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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翰苑)은, 중국 고종 현경 5년(660년) 이전에 장초금(張楚金)이 저술하고, 대에 옹공예(雍公叡)가 주석을 붙인 유서(類書)로, 권제30에 해당하는 번이부(蕃夷部) 1권만이 일본 후쿠오카 시 다자이후 덴만구(太宰府天滿宮)에 전한다. 해당 사본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목차

개요편집

일본의 사학자 유아사 유키히코(湯淺幸孫)에 따르면 《한원》은 원래 아동 대상의 (훗날의 4-4-6-4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사륙병려문 창작을 위한) 대구(對句) 연습용 교재로써 저자 장초금이 자신의 일족 아이들을 위한 홈스쿨링용으로 이 책을 작성하였다고 지적되고 있다.[1] 장초금의 자서에 따르면 당 고종 현경 5년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해 3월 12일 계축에 꿈에서 공자를 만나 그에게 춘추를 지은 대의와 그의 생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깨어난 뒤 그 감흥으로 한원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적었다.[2]

《한원》의 문장 구성은 4자씩 8자가 대구를 이루어 16자가 1운으로 구성되는 정문(正文)과, 대구 뒤에는 전거를 제시하는 협주(주기)가 있다. 주(注)에는 그 출전이 작게 적혀 있다. 《한원》에는 장초금이 찬하고 옹공예가 주석한다(張楚金撰雍公叡注)고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정문과 주기 모두 장초금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송대에 옹공예가 일부 내용에 간단하고 평이한 내용만을 짧게 보주하였다고 보는 견해와[1], 장초금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인 고예를 옹공예로 보고 주기는 전적으로 그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견해가[3] 있다(다만 윤용구는 유아사의 설을 반대하고 장초금에 의해 정문이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주기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면서도, 전해종처럼 특정 인물을 옹공예로 비정하려는 설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비쳤다).[4]

전체 권수에 대해서는 《구당서》(舊唐書) 장도원(張道源)[5]의 열전에는 30권、《신당서》(新唐書) 예문지(芸文志)에는 7권과 20권이라는 두 설이 병기되어 있고, 《숭문총목》(崇文總目) 유서부에는 7권, 《송사》(宋史) 예문지에는 11권으로 되어 있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나이토 고난(内藤湖南)에 따르면 30권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한다. 875년~891년에 작성된 《일본국현재서목록》(日本国見在書目録)에는 《한원》이 30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한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신당서》가 편찬되던 시점에서는 이미 《한원》 전질이 흩어져 일부만 남은 상태였음을 보여준다.[4]

《일본국현재서목록》 외에도 9세기 시게노 사다누시(滋野貞主)가 쓴 《비부략》(秘府略)과 헤이안 말기의 《향약초》(香薬抄) 등에서 《한원》을 인용하고 있다.[4] 그 뒤에는 기록에 사라졌으나, 1917년에 후쿠오카의 다자이후덴만구 소장 보물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에 의해 재발견된다.

다자이후 덴만구 소장 사본 《한원》은 나이토 고난의 해설로 1922년에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学)에서 영인 역주본이 출간되었으며[6](중국에서도 1934년 역주본이 나왔다). 1954년에는 해당 사본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1977년에는 다자이후덴만구의 제신(祭神)이기도 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1075주기를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써 다케우치 리조(竹内理三)에 의해 해석문 ・ 훈독문이 붙은 번역본이 간행된다.

오자와 탈문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제는 실전되어 이름만 남은 사서들인 어환(魚豢)의 《위략》(魏略), 《고려기》(高麗記) 등의 문헌을 다수 인용하고 있는 데다 현존하는 문헌과 대조해 보아도 본문과는 다른 부분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귀중한 사료로 취급된다. 특히 어환의 《위략》은 한국이나 일본 관련 기사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7]

구성편집

한국어 번역편집

한국에서는 1974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본을 출간하였으며,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에서 역주본을 출간하였다.

각주편집

  1. 湯淺幸孫(1983), '前言' 《翰苑校釋》 東京, 國書刊行會
  2. 윤용구는 《한원》의 자서 가운데 공자가 장초금에게 말했다는 "때로 정도(政道)가 이지러지고 예악(禮樂)은 없어지기도 한다. 고로 시사(時事)에 따라 선(善)을 드러내고 허물을 나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왕(一王)의 법(法)을 드러내려는 것이지 어찌 린(麟)에만 있다고 하랴(于時政道陵夷 禮樂交喪 故因時事 褒善貶過 以示一王之法 豈專在於麟乎)"라는 대사에 비추어 고구려 등 이민족 사회를 황제의 일원적 세계질서 아래 구축하려던 당 초기의 사정과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였으며, 아울러 해당 저술이 '번이부' 조목과 인용문헌에서 사이(四夷) 즉 중국 주변 이민족 모두를 망라한 듯하지만 고려(고구려)와 백제, 신라, 그리고 왜국을 제외하면 660년 찬술 시점에서 모두 사라진 이민족인데다 수 왕조 시절부터 빈번하게 교섭하던 돌궐(突厥) · 거란(契丹) · 설연타(薛延陀) · 말갈(靺鞨) 등의 존재에 대하여는 설명이 없고, 구문(句文)의 분량에서도 동이 지역이 70구로 전체 165개 구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데다 구문과 실제 기록의 분량에서 흉노 다음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국가가 고려(고구려)라는 점에서 《한원》 번이부는 중국 주변 이민족 가운데서도 동이 지역, 특히 고구려를 매우 중시하였음을 볼 수 있으며, 당대 고구려와의 분쟁으로 골몰하던 당시의 사정을 반영한다고 해석하였다(윤용구(2011) '한원 번이부의 주문구성에 대하여' 《백제문화》45집,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157~158쪽).
  3. 全海宗, 1980, '魏略에 대한 豫備的 考察' 《東夷傳의 文獻的硏究》 서울, 一潮閣, pp.44-46
  4. 윤용구(2011)
  5. 저자인 장초금의 선조이다.
  6. '한원권제3' 《교토제국대학문학부영인구초본 제1집》 1922년.
  7. 다만 《한원》에 인용된 《위략》의 내용은 대부분 《삼국지》, 《후한서》 한전의 내용과 대동소이하기에, 한원 삼한전에 인용된 자료를 가지고는 삼한의 사회상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시도할 만한 여건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김병곤 '《한원》 찬자의 삼한전에 대한 서술과 이해' 《한국사학사학회》18권 18호, 2008년 12월, 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