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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大元, 몽골어: ᠳᠠ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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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 Ön, 몽골어: ᠳᠠᠶᠠᠨ Dayan)[1][2][주 1]다이운 예케 몽골 울루스(大元大蒙古國, 몽골어: ᠳᠠ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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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 Ön Yeqe Mongɣul Ulus)[3][4], 다윤 예케 울루스(大元國, 몽골어: ᠳᠠᠶᠤ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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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un Yeqe Ulus)라고도 한다.[5] 1271년, 쿠빌라이 카안이 기존의 몽골제국의 세계 통치를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로 《주역(周易)》에 나오는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구절에서 '대원(大元)'이라는 글귀를 따 삼은 몽골제국의 한자식 국호이다.[6][7] 다음과 같이 쿠빌라이 카안에 의해 국호가 바뀐 후의 제국 시기를 '대원'이라고 하여, '대원'이 하나의 특정 기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으며,[주 2] 특히 몽골제국 시대는 형용사의 '대'(大, 몽골어: ᠶᠡᠬᠡ Yeqe)가 제국과 몽골 황실과 관련된 주요 용어 였음이 판명됐다.[8] 따라서 최근에는 '원' 등의 호칭은 몽골 정부로의 실태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몽골 제국사 연구에서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로 대표되는 일본 연구자 사이에서는 대원 울루스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빈도가 증가하고있다.[9][10] 한국김호동은 최근 일부 학계에서 '대원 울루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지적하면서 '대원'이 대몽골 울루스의 한자식 국호였다고 주장하면서,[11] '원’이란 사람들에게 친숙한 국호를 쓰는 대신 모든 울루스를 아우르는 황제국을 의미하는 카안 울루스라는 명칭을 사용한다.[12]

예케 몽골 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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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元

 

 

1271년1635년
1310년경, 카안 울루스의 행정구역.
1310년경, 카안 울루스의 행정구역.
수도 다이두, 샹두
정치
공용어 몽골어
정부 형태 전제 군주제
카안(황제) 쿠빌라이 카안 (1271년 ~ 1294년)
토곤 테무르 카안 (1333년 ~ 1370년)
역사
 • 대원 선포
키타이 상실
•멸망
1271년
1368년
1635년
인구
1351년 어림 87,587,000명
기타
통화 지원보초
현재 국가 몽골 몽골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홍콩
마카오 마카오
러시아 러시아
인도 인도
미얀마 미얀마
라오스 라오스
태국 타이
파키스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 네팔
부탄 부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신화 ~ 진의 통일 이전
선사 시대
황하·장강 문명기원전 4800?~기원전 3500?
신화·삼황오제기원전 4000?~기원전 2070?
기원전 207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046?~기원전 256
  서주 기원전 1046?~기원전 771
  동주 기원전 771~기원전 256
    춘추 시대 기원전 771~453
    전국 시대 기원전 453~221
고대 ~ 근대의 중국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2~서기 220
  전한 기원전 202~서기 8
  8~23
  후한 25~220

삼국 시대 220~280
  220~265
  촉한 221~263
  229~280
265~420
  서진 265~316
  동진 317~420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386~589
581~619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시대
907~979

916~1125

960~1279
  북송
 960~1127
서하
1038~1227
  남송
 1127~1279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16~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북양 정부, 국민정부) 1912~1949
  만주국 1931~1945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1949~현재

v  d  e  h

1271년 12월 18일 쿠빌라이 카안은 ‘대원(大元)’을 새로운 국호로 정했음을 알리는 「건국호조(建國號詔)」를 선포했는데, 그 전문은 《원사》 · 《원전장(元典章)》에 수록되어 있다.[13] 이 조칙에는 과거 중화제국들의 국호가 ·과 같이 처음 흥기한 지명을 따르거나 ·과 같이 작읍을 받은 지명을 따랐던 전례가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칭기스 칸이 초창한 이래 몽골인들이 성취한 대업에 적절한 이름을 지을 필요성을 절감하여, 《역경》에 나오는 ‘대재건원’에서 그 뜻을 취하여 ‘대원’이라는 명칭을 정했음 분명히 기록하였다. 《경세대전(經世大典)》 「서록·제호」는 ‘원(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원이라는 것은 ‘크다’(大)는 것이다. 커서 다함이 없는 것을 일컬는 것이니, 원이라는 함은 큰 것의 지극함이다.”[14] 따라서 ‘대원’이라는 국호의 의미가 ‘크다’는 뜻을 극도로 강조한 추상적 개념이며, 과거 당나라 등이 스스로를 높여 대당(大唐)이라고 불렀던 것과는 달리 ‘대원’은 처음부터 이자국호였었음을 알 수 있다.[15]

그러나 쿠빌라이 카안이 '대원'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제정한 이후,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국호는 더 이상 중지된 것이 아니라 '대원'이라는 국호와 일체화되었다. 1335년에 한문과 그것을 몽골문으로 번역하여 작성된 《장씨선영비(張氏先塋碑)》에서 한문 '황원(皇元)'은 몽골문 '예케 몽골 울루스'로 번역되어 있고, 1346년에 작성된 《칙건흥원각비(勅建興元閣碑)》에서 '아원(我元)'이라는 한문 구절이 '예케 몽골 울루스'로 번역돼 있다.[주 3] 나아가 1338년에 작성된 《달로화적죽온태비(達魯花赤竹溫台碑)》에는 '대원'이 '대원이라 칭하는 예케 몽골 울루스'(몽골어: ᠳᠠ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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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 Ön qemeqü Yeqe Mongɣol Ulus)[16]로 번역되어 있으며, 1362년에 세워진 《추봉서녕왕흔도비(追封西寧王忻都碑)》에는 '대원 예케 몽골 울루스'(몽골어: ᠳᠠ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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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 Ön Yeqe Mongɣul Ulus)[17][18]로 나타나 있다. 이들 비문은 모두 몽골식 국호인 '예케 몽골 울루스'가 몽골의 중국지배가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사용되었음을 입증해 준다.[19]

