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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시조 우현(禹玄)은 고려 광종조에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냈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6세손 우중대(禹仲大)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장남 우천규(禹天珪)는 남성전서(南省典書), 둘째 우천계(禹天啓)는 판서(判書), 셋째 우천석(禹天錫)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우천규(禹天珪)의 아들 우탁(禹倬)은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으며, 시호는 문희(文僖)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우천석(禹天錫)의 증손 우현보(禹玄寶)가 고려조에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며, 조선조에는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이 되었다.

분파편집

  • 7세 우천규(禹天珪)
    • 8세 우탁(禹倬) - 문희공파(文僖公派)
      • 9세 우원광(禹元光) - 참의공파(參議公派)
      • 9세 우원명 - 봉상정공파
  • 7세 우천석(禹天錫)
    • 8세 우칭(禹偁)
      • 9세 우길생(禹吉生)
        • 10세 우현보(禹玄寶)
          • 11세 우홍수(禹洪壽) -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 11세 우홍부(禹洪富) - 예안군파(禮安君派)
          • 11세 우홍강(禹洪康) - 안정공파(安靖公派)
          • 11세 우홍득(禹洪得) - 집의공파(執義公派)
          • 11세 우홍명(禹洪命) - 판서공파(判書公派)
      • 9세 우국진(禹國珍) - 문강공파(文康公派)
    • 8세 우팽(禹伻)
      • 9세 우복생(禹福生)
        • 10세 우인열(禹仁烈) - 정평공파(靖平工派)
        • 10세 우희열(禹希烈) - 문숙공파(文肅公派)

족보편집

역동 서원과 우씨 세보편집

퇴계 이황의 학인(學人) 중 우성전(禹性傳)이 있었다. 퇴계는 우성전(禹性傳)에게 서원을 짓고 역동 우탁(易東 禹倬)을 모시라고 권했다. 그래서 안동(安東)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생겼다. 역동 서원은 사액 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1600년(조선 선조 33) 처음 세보(世譜)가 만들어졌다.

본관의 통일편집

역동 서원이 사액되어 조세 감면이 이루어지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단양을 본관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탁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고려사에 존재하는 이름 중에 세보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1]

고려 말~조선 초기 혼인관계에서 타 성씨 족보에 존재한 단양우씨 족보와 先系편집

단양우씨의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족보는 전해지지 않아, 역동서원을 세우면서 서원의 우탁 신위에 올릴 제물로 퇴계 이황이 手筆籍한 예안보가 임진왜란 중에 유실된 후, 우현보의 증조인 천석의 후손인 우희열(문숙공파조)의 자손 우복룡(退溪 門下生)이 안동부사로 부임한 이듬 해에 예안에서 사는 우성적이 우복룡 부사를 방문하고 이를 보고하자 애통해 하며 자신이 소장한 족보 草記를 우성적에게 보여 주어 현존 예안보(1600년)를 1599년에 편찬시 기초가 되었다. 이것이 우씨 문중에 내려온 조선중기 1600년 이전의 우씨집안의 족보 기록이다.

고려 말 해주오씨와 단양우씨는 혼인관계였다. 조선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최초의 族圖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族圖는 태종 1년(1401년)에 해주오씨 집안에서 만들어진 建文三年辛巳族圖이다.이 族圖는 1세부터 9세까지, 그리고 해주오씨 3세, 4세, 5세와 通婚圈을 이루는 집안의 가계를 手筆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고려말 典書公(工曹判書) 吳光廷이 시작하여 그의 둘째 아들인 舍人公 吳先敬이 부친의 초안을 정리하여 2대에 걸쳐 편찬한 것이다. 이족도에 우현보 큰 아들 우홍수가 올라 았다.

