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제임스 얼 “지미” 카터 주니어(영어: James Earl Carter, Jr., 1924년 10월 1일~)는 민주당 출신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1977-81)이다.

지미 카터
Jimmy Carter
제임스 얼 카터(1978년)
제임스 얼 카터(1978년)
미국제39대 대통령
임기 1977년 1월 20일~1981년 1월 20일
부통령 월터 먼데일
전임: 제럴드 포드(제38대)
후임: 로널드 레이건(제40대)

조지아주의 제76대 주지사
임기 1971년 1월 12일~1975년 1월 14일
부주지사 레스터 매독스
전임: 레스터 매독스(75대)
후임: 조지 버스비(77대)

신상정보
출생일 1924년 10월 1일(1924-10-01)(100세)
출생지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스
국적 미국
학력 조지아 남서 주립대학교
조지아 공과대학교
유니언 칼리지
미국 해군사관학교
정당 민주당
부모 부 제임스 얼 카터 시니어(1894년~1953년)
모 릴리안 고디 카터(1898년~1985년)
배우자 로절린 카터 (1946년 결혼~2023년 사별)
자녀 장남 잭 카터(1947년~)
차남 칩 카터 (1950년~)
삼남 도넬 카터(1952년~)
장녀 에이미 카터 (1967년~)
종교 침례교
서명
웹사이트 http://www.cartercenter.org/index.html
서훈 노벨 평화상(2002)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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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 조지아 주 의회 상원의원
  • 1971.01. 제76대 조지아 주지사 (1971.1.12.~1975.1.14.)
  • 1977.01. 제39대 미국 대통령 (1977.1.20.~1981.1.20.)
  • 1999.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훈
  • 2002. 노벨 평화상 수상
  • 2007. 제49회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낭독 앨범상 수상
  • 2016. 제58회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낭독 앨범상 수상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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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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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는 조지아주 섬터 카운티 플레인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고, 그 후 해군에 들어가 전함·원자력·잠수함의 승무원으로 일하였다. 1953년 미국 해군 대위로 예편하였고 이후 땅콩·면화 등을 가꿔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별명이 "땅콩 농부" (Peanut Farmer)로 알려졌다.

정계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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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조지아주 상원 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으나, 그 선거가 부정선거 였음을 입증하게 되어 당선되고, 1966년 조지아 주지사 선거에 낙선하지만, 1970년 조지아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됐다. 대통령이 되기 전 조지아주 상원의원을 두번 연임했으며,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 지사로 근무했다.[1] 조지아 주지사로 지내면서, 미국에 사는 흑인 등용법을 내세웠다.

대통령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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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을 올리는 카터

1976년 미합중국 제39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도덕주의 정책을 내세워서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에너지 개발을 촉구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3][4][5]

외교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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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데이비드에서 사다트베긴과 함께

카터는 이집트이스라엘을 조정하여 캠프 데이비드에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수상과 함께 중동 평화를 위한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공화당과 미국의 유대인 단체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1979년, 양국 간의 평화조약이 백악관에서 이루어졌다.

소련과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SALT II)에 조인했다.

카터는 1970년대 후반 당시 대한민국 등 인권 후진국의 국민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취임 이후 계속해서 도덕정치를 내세웠다.

임기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건으로 인해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반공국가들의 보이콧을 하였다.

그는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의 인질 구출 실패로 인한 원인으로, 1980년 제40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하며 재선에 실패하였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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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는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대통령 중 하나다. 인권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한때 한미 관계가 불편하기도 했다. 1978년 대한민국에 대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위협에 대비해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면서, 1982년까지 3단계에 걸쳐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와 정보기관·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주한미군은 완전철수 대신 6,000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6]. 또한 박정희 정권의 인권 문제 등과의 논란으로 불협화음을 냈으나, 1979년 6월 하순, 대한민국을 방문했는데 관계가 다소 회복되었다. 1979년~1980년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변기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그는 이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고, 이는 후에 대한민국 내에서 고조되는 반미 운동의 한 원인이 됐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해 그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을 조문사절로 파견했다. 12·12 군사 반란5.17 쿠데타에 대해 초기에는 강하게 비난했으나, 미국 정부가 신군부를 설득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게 됐다.

퇴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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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남수단 독립 국민투표에 업저버 사절단을 지도한 카터

퇴임 이후 민간 자원을 적극 활용한 비영리 기구인 카터 재단을 설립한 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제 3세계의 선거 감시 활동 및 기니 벌레에 의한 드라쿤쿠르스 질병 방재를 위해 힘썼다. 미국의 빈곤층 지원 활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 국제 분쟁 중재 등의 활동도 했다.

카터는 카터 행정부 이후 미국이 북핵 위기, 코소보 전쟁, 이라크 전쟁과 같이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최후로 선택하는 전통적 사고를 버리고 군사적 행동을 선행하는 행위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 하며 미국의 군사적 활동에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국제 분쟁 조정을 위해 북한의 김일성, 아이티의 세드라스 장군, 팔레인스타인의 하마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정권 같이 미국 정부에 대해 협상을 거부하면서 사태의 위기를 초래한 인물 및 단체를 직접 만나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힘썼다. 이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와 갈등을 보이기도 했지만, 전직 대통령의 권한과 재야 유명 인사들의 활약으로 해결해 나갔다.

1978년에 채결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이행이 지지부진 하자 중동 분쟁 분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3년 퇴임 후 직접 이스라엘과 팔레인스타인의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 내는 데도 성공했다.