1368년에 카안 울루스가 명나라주원장에 의해 중원에서 철수한 뒤에도 '대원'이라는 국호는 몽골 초원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에센다얀 칸은 명나라를 상대로 각각 '대원전성가한(大元天盛可汗)'과 '대원대가한(大元大可汗)'을 자칭한 서한을 보낸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몽골 초원에서는 '대원'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원'과 그 국호는 1634년 차하르릭단 칸의 죽음과 청 제국의 복속으로 인해 소멸했다고 여겨진다.[20]

차하르를 꺾고 내몽골 초원의 유목민을 모두 복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차하르 칸 가문에 전해 오던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을 손에 넣은 홍 타이지는 이제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군주를 자처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가 선포한 다이칭 구룬은 몽골제국의 정통 계승을 지향하는 만주인과 몽골인 그리고 한족의 제국으로 변모했다.[21]

목차

역사편집

13~14세기 몽골제국은 역사상 존재했던 국가 중 가장 발대한 영토를 지닌 제국이었다. 가장 넓었을 때의 영토는 고려에서부터 헝가리에 이르렀고,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와 동유럽의 상당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었다.[22]

 
대원(예케 몽골 울루스)의 영역과 속령 그리고 종속국들의 지도.

쿠빌라이 카안의 집권 이후 카안 울루스는 중국적 제도의 도입, 한족 관료들의 등용, 수도를 당시 '키타이(Kitai)'라고 불리던 내몽골ㆍ북중국 일대의 상도(上都) 및 대도(大都)로의 천도 등의 중국식 통치방식을 원용했다.[23][24]

몽골 제국의 재편편집

1259년 뭉케 카안이 사천의 조어산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남송 원정군을 이쓸고 화이수이를 건널 예정이었던 쿠빌라이와 몽골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후방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던 아릭 부케간의 분쟁이 발생했다.

쿠빌라이는 뭉케 카안의 붕어 소식을 듣고 남송 원정을 중단하고 북상하다가, 1260년 4월 내몽골 지역의 개평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만 모아 독자적인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카안의 자리에 올랐다. 아릭 부케는 이 소식을 듣고 같은 해 5월 카라코룸 부근에서 또 다른 쿠릴타이를 열어 즉위했다.

쿠빌라이 카안은 1260년 여름 자신이 직접 몽골의 최정예 기마군단인 동방 삼왕가와 오부족 군대를 비롯한 병력을 이끌고 카라코룸까지 진출했지만 퇴각한 아릭 부케를 사로잡지 못했다. 오히려 이듬해 가을 아릭 부케 카안이 반격을 시작하여 카라코룸을 탈환했으며 11월에는 내몽골 북방의 시물투에서, 곧이어 겨울에는 시르겐 나우르에서 양자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승패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반 동안은 아무런 충돌도 없었다.

그러나 1261년 말에 아릭 부케의 추종 세력인 차가다이 울루스의 알구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서아시아의 훌레구가 쿠빌라이 카안을 지지하는 쪽을 선택하면서 상황은 급작스럽게 바뀌었다. 이는 쿠빌라이 카안이 각각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울루스의 통치자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곳에 있는 정주지대에 대한 관할권까지 위임했기 때문이었다. 즉 쿠빌라이는 종래 카안이 독점적으로 장악하던 몽골제국의 지배권을 알구와 훌레구에게 분할해줌으로써 카안의 지위를 확보했다.

아릭 부케가 변절한 알구를 응징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그의 추종자들은 사라지고 말았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1264년 아릭 부케는 쿠빌라이 카안에게 투항했다.[25]

칭기스 일족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은 쿠빌라이 카안의 집권으로 끝나지 않았다. 툴루이 가문의 쿠데타에 대한 우구데이차가다이 가문의 반발, 뭉케 집권 직후 두 가문에 대한 숙청에 따른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더나아가 불만은 툴루이 가문 내에서도 생겨났으니, 뭉케와 아릭 부케의 집안도 쿠빌라이의 즉위에 대해 매우 탐탁지 않은 심사였다. 차가다이 울루스의 알구가 사망하자 쿠빌라이가 차가다이 울루스를 장악하기 위해 보낸 심복이었던 바락이 쿠빌라이 카안에게 반기를 들고 곧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중앙아시아에는 차가다이 가문 이외에 또 다른 두 세력이 있었으니, 카이두가 이끄는 우구데이 가문과 뭉케 테무르를 수장으로 하는 주치 가문이었다. 1269년 봄 바락과 카이두 그리고 뭉케 테무르를 대신한 베르케체르가 탈라스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트란스옥시아나의 정주지대 지배권을 논의했다. 그 결과 그 지역의 2/3은 바락이, 나머지는 카이두와 뭉케 테무르가 분할하기로 했으며, 몽골 유목민들이 정주지대로 내려가 약탈하는 것을 자제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러한 합의에 만족하지 못한 바락은 1269~70년 후라산 침공을 단행했다. 그러나 함께 원정에 참전한 카이두 측 군대가 미리 귀환해버렸고, 그로 인해 바락은 아바카 칸의 군대와 헤라트에서 벌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바락은 귀환 직후인 1271년 사망했고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패권은 카이두의 수중에 들어갔다.