이 족도을 완성한 吳光廷의 아들 吳先敬이 쓴 1401년 족도 跋文에 "선친께서 친히 譜事를 시작하시다가 미쳐 정리를 하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故로....선친께서 일찍이 내개 말씀하시기를 吳氏의 계통만 하여도 그 근거를 찾는다면 자연 그 수효가 여기에만 그치지 않을 것인데 그 屬籍이 禹氏家門에 소장되어 있는 듯 하니, 조금 더 기다려서 그 근원을 다 찾은 후에 이것을 圖本으로 만들겠다고 하시다가 마음 먹은 일을 이루지 못하고 별안간 불행히도 별세하시니 슬픔을 견딜수 없도다. 내가 이제 廬墓에 있으면서 그 원본대로 다시 그려서 선친께서 이루지 못하신 뜻을 이루기는 하였으나 슬프다. 선친께서 연만하시여 시력이 약하신데도 불구하시고..."을 보면 고려 말에 단양우씨 문중에 어떻 형태로든 족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禹氏家門에 소장된 世系에 오씨가문의 先系 屬籍이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그 屬籍이란 호적에 기록된 또 다른 족도의 형태였을 것이고, 해주오씨의 先系가 禹氏家門에 소장되었다는 사실은 두 집안이 혼인관계가 있는 까닭에 오씨가문의 先系에 대한 기록이 단양우씨의 世系속에 남겨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색, 이숭인, 정몽주와 교분이 두터웠던 당대 성리학의 대가이자 宗法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인물가운데 한 사람이 우현보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단양우씨 집안에서도 世系籍, 屬籍이라고 말해지는 家系와 관련한 族圖와 같은 보첩류가 있었다는 객관적이 증거다. 해주오씨 족도 작성 과정을 보면 禹氏家門에 소장된 屬籍속에 해주오씨에 대한 先系에 대해서 분명히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의 족보, 준호구(지금의 가족관계상세증명서), 재산분재기 등을 보면 남녀평등, 유산균등분재, 낳은 순서대로 딸 아들이 돌아가며 윤회봉제사했던 시대로, 조선 중후기에 정착한 남존여비, 남아선호, 장남우선, 출가외인 등의 사회가 아니였으므로 당시의 족보의 기재방식은 친손과 외손의 차별없이 모두 수록하였고, 사위나 외손을 기록할 때 반드시 성명을 포함하여 표시하였다. 또한 자녀를 기록하되 先男後女가 아닌 출생순서로 기재하였음을 이 해주오씨 族圖에도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초 : 고려 말에서 조선 개국 초기에 우씨가문은 안동의 대표적인 사족가문이자 退溪學脈을 계승한 핵심적인 가문의 하나인 전주 류씨(全州柳氏)와도 사돈관계였다. 안동의 전주 류씨는 고려말 류습(柳濕)의 둘째 아들인 극서(克恕)의 후예로,빈(濱)-義孫-季潼-軾-潤善-城으로 가계가 이어진다. 禹倬의 첫째 아들 禹元光의 손녀가 전주 류씨와 사돈관계임이 전주 류씨 족보에 올라 있다.

高麗史와 전주 류씨 족보를 보면 楊廣道按廉使·判典客寺事·延安府使 등을 지낸 유극서(柳克恕)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한 명은 晉州河氏 允潾의 딸로 河崙(1347~1416)의 누이였으며, 한 명은 水原李氏 仁壽의 딸로 守門下侍中을 지낸 公山府院君 李子松(?~1388)의 손녀였다. 유극서(柳克恕)는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개국 후 영흥부사를 지낸 둘째 아들 빈(濱)과 禹倬 家門의 큰아들 禹元光과 사돈관계다. 유극서의 둘째 아들인 濱(1370~1448)은 역시 두 명의 부인이 확인되는데 한 명은 德山尹氏로 禹元光의 외손녀였으며, 한 명은 丹陽禹氏로 우원광의 손녀였다. 그는 전후 부인이 모두 우원광의 손녀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우원광은 禹倬(1263~1342)의 아들로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를 지낸 것으로 안동 전주유씨 족보에 전한다. 유극서, 유빈 부자가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 관료 출신들과 혼인관계를 맺는 정황은 이들이 中央 官界에 안착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해 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려후기에 등장한 한 개인의 고조부까지 내외조부모 8쌍(四祖x2: 아버지, 조부, 증조부, 외조부)을 기재하는 호적기재 양식인 팔조호구식(八祖戶口式)의 영향을 받아 족보도 친가와 똑같이 외가 처가도 기록하여 고려말에서 조선 중기 이전의 족보에서 혼인 관계를 추적하면 읽어버렸던 世系圖을 찾을 수 있다.

