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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함양 여씨(咸陽呂氏) 시조 여어매(呂禦梅)는 당나라 한림학사(韓林學士)로서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신라로 동래하였다. 이후 성주군 벽진면에 정착하고 고려시대 전서(典書)를 지냈다. 여어매는 여임청(呂林淸)과 여광유(呂光有) 형제를 두었는데, 여임청의 후손인 여자장(呂子章), 여존혁(呂存赫) 형제와 여광유의 후손들이 함양(咸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한편 여임청의 후손 중 여양유(呂良裕)와 여자열(呂子列)은 본관을 성주(星州)로 하였다.

인물편집

  • 여칭(呂稱, 1351년 ~1423년) : 10세손. 고려 말기에 사헌부규정, 전라도안렴사(按廉使), 전법총랑(典法摠郎), 전리총랑(典理摠郎) 등을 역임하고, 공주와 나주의 목사를 지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양광·경상·전라도의 조전부사(漕轉副使)가 되고, 이어 판합문사(判閤門事)·승추부우군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 등을 역임하였을 때에 근면하고 치밀한 사람으로 정평이 있었다. 그 뒤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참지의정부사가 되었다. 1400년(정종 2) 병조 전서(典書)가 되고, 1402년(태종 2) 동북면의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로 태조를 배종하였다. 1404년에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서 왕실의 계통이 잘못 전해진 것을 바로잡는 데 힘쓰는 한편, 명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조선 동포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데 노력하였다. 돌아와 서북면의 도순문찰리사로 병마도절제사를 겸하였다. 1407년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지내고, 1413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에 이어 형조판서가 되었다. 1414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가 되었으며,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1]
  • 여자신(呂自新) : 무과에 급제한 뒤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지냈다. 1479년(성종 10) 병조참판이 되고, 1486년 영안남도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가 되어 변방의 방어에 큰 공을 세워 1490년 공조참판·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이어 경기도·강원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1492년에는 지중추부사로서 성절사로 뽑혀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연산군 때 오위도총부도총관, 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중종반정 후 병조와 형조판서를 지내며 많은 치적을 올렸다. 아들 여윤철(呂允哲)과 함께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 여우길(呂祐吉, 1567년 ~ 1632년) : 자는 상부(尙夫), 호는 치계(稚溪, 痴溪). 첨정 여세침(呂世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승지 여숙(呂淑)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여순원(呂順元)이며, 어머니는 사인(舍人) 이영(李瑛)의 딸이다. 1591년(선조 2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6년 사신의 일행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정랑·평안도도사·사간원정언·지평(持平)·장령(掌令)·직강(直講)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모질지 않아 화요(華要)의 직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었다. 1603년 밀양부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전쟁을 마무리짓는 사신으로서 일본에 내왕하면서 포로의 쇄환 등에 공이 많았다. 연안부사가 되어서는 고을을 잘 다스려 모범으로 뽑혔다. 후일 평안도안무사(平安道安撫使)를 지냈고, 1614년(광해군 6)에는 또다시 진위사(陳慰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618년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 여이징(呂爾徵, 1588년 ~ 1656년) :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2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다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한성부좌윤·예조참판을 지내고, 1641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부빈객(副賓客)·대사성·대사헌·강화부유수·부제학·도승지·공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밝았으며 선유(先儒)의 격언 20여조를 찬술하여 인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많은 묘비명을 지었고 또한 천문·역산(曆算)·서화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집』이 있다.
  • 여이재(呂爾載, 1600년 ~ 1665년) : 1637년(인조 15)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호조참판·동지중추부사·한성우윤·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 여성제(呂聖齊, 1625년 ~ 1691년) : 숙종 때 의금부판사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낸 뒤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 여운형(呂運亨, 1886년 ~ 1947년) : 독립운동가

과거 급제자편집

함양 여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3명을 배출하였다.[2]

문과

여계선(呂繼先) 여계주(呂啓周) 여광세(呂光世) 여광주(呂光周) 여광헌(呂光憲) 여구주(呂龜周) 여규익(呂圭益) 여규형(呂圭亨) 여동식(呂東植) 여만영(呂萬永) 여민제(呂閔齊) 여선기(呂善驥) 여선덕(呂善德) 여선응(呂善應) 여선장(呂善長) 여선형(呂善亨) 여성제(呂聖齊) 여영조(呂榮祖) 여영휘(呂永徽) 여우길(呂祐吉) 여위량(呂渭良) 여위로(呂渭老) 여유길(呂裕吉) 여이재(呂爾載) 여이징(呂爾徵) 여이징(呂爾徵) 여인섭(呂仁燮) 여준영(呂駿永) 여증제(呂曾齊) 여필용(呂必容) 여필중(呂必重) 여필희(呂必禧) 여호(呂箎)