탈라스에서의 회맹은 쿠빌라이 카안에 대한 도전이었다. 원래 카안의 고유 영역인 정주지대 관할권을 놓고 자신을 배제한 채 제왕글이 모여서 결정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카이두는 어전으로 찾아와 복속의 뜻을 표시하라는 쿠빌라이 카안의 거듭된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인했디. 쿠빌라이 카안은 1265년 아들 노무칸을 북평왕(北平王)에 임명하여 서북 몽골에 주둔시키고 친카이 둔전을 실시하는 한편, 1270년에는 예니세이 강 유역에 오부단사관을 두었다. 카이두 세력이 팽창하자 1271년에는 노무칸을 알말릭에 진주시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으며, 1275년에는 무칼리의 후손 안동을 파견하여 그를 보좌케 했다.

그러나 1276년에 평소 쿠빌라이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툴루이 가문의 제왕들이 뭉케 카안의 아들 시리기를 카안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노무칸을 붙잡아 주치 울루스로 보내고, 안동은 카이두에게 보내어 이 두 가문의 지원를 얻으려고 했다. 1282년 시리기 등이 투항함으로써 예상치 못했던 반란을 실패로 끝났지만, 이로 인해 카안 울루스의 서북 방위체제는 일거에 와해되고 말았다. 특히 1285년~86년 카이두와 두아의 연합군이 위구리스탄의 카라호초와 베쉬발릭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사건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로인해 천산 위구르의 군주인 이디쿠트를 위시한 지배층은 감숙 지방의 영창 부근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1288년에는 서역 주둔 장인들에게도 철수 명령이 내려져, 투르판 지역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전역이 카이두의 수중에 들어갔다. 카이두는 차가다이 가문에 대한 지배권도 강화했다. 바락의 아들 두아는 카이두에게 부용하는 종속적인 지위에 만족해야 했지만, 알구의 두 아들 카반과 추베이는 1277년을 전후한 시점에 무리를 이끌고 쿠빌라이 카안에게 투항하여 숙주, 사주, 과주, 등 하서회랑 지역의 목지를 부여받고 카이두와 두아의 세력에 대치하며 카안 울루스의 서북 변경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26]

쿠빌라이는 생전에 중앙아시아 제왕들의 반발을 끝내 제압하지 못했다. 1287년 카안 울루스의 좌익 울루스의 맹주인 나얀이 쿠빌라이 카안이 일본 원정을 추진하면서 동방에 대한 징발과 통제를 강화하고 1285년에는 요양행성까지 설치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위기를 느낀 쿠빌라이 카안은 73세의 고령에다 통풍까지 무릎쓰고 1287년 봄 기습적인 친정을 단행하여 내얀의 반란을 제압했다.

한편 중앙아시아 방면의 카이두에 대한 성과를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1289년 쿠빌라이 카안은 노무칸을 대신하여 친킴의 장자 캄말라를 지농으로 삼아 카라코룸에 진주시켰다. 그러나 캄말라는 항가이 산지 전투에서 패배했고 카이두의 군대는 카라코룸에 입성했다. 대원(몽골제국)의 상징적 중심지를 상실한 쿠빌라이 카안은 1289년 여름 다시 한 번 친정을 감행했고 카이두는 자발적으로 퇴각했다. 쿠빌라이 카안은 남송전의 영웅 바얀을 카라코룸에 주둔시키고 돌아왔으나 1291년에는 캄말라를 다시 북평왕에 임명하여 항가이 산맥의 동쪽 방위를 책임지게 했다. 항가이 서쪽에는 친킴의 또 다른 아들 테무르를 주둔시켰다.

1294년 쿠빌라이 카안이 붕어한 뒤 바얀의 즉위를 받은 테무르가 울제이투 카안으로 즉위했다. 서북방에 주둔하면서 그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테무르는 일본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을 일체 중단하고, 제국의 군사력을 서북방 몽골 초원 방면으로 집중시켰다. 카라코룸 방면은 캄말라의 아들 이순 테무르에게 맡기고, 그 서쪽의 알타이 방면에는 자기 형 다르마발라의 아들인 카이샨을 주둔시켰다. 울제이투 카안의 전략은 조금씩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여 1296년에는 아릭 부케의 장자 유부쿠르, 시리기의 아들 울루스 부카, 수년 전에 카이두에게 투항한 투르타카 등이 귀순해왔다. 1298년에는 킵착계 장군인 총우르의 활약으로 전세를 회복했다. 마침내 1301년 카이샨이 이끄는 군대와 카이두와 두아 연합군 간에 알타이 남쪽 산지에서 대회전이 벌어졌다. 이때 부상을 입은 카이두는 퇴각한 뒤 사망하고 말았다.

