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고려)
예종(睿宗, 1079년 2월 17일(음력 1월 7일), 율리우스력 2월 11일 ~ 1122년 5월 22일(음력 4월 8일), 율리우스력 5월 15일)은 고려의 제16대 국왕(재위: 1105년 11월 17일(음력 10월 2일), 율리우스력 11월 10일 ~ 1122년 5월 22일(음력 4월 8일), 율리우스력 5월 15일)이다.
예종
睿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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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고려 국왕 | |
재위 | 1105년 11월 17일 ~ 1122년 5월 22일 (양력) |
즉위식 | 개경 중광전 |
전임 | 숙종 |
후임 | 인종 |
고려국 왕태자 | |
재위 | 1100년 3월 17일[1] ~ 1105년 11월 17일 (양력) |
전임 | 왕태자 욱 (헌종) |
후임 | 왕태자 구 (인종) |
이름 | |
휘 | 왕우(王俁) |
묘호 | 예종(睿宗) |
시호 | 명렬제순문효대왕(明烈齊順文孝大王) |
능호 | 유릉(裕陵) |
신상정보 | |
출생일 | 1079년 2월 17일(양력) |
사망일 | 1122년 5월 22일(양력) | (43세)
부친 | 숙종 |
모친 | 명의왕후 유씨 |
형제자매 | 8남 4녀 중 장남 |
배우자 | 경화왕후 이씨, 순덕왕후 이씨, 문정왕후 왕씨 |
자녀 | 4남 4녀
인종, 승덕공주, 흥경공주 왕각관, 광지대선사, 왕각예, 왕녀 2명 |
휘는 우(俁), 자는 세민(世民), 묘호는 예종(睿宗), 시호는 명렬제순문효대왕(明烈齊順文孝大王), 능호는 유릉(裕陵)이다. 숙종과 명의태후 유씨(明懿太后 柳氏)의 아들이다.
생애
편집숙종의 여진 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를 간직하고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 정벌에 힘써 1107년에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으로 하여금 30만의 별무반 중 17만 7천명을 주어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섬멸하고 이듬해에는 동북 9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여진족의 침입과 9성 방비의 어려움,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로 인하여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반환하였다.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여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다.
1112년에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시약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이자겸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한안인(韓安仁)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하였다.
1115년 고려의 속국이었던 동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칭한 후 거란(요)에 적대하자, 요(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거부하였다.
1116년, 청연각과 보문각을 짓고 학사를 두어 경서를 토론하게 하였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바로 아악(雅樂)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따르면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가 아우인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1119년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하였다.
예종 때에는 덕창(德昌)·담진(曇眞)·낙진(樂眞)·덕연(德緣) 등의 불교 고승들이 있었다. 이 중 담진은 1107년 예종의 왕사가 되었고, 1114년 국사가 되었으며, 1116년 보제사(普濟寺)로 행차한 왕에게 설법하였다. 화엄학의 대가로서 일승법을 선양하여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종양으로 병석에 눕게 되어 한달만에 죽게 되었다.[2]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도이장가
편집《도이장가(悼二將歌)》는 1120년 음력 10월, 팔관회 때 예종이 가면극을 보고 지은 노래이다.[3] 태조 왕건을 도운 공신이자 927년 후백제와의 공산성 전투중 전사한 신숭겸과 김낙 두 장군(二將)을 추도(悼)하는 노래(歌)이다. 향찰로 표기된 향가이며 현존하는 향가 중 유일하게 왕이 지은 노래이다. 또한 향찰로 표기된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主乙完乎白乎 心聞際天乙及昆
님을 온전케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魂是去賜矣中 三烏賜敎職麻又欲
넋은 가셨지만 내려주신 벼슬 또한 대단하구나望彌阿里刺 及彼可二功臣良
바라보면 알리라 그때의 두 공신이여久乃直隱 跡烏隱現乎賜丁
오래되었지만 거룩한 그 자취는 나타나시도다
— 도이장가(悼二將歌)
예종 지음, 현대어 번역 양주동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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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편집
왕후편집
후궁편집
왕자편집
왕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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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숙종 5년 음력 1월 28일, 율리우스력 3월 10일
-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45페이지
- ↑ 《고려사》 예종 15년(1120년 음 10월 14일(신사))
팔관회를 열고 왕이 잡희를 구경하다
팔관회를 열고 왕이 잡희를 관람하였다.국초의 공신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의 모습을 본 뜬 우상(偶像)이 있었는데, 왕이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
- ↑ 《윤언영 처 유씨묘지명(尹彦榮妻柳氏墓誌銘)》
부인의 성은 유씨이며 하동군 사람인데 오늘날의 승천부이다.(중략) 광숙공의 넷째 딸이며 명의태후의 동생이다.(중략) 어머니는 낙랑국대부인 김씨이며, 외조부는 검교태자태사중추원사병부상서위 원황이니 모두 나라의 뛰어난 가문이다. - ↑ 최사추의 딸. 최충의 증손녀
- ↑ 문종과 인경현비의 아들
- ↑ 최충의 증손자
- ↑ 《최용 처 김씨묘지명》
- ↑ 가 나 다 《유응규 묘지명(庾應圭墓誌銘)》(1175년)
군(君)의 이름은 유응규(庾應圭)이고 자는 빈왕(賓王)이며 무송현(茂松縣) 사람이다.(중략) 아버지 유필(庾弼)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이며, 추증받은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공은 문장과 행실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예종(睿宗) · 인종(仁宗) · 의종(毅宗) 세 조정에서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 안씨(安氏)는 유릉(裕陵, 예종) 시녀의 자식이다.