무과

여겸제(呂謙齊) 여경승(呂慶承) 여광덕(呂光德) 여기영(呂基永) 여몽천(呂夢天) 여문익(呂文翊) 여삼이(呂三伊) 여성혁(呂聖赫) 여시채(呂時彩) 여안필(呂安弼) 여영원(呂瑩元) 여영제(呂暎齊) 여응록(呂應祿) 여응문(呂應文) 여응주(呂應周) 여응주(呂應周) 여응희(呂應姬) 여이후(呂爾後) 여인길(呂裀吉) 여정방(呂定邦) 여정수(呂鼎秀) 여종천(呂宗天) 여지길(呂祉吉) 여지영(呂趾永) 여창섭(呂昌燮) 여필적(呂必迪) 여현장(呂鉉長)

생원시

여광국(呂光國) 여광빈(呂光賓) 여광윤(呂光尹) 여광주(呂光周) 여광헌(呂光憲) 여근섭(呂根燮) 여동기(呂東箕) 여동우(呂東愚) 여득영(呂得永) 여만영(呂萬永) 여면주(呂冕周) 여민제(呂閔齊) 여선양(呂善養) 여선용(呂善容) 여성제(呂聖齊) 여세온(呂世溫) 여안소(呂安素) 여용섭(呂龍燮) 여우주(呂佑周) 여위현(呂渭賢) 여유형(呂有衡) 여윤신(呂潤身) 여응망(呂應望) 여응백(呂應伯) 여이룡(呂爾龍) 여이재(呂爾載) 여이징(呂爾徵) 여익제(呂翼齊) 여잠(呂埁) 여정현(呂正鉉) 여준영(呂駿永) 여창영(呂昌永) 여필용(呂必容) 여필화(呂必華) 여현섭(呂賢燮) 여현영(呂玄永) 여현제(呂賢齊) 여형제(呂衡齊)

진사시

여계주(呂啓周) 여관영(呂瓘永) 여광주(呂光周) 여구영(呂龜永) 여규석(呂圭奭) 여규찬(呂圭燦) 여극성(呂克誠) 여근섭(呂近燮) 여단제(呂端齊) 여동간(呂東簡) 여동규(呂東奎) 여동근(呂東根) 여동석(呂東錫) 여동하(呂東夏) 여명주(呂命周) 여민섭(呂民燮) 여선경(呂善慶) 여선덕(呂善德) 여선명(呂善明) 여선복(呂善復) 여선장(呂善長) 여세윤(呂世潤) 여세침(呂世琛) 여안제(呂顔齊) 여양섭(呂亮燮) 여우길(呂祐吉) 여원(呂源) 여원영(呂源永) 여이망(呂爾望) 여이흥(呂爾興) 여인현(呂麟鉉) 여정섭(呂正燮) 여주현(呂周鉉) 여중섭(呂重燮) 여증제(呂曾齊) 여춘영(呂春永) 여태제(呂台齊) 여택조(呂宅祖) 여필관(呂必寬) 여필세(呂必世) 여필운(呂必運) 여필응(呂必應) 여필중(呂必重) 여필휘(呂必輝) 여헌주(呂憲周) 여회제(呂誨齊)

음관

여근섭(呂近燮) 여근섭(呂近燮) 여동간(呂東簡) 여동간(呂東簡) 여동규(呂東奎) 여동규(呂東奎) 여동근(呂東根) 여동근(呂東根) 여동기(呂東箕) 여동면(呂東冕) 여동성(呂東星) 여동성(呂東星) 여동식(呂東植) 여동엽(呂東燁) 여동엽(呂東燁) 여민섭(呂民燮) 여민섭(呂民燮) 여석규(呂奭奎) 여양섭(呂養燮) 여위룡(呂渭龍) 여은섭(呂殷燮) 여은섭(呂殷燮) 여중섭(呂重燮) 여중섭(呂重燮) 여창섭(呂昌燮) 여창섭(呂昌燮) 여태섭(呂台燮) 여현섭(呂賢燮) 여현섭(呂賢燮)

항렬자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