카이두 사후 중앙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한 두아는 우구데이 가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이두의 자식들 가운데 차파르를 우구데이 가문의 수령으로 지명했는데, 이로 인해 카이두 진영은 심각한 내홍을 겪게 되었다. 한편 두아와 차파르는 1303년 울제이투 카안에게 사신을 보내 복속 의사를 전하고 화평을 제의했다. 울제이투 카안은 내분의 종식을 알리기 위해 훌레구 울루스의 칸 울제이투에게 사신을 파견했고, 이로써 카이두의 세력은 완전히 소멸하였다.[27]

1260년경부터 쿠빌라이 카안의 집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몽골제국 즉, '대몽골 울루스'라는 거대한 정치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310년 차파르가 울제이투 카안에게 투항하고 그 휘하의 부민들이 대거 몽골 초원으로 이주함으로써, 우구데이계 울루스들은 카안 울루스에 흡수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원(몽골제국)은 4개의 대형 울루스가 정립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유라시아 동부의 카안 울루스, 중앙아시아의 차가다이 울루스, 킵차크 초원을 중심으로 하는 주치 울루스, 그리고 서아시아의 훌레구 울루스였다.

그러나 이들 4대 울루스를 제외한 다른 울루스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 4대 울루스 내부에는 여전히 여러 개의 소형 울루스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몽골제국이 이처럼 4개의 대형 울루스로 정리된 것은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울루스들 상호간의 역관계가 변화한 것이지, 제국의 구성 원리로서 울루스 체제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14세기 초경이 되면 몽골제국은 사실상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거의 독립적인 네 개의 대형 울루스, 즉 동방의 카안 울루스와 서방의 삼대 울루스로 분할되어 독자성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명분상으로는 카안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 제국이라는 통합성을 유지하였다.[28][29]

중국 지배편집

 
전투 당일 코끼리 4 마리가 탑승 한 타워에있는 쿠빌라이 카안

원나라 건국 당시 쿠빌라이의 세력은 몽골 고원과 기존 금나라가 점유하던 화북 지역에 불과했다. 장강 이남에 버티고 있던 남송은 뛰어난 경제력을 갖춘 것은 물론, 금나라 멸망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 충분히 원나라를 위협할 만한 군사력도 갖춘 터라, 그대로 유지시켰을 경우 원나라의 지배가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몽케 칸의 대에, 남송의 재상인 가사도(賈似道)에게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두 차례의 태풍과 기상악화로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 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보호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력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방화를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이로서 몽골은 역사 시대 이래 중국 바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다. 제2중국 국가는 중앙 유라시아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몽골 궁정의 사가들은 이전과 같이 《송사》에 이전 북방왕조들의 기록을 「열전」에 넣기보다는, 《요사》와 《금사》를 각각 편찬함으로써, 북방왕조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역사 기록의 조정은 하늘 아래 두 가지 동등한 황제제도의 존재가 함께 존재했음을 인정하였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대한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국 황제제도가 가진 중대한 특성, 곧 단일성을 잃어버림으로써, 몽골 제국의 카안 제도로 대체되었다. 중국인들은 카안들을 황제라 불렀으나, 이들 황제는 단지 전통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방대한 몽골 제국가 그 후계 국가들을 지배하는 카안의 여러 일면 중 중국적 성격만을 의미했을 뿐이다.[30]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일명 가미카제의 도움), 1285년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이 쩐 왕조에게 차례로 패배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했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고, 또한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이에 대응하는데 시간을 보내 일본원정도 포기했다. 또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패배로 끝났다. 무엇보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로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고, 그의 치세 때인 1301년 하이두가 죽자, 1304년 긴 시간 동안 원나라와 항쟁을 벌였던 서쪽 여러 칸과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동서 울루스의 융화로 인해 몽골 제국은 대칸을 정점으로 한 느슨한 연합으로 다시 묶어지는 동시에, 실크로드 교역의 호황이 찾아왔다. 이 상황을 가리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몽골의 평화)라고 불리었다.

원나라의 수도 대도는 전 몽골 제국의 정치 경제의 센터가 되어, 마르코 폴로 등 수많은 서방의 여행자가 방문하고, 그 번영은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강남의 항만도시에서는 해상무역이 융성하였고, 일본 원정을 통해 국교가 단절되었던 일본에서도 사적인 무역선 및 유학승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어느 정도 교류가 지속되었다.

쇠퇴기편집

1307년 테무르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 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연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모후, 외척, 권신 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 다툼이 되풀이 되었다.

또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칭기즈 칸의 황후 보르테, 쿠빌라이의 황후 차브이, 테무르의 모친 코코진 등의 출신부족에서 쿠빌라이, 테무르의 2대에 걸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옹기라트부를 중심으로 결속된 원나라의 궁정귀족들이었다. 테무르의 황후 브르간곤기라트부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황제로 맞이했다.

카이산의 사후는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으나, 그의 치세는 대대로 옹기라트씨 출신의 황후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던 곤기라트부 출신의 아유르바르와다의 어머니 다기 카톤이 궁정내의 권력을 장악하여 칸의 명령보다도 모후의 명령이 더 권위를 가질 정도라고 이야기 되었다. 그 때문에 비교적 안정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가 1320년에 끝나고, 1322년에 다기가 죽자 다시 정쟁이 재연되었다. 다음해 1323년 아유르바르와다의 뒤를 계승한 시데바라가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때까지 13년간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대하는 이상사태가 발생했다.