기록에 남은 가장 오래된 우씨편집

여자는 만성통보략 명인편을 보면 주(周), 제나라(齊國)의 우씨(禹氏)다. 남자는 만성통보 등에 의하면 남북조시대 상주 자사(常州刺史) 우만성(禹万城)이다.[2]

문자의 의미편집

형성문자편집

뜻을 나타내는 짐승발자국유(禸☞짐승의 발자국)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九(구)로 이루어짐. 벌레훼(虫☞뱀이 웅크린 모양, 벌레)部는 훼(☞뱀)를 나타내어 뱀의 뜻. 나중에 水神(수신)인 뱀을 숭배한 종족(種族)의 성왕(聖王)의 이름으로 쓰여졌음.

우씨의 기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편집

만성통보략 명인편(萬姓統譜略 明人編)에 의하면, "우씨(禹氏)는 본(本)이 롱서(隴西)고 우음(羽音)이며 즉(卽) 하우씨(夏禹氏)의 후(后)이다."[3] 를 볼 때 왕비 씨족의 성씨이거나 하우씨에게 사성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우(夏禹)씨의 후손 하후(夏侯)씨편집

씨성과 보첩(譜牒)에 대한 변증설 주석에서 "우(禹) 임금의 후예가 하(夏)씨로 되었는데, 기간공(杞簡公)의 아우 타(佗)가 노(魯)로 망명하여 후작(侯爵)을 받았으므로 다시 하후(夏侯)씨가 생기게 되고, 진(陳) 나라의 후예가 식(息)씨로 되었는데, 식 공자(息公子) 변(邊)이 대부(大夫)의 작위를 받았으므로 다시 식부(息夫)씨가 생기게 된 유를 말한다."[4]를 볼 때 하(夏)가 망한 후 사(姒)씨의 후손 중 일부가 하(夏)씨를 만들고 훗날 타(佗)가 하후(夏侯)씨를 받은 후 하후(夏侯)씨가 생긴 걸 알 수 있다. 우(禹)씨는 하우씨의 후손이라는 명확한 근거 자료가 없고 만성통보략 명인편(萬姓統譜略 明人編)의 기록이 가장 신빙성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인물편집

  • 우천석(禹天錫) : 7세손. 1268년(원종 9)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서 낭장 박신보(朴臣甫)와 함께 몽골의 사신 왕국창(王國昌) 일행을 흑산도로 인도하여 뱃길을 살폈다. 1273년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제주를 거점으로 하여 저항하는 삼별초를 공격하였다. 1277년(충렬왕 3) 전라도안렴부사(全羅道按廉副使)를 거쳐, 1280년 잡단(雜端)에 올랐다.
  • 우탁(禹倬) : 8세손.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르는 신사(神祠)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 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뛰어난 역학자였다.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다.
  • 우현보(禹玄寶, 1333년 ~ 1400년) : 10세손. 자는 원공(原功). 아버지는 적성군(赤城君) 우길생(禹吉生)이다.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곧이어 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오래 역임하면서 정사를 주관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우왕의 명령에 따라 좌시중에 임명되어 방어하려 하였으나, 실패해 파직되었다. 그 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인척인 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1390년(공양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1392년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시체를 거둬 장례를 치렀다. 그래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해 다시 탄핵을 받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 일파가 제거된 뒤 복관되었고, 1399년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에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래(李來)로부터 반란의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에게 알려준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 우인열(禹仁烈, 1337년 ~ 1403년) : 10세손. 고려조에 경상·양광·전라삼도도체찰사(慶尙楊廣全羅三道都體察使)로 왜구를 방어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해 판개성부사가 되었으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에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1403년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 우성범(禹成範, ? ~ 1392년) : 고려 제34대 왕 공양왕의 부마이다. 조부는 찬성사 우현보(禹玄寶), 아버지는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우홍수(禹洪壽)이다. 부인은 공양왕의 둘째딸 정신궁주(貞信宮主)이다. 1390년(공양왕 2) 1월 대호군으로 세자시학(世子侍學)에 제수되고, 곧 이어 단양군(丹陽君)에 봉하여져 왕의 신임을 받고 가문을 일으켰다. 1392년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폐위되자 다른 부마들과 함께 개경의 회보문(會寶門) 밖에서 참수되었다.
  • 우창적(禹昌績, 1623년 ~ 1693년) : 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52년 사직서참봉, 광흥도사(廣興都事),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그 뒤 1660년(현종 1)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의성현령을 거쳐, 1662년 황해도도사가 되고, 이어 1664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정언(正言)이 되고,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1669년 배천군수에 이어 1672년 장령(掌令), 1675년(숙종 1) 사간·집의(執義)·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고, 1679년 황해도관찰사, 1689년 동지의금부사·개성부유수가 되었다. 그 뒤 1691년 호조참판·한성부윤을 거쳐, 이듬해 경기도관찰사 되었으며, 1693년에는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과거 급제자편집

