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티르 빈 모하맛
마하티르 빈 모하맛(말레이어: Mahathir bin Mohamad IPA: [maˈhɑ.ðe bin moˈhɑ.mat̚], 자위 문자: محضير بن محمد, 문화어: 다뚝 스리 독터 마하디르 빈 모하마드, 1925년 12월 20일 ~ ) 또는 툰 닥터 마하티르 모하맛(Tun Dr. Mahathir Mohamad), "Dr.M"이라고 알려진 그는 말레이시아의 제4대, 제7대 총리이다. 별명은 "Che Det"이며, 1947년 7월 20일 "말레이 여성들을 자유롭게 만들다"(Wanita Melayu Mencipta Kebebasan Sendiri)라는 칭호가 붙은 더 스트레이츠 타임즈 싱가푸라(The Straits Times Singapura)에서 필명처럼 자주 사용되던 이름이다. 그는 1981년 7월 16일부터 2003년 10월 31일까지 22년 간을 총리으로 재임했으며, 그 기간 동안 경제정책을 성공시키는가 하면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신흥 중진국"으로 명명될 때까지, 말레이시아는 동남아 국가 중 세계 무대에서 가장 유력한 나라였다.
마하티르 빈 모하맛
툰 닥터 마하티르 빈 모하맛 Tun Dr. Mahathir bin Mohamad | |
---|---|
![]() | |
말레이시아의 제4대 총리 | |
임기 | 1981년 7월 16일~2003년 10월 31일 |
전임: 후세인 온(3대) 후임: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5대)
| |
말레이시아의 제7대 총리
| |
임기 | 2018년 5월 10일~2020년 3월 1일 |
전임: 나집 라작(6대) 후임: 무히딘 야신(8대)
|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25년 7월 10일 | (97세)
출생지 | 말레이시아 알로르 스타르 |
국적 | 말레이시아 |
학력 | 싱가포르 국립 대학 의학부 |
정당 | 통일말레이국민조직 (UMNO)(舊) 희망연맹에서 말레이시아 원주민연합당 (브르사뚜 당, BERSATU) |
부모 | 모하맛 빈 이스칸다르, 완 틈파완 완 하나피 |
배우자 | 시티 하스마흐 |
자녀 | 마리나, 미르잔, 멜린다, 모흐자니, 무흐리즈, 마이주라, 마자르 |
종교 | 이슬람교 |
서명 | ![]() |
젊은 시절편집
마하티르 빈 모하맛은 1925년 12월 20일 크다 주의 알로르 스타르에서 모하맛 빈 이스칸다르와 완 틈파완 완 하나피 사이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1][N 1] 프낭 출신으로 말레이시아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아버지 모하맛 빈 이스칸다르는 말레이인/인도인 혼혈이었고, 크다 출신인 어머니 완 틈파완 완 하나피는 순혈 말레이인이었다. 사실, 그의 집안은 귀족 출신이 아니었고, 두드러진 종교관이나 정치관이 없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2] 마하티르의 아버지는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던 학교장이었는데, 이는 어머니 완 틈파완이 크다의 왕족들과 관계를 맺는 동안 그의 딸이 중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두 부부가 결혼하기 전에, 마하티르에게는 6명의 반 형제자매(half-sibling)와 2명의 완전형제자매(full-sibling)가 있었다.[3]
마하티르는 근면한 학생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공부를 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는 체육에 약간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 중학교(당시 말레이시아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의 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했고, 다른 초등학교 친구들보다도 뛰어난 영어 실력을 보이기도 했다.[4] 말레이시아가 일본에 점령당했던 제2차 세계 대전 무렵, 그는 사업 - 처음에는 커피, 그 다음에는 피상 고렝(pisang goreng, 바나나 튀김)과 기타 스낵류 - 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말레이시아는 고등학교가 없고, 대신 중학교가 5학년까지 있다) 싱가포르의 킹 에드워드 7세 대학교(현재 싱가포르 국립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했다. 당시 그는 훗날 부인이 되는 동창 시티 하스마흐 모하맛 알리(Siti Hasmah Mohamad Ali)를 만났다. 졸업 후, 그는 1956년 결혼하기 전까지 공직 의사로 활동했다. 그는 그의 업무를 마련하였고, 동년 알로르 스타르로 돌아왔다. 그는 마을의 첫 번째 말레이인 의사였고, 또 사회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그는 커다란 집을 짓고, 다양한 사업에 투자했으며, 자신의 폰티악 카탈리나(Pontiac Catalina, 자동차)를 운전해 줄 중국계 기사를 고용하기도 했다. 1957년, 그는 부인이 된 시티 하스마흐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 마리나 마하티르(Marina Mahathir)를 낳았는데, 그 전에도 3명을 더 낳을까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고 앞으로 28년 동안 3명을 입양하기도 했다.
