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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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환도성(丸都城)은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고구려 유리명왕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쌓은 성이다. 현재의 중국 지린성 퉁화시지안시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며, 중국 지명으로는 환도산성(丸都山城)으로도 불린다.

위나암성의 남쪽 성터
위나암성의 망대
위나암성의 동쪽 궁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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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년(유리왕 22년) 고구려국내성(國內城)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성에서 가까운 산에 축조한 산성이다. 처음 산성의 이름은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 불렀다.

삼국사기》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위나야성(尉那也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산상왕 원년인 197년공손탁(公孫度)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이듬해인 198년에 위나암성을 전면적으로 증축하고, 환도성(丸都城)이라 하였다.[1]

이후 산상왕(山上王) 13년(209년)에 환도(丸都)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2]

동천왕(東川王) 20년(246년)에 (魏)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와, 환도성을 함락시켰다.[3] 동천왕 21년(247년)에 왕이 환도성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通溝 부근의 어느 곳)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그곳으로 옮기며, 환도성을 떠났다.[4]

고국원왕 12년(342년)에 왕이 환도성(丸都城)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5][6] 그해 겨울에,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병력 4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고,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에 있던 여러 대의 보물을 약탈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다.[7]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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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암성(환도성)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 서북쪽 2.5km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는 그 성벽이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남측 성벽과 망대의 일부만 남아있다.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어 조성되었다.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위나암성은 전시 때 사용하는 산성이었다.

위나암성은 뒤로 가파른 산능선을 두르고 있고 앞에는 퉁거우 강[通溝河]이 흐르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되는 곳이다. 또한 국내성과 압록강이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적의 움직임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의 공격로는 남문 한 곳이었다. 성벽 둘레는 약 7km이고, 동쪽 성벽 높이는 6m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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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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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부식. 《삼국사기》. 卷第十六 髙句麗本紀 第四.  山上王 二年, 春二月, 築丸都城. (산상왕 2년(198) 봄 2월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2. , 부식. 《삼국사기》. 卷第十六 髙句麗本紀 第四.  山上王 十三年 冬十月, 王移都於九(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丸으로 되어 있다.)都. (산상왕 13년(209) 겨울 10월에 왕이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
  3. , 부식. 《삼국사기》.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  密友·紐由 東川王二十年, 魏幽州刺史毌丘儉, 將兵來侵, 䧟丸都城. (동천왕 20년(246)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와,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켰다.)
  4. , 부식. 《삼국사기》. 卷第十七 髙句麗本紀 第五.  東川王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本으로 되어 있다.)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5. , 부식. 《삼국사기》. 卷第十八 髙句麗本紀 第六.  故國原王 十二年, 春二月, 修葺丸都城, 又築國内城. (고국원왕 12년(342) 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여 지붕을 새로 이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6. , 부식. 《삼국사기》. 卷第十八 髙句麗本紀 第六.  故國原王 十二年 秋八月, 移居丸都城. (고국원왕 12년(342) 가을 8월에 환도성으로 옮겨 살았다.)
  7. , 부식. 《삼국사기》. 卷第十八 髙句麗本紀 第六.  故國原王 十二年 十一月, 皝自將勁兵四萬, 出南道, 以慕容翰·慕容覇爲前鋒, 別遣長史王㝢等, 將兵萬五千, 出北道以來侵. 王遣弟武, 帥精兵五萬, 拒北道, 自帥羸兵, 以偹(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備로 되어 있다.)南道. 慕容翰等先至戰, 皝以大衆繼之, 我兵大敗. 左長史韓壽斬我將阿佛和度加, 諸軍乗勝, 遂入丸都. 王單騎走入斷熊谷. 將軍慕輿埿, 追獲王母周氏及王妃而歸. 㑹王寓等, 戰於北道, 皆敗沒. 由是, 皝不復窮追, 遣使招王, 王不出. 皝將還, 韓壽曰, “髙句麗之地, 不可戍守. 今其主亡, 民散潛伏山谷. 大軍旣去, 必復鳩聚, 收其餘燼, 猶足爲患. 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䇿之上也.” 皝從之, 發羙(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美로 되어 있다.)川王廟(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墓로 되어 있다.), 載其尸, 収其府庫累世之寶, 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宫室, 毀丸都城而還. (고국원왕 12년(342)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굳센 병력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오고,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을 보내 병력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 침략해 왔다. 왕이 동생 무(武)를 보내 정예병력 5만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방어하였다. 모용한 등이 먼저 도착하여 싸우고 모용황이 큰 무리로써 이어 오니 우리 병력이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左長史)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드디어 환도로 들어왔다. 왕이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나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장군 모여니(慕輿埿)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추격하여 사로잡아 돌아갔다. 마침 왕우 등이 북도에서 싸워서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이 나오지 않았다. 모용황이 돌아가려 하는데 한수가 말하기를 “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은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들어가 숨어 엎드려 있습니다.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남은 불씨를 거둘 것이니 오히려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어머니를 인질로 잡아 돌아가서 몸을 묶고 스스로 항복해 오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기를 청하옵니다. 은덕과 신뢰로 무마하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하였다. 모용황이 그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에 있던 여러 대의 보물을 약탈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