 
워싱턴 행렬 50주년을 맞는 날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2013년)

1993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행동이 임박했으나, 미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미국과 북 양국의 중재에 큰 기여를 해 위기를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주선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주일 후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였으므로 김일성김영삼 정상회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 세계의 인권문제에서도 관심이 깊어 유엔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제도를 시행하도록 노력하여 독재자들의 인권 유린에 대해 제약을 하고, 국제형사재판소를 만드는데 기여하여 독재자들 같은 인권유린범죄자를 재판소로 회부하여 국제적인 처벌을 받게 하는 등 인권 신장에 크나 큰 기여를 했다.

2011년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북한을 3일간 방문했다.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의 유죄판결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한국 대법원에 발송했다.

둘째 아들 칩 카터가 가수 윌리 넬슨과 백악관 지붕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사실을 털어놨다.

2020년에는 28년만에 대통령 선거에서 고향 조지아 주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 기쁨을 맛봤다.

2021년 1월 20일에 행할 예정인 조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불참을 결정했다. 불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코로나19의 유행에 따른 방역 지침을 지키기 위해서로 보인다고 발혔는데 그 대신,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2015년 간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아서 좋은 결과가 나오긴 했으나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된 것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 한다. 암은 흑색종으로 진단되었으며 간에서 종양이 2.5cm 절제되었다. 허나 암이 뇌에 전이된 것이 발견되었고, 2015년 8월 20일(현지시간) 오후에 첫 방사능 치료를 했다.

그런데 그가 암을 이겨낸 지 불과 2주 만에 그의 손자인 제레미 카터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수면 중 심장마비로 고통없이 사망했으며 심장병에 걸린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22년 10월 1일, 98번째 생일을 맞이했으며 고향인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땅콩 축제에 참가했다.

2023년 2월 18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호스피스 간병에 들어갔다는 지미 카터 센터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진단을 받고 그동안 자택에서 투병 중이었으며 현재는 암세포가 뇌와 간 등으로 전이되어 더 이상의 연명치료를 포기하고 남은 시간은 가족들과 함께 보낼 것이라고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보통 만성질환이나 불치병으로 투병하는 시한부 환자들이 사망하기 전에 거치는 과정이기에 이제 그의 삶도 오래 남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의 동지이자 정치적 후배인 조 바이든 역시 이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그의 손자인 조시 카터는 8월 19일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가 '마지막 장'에 들어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터는 2015년 당시에도 뇌암이 4기까지 진행되었으나 끝내 완치했었고 8년이 지난 현재는 그보다 더 나이가 든 만큼 카터가 곧 사망할 것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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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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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의 이상주의적 도덕주의 외교정책은 현실에서 많은 좌절을 겪었으며 특히 인권외교라는 멋들어진 표어와는 정반대되는 차우세스쿠 같은 독재자 가운데에서도 막장 독재자들과 어울리는 위선적인 행태는 카터와 미국의 외교에 큰 오점으로 남았으며, 거기에 비록 닉슨 독트린의 연장선상이긴 하지만 여러 친중적인 행보들은 21세기 신냉전 체체에 들어서 미중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다시 비판받고 있다.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발목이 잡혀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지만 이란 사태는 미국 내 이란 재산을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워서 사실상 카터가 해결한 것이었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 등으로 퇴임 이후에 훨씬 더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 중에 특이한 인물로 남았다.

'도덕주의 외교' - 반론과 재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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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2년 말 인권과 중재 역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은 물론 퇴임 후에도 지속적으로 여러 장기 집권중인 독재자들을 만나왔는데, 그와 만난 독재자들 중 절대 다수가 얼마 되지 않아 최후를 맞이하게 되며 '독재자의 사신'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렇게나 상당히 자신들의 목적과 한계를 잘 파악한, 매우 정교한 외교안을 뜬구름 잡는다고 느낀다면, 인권 개념 자체를 추상적이고 비현실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이다. 다르게는, 무작정 모든 인류의 인권을 지켜주고 상향시키지 못했기에 실패했다는 식의 비판이 된다.

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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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메이킹을 통해 어필한 레이건에 가려져서 그렇지 실질적으로 소련을 군사력으로 압도하려 했던 핵심인물이었다. M1 에이브람스, F-117, M270 MLRS 등 밀리터리 매니아들에게 잘 알려진 주요 무기체계들이 카터 정권 때 집중적으로 추진되었으며 국방비도 오히려 증가되었다. ALCM, LGM-118A 피스키퍼, B-2, UGM-96 트라이던트 I 등 전략무기체계의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었다. 카터 정권 때 추진된 대규모 군사력 프로젝트는 후에 레이건 행정부의 큰 군사적 자산이 되었다. 안 그래도 미국 경제력의 반도 안되는 소련은 질적으로 우월해진 미국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해 거대한 재래식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다가 군비경쟁을 감당 못하고 경기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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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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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선거인단) 결과 당락
1970년 선거 조지아 주지사 76대 민주당      59.28% 620,419표 1위  
1976년 선거 미국의 대통령 39대 민주당   50.08% 40,831,881표 (297명) 1위  
1980년 선거 미국의 대통령 40대 민주당     41.02% 35,483,820표 (49명) 2위 낙선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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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지아주 백과사전. “Jimmy Carter”. Georgia Humanities Council. 2007년 11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9월 4일에 확인함. 
  2. 카터 에너지 계획의 내용과 전망
  3. 카터미대통령의 에너지 계획 (카터美大統領의 에너지 計劃)
  4. ... 에너지대책 과 평가
  5. 카터 대통령의 연설
  6.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신문”. 2012년 7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2월 21일에 확인함.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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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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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9대 미국 대통령  
전임
제럴드 포드
1977년 1월 20일~1981년 1월 20일 후임
로널드 레이건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전임
미국의 여성들
제50대 타임 올해의 인물
1976년
후임
안와르 사다트
전임
제럴드 포드
미국의 국가 원수
1977년 1월 20일~1981년 1월 20일
후임
로널드 레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