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회는 통일 신라ㆍ고려 시대에 해마다 토속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의식이다. 음력 10월 15일은 서경에서, 11월 15일은 중경에서 팔관회를 지냈다. 술, 다과와 놀이를 즐기고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빌었다.

팔관회는 562년에 팔관지법(八關之法)을 둔 것이 처음이다.[1] 그 후 전사한 병사들을 위하여 외사(外寺)에서 열린 때도 있듯이 처음에는 각 사원을 중심으로 개설되었지만 고려 때에는 국가 행사로 바뀌었다.[1]

고려 태조 때 중요성이 강조되어 성종(成宗) 때를 제외하고는 연등회와 함께 국가의 2대 의식의 하나가 되었다.[2]

팔관회는 음력 11월 15일음력 10월개경서경에서만 행했는데, 불교적인 색채는 거의 띠지 않았고, 천령(天靈) · 5악(五岳) · 명산(名山) · 대천(大川) · 용신(龍神) 등 토속신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으로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이 있어 많은 의식과 하례(賀禮)가 있었고, 무역도 행해졌다 한다.[2] 고려 왕조를 통하여 여러 변화를 보였으나 국가 최고의 의식으로 계속되었다.[2]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배불정책(排佛政策)에 따라 철폐되었다.[2]

신라의 팔관회 편집

신라 팔관회의 성격 편집

팔관회란 불교의 계율인 팔계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불사의식(佛事儀式)이다.[3] 즉, 근본 5계인 불살생(不殺生) · 불투도(不偸盜) · 불망어(不妄語) · 불음주(不飮酒)에다 부좌고대광상(不坐高大廣床) · 부착화만영락 · 불습가무희악(不習歌舞戱樂)을 지켜 행하려는 종교적인 의식이며, 윤리적 덕목으로 삼아야 할 것을 매월 7일 · 15일에 포살(布薩) · 설경(說經)하는 것이다.[3] 이러한 종교적인 행사가 신라에서는 중국의 양무제(재위 502-549)때에 이룩된 무차대회(無遮大會)의 형식을 넘어서 전몰자의 위령제로 변용되게 되었다.[3]

신라 팔관회의 시원은 백고좌법회와 같이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한 진흥왕 12년(551)부터 비롯된다.[3] 즉, 진흥왕은 전몰장병을 위하여 팔관법회를 외사(外寺)에 베풀어 7일 동안이나 행하였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제4 진흥왕조에 보인다.[3]

신라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항상 침공하였다.[3] 이때 무수한 신라 장병들이 전몰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3] 이 전몰장병의 추모를 위하여 팔관회 의식이 호국적이고 군사적인 행사로 변용된 것이다.[3]

더욱이 자장(慈藏)이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하여 황룡사9층탑을 세우기를 간청하였는데, 그 탑은 국방적이고 호국을 상징하는 탑이었다.[3] 이 탑이 이룩된 이후 팔관법회를 황룡사에서 개설하여 이웃 9개국이 신라에 조공을 바칠 것을 널리 알렸으며, 이 탑으로 말미암아 신라는 영원히 안위할 것을 선포하였다.[3]

이처럼 신라의 팔관법회는 불교적인 팔계수행을 덕목으로 삼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국가 수호와 전몰 장병을 위한 위령제 형식이 가미된 것이었다.[3] 또한 신라 팔관회는 10월에 개최 ·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고대의 한국에서 10월을 중히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 고유의 무속적(巫俗的)인 일면도 저버리지 않고 불교와 호국, 장병 위령을 위한 것이 복합적으로 습용(襲用)된 신라 의식의 하나였다.[3]

신라 팔관회의 의식 편집

신라의 팔관회(八關會)는 하늘을 섬기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고풍(古風)으로 선랑(仙郞) · 국선(國仙) · 선가(仙家)가 주재하였다.[4] 이 팔관회 의식에서는 국선이 가무를 아뢰어 용천(龍天)을 환열(歡悅)시켜 복을 비는 제도였기 때문에 백희가무(百戱歌舞)를 성히 하였다.[4] 신라 진흥왕 때에 생겨서 숭상받은 국선 또는 화랑(花郞)은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 때에도 성행하다가 고려 예종 때부터 점점 쇠퇴하였다.[4]

고려의 팔관회 편집

고려 팔관회의 성격 편집

고려 태조 왕건(王建)도 신라의 전례를 답습하여 매년 11월에 팔관회를 시설하였다.[2][5] 이 법회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일률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나, 성대한 국가적 행사로 거행되었다.[5] 고려 팔관회도 신라후삼국의 영향을 받아 호국사상이라든가 미륵신앙 등의 고대적 종교제례(宗敎祭禮) 형식이 가미되었다.[5]