정치 활동편집
정계 입문편집
말레이시아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마하티르는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그는 단명한 말레이 연방(1946-1948) 시절 비(非)말레이인들의 시민 인정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의과 대학에서 말레이인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더 스트레이츠 타임즈(The Straits Times)의 학생 저널에서 체 뎃(C.H.E. Det)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말레이어의 공용어 지정 등을 주장하는 등, 말레이인의 권리 향상을 주장했다. 알로르 스타르에서 의사 활동을 하던 무렵(1959년 총선 전후)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크다 주당의 의장이 되었다. 비록 UMNO에서 명성을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59년 총선에 불출마했는데, 이는 당시 총리였던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과의 대립 때문이었다. 마하티르가 압둘 라만이 자국을 독립 후에도 영연방의 일원으로 두려 하는 정책을 비판하면서, 둘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제 압둘 라만은 마하티르의 정책 - UMNO의 후보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을 도입하는 정책 - 에 반대하게 되었다. 이는 시위로 인해 정계 입문을 좀 늦춘 그에게 있어 충분히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길게 늦어지지는 않았다. 1964년 총선에서, 마하티르는 알로르 스타르의 코타 스타르 슬라탄의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5]
국회의원 시절에서 출당 후까지편집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당선된 마하티르는 평의원으로서, 당시 말레이시아의 사회적 갈등 - 싱가포르(당시 말레이시아의 영토)의 미래, 중국계들의 막대한 경제권 등 - 을 스스로 해결하기 시작했다. 그는 싱가포르의 주요 정당이던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 친 중국(pro-Chinese) 및 반 말레이(anti-Malay) 성향 -의 지도자 리콴유(Lee Kwan Yew)를 "오만하다"며 큰 소리로 공격했다. 마하티르가 국회의원이 되고 1년이 지난 후, 싱가포르는 결국 추방되었다. 하지만 마하티르는 평의원으로서 명성을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1969년 총선에서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n-Malaysian Islamic Party, 말레이시아의 야당)의 유소프 라와(Yusof Rawa)에게 패하였다.[6] 마하티르는 이 이유를 중국계 유권자들이 UMNO에서 PAS로 이탈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7] 당시 동년 5월 13일에 있었던 대규모 인종 폭동(5·13 사건이라고 부르며, 말레이계와 중국계간의 충돌로 빚어져 수백명이 사망했다)이 일어나면서, UMNO는 총선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사실, 마하티르는 작년에 일이 터질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다. 더 이상 국회의원이 아닌 그는, 압둘 라만에게 말레이인 이해관계 유지에 결점이 있었다며 이를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는 곧 압둘 라만의 사퇴를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8] 곧 마하티르는 1969년 말 UMNO의 최고회의에서 쫓겨난 데 이어 당에서 출당되었다.[5] 다만, 그를 체포하지 않도록 설득했다.[6][7]
정치적으로 소외된 뒤, 마하티르는 그의 첫 번째 책인 말레이 딜레마(The Malay Dilemma)를 썼는데, 이는 말레이인 공동체를 새롭게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는 UMNO에 대한 말레이인들의 충분한 지지를 이끌게 하여금 경제에 대한 관심과 권한이 중국계한테만 편향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춰야 하고, 또 말레이인들이 충분한 경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만약에 돈과 재산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않고 노동을 피하려 한다면 질 수 밖에 없음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압둘 라만 정권에 대한 비판을 계속 했으며, 가차없이 금지되었다. 물론 그가 총리가 된 1981년 이후로만 해금되었다.