단양 우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5명, 무과 급제자 73명을 배출하였다.[5]

고려 문과

우천석(禹天錫) 우천우(禹天佑) 우탁(禹倬) 우현보(禹玄寶) 우홍강(禹洪康) 우홍득(禹洪得) 우홍명(禹洪命) 우홍부(禹洪富) 우홍수(禹洪壽)

고려 사마

우근(禹謹) 우홍명(禹洪命)

문과

우경석(禹敬錫) 우경한(禹景漢) 우계번(禹繼蕃) 우규(禹糾) 우방(禹舫) 우배창(禹拜昌) 우상(禹鏛) 우석간(禹錫簡) 우석구(禹錫龜) 우석문(禹錫文) 우성전(禹性傳) 우세신(禹世臣) 우세준(禹世準) 우승범(禹承範) 우승범(禹承範) 우여무(禹汝楙) 우유일(禹惟一) 우전(禹塡) 우정(禹鐤) 우정구(禹鼎九) 우정규(禹禎圭) 우정봉(禹禎鳳) 우정침(禹廷琛) 우제일(禹濟一) 우준민(禹俊民) 우즙(禹楫) 우창적(禹昌績) 우천기(禹天機) 우필순(禹弼舜) 우하손(禹賀孫) 우하철(禹夏哲) 우홍적(禹弘績) 우홍적(禹洪迪) 우효강(禹孝剛) 우효강(禹孝剛)

무과

우갯지(禹㖋知) 우경서(禹敬敍) 우광적(禹光績) 우극렴(禹克廉) 우끝치(禹唜致) 우내복(禹來福) 우대유(禹大兪) 우득경(禹得景) 우문명(禹文明) 우배언(禹拜言) 우배천(禹拜天) 우봉룡(禹鳳龍) 우상급(禹尙給) 우서규(禹瑞圭) 우석용(禹錫瑢) 우석하(禹錫夏) 우성률(禹聲律) 우성민(禹聖民) 우성부(禹聖敷) 우성준(禹成俊) 우성하(禹聖夏) 우성해(禹聖諧) 우세환(禹世煥) 우순량(禹順良) 우시웅(禹時雄) 우안국(禹安國) 우여도(禹汝度) 우여흠(禹汝欽) 우영철(禹英哲) 우원훈(禹元勛) 우윤민(禹允民) 우윤순(禹胤舜) 우응진(禹應辰) 우응태(禹應台) 우인경(禹仁慶) 우인구(禹仁龜) 우일성(禹一聖) 우자산(禹自山) 우장규(禹章奎) 우전문(禹傳文) 우전범(禹傳範) 우점송(禹點松) 우정추(禹廷樞) 우제만(禹濟萬) 우종선(禹宗善) 우중창(禹重昌) 우징귀(禹徵龜) 우찬(禹贊) 우창배(禹昌拜) 우천규(禹天圭) 우천필(禹天弼) 우취순(禹就舜) 우치연(禹治沇) 우치적(禹致績) 우치홍(禹治洪) 우치홍(禹致洪) 우대춘(禹大春) 우태열(禹泰說) 우태영(禹台榮) 우택구(禹澤九) 우택수(禹澤水) 우필한(禹弼漢) 우하종(禹夏宗) 우하주(禹夏疇) 우하형(禹夏亨) 우협(禹協) 우홍구(禹洪龜) 우홍규(禹弘圭) 우홍채(禹洪采) 우홍택(禹洪宅) 우효민(禹孝民) 우희복(禹希福) 우희영(禹熹英)