고려의 팔관회는 궐내와 사찰에서 베풀어졌는데 사찰의 경우는 대개 법왕사(法王寺)에서 행하여졌다.[5] 팔관회가 법왕사에서 행하여진 것은 팔관회법회의 중요성과 아울러 법왕사의 지위에 연유한 것이다.[5] 즉, 고려 태조 왕건이 즉위하여 제일 먼저 창건한 사찰이 법왕사였으며, 그는 또 국가를 진호하고 호국하는 길은 팔관회를 잘 모시는 것이라고 훈요십조에 못박았던 것이다.[5]

그 외에도 고려에서 팔관회를 중히 여긴 것은 지리풍수도참 내지 오행사상에 기원하는데, 동방은 목위(木位)요, 목위의 색은 청이며, 이것을 수로 돌리면 8이 된다고 하였다.[5] 이 "8수의 사상"은 이미 있었던 팔관회의 8이라는 수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5] 이러한 8수사상인종묘청(妙淸)이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5] 여기의 8성은 국내 명산을 뽑아 8산이라 하고 그 8산에 살고 있는 선불(仙佛)이 나라를 비보(裨補)하여 준다고 강조한 팔관회의 방계적인 발전을 보인 것이다.[5]

한편 팔관회는 비록 국가를 위한 법회의식이긴 하였지만 국가의 경제를 피폐하게 하여 한동안 중지되기도 하였다.[5]

팔관회의 거행을 위한 행정적 조치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즉 팔관보(八關寶)가 그것이다. 팔관보는 《고려사백관지(高麗史百官志)》·《제사도감각색(諸司都監各色)》에 보이는데 팔관회 운용에 관한 재정을 담당하는 관직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5] 팔관보와 아울러 팔관회에 관한 관직 또는 관아로서 팔관사(八關司)를 두었다. 이처럼 고려의 팔관회는 국가비보를 위한 호국법회였다.[5]

연등회·팔관회·백희 편집

고려의 사회에는 시민들을 위한 고정된 오락장은 없었으나 그 대신 국가 명절과 각종 불교행사가 행하여져서 음악 · 가무 · 백희(百戱) 등으로 제불(諸佛)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즐겁게 하였고, 그로써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빌었다.[6] 또 이러한 국가적 행사를 통해 군신(君臣)이 동락(同樂)하고 일반 백성까지 즐겼다.[6]

고려에는 아홉 가지 명절, 즉 원정(元正) · 상원(上元) · 한식(寒食) · 상사(上巳) · 단오(端午) · 추석(秋夕) · 중구(重九) · 동지(冬至) · 팔관(八關) 등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성대한 행사가 상원(上元)에 행하던 연등회(燃燈會:나중에는 2월 연등으로 되었음)와 중동(仲冬)에 행하던 팔관회(八關會)였다.[6]

연등회불사(佛事)에 관한 것이며, 팔관회는 토속신(土俗神)을 위한 것으로, 그 대상은 달랐으나 의식절차에 있어서는 양자가 동일했다.[6] 고려 태조(太祖)는 신라의 유풍인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키고, 선풍(仙風)인 팔관회와 사불(事佛)하는 연등회(燃燈會)를 분명히 구별했다.[6] 그 후 유교주의(儒敎主義)를 택한 성종(成宗)은 이를 폐지하였으나 현종(顯宗) 때에 회복되어 13세기 말 쇠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6]

전후 300년을 내려오는 동안 의식(儀式)의 내용이 변모하여 신라 팔관회의 유풍이던 의식의 중심으로서의 국선(國仙)이 없어지고, 세속인인 양반과 가산이 넉넉한 자로 하여금 대행시켜, 종교적인 제례에서 속인의 백희(百戱)를 수반하는 의식으로 변모하면서 차차 세속화하여 갔다.[6] 백희(百戱)란 죽방울놀리기 · 장대타기 · 줄타기 · 땅재주 · 사발돌리기 · 광대탈 · 꼭두각시놀음 등 신라 때의 가무백희 · 5기(五伎) 등의 전승이라 볼 수 있는 놀이들인데, 채붕(綵棚)이라 불리는 오색비단 장막을 늘인 다락 위에서 연희되었으며, 팔관회와 연등회(燃燈會) 등 국가적인 경사 때에 상연되었다.[6]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참고 문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