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조선의 남자 과학자, 발명가 (?-?)

장영실(蔣英實, ?~?)은 조선과학기술자이다. 조선 세종때 상의원 별좌로 등용되어 과학 기술자로서 조선의 천문학 기술을 찬란히 꽃피웠다. 경상남도 동래군 출생으로 본관은 아산이다.

장영실
蔣英實
장영실 동상(천안아산역 소재)
장영실 동상(천안아산역 소재)
출생 1385? 또는 1393년? [1]
고려 경상도 동래
사망 미상
주요 업적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수표, 갑인자, 등
부모 모친 : 동래구의 노비
분야 과학 천문학 기술
경력 조선 시대 기술자 겸 관료
장영실
한글 표기: 장영실
한자 표기: 蔣英實
개정 로마자 표기: Jang Yeongsil
매큔-라이샤워 표기: Chang Yŏngsil
예일 표기: Cang Yengsil

생애 편집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2]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다. 장영실은 기술력이 뛰어나 세종 임금이 필히 아끼었다고 설명한다.

장영실은 본래 동래현관노이나 기술자로서의 훌륭한 재주를 태종이 인정하여 발탁하였다. 세종은 실용주의자로서 장영실의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세종 4년)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 나이 약 34세 때인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종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다.[3] 1424년(세종6) 5월, 임금은 그를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켰고 갱점지기(更点之器)를 만들라고 명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첫 물시계였다.

그 후, 세종의 명에 따라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이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 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 등이 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4품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였다. 장영실은 대단한 업적들을 남겼다.

1434년(세종 16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판본이 깨끗하였다. (그 이전에는 2장만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져서 자본을 교정한 후에 다시 찍을 수 있었다)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지고 있던 중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4][5]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형벌을 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한다.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다.[6] 후세에도 그의 공교한 솜씨가 간혹 회자되었다.

한편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아산 장씨 시조인 장서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있다.

평가 편집

장영실은 당시 세종대왕이 직접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하였고, 수많은 기기를 제작하였다. 미천한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정3품관 대호군(大護軍)에서 정3품관 상호군(上護軍)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다. 장영실은 이순지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당대의 훌륭한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다.[7]

발명품 편집

앙부일구 편집

1434년 조선 세종대왕 16년 이후로 제작·사용된 해시계이다. 과학·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었다. 앙부일구는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초기의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이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남아 있지 않아 18세기에 제작된 것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휴대용 앙부일구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로 강건이 제작한 것이다.

자격루 편집

자격루(自擊漏)는 조선 세종 때의 물시계로, 자동으로 시간마다 종이 울리도록 한 국가 표준시계이다. 장영실과 김조 등이 2년 간 제작하여 세종 16년 (1434년 8월 5일 (음력 7월 1일)) 완성·발표하였다. 시간이 지나 중종때 자격루가 낡으며 자격루를 새로 만들었다. 중종 때의 자격루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부가 보존되어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옥루 편집

옥루(玉漏)는 조선시대의 천상시계(天象時計)이며 자동 물시계의 하나이다. 장영실이 1438년(세종 20년) 1월에 완성하여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다.

그 외 발명품 편집

가계 편집

장영실의 생몰 연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1385년경에서 1390년(우왕 11년~공양왕 2년)경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영실의 아버지가 원나라 때에 중국 소주, 항주로부터 귀화하였으며 어머니는 동래의 관노였다는 것만이 세종의 발언으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장영실의 일족이라고 자처하는 아산 장씨는 장영실의 아버지 이름이 장성휘(蔣成暉)로 아산 장씨의 시조 장서의 8세 손이고 고려 말 전서(典書)였으며[2]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장영실의 어머니와 장영실이 관기 및 관노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장영실의 영자는 종친회에서 주장하는 부친 장성휘의 성자 항렬의 다음 세대의 항렬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의 자제라면 고대 중국식으로 외자로 이름을 짓고 자나 호를 짓거나, 아니면 평범한 이름으로 짓지, 당시의 아산 장씨 집안의 항렬에 맞게 짓고 족보에 올린다는 것은 유교적 정서에서 힘들기 때문이다.[8] 그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하며 사촌여동생이 당대의 천문학자 김담에게 시집갔다고 한다.[9]

  • 증조부 : 장균(蔣均) 판도판서(版圖判書)
    • 조부 : 장자방(蔣自芳) 삼사부사(三司副使)
      • 백부 : 장성길(蔣成吉) 평장사(平章事) 오형제병향일원(五兄弟幷享一院)
        • 종형 : 장영우(蔣英雨)
      • 백부 : 장성발(蔣成發) 전공전서(典工典書)
        • 종형 : 장을유(蔣乙濡) 중문지후(中門祗侯)
        • 종형 : 장을충(蔣乙忠)
      • 아버지 : 장성휘(蔣成暉) 전서(典書)
      • 숙부 : 장성미(蔣成美) 전법전서(典法典書)
        • 종제 : 장계무(蔣繼茂)
        • 종제 : 장계생(蔣繼生)
        • 종제 : 장계손(蔣繼孫)
      • 숙부 : 장성우(蔣成祐) 공조전서(工曹典書)
        • 종제 : 장영무(蔣英茂) 군기소감(軍器少監)
        • 종제 : 장영시(蔣英時)

각주 편집

  1. 철종 8년(1858년) 창경궁의 화재로 주자소가 소실되어 이듬해인 동왕 9년(1859년) 재건되었을 때 내건 현판에 주자소의 역대 담당 관원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는데, 이 중 갑인자를 담당한 관원의 이름으로 김돈과 김빈 다음으로 '호군 장영실 실보 계유 경주인'(護軍蔣英實實甫季酉慶州人)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계유를 계유년 즉 1393년으로 볼 경우 이 해가 장영실의 태어난 해가 된다. 다만 해당 현판은 장영실의 당대에서 3백여 년이나 후대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함께 기록된 관련 인물들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도 《조선왕조실록》 및 《등과록》, 《국조방목》 등 기록과의 비교 대조 결과 착오가 발견되고 있어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2. 《아산장씨족보》
  3. 《연려실기술》에는 세종 7년에 면천하여 실첨지를 제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4.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1442년 3월 16일
  5. 장영실은 세종대왕의 명로 세종이 온천으로 갈 때 쓰는 가마를 만들었는데, 세자가 가마에 금이 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6.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5월 3일
  7. 장영실만 있나?… 이순지-이천도 있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동아일보》, 2008.1.11.
  8. 아산 장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9. 박성래 (2011년 11월 30일). 《한국의 과학자들》. 책과함께. 41-42쪽. 

참고 문헌 편집

  • 전상운, 《세종 시대의 과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6

외부 링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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