겨우 제위가 안정된 것은 다수의 황족이 황위를 둘러싼 항쟁에 의해 쓰러진 끝에, 광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의 즉위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는 이 시기 권력을 장악하던 킵차크 친위대 사령관 엘 테무르에게 묶여있어, 엘 테무르가 병사할 때까지 정식으로 즉위할 수 없었다. 거기에 에르 테무르의 사후에는 아스트 친위군 사령관인 바얀이 엘 테무르의 유아를 살해하고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고, 1340년에는 바얀의 조카 토구다가 백부를 쿠데타로 살해하고 그 권력을 빼앗는 등, 원나라의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항쟁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성인이 된 칸도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더해져 1347년부터 1349년까지 토구다가 추방당하는 등 중앙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 정치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던 흑사병과 비슷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중국에 유행하였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 시켰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권력 다툼에 마음을 빼앗긴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고, 원나라의 차별정책 아래 놓였던 옛 남송인의 불만과 상업중시의 원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착취에 괴로워하던 농민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만 갔다.

신분 제도와 민족 차별편집

원나라는 자국인 제일주의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인(국족)→색목인→화북인(한인)→남송인(남인)의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 한족은 3~4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중앙의 장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31] 10 가구의 한인당 한 명의 몽골 병사의 시중을 들어야 했으며, 몽골족은 이들의 반란이 두려워서, 여러 사람이 만나거나 모이는 것을 금지시키고 10 가구에 오직 하나의 부엌칼만 가질 수 있게 하는 등 민족 차별 정책이 극심했다. [32]

명나라의 건국편집

1348년 절강의 방국진(方國珍)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홍건당이 봉기했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크토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대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주원장은 즉위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북벌을 개시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지금의 베이징)에 육박했다. 여기까지 이르자 몽골인들은 도저히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1368년 토곤 테무르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고원으로 물러났다. 일반적인 중국사의 서술에서는 토곤 테무르의 북쪽으로의 이동에 의해 원 황조는 끝난 것으로 보았으나, 토곤 테무르의 대칸정권은 이후에도 몽골고원에서 북원으로 존속하였다. 거기에 왕조의 연속성을 보더라도 원 황조는 1368년을 기점으로 멸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 이후의 원 황조는 북원이라 부르면서 이때까지의 원나라와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의 두 아들이었던 아유르시리다라토구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의 지위를 이었고, 명나라는 당연히 이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별칭을 이용하였다. 1388년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자 쿠빌라이 이래의 직계 황통은 단절되었다.

다만 이 과정을 단순히 한족의 승리, 몽골민족의 패주라는 관점으로 볼 것인가는 문제가 있다. 즉 화북에서는 먼저 황하의 개수 등에 의해 재해를 방지하기 위한 일로 인해 원나라의 구심력이 일시적으로 높아졌던 시기가 있었다. 주원장이 아직 화남평정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도 배경이 되었다. 또한 한족의 관리 중에는 앞에서 나온 가노를 시작으로 원 왕조에 충성을 다하여 명나라군과 반란세력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도 많았고, 1367년 명나라군에게 붙잡힌 호부상서 장욱은 주원장의 항복권고에 대해 “몸은 강남에 있어도, 마음은 삭북을 생각하고 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처형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청나라의 역사학자 조익은 원나라에 순사한 한족의 관리의 숫자는 격렬한 저항이 있었던 남송 다음으로 많았다고 지적하였다.

북원편집

북원에서는 1388년 토구스 테무르의 자손이 끊어지면서 쿠빌라이 가문의 대칸 세습이 끝나고, 쿠빌라이 왕조인 원나라는 단절되었다.

정치편집

행정편집

쿠빌라이 카안은 동생 아릭 부케와의 계승 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카안의 지위에 올랐다. 몽골제국 정체의 군주로서 그의 지위는 당시 울루스의 수장들 대다수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뭉케 카안의 치세 때부터 독자적인 지배권을 어느정도 인정받았던 주치 울루스의 베르케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의 알구와 서아시아의 훌레구에게 그곳의 정주지대에 대한 관할권도 양도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카안의 직접적인 통치가 미치는 권역은 몽골 초원을 비롯하여 여진의 영역이었던 북중국 탕구트의 영역이었던 하서 지방 그리고 새로이 편입된 티베트로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쿠빌라이 카안과 그 후계자들이 직접 통치하던 이 지역을 당시 몽골인들은 '카안 울루스'라고 불렀다.

쿠빌라이 카안은 몽골제국의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자신의 막부가 있던 내몽골 금련천 부근으로 옮기고 그곳이 도성을 세웠다. 이것이 '상도'로 알려진 제국의 여름 수도이다. 그는 또한 폐허가 된 금나라의 수도 중도 부근이 새로운 도성을 축조했으니, 이것이 겨울 수도 '대도'이다. 쿠빌라이 카안은 봄이 되면 상도로 붓상해 그 부근에서 여름을 지내고, 가을이 되면 남하해 대도와 그 인근에서 겨울을 보냈다. 카안이 있는 곳이 바로 주도가 되고 다른 곳에는 유수사를 두었다.

 
내몽골 일대와 화북(河北ㆍ山西ㆍ山東)을 포함하는 중서성 직할지 복리(腹裏, Qol-un Ulus).