생원시

우강(禹綱) 우경(禹璟) 우경우(禹景愚) 우경필(禹敬弼) 우광적(禹光績) 우구명(禹龜命) 우규(禹糾) 우극겸(禹克謙) 우기명(禹驥命) 우단중(禹端中) 우동영(禹東榮) 우명적(禹明績) 우문규(禹文圭) 우방(禹舫) 우배언(禹拜言) 우백규(禹伯圭) 우봉명(禹鳳命) 우상(禹鏛) 우상정(禹尙鼎) 우서(禹曙) 우석구(禹錫九) 우석규(禹錫圭) 우석규(禹錫珪) 우석주(禹錫疇) 우석현(禹錫玹) 우성서(禹聖瑞) 우성하(禹聲夏) 우세복(禹世復) 우세일(禹世一) 우세준(禹世準) 우세팽(禹世祊) 우세흠(禹世欽) 우순민(禹舜民) 우승모(禹升謨) 우식(禹軾) 우언신(禹彦信) 우여순(禹如舜) 우연(禹淵) 우열규(禹悅圭) 우영승(禹永承) 우유일(禹惟一) 우유직(禹惟稷) 우윤하(禹崙河) 우정(禹鼎) 우정규(禹禎圭) 우정린(禹禎麟) 우정진(禹鼎鎭) 우정침(禹廷琛) 우준겸(禹俊謙) 우즙(禹楫) 우지서(禹之敍) 우지익(禹之益) 우지홍(禹志洪) 우창서(禹昌敍) 우창서(禹昌瑞) 우창적(禹昌績) 우창하(禹昌夏) 우필인(禹弼寅) 우하익(禹夏益) 우하중(禹夏重) 우하창(禹夏昌) 우현규(禹玄圭) 우현극(禹賢克) 우형(禹悙) 우홍구(禹洪龜) 우홍명(禹鴻命) 우홍적(禹洪迪) 우홍전(禹洪傳) 우홍표(禹洪標) 우희평(禹熙平)

진사시

우강(禹綱) 우강(禹綱) 우경모(禹景謨) 우경석(禹敬錫) 우곤하(禹崑河) 우구서(禹九敍) 우대규(禹大圭) 우덕구(禹德九) 우득중(禹得中) 우만적(禹萬績) 우명구(禹命構) 우문제(禹文濟) 우배언(禹拜言) 우복룡(禹伏龍) 우사원(禹思元) 우상(禹鏛) 우상한(禹相漢) 우석모(禹錫謨) 우석보(禹錫寶) 우석주(禹錫疇) 우성전(禹性傳) 우성해(禹成海) 우세열(禹世烈) 우세환(禹世煥) 우숭검(禹崇儉) 우양(禹讓) 우여무(禹汝楙) 우연정(禹然鼎) 우원규(禹元奎) 우응룡(禹應龍) 우익룡(禹翼龍) 우정구(禹鼎九) 우정규(禹廷圭) 우정동(禹程東) 우정룡(禹禎龍) 우정봉(禹禎鳳) 우정삼(禹鼎三) 우정필(禹廷弼) 우정하(禹楨夏) 우제선(禹濟善) 우준민(禹俊民) 우지서(禹之敍) 우창식(禹昌植) 우천기(禹天機) 우천주(禹天柱) 우천형(禹天亨) 우철(禹轍) 우청(禹晴) 우치영(禹治榮) 우탁(禹鐸) 우태원(禹泰元) 우태진(禹泰進) 우필량(禹弼亮) 우필순(禹弼舜) 우필전(禹弼甸) 우필해(禹弼諧) 우호(禹豪) 우홍상(禹弘祥) 우홍성(禹弘成) 우홍세(禹弘世) 우홍수(禹洪受) 우홍일(禹弘一) 우홍적(禹弘績) 우홍정(禹弘鼎) 우홍주(禹洪疇)

율과

우덕구(禹德九) 우정구(禹鼎九)

항렬자편집

  • 대동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