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공삼
주공삼(朱孔三, 1875년 ~ ?)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시대 관료직을 지낸 일제강점기 시대의 개신교(장로회) 목사이며, 시인으로도 활약하였다.
주공삼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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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이름 | 朱孔三 |
당교회 | 평안남도 평양 연화동교회 목사 |
기타 | 아명(兒名)은 주진우(朱珍雨) |
개인정보 | |
출생 | 1875년 |
사망 | ? |
교파 | 개신교(장로회) |
가족 | 자녀는 4남 4녀(그 중 장남 주요한(시인 겸 정치가), 차남 주요섭(소설가 겸 대학 교수), 4남 주영섭(극작가 출신)) |
재직 | 목회자 겸 시문학가 활동 |
전직 | 대한제국 평안남도 대동군 군서기관 |
학력 | 1910년 평안남도 평양신학교 전문학사 |
주요 이력
편집일생
편집출생과 생애 초기
편집평안남도 평양 출생이다. 아명(兒名)은 주진우(朱珍雨)였는데 6세 시절이던 1880년에 주공삼(朱孔三)으로 개명(改名)하였다. 공삼(孔三)이라는 그의 이름은 공자(孔子)와 주자(朱子) 뒤에 주진우(朱珍雨) 그 자신이 있다는 의미로, 그의 부친이 개명하여 지어 준 것이다.
1893년 음서로써 천거되어 그 후 1899년까지 6년간 대한제국 조선 황조 하급 관료직을 지낸 그는 1899년 대한제국 관료직을 전격 퇴임 선언하였다.
목회자 활동
편집시인 주요한(朱曜翰), 소설가 주요섭(朱耀燮), 극작가 주영섭(朱永涉) 형제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고, 유교 성리학에서 개신교 장로회로 개종한 후에는 1910년 평안남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나오면서 그 계기로 개신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1년 12월에서부터 1914년 3월까지 일본에 3년 남짓 체류한 뒤 귀국, 1935년 이후에는 사회사업에도 관여하였다.
광복 이후의 말로
편집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월남하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족 관계
편집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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