카안 울루스는 중서성(中書省)과 그 파견 기관인 10여 개의 '행중서성'(行中書省)이 관할하는 지역들로 나뉘었다. 후에 만주 지역과 몽골 초원에도 요양행성과 영북행성(화림행성)이 설치되었다. 티베트는 일종의 특별관리 구역으로 팍파 교단의 지도자들이 관장하는 선정원이 다스리는 영역이었다. 중서성과 행성 아래에는 노(路), 부(府), 주(州), 현(縣)을 두었다. 일부 지역에는 행정과 군사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선위사를 두었다. 또한 군사를 담당하는 추밀원(樞密院), 감찰을 담당하는 어사대(御史臺)가 있었고, 지방에는 행추밀원과 행어사대가 설치되었다.[33] 원래 복속한 천산 위구르 왕국은 내정에 관해서는 그 군주에게 고창왕(高昌王)을 주어 기존의 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자치를 인정해주었다. 그 왕족은 부마(Güregen)가 되어 몽골 왕족·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쿠빌라이 가문의 공주와 혼인을 맺었다. 또한 이후에 복속한 고려는 12성에 포함되어 몽골인에 의해 지배되었다.[34][주 4] 당시 고려국왕은 몽골제국의 외부에 별도로 존재하는 영토와 백성을 가지고 있는 군주임과 동시에 칭기스 일족의 부마로서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제왕이었다.[35] 정동행성이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지방행정기관으로 기능하지는 않았지만,[36] 정동행성 승상이라는 직책도 제국의 고위 관리라는 점에서 제국의 내적 존재였다. 고려의 정치적 위상은 이러한 국왕의 지위와 연동했기 때문에 이중적인 특징을 가졌다.[35]

카안 울루스는 안남에 ‘군장친조(君長親朝)’, ‘자제입질(子弟入質)’, ‘편민수(編民數)’, ‘출군역(出軍役)’, ‘수납세부(輸納稅賦)’, ‘치다루가치[置達魯花赤]’ 등 ‘육사’를 요구했는데,[37] 구체적인 항목은 조금 다르지 만 책봉–조공의 형식을 취하고 있던 고려와 더불어 안남에 대해서도 몽골제국 전통에 따른 통치방식을 적용하려 하였다.[38]

문화편집

몽골제국은 멀리 유럽에 펼쳐진 대제국으로서 참치(站赤) 제도가 정비되자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실크 로드를 왕래하는 대상(隊商)도 증가하여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기를 띠고 유럽의 선교사나 상인·여행가가 속속 동방 세계를 방문했다. 서방 문화의 유입 가운데서 중국에 전래한 이슬람 문화는 그 영향이 가장 현저하여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의 자연과학이나 미술에는 주목할 것이 많다. 중국의 전통 문화는 원조(元朝)가 무시했기 때문에 정체했다. 특히 유학의 경시는 학문 발전의 장해가 되었다. 반면 서민 문학은 성행하여 중국 문학사에서 한문·당시(唐詩)·송사(宋詞)와 견주는 대표적인 문학의 하나인 원곡(元曲)이라 불리는 희곡(戱曲)이 융성했다. 회화에서는 송의 원화체(院畵體)나 문인화(文人畵)의 화풍을 엮은 명장(名匠)이 배출되었다. 또한 원조의 종교 정책은 극히 관대하여 이슬람교·그리스도교가 상당히 퍼졌고, 라마교도 티베트에서 전파돼 중국 불교 역사에 이채를 던졌다.[39]

음악편집

원나라 시대의 음악을 호악(胡樂, 오랑캐 음악)이라고 하였는데 원 간섭기 시절 고려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도입된 원나라 악기가 해금태평소다.

미술편집

원대의 화가는 화원계(畵院系), 문인계(文人系), 거기에 산수화의 이곽파(李郭派) 등 셋으로 대별된다. 원대에는 화원(畵院)의 제도는 없었고, 남송의 멸망과 더불어 화공(畵工)은 후원자를 상실하여, 대부분 저장지방(浙江地方)의 한 양식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중국내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은 편은 못 되었다. 화원계의 화인에 비하여 문인화가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어 동원(董源)·미불 미우인(米友仁) 등과, 또 한편으로는 이곽파의 화가들도 이성(李成), 곽희(郭熙) 등을 스승으로 받들고, 북송(北宋)으로의 복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북송의 여러 선학들의 예술의 본질은 상실되어 자연을 관찰하는 의욕도 희박해지고 기법상으로도 조잡하여, 산수화로서는 구도에 있어 통일성이 결여되고 화면의 원근 표현도 성공을 보지 못하였다. 조맹부에서 비롯된 복고운동은 원말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오진(吳鎭), 예찬(倪瓚)의 4대가에 이르러 남종(南宗) 산수화풍의 전형이 완성케 되었다. 명말의 동기창(董其昌)은 4대가 이후에 규범이 될 수 있는 강렬한 개성적인 작가는 없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방 아무개’라고 낙관한 산수화가 이의적(二義的)인 모사(模寫)는 아니고 독립된 작품으로서 성행하게 되었다.[40]

문학편집

가무(歌舞), 음곡(音曲), 연기(演技)를 통합한 중국식 오페라라고도 할 수 있는 원곡, 즉 원잡극(元雜劇)이야말로 바로 몽골 왕조의 지배라는 특수상황 아래에서 성숙하여 발전한 것이다. 원잡극은 희극(戱劇) 등(직접적으로는 金의 院本雜劇)을 계승하여 생겨난 것으로 배우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대사를 말하고 동작을 보이는 것인데, 대도(大都)에서 유행했기 때문에 북곡(北曲)이라 불린다.원의 곡은 4막으로 이루어지며 비파(琵琶)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악기를 구사한다. 정말(正末), 정단(正旦)을 비롯하여 충말(沖末), 정(淨), 축(丑) 같은 배역이 정해지며, 주역의 말(末)과 단(旦)만이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내용적으로는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 쉬운 구어(口語)를 한껏 구사하고 과거(科擧)의 문이 막힌 지식인층에서 작자(作者)를 끌어들여 신선한 문예의 한 장르로서 지위를 굳히기에 이르렀다. 대표작은 『서상기(西廂記)』 『한궁추(漢宮秋)』 등이다. 북곡이 엄격한 규칙을 갖는 데 반해 원의 중엽 이후 강남(江南) 지방에서 일어난 남곡(南曲)은 자유롭고 무대의 변화가 많고 화려하다. 남곡의 대표작으로는 『비파기(琵琶記)』가 있다.[39]

