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이
권진이(權珍伊, 1819년 ~ 1840년 1월 31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가타(Agatha)이다.
권진이 아가타 | |
---|---|
순교자 | |
출생 | 1819년 서울[1] |
선종 | 1840년 1월 31일 서울 서소문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시복 |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 |
시성 |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축일 | 9월 20일 |
생애 편집
권진이는 한양의 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권 진사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임종 때의 유언에 따라, 권진이와 모친 한영이는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권진이는 12~13세 경에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너무나도 가난하여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였고, 집도 없었기에, 그녀는 친척 정하상의 집에서 얹혀살았다.
청국인 사제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권진이는 그의 식복사 즉 성직자를 시중드는 사람으로 일했다. 권진이는 유방제 신부에게 처녀로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유방제 신부는 그녀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어 주어, 그녀는 처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제 신부와 권진이 사이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서 교회에 해를 입혔다. 그러므로, 프랑스인 사제 모방 신부는 입국 하자 곧 유방제 신부를 청나라로 돌려보냈고, 모방 신부는 권진이를 곁에 불러 권진이가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도록 격려하였다. 그 덕에 몇 달 동안 교우들을 불안케 하던 소문이 가라앉았다. 권진이는 어떻게 자신의 행동이 부지불식간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는지를 깨달았고, 회개하며 속죄의 뜻으로 스스로 하느님을 위해서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권진이는 어머니 한영이에게 돌아가 함께 살게 된 이경이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배교자 김여상의 밀고로 7월 17일에 권진이는 그녀의 어머니 한영이와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두 명의 여성은 따로 포졸들의 감시 하에 사관청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평소 그들의 미모를 탐내던 김여상이 그들을 납치하려 하자 그들을 동정한 몇몇 포졸들의 도움으로 그들은 탈출하였고 한양에 있는 한 교우의 집에 숨었다. 그러나 먼저 체포된 한 하녀가 포졸들에게 그 두 아가타가 숨은 곳을 말하였고 그들은 다시 체포되었다. 아무리 많은 혹독한 고문도 그 두 아가타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다.
권진이는 감옥에서 어머니 한영이를 만났고,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희망하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권진이는 그녀의 한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열렬한 애정과 귀의로 가득차 있었다. 그 젊은 조선 여성은 하느님에게 예수의 수난과 죽음 때의 마리아 막달레나 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았고 더 좋은 향기를 풍겼다.
관찬 기록(《승정원일기》)에 따르면, 21세의 권진이는 한양 근교의 당고개라고 부리우는 곳으로 압송되어 1840년 1월 31일 다른 다섯 명의 천주교도들과 함께 참수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는 순교자가 되었다.
시복 · 시성 편집
권진이 아가타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2]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3]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각주 편집
- ↑ http://newsaints.faithweb.com/martyrs/Korea1.htm
- ↑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2014년 10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12월 21일에 확인함.
- ↑ 이상도 (2014년 7월 24일).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평화방송. 2014년 10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12월 2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