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
벨 에포크(프랑스어: Belle Époque [bɛlepɔk][*], 아름다운・좋은 시절)란 주로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914년)까지 프랑스가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 발전으로 번성했던 시대를 일컫는 데에 회고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벨 에포크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말・에드워드 시대와, 독일의 빌헬름 시대와 대응하는 프랑스의 시대를 의미하나, 대부분의 유럽 국가의 이 무렵 시절을 말할 때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벨 에포크 La Belle Époqu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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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프랑스 |
이 표현은 1930년대에 전쟁 전 15년간을 일컫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역사학자 도미니크 칼리파에 의하면, 앙드레 알레오가 1940년 11월 라디오파리Radio-Paris에서 진행한 "아 좋은 시절! 1900년의 음악 크로키"라는 이름의 라디오 방송이 확실한 첫 용례라고 한다.[1]) 이 회고적인 명칭에는 현실적으로 그 시대를 보여주는 측면(팽창, 무사태평, 발전의 연속, 쾌활 등)도 있으며 꿈같던 시절을 회상하는 측면도 있다.
역사학자 장 가리그, 필리프 라콩브라드, 도미니크 르죈 등에 의하면, 이 표현은 더 이른 1919년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2][3]
유럽에서
편집총설: 평화의 시기
편집보불전쟁 이후, 유럽은 40년간 역사상 예외적으로 순조롭던 경제적, 기술적인 발전과 함께 긴 평화의 시기를 보낸다. 이 모든 발전들은 특히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벌어졌다. 이 시대에는 전 유럽의 노동자들이 조합과 정당에 가입하고, 사회당들이 처음 등장하여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갔다.
벨 에포크: 1880년부터 1914년까지의 프랑스
편집지방 통합과 사회인구적 문제
편집1873년부터 1896년까지의 장기불황 이후, 프랑스는 대외적으로 급성장한 파리 금융가와 더불어 제2차 산업 혁명으로 꾸준한 성장의 시기에 들어간다.
제2제국 시절 프랑스는 크게 팽창했었다. 프랑스는 니스와 사부아를 획득했으나, 1871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알자스-로렌(벨포르 지역을 제외한 현 모젤과 알자스 전체)을 잃었다. 1870년 프랑스의 패전로 야기된 독불간의 대립으로 인하여 프랑스 국민들은 복수에 불탔다. 조르주 불랑제 장군의 호전적인 연설, 불랑제 장군의 이름을 딴 불랑지즘이라는 정치 운동과 더불어 슈내벨레 사건이 바로 이 시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일부 언론 및 여론은 적 독일과의 전쟁을 주장하며 민족주의와 복수의 감정을 불러모았다.
파리는 매우 인구가 집중된 근대 도시로, 프랑스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파리만이 벨 에포크 시기 프랑스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이 펼친 파리 개조 사업으로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점점 사람들로 북적였다.
독립적인 자유 공화국
편집프랑스 형식의 자유 민주주의하에 대세를 잡은 정치 문화는 바로 거대한 애국적 합의로 이뤄진 공화정 체제였다.
국무회의 의장이자 전 공교육 장관이었던 쥘 페리는 여성이 중등 공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 1880년 12월 21일 법, 초등교육을 무료화한 1881년 6월 16일 법, 마지막으로 공교육을 세속화하고 의무 교육으로 만든 1882년 3월 29일 법과 같은 여러 주요 법안들을 발안했다. 쥘 페리가 집행한 세속화 작업은 지식 규범의 정의에 있어서, 도덕에 있어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공공장소에서의 종교의 위상을 격하했다.
1848년 6월의 노동자 폭동과 1871년의 코뮌은 오랫동안 흑색 전설을 만들며, 제3공화국 주요 인사들에게 공포를 끼쳤다. 이러한 맥락에서 피에르 발데크루소 장관은 르 샤플리에 법(1791년)을 1884년 3월 21일 폐지하며, 노조를 허가했다.
공화주의자들은 특히 에두아르 에리오와 아나톨 프랑스로 대표되었다.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급진주의, 평화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 (모리스 바레스, 자크 뱅빌, 악시옹 프랑세즈)와 같은 여타 정치 문화는 정치의 활기를 북돋았다. 드레퓌스 사건과 불랑제 사건과 같은 주요 정치 사건들은 파나마 스캔들로 탄생한 극좌파와 극우파의 반의회 운동에 불을 지폈다.
드레퓌스 사건은 지속적으로 증오와 파장을 낳으며 당대 사회 정신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1899년 9월 19일 군대와의 합의로 대통령 특사를 내리고, 같은 달 21일 드레퓌스를 사면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본 사건은 프랑스에서 종교에 기반한 두 대립 진영이 형성되는 결과를 낳았다.
불랑제 사건 이후, 우파는 민족주의자들의 광명을 되찾으며 대세가 되었는데, 공화주의 사상가들이 드레퓌스 사건으로 더욱 세를 떨쳤기 때문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우파로 돌아섰다. (샤를 페기, 다니엘 알레비)
참고 문헌
편집- 피에르 뒤 부아 드 뒤닐락, Les Mythologies de la Belle Époque. La Chaux-de-Fonds, André Evard et l'Art Nouveau, Lausanne, 1975, W. Suter, 1975, p.|34
- 장바티스트 뒤로셀, La France de la Belle Époque, 2판, Paris, Presses de la FNSP, 1992 ASIN B0000E7JHG.
- 도미니크 칼리파, La Véritable Histoire de la Belle Époque, Paris, Fayard, coll. « histoire », 2017, p.296[4]
- 미셸 비녹, La Belle Époque. La France de 1900 à 1914, Paris, Perrin, coll. « Pour l'histoire », 2002, p.432 ISBN 978-2262016678.
-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김동택 역, 한길사, 1998, ISBN 978-89-356-5178-8.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도미니크 칼리파Dominique Kalifa, La Véritable Histoire de la Belle Époque, Paris, Fayard, 2017.
- ↑ 장 가리그Jean Garrigues, 필리프 라콩브라드Philippe Lacombrade 공저, La France au XIXe siècle, Armand Colin, collection U, 3판, 2015, 165쪽.
- ↑ 도미니크 르죈Dominique Lejeune, La France de la Belle Époque, 4판, 2002, 4쪽.
- ↑ Kalifa, Dominique. 《La Véritable Histoire de la Belle Époque》. ISBN 9782213655291. OCLC 970388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