역대 칸(汗)편집

보르지긴 부족 추장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재위기간 기타
- 원 희조
(元熙祖)
(원 태조 추숭)
의현황제
(毅玄皇帝)
보르지긴 보돈차르
(孛兒只斤孛瑞察兒)
- 칭기즈 칸의 10대조
- 원 선조
(元宣祖)
(원 태조 추숭)
공철황제
(功哲皇帝)
보르지긴 카불
(孛兒只斤合不勒)
1130년 ~ 1149년 칭기즈 칸의 증조부
- - - 보르지긴 안바카이
(孛兒只斤俺巴孩)
1149년 ~ 1156년 칭기즈 칸의 재종증조부,
카부러 칸의 사촌 형제
- - - 보르지긴 쿠툴라
(孛兒只斤忽圖剌)
1156년 ~ 1160년 칭기즈 칸의 종조부,
예수게이의 숙부
- 원 열조
(元烈祖)
(원 태조 추숭)
신원황제
(神元皇帝)
보르지긴 예수게이
(孛兒只斤也速該)
(예수게이)
1160년 ~ 1171년 칭기즈 칸의 생부
제1대 원 태조
(元太祖)
법천계운성무황제
(法天啓運聖武皇帝)
(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즈 칸>)
보르지긴 테무진
(孛兒只斤鐵木眞)
(테무진)
1189년 ~ 1206년 -
몽골 제국 대칸과 연호
어진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원 태조
(元太祖)
법천계운성무황제
(法天啓運聖武皇帝)
(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즈 칸>)
보르지긴 테무진
(孛兒只斤鐵木眞)
- 1206년 ~ 1227년
- 원 목종
(元穆宗)
(원 세조 추숭)
도녕황제
(道寧皇帝)
보르지긴 주치
(孛兒只斤朮赤)
- -
- 원 성종
(元聖宗)
(원 세조 추숭)
충무황제
(忠武皇帝)
보르지긴 차가타이
(孛兒只斤察合台)
- -
  임시 원 예종
(元睿宗)
(원 세조 추숭)
인성경양황제
(仁聖景襄皇帝)
보르지긴 툴루이
(孛兒只斤拖雷)
- 1227년 ~ 1229년
  제2대 원 태종
(元太宗)
영문황제
(英文皇帝)
보르지긴 우구데이
(孛兒只斤窩闊台)
- 1229년 ~ 1241년
  제3대 원 정종
(元定宗)
간평황제
(簡平皇帝)
보르지긴 귀위크
(孛兒只斤貴由)
- 1246년 ~ 1248년
  제4대 원 헌종
(元憲宗)
환숙황제
(桓肅皇帝)
보르지긴 몽케
(孛兒只斤蒙哥)
- 1251년 ~ 1259년
  제5대 원 세조
(元世祖)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보르지긴 쿠빌라이
(孛兒只斤忽必烈)
중통(中統) 1260년 ~ 1264년
지원(至元) 1264년 ~ 1271년
1260년 ~ 1271년
원나라 황제와 연호
어진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원 세조
(元世祖)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보르지긴 쿠빌라이
(孛兒只斤忽必烈)
지원(至元) 1271년 ~ 1294년 1271년 ~ 1294년
- 원 유종
(元裕宗)
(원 성종 추숭)
문혜명효황제
(文惠明孝皇帝)
보르지긴 친킴
(孛兒只斤眞金)
- -
  제2대 원 성종
(元成宗)
흠명광효황제
(欽明光孝皇帝)
보르지긴 테무르
(孛兒只斤鐵穆耳)
원정(元貞) 1295년 ~ 1297년
대덕(大德) 1297년 ~ 1307년
1294년 ~ 1307년
- 원 순종
(元順宗)
(원 무종 추숭)
소성연효황제
(昭聖衍孝皇帝)
보르지긴 다루마바라
(孛兒只斤答剌麻八剌)
- -
  제3대 원 무종
(元武宗)
인혜선효황제
(仁惠宣孝皇帝)
보르지긴 카이산
(孛兒只斤海山)
지대(至大) 1308년 ~ 1311년 1307년 ~ 1311년
  제4대 원 인종
(元仁宗)
성문흠효황제
(聖文欽孝皇帝)
보르지긴 아유르바르와다
(孛兒只斤愛育黎拔力八達)
황경(皇慶) 1312년 ~ 1313년
연우(延祐) 1314년 ~ 1320년
1311년 ~ 1320년
  제5대 원 영종
(元英宗)
예성문효황제
(睿聖文孝皇帝)
보르지긴 시디발라
(孛兒只斤碩德八剌)
지치(至治) 1321년 ~ 1323년 1320년 ~ 1323년
