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외(慕容廆, 269년 ~ 333년)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수장으로 훗날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황(慕容皝)의 아버지이다. 전연이 건국된 이후 고조(高祖) 선무제(宣武帝)로 추존되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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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는 269년 모용부의 대인(大人)인 모용섭귀(慕容涉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83년모용섭귀가 죽자 그의 동생 모용내(慕容耐)가 정권을 장악하고 모용외를 죽이려 하였으나 모용외가 요동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285년에 모용내가 국인(國人)에 의해 살해되자 모용외가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서진을 자주 공략하여 정복활동을 벌이고 공략을 벌일 때마다 한족(漢族)들을 수만명씩 노예로 끌고가 선비족들에게 나눠주어 명성을 얻었다.

모용외는 선비족우문부(宇文部)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격하려 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막았다. 이에 서진과 적대하게 된 모용외는 서진의 유주(幽州) 일대를 공격하여 한족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서진 무제(武帝)는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모용외의 서진 정복은 계속되었다. 또한 서기 285년 부여(扶餘)를 공격하였다. 이후 단부선비족을 이끄는 단석괴가 대단한 세력이 되어 서진을 공격하였고 모용부 선비족도 공격하였다. 단부선비족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모용외는 세력이 매우 약해지게 되었다. 서진은 약해진 모용외를 회유하기 위해 선비도독(鮮卑都督)에 임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우문부, 단부 선비족의 침입을 피해 도하(徒河)의 청산(靑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294년에는 다시 본거지를 극성(棘城)으로 옮겨 서진을 공격하였다.

307년,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였으며, 서진을 공격하여 많은 한족들을 노예화 시키며 국력을 크게 키웠다. 이에 서진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모용외가 끌고간 한족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모용외는 듣지 않았다. 318년우문부 선비족, 단부 선비족과 고구려(高句麗)가 동맹을 맺고 모용외를 협공하였는데 모용외는 우문부 선비, 단부 선비, 고구려의 군사들을 이간질하여 간신히 위기를 벗어나고 우문부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최비는 모용외 공격을 두려워하여 결국 319년고구려로 망명하였으나 고구려는 최비를 죽여 그 목을 모용외로 보냈다. 모용외는 요동을 정복하게 되었다. 이후 모용외는 고구려와 적대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320년동진(東晉)은 모용외를 회유하기 위해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로 삼았으며 많은 비단과 공물들을 모용외에게 주어 동진에 협조하게 하였다. 이것은 마치 당나라가 돌궐 군주 등 이민족들에게 비단과 공물을 제공하고 군으로서 협조하게 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였다. 이후 모용외는 후조(後趙)와 대립하였다. 321년에는 동진에서 모용외에게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을 제수하였다. 325년에는 우문부가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오히려 반격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333년에 사망하였다.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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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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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선황후(武宣皇后) 단씨(段氏)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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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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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모용내
모용부의 족장
모용외
후임
모용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