UMNO 복귀와 총리 취임편집
교육부 장관 시절편집
1970년 압둘 라만은 총리를 사임하였고, 부총리였던 압둘 라작(Abdul Razak)이 후임 총리가 되었다. 라작 신임 총리는 마하티르에게 UMNO에 복당할 것을 격려했고, 이후 1973년 그를 상원의원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UMNO 최고회의에 복귀하면서[5] 라작 정권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1974년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5] 한편 1974년 크다에 기반한 쿠방 파수의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대의원으로도 복귀하였다.[5]
경선 승리와 부총리 취임편집
1975년, 그는 UMNO의 부총재에 세 번째로 도전했다. 이 경선은 건강이 악화되고 있던 라작 총리와, 그의 부총리 후세인 온(Hussein Onn) 모두가 당의 지도부를 계승하기 위한 대결이었다. 여기서 라작이 선호했던 믈라카의 전 주(州)수상 가파르 바바(Ghafar Baba), 클란탄 주 왕가 출신으로 부유한 사업가 텡쿠 라잘레이프 함자(Tengku Razaleigh Hamzah), 그리고 마하티르가 당선되었다. 바로 이듬해 라작이 죽자, 새 총리로 취임한 후세인은 부총리 후보 3명 중 한 명만을 선택해야 했는데, 야심만만하기로 유명했던 가잘리 샤피(Ghazali Shafie)를 고려하기도 했다. 마하티르의 경쟁자들은 각각 중요한 정치적 책임을 갖고 있었는데, 특히 후세인이 부총리 후보로 고려했던 가잘리는 당의 낮은 지지율로 부총재 경선에서 패하였다. 가파르의 경우, 상급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다가 영어도 잘 하지 못했고, 라잘레이프는 너무 젊어서 경험이 부족했는데다가 미혼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후세인은 쉽게 선택하지 못했다. 후세인과 마하티르는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고, 또 여전히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압둘 라만을 불쾌하게 만들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주간의 망설임 끝에, 후세인은 마하티르를 부총리로 임명했다. 다만 둘 사이의 약속이 있자면, 후세인 자신의 후계자는 마하티르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총리 재직 시절편집
마하티르는 성공한 교육부 장관이자 산업자원부 장관(1978-1981, 부총리 재직 시절 겸직)으로 여겨졌다.[출처 필요] 임기 후반에는 중공업 정책(heavy industries policy)을 펼쳤는데, 정부지배기업(government-controlled corporation)인 하이콤(DRB-HICOM)의 설립, 국내 자동차 산업 등 제조 분야의 장기간 개발을 위한 투자 등이 그 정책에 의한 성과이다.[9] 그가 부총리 겸 장관을 재직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시간을 해외 방문을 통해 세계에 말레이시아를 홍보하는 데 사용했다.[10]
그러나, 마하티르는 그렇게 영향력이 큰 부총리는 아니었다. 조심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던 후세인은 그의 대담한 정책 제안(bold policy proposals)을 거부했다. 후세인과 마하티르 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가잘리와 라잘레이프가 후세인의 가까운 조언자가 되어, 둘이 접촉할 때 마하티르를 우회해 왔다. 그렇기는 하지만, 1981년 후세인이 건강 문제로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마하티르는 총리직을 승계하게 되었다.[5][11]
총리 재임시편집
후세인 온의 건강 문제가 화제가 되던 1981년, 부총리로 재임하던 그는 총리로 임명될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던 중 후세인 온이 사임하자, 그는 총리로 임명되었다. 재임 중 국방장관직을 겸임했으며 동지인 무사 하탐을 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2M내각이라고 했다.[12]
총리 시절 그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우자"는 소위, 향동학습정책(向東學習政策, Look East Policy)을 펼쳤다.[13] 재직 기간 동안 말레이시아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른바 '신흥 중진국'으로 떠올랐다, 이로써 '현대화의 아버지' 등으로 칭찬을 받았으나.
취임 초반편집
1981년 7월 16일 56세의 나이로 총리에 취임하였다.[14] 그가 처음으로 취한 조치는 국가보안법 수감자 21명을 석방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저널리스트인 사마드 이스마일(Samad Ismail)과 후세인 정권의 차관급 공직자로 지하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았던 압둘라 아흐마드(Abdullah Ahmad)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집권 초 2년 동안 당 개편을 위한 조치도 조심스레 취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동지인 무사 히탐(Musa Hitam)을 부총리로 임명했다.
임기 초반(1981년 ~ 1987년)편집
마하티르는 취임 초기 2년 동안 UMNO의 리더십을 굳히는 데 주력했는데, ABIM의 지도자 안와르 이브라힘을 UMNO로 넣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UMNO는 이슬람 부흥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안와르를 편입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ABIM을 누르는 데 성공한다.[12] UMNO는 1982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5][16] 1983년에는 술탄(국왕을 임명하는 종교지도자)끼리의 다툼을 줄이고자 헌법을 개정하였다. 말레이시아의 국가원수인 국왕(양디-퍼르투안 아공)은 당시 고령이었던 페락 주의 이드리스 샤 2세와 논란이 많았던 조호르 주의 이스칸다르 중 하나씩 돌아가며 임명해야 했던 시기였다. 마하티르는 두 술탄에 대해 매우 심각한 의구심을 가졌다. 둘 다 각 주에서 행동주의적(activist) 지도자였는데 다, 특히 이스칸다르는 겨우 몇 년 전 살인죄에 대한 유죄가 확정된 상태였기 때문이다.[17][18] 마하티르는 후에 선출될 새 아공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선제(pre-emptively) 권력에 대한 제한을 취했다.
