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홍씨

희빈 홍씨(熙嬪 洪氏, 1494년 4월 14일 ~ 1581년 11월 6일)는 조선 중종의 후궁이며 금원군봉성군의 생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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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홍씨
熙嬪 洪氏
지위
조선 중종의 후궁
이름
이칭 홍빈(洪嬪)
신상정보
출생일 1494년 4월 14일(1494-04-14) (음력)
사망일 1581년 11월 6일(1581-11-06)(87세) (음력)
능묘 희빈 홍씨 묘(熙嬪洪氏墓)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심곡리 363
가문 남양 홍씨
부친 홍경주
모친 안동 권씨
배우자 중종
자녀 2남
금원군 · 봉성군

생애편집

탄생과 가계편집

본관은 남양이며, 1494년(성종 25년) 홍경주(洪景舟)와 안동 권씨(安東 權氏)의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경주중종반정에서 공을 세운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남양군(南陽君)에 책봉되었다. 어머니 안동 권씨는 권금성의 딸이며 정인지의 외손녀이다.

후궁 시절편집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

1506년(중종 1년) 입궁하였는데, 홍경주가 반정 공신이었으므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종2품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아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이후 소의(昭儀)와 귀인(貴人)을 거쳐 희빈(熙嬪)에 책봉되었다.

중종의 총애를 얻어 아버지의 든든한 정치적 기반이 되는 한편,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당시 조정에 등장한 새로운 세력인 사림파를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나뭇잎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趙氏)가 왕이 됨)' 네 글자를 벌레가 파먹게 한 뒤, 이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이며 조광조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상(중종)이 근심과 두려움으로 불안해 하자,
남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위태로운 말로 상을 움직이고자 하여
몰래 대궐의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산 속의 곤충이 꿀물을 따라 파먹어 글자를 만들게 하였다.
홍경주가 찬성으로 있다가 탄핵을 받은 일로 조광조 등을 원망하는 것을 알고,
홍경주의 딸 희빈을 종용하여,
‘조정의 권세와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조광조에게로 돌아갔다.’는 등의 말을
밤낮으로 상(중종)에게 흘러들어가게 하였다.
정국공신들의 위훈을 삭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자
여러 훈신들이 떠들썩하며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남곤이 뭇사람들의 원망을 이용하여 마침내 홍경주 및 심정 등과 함께
밤중에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왕에게 변을 고하였다.
— 《국조보감》 제20권 중종조 3
14년(기묘, 1519년)

중종 사후편집

1545년(명종 즉위년), 윤여해(尹汝諧)과 유희령(柳希令)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았으나 선왕의 총애를 생각하여 무마되었다.[1] 이후 사가로 나와 살았는데, 당시 아들 봉성군이 중종의 왕자들 가운데 총명하여 역모의 추대자로 자주 언급되는 등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2]

중종과의 슬하에 5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3명은 조졸하였고[3], 금원군봉성군만이 장성하였으나, 봉성군은 옥사에 연루되어 끝내 사사되었다.[4]

1581년(선조 14년) 11월 6일 사망하였다. 생몰년이 확인되는 조선의 후궁 가운데 연산군의 후궁인 숙의 윤씨와 더불어 가장 장수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희빈 홍씨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명종실록》 2권, 명종 즉위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9월 15일 (을해)
    양사가 봉성군과 홍빈의 일에 대해 아뢰니 불윤하다
    양사가 봉성군 이완과 홍빈(洪嬪)의 일에 대하여 아뢰니, 상(명종)이 친필로 답하였다.

    "봉성군의 일에 대하여는 윤허하지 않는다는 뜻을 이미 다 일렀고, 희빈(熙嬪)은 【바로 홍씨(洪氏)이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 아니다.

    부왕의 후궁을 축출하는 것은 내 마음에만 미안할 뿐이 아니라 자전(문정왕후)께서도 항상 후궁을 대함에 있어 정의(情意)가 매우 두터우셨다.

    그런데 지금 중종의 소상(小祥)을 지내기도 전에 축출하여 서로 이별하게 하는 것은 웃전의 뜻에도 지극히 비통스럽게 여길 것은 물론 나의 심정도 슬퍼 더욱 미안스럽다.

    희빈을 축출하는 일은 결코 따를 수 없다."


    【상이 지금 12세인데 사의(詞意)가 간곡하고 필획도 굳건하니 덕예(德藝)의 숙성이 이와 같았다.

    효성과 우애는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재능이 많은 것은 또 타고난 것의 일단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칭탄하고 열복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들

    ‘오늘날 인종대왕을 다시 뵈올 줄을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2. 명종실록》 2권, 명종 즉위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9월 21일 (신사)
    홍빈이 사가로 나가다
    홍빈(洪嬪)이 사가(私家)로 나갔다.

    봉성군은 홍빈의 소생이다. 당시 양사가 홍빈 및 봉성군의 일에 대하여 한창 논계한 까닭으로 홍빈이 어머니의 병환을 핑계로 나갔으나 실은 스스로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 희빈홍씨묘지명
    빈은 모두 다섯 아들을 낳았으나 많이 요절하여, 그 중에 봉작을 받은 이는 두 사람이다.

    첫째는 금원군(錦原君) 영(岺)이고, 둘째는 봉성군(鳳城君) 완(岏)이다.

  4.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1547년 명 가정(嘉靖) 26년) 윤9월 16일 (갑오)
    완(봉성군)은 성품이 상당히 총명하였다.

    중종의 상(喪)을 당했을 때 슬퍼함이 얼굴에까지 나타나니, 보는 이들이 칭찬하였다.

    여러 왕자 중에 가장 현명하였으므로, 을사년에 가장 참혹한 화를 만났다.

    처음에 울진(蔚珍)으로 귀양갔었는데, 왕실의 지친이므로 목숨이 보존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밭을 사서 생활 대책을 세우며 장구한 계획을 마련했었다.

    자살하라는 명이 내리자, 사람들이 차마 알리지 못하고 치상(治喪)의 준비를 마친 다음에 비로소 말해 주었는데, 즉시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고 죽었다.

    곧바로 관(棺)에다 염(斂)을 하여 발인해서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