(중략) - ↑ 가 나 다 《고려사》 권121, 열전 권제34, 양리(良吏) 유석(庾碩)
유석(庾碩)의 증조모는 예종(睿宗)의 후궁의 소생이다.과거 예종이 서경(西京)에 갔다가 평주(平州) 향리의 딸이 길에 구경나왔는데, 매우 아름다운 것을 보고 불러들여 딸을 낳았고, 마침내 유필에게 시집을 갔다.
이 때문에 유석은 왕실 서자[國庶]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대간(臺諫)·정조(政曹)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 ↑ 《해동 광지대선사 묘지명(海東廣智大禪師墓誌銘, 1158년)》
대금(大金) 정풍(正豐) 3년(의종 12년, 1158년) 가을에 광지대선사가 돌아가셨다.그 문인들이 나에게 묘지명[墓]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는데, 요청이 매우 간절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글을 짓는다. 선사는 이름이 왕지인(王之印)이고, 자(字)가 각로(覺老)이며, 자호(自號)가 영원수(靈源叟)였다. 아버지는 예종이고, 어머니는 은씨(殷氏)로 왕의 후궁이었다. 거란 건통(乾統) 임오년(숙종 7년, 1102년) 여름 6월 26일에 사제에서 〈선사가〉 태어나셨다. 선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덕이 뛰어났고[岐嶷] 육식[葷血]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체모(體貌)와 언음(言音)이 예종과 매우 비슷하여 예종이 선사를 매우 사랑하였다.
(중략) 영평산(鈴平山)의 서쪽 기슭에서 관을 불태우니, 향년 57세이고 승랍 48세이다.
이해 겨울 11월 28일에 그 유골을 조양산(朝陽山)의 동쪽 기슭에 매장하니 예를 따른 것이다.
- ↑ 《현화사 승통 각관 묘지명(玄化寺僧統覺觀墓誌銘, 1175년)》
스님은 이름이 각관(覺觀)이고 자는 치허(致虛)이며 속성(俗姓)은 왕씨(王氏)로, 왕실의 자손이다. 어머니는 최씨(崔氏, 숙비 최씨)이다.예종 16년(1121년) 신축년 11월 9일에 탄생하였다.
(중략) - ↑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장효대왕 1164년(의종 18년) 3월 미상
장차 인지재(仁智齋)로 이어(移御)하려 하는데, 예종(睿宗)의 궁인(宮人)의 아들인 법천사(法泉寺) 주지(住持) 각예(覺倪)가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달령원(獺嶺院)에서 어가(御駕)를 맞이하였다.왕(의종)이 풍월을 읊으며 감상하며 여러 학사들과 더불어 시를 주고받음이 끝이 없었다. 대장군(大將軍) 정중부(鄭仲夫) 이하 여러 장수들이 피곤하고 분개하니 비로소 모반을 꾀하는 마음[不軌之心]을 가지게 되었다.
- ↑ 가 나 《고려사》 권100, 열전 권제13, 제신(諸臣) 이준창(李俊昌)
이준창의 어머니는 예종(睿宗)의 궁인(宮人) 출신인데, 궁인은 본래 천인[賤肄]이었다.옛 법에 궁인의 자손은 7품까지만 승급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고 오직 과거에 급제한 사람만 5품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준창이〉 3품에 임명되었는데도 대간(臺諫)이 두렵고 위축되어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벼슬이 추밀원사(樞密院使)까지 오르고 죽었다.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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