정계 복귀와 2기 총리 임기편집
야당에 들어가 정계에 복귀했고 2018년 5월 9일 총선에서 승리해 5월 10일 총리에 취임했다[19][20]. Mahathir는 말레이시아가 집권 후 "법치주의를 회복"하고 1MDB 스캔들에 대해 심층적이고 투명한 조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약속했으며, 언론에 나집 라작 전 총리가 실수를 했다면 나집 자신이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언론에 말했습니다 결과.[21]
기자회견 중 코피편집
2019년 11월 19일 마하티르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국제 팜오일 콘퍼런스·전시회에 참석해 기자회견 질의응답을 하던 중 갑자기 코피를 흘렸다. 마하티르 들고 있던 흰 손수건으로 급히 코를 닦았지만 코피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마하티르 기자회견을 중단하고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자리를 떴다. 이후 마하티르 승용차 안에서 코를 막고 있는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됐다.[22][23]
이와 관련해 말레이시아 총리실은 "마하티르 총리 코피를 흘렸지만, 잠시 뒤 멈췄고 푸트라자야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재개했다"며 건강 이상설에 선을 그었다.[24]
부산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참석차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
퇴임 및 정계 은퇴편집
그는 2020년 3월 1일에 총리직에 퇴임을 하였다.[25]
2021년 3월 7일마하티르 코로나19 화이자 백신을 맞았다. 뉴스트레이츠타임스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내 최고령 접종자다.[26]
평가편집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근대화를 이끈 주역이다. 1981년 총리로 임명돼 2003년까지 22년간 집권했고, 93세이던 2018년부터 다시 2년간 총리를 지냈다. 그는 농업 국가였던 말레이시아를 철강·자동차를 생산하는 무역 강국으로 탈바꿈시켰지만.[27]
이명박 대통령은 그의 저서 《신화는 없다》에서 마하티르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1994년 2월,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사흘 동안의 그의 방한은 매우 조용하고 이례적이었다. 김해공항을 통해 소리 없이 들어와 울산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 계열사를 둘러보고 회사 관계자들과 사업을 논의한 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돌아갔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이런 식으로 한국을 다녀가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말레이시아 경제발전의 견인차 마하티르 총리의 실질외교다. 겉치레와 요란한 수사를 그는 멀리한다.>[28]
미국 "타임 매거진"이 1998년 아시아 뉴스 인물로 마하티르를 선정했습니다.[29]
2013년 10월 5일 중화 인민 공화국 시진핑 주석은 쿠알라룸푸르에서 마하티르를 만났을 때 그를 "중국인이 존경하는 오랜 친구"라고 불렀다.[30][31]
같이 보기편집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64년 선거 | 하원의원 (코타세타 선거구) | 2대 | 통일말레이국민조직 | 60.22% | 12,406표 | 1위 | |
1969년 선거 | 하원의원 (코타세타 선거구) | 3대 | 통일말레이국민조직 | 48.03% | 12,032표 | 2위 | 낙선 |
1974년 선거 | 하원의원 (쿠방파수 선거구) | 4대 | 통일말레이국민조직 | 단독후보 | 무투표 | 1위 | |
1978년 선거 | 하원의원 (쿠방파수 선거구) | 5대 | 통일말레이국민조직 | 64.64% | 18,198표 | 1위 | |
1982년 선거 | 하원의원 (쿠방파수 선거구) | 6대 | 통일말레이국민조직 | 73.67% | 24,524표 | 1위 | |
1986년 선거 | 하원의원 (쿠방파수 선거구) | 7대 | 통일말레이국민조직 | 71.48% | 25,452표 | 1위 | |
1990년 선거 | 하원의원 (쿠방파수 선거구) | 8대 | 통일말레이국민조직 | 78.07% | 30,681표 | 1위 | |
1995년 선거 | 하원의원 (쿠방파수 선거구) | 9대 | 통일말레이국민조직 | 77.12% | 24,495표 | 1위 | |
1999년 선거 | 하원의원 (쿠방파수 선거구) | 10대 | 통일말레이국민조직 | 63.22% | 22,399표 | 1위 | |
2018년 선거 | 하원의원 (랑카위 선거구) | 14대 | 말레이시아 원주민연합당 | 54.90% | 18,954표 | 1위 |
각주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 ↑ 가 나 Wain 2010, 8쪽
- ↑ Wain 2010, 5–6쪽
- ↑ Wain 2010, 4–5쪽
- ↑ Wain 2010, 6–7쪽
- ↑ 가 나 다 라 마 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Mahathir bin Mohamad”. 2012년 4월 2일에 확인함.
