睿宗)이며, 시호는 흠문성무의인소효(欽文聖武懿仁昭孝)이다.
예종이 승하한 당일 날, 왕대비였던 정희왕후의 명으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정희왕후와 수빈 한씨 (인수대비)와 자을산군의 장인이었던 한명회 등의 정치적 결탁으로 인한 결과였다. 왕위계승서열 첫 번째인 원자(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는 3살로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제외되었고, 계승서열 두 번째인 의경세자의 장자 월산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로 후계자에서 제외되었다. 정희왕후와 수빈 한씨 (인수대비)와 자을산군의 장인이었던 한명회 등의 정치적 결탁으로 인한 결과였다. 이후 원자는 제안대군으로 봉해졌으며, 평원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번째 아들)의 후사로 입적되었다.
능묘
편집가족 관계
편집
부모편집
왕비편집
후궁편집
왕자편집
왕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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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이 등장하는 작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1996년 p161
- ↑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년 p272
- ↑ 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 (1)> 역사의아침 2011년 p71
-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공빈최씨묘'
- ↑ 《성종실록》 226권, 성종 20년(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3월 16일 (갑술)
예종의 상궁 기씨가 죽다 - ↑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1463년 명 천순(天順) 7년) 12월 21일 (을사)
사헌 감찰 이의생의 첩의 딸을 뽑아 동궁에 들이다
사헌 감찰(司憲監察) 이의생(李義生)의 첩(妾)의 딸을 뽑아서 동궁(東宮)에 들였다. - ↑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11월 28일 (갑신)
- ↑ 임사홍의 아들
제8대 조선 국왕 | ||
전 임 세조 |
1468년 ~ 1469년 | 후 임 성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