- ↑ 가 나 Tan & Vasil, p. 51
- ↑ 가 나 Wain 2010, 28쪽
- ↑ Wain 2010, 26쪽
- ↑ Milne & Mauzy 1999, 64쪽
- ↑ Wain 2010, 39쪽
- ↑ Wain 2010, 38–40쪽
- ↑ 가 나 하기와라 (1996) pp.168-195
- ↑ Kit G. Machado (1987년 6월). “Malaysian Cultural Relations with Japan and South Korea in the 1980s: Looking East”. 《Asian Survey》 (영어) 27 (6): 638. doi:10.1525/as.1987.27.6.01p00645.
The prime minister, Datuk Seri Mahathir bin Mohamad, urges Malaysians to look to both Japan and South Korea "for inspiration, methods, and skills" and "to emulate and learn ... [their] work ethics and attitudes" in order to further the country's economic progress.1 ... 1. Address at the 5th ASEAN-Japan Symposium in Kuala Lumpur, August 24, 1982, in Foreign Affairs Malaysia (hereinafter FAM), 15:3 (September 1982), p. 228.
- ↑ Wain 2010, 40쪽
- ↑ Milne & Mauzy 1999, 28쪽
- ↑ Sankaran & Hamdan 1988, 18–20쪽
- ↑ Milne & Mauzy 1999, 30–31쪽
- ↑ Branigin, William (1992년 12월 29일). “Malaysia's Monarchs of Mayhem; Accused of Murder and More, Sultans Rule Disloyal Subjects”. 《The Washington Post》.
- ↑ “Malaysia's Mahathir Mohamad sworn in after shock comeback victory”. 《BBC News》 (영국 영어). 2018년 5월 10일. 2021년 3월 12일에 확인함.
- ↑ “Malaysia's Mahathir Mohamad is now the world's oldest leader” (영어). 2021년 4월 10일에 확인함.
- ↑ “1MDB poses fresh threat to Najib”. 2019년 5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1년 9월 14일에 확인함.
- ↑ Times, New Straits (2019년 11월 19일). “Dr Mahathir suffers nose bleed during aborted press conference | New Straits Times” (영어). 2021년 9월 14일에 확인함.
- ↑ Palansamy, Yiswaree. “PM’s nosebleed ends press conference prematurely | Malay Mail” (영어). 2021년 9월 14일에 확인함.
- ↑ “PM stops press conference because of nose-bleed, aide says he’s fine” (영어). 2021년 9월 14일에 확인함.
- ↑ CNN, Helen Regan and Ushar Daniele. “Malaysia's Mahathir Mohamad resigns as Prime Minister”. 2021년 4월 10일에 확인함.
- ↑ 기자, 임선영 (2021년 3월 8일). “96세 마하티르도, 달라이 라마도 맞았다…지도자들 백신 접종 행렬”.
- ↑ “Hindustan Times:: Leadership Summit”. 2008년 3월 6일. 2008년 3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1년 5월 15일에 확인함.
- ↑ “말레이시아의 ‘國父’ 마하티르 전 총리”. 2011년 5월 18일.
- ↑ SPAETH, ANTHONY (1999년 12월 28일). “Breaking News, Analysis, Politics, Blogs, News Photos, Video, Tech Reviews”. 《Time》 (미국 영어). ISSN 0040-781X. 2021년 9월 14일에 확인함.
- ↑ ““马哈蒂尔是中国敬重的老朋友”-观察者网”. 2021년 5월 15일에 확인함.
- ↑ “習近平主席,マレーシアのマハティール元首相と会見”. 2021년 5월 23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전임 후세인 온 |
제4대 말레이시아의 부총리 1976년 3월 5일 ~ 1981년 7월 16일 |
후임 무사 히탐 |
전임 후세인 온 |
제4대 말레이시아의 총리 1981년 7월 16일 ~ 2003년 10월 3일 |
후임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
전임 타보 음베키 |
비동맹 운동 사무총장 2003년 |
후임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
전임 나집 라작 |
제7대 말레이시아의 총리 2018년 5월 10일 ~ 2020년 3월 1일 |
후임 무히딘 야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