- 원 현종
(元顯宗)
(원 진종 추숭)
광성인효황제
(光聖仁孝皇帝)
보르지긴 카말라
(孛兒只斤甘麻剌)
- -
  제6대 원 진종
(元眞宗)
흠인대효황제
(欽仁大孝皇帝)
(익황제<翼皇帝>)
(진왕<晉王>)
보르지긴 예순테무르
(孛兒只斤也孫鐵木兒)
태정(泰定) 1324년 ~ 1328년
치화(致和) 1328년
1323년 ~ 1328년
  제7대 - 덕효황제
(德孝皇帝)
(폐황제<廢皇帝>)
(유주<幼主>)
보르지긴 라기바흐
(孛兒只斤阿速吉八)
천순(天順) 1328년 1328년
  제8대 원 문종
(元文宗)
성명원효황제
(聖明元孝皇帝)
보르지긴 투그테무르
(孛兒只斤圖帖睦爾)
천력(天曆) 1328년 ~ 1330년
지순(至順) 1330년 ~ 1332년
1328년 ~ 1329년
1329년 ~ 1332년
  제9대 원 명종
(元明宗)
익헌경효황제
(翼獻景孝皇帝)
보르지긴 쿠살라
(孛兒只斤和世剌)
천력(天曆) 1329년 1329년
  제10대 원 영종
(元寧宗)
충성사효황제
(沖聖嗣孝皇帝)
보르지긴 린친발
(孛兒只斤懿璘質班)
지순(至順) 1332년 1332년
  제11대 원 혜종
(元惠宗)
선인보효황제
(宣仁普孝皇帝)
(순황제<順皇帝>)
보르지긴 토곤테무르
(孛兒只斤妥懽帖睦爾)
지순(至順) 1333년
원통(元統) 1333년 ~ 1335년
지원(至元) 1335년 ~ 1340년
지정(至正) 1341년 ~ 1368년
1333년 ~ 1368년
북원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원 혜종
(元惠宗)
선인보효황제
(宣仁普孝皇帝)
(순황제<順皇帝>)
보르지긴 토곤테무르
(孛兒只斤妥懽帖睦爾)
지정(至正) 1368년 ~ 1370년 1368년 ~ 1370년
제2대 원 소종
(元昭宗)
무승화효황제
(武承和孝皇帝)
보르지긴 아유르시리다르
(孛兒只斤愛猷識里答臘)
선광(宣光) 1371년 ~ 1378년 1370년 ~ 1378년
제3대 - 익성영효황제
(益聖寧孝皇帝)
(평황제<平皇帝>)
(후주<后主>)
보르지긴 토구스테무르
(孛兒只斤脫古思帖木兒)
천원(天元) 1378년 ~ 1388년 1378년 ~ 1388년
북원 대한
대수 시호 성명 재위기간
제1대 조리그투 칸
(卓里克圖汗)
보르지긴 이수데르
(孛兒只斤 也速迭兒)
1389년 ~ 1392년
제2대 엥크 칸
(恩克汗)
보르지긴 엥크
(孛兒只斤 恩克)
1392년 ~ 1394년
제3대 니구라스크치 칸
(尼古埒蘇克齊汗)
보르지긴 엘베크
(孛兒只斤 額勒伯克)
1394년 ~ 1399년
제4대 토요얀 칸
(脫古罕汗)
보르지긴 군테무르
(孛兒只斤 坤帖木兒)
1400년 ~ 1402년
제5대 울루그 테무르 칸
(兀雷帖木兒汗)
보르지긴 구리이치
(孛兒只斤 鬼力赤)
1402년 ~ 1408년
제6대 울제이 테무르 칸
(完者帖木兒汗)
보르지긴 분야시리
(孛兒只斤 本雅失里)
1408년 ~ 1412년
제7대 델베그 칸
(答力巴汗)
보르지긴 델베그
(孛兒只斤 答力巴)
1415년
제8대 에세크 칸
(額色庫汗)
보르지긴 오이라다이
(孛兒只斤 斡亦剌歹)
1415년 ~ 1425년
제9대 아자이 칸
(阿岱汗)
보르지긴 아자이
(孛兒只斤 阿岱)
1425년 ~ 1438년
제10대 타이손 칸
(岱總汗)
보르지긴 토크토아부카
(孛兒只斤 脫脫不花)
1433년 ~ 1452년
제11대 오케크트 칸
(烏格克圖汗)
보르지긴 아크바르지
(孛兒只斤 阿噶多尔濟)
1451년 ~ 1453년
제12대 다이온타슨다이칸
(大元田盛大可汗)
오이라트 에센
(衛拉特 也先)
1453년 ~ 1454년
제13대 오헤크트 칸
(烏珂克圖汗)
보르지긴 마르코르기시
(孛兒只斤 馬兒古兒吉思)
1454년 ~ 1465년
제14대 멀런 칸
(摩伦汗)
보르지긴 토구스멩게
(孛兒只斤 脫古思猛可)
1465년 ~ 1466년
제15대 오케크트 칸
(烏格克圖汗)
보르지긴 만도르
(孛兒只斤 滿都鲁)
1475년 ~ 1478년
제16대 다얀 칸
(達延汗)
보르지긴 바트몬크
(孛兒只斤 巴圖蒙克)
1480년 ~ 1517년
제17대 바르스볼트 칸
(巴尔斯博罗特汗)
보르지긴 바르스볼트
(孛兒只斤 巴尔斯博罗特)
1519년 ~ 1531년
제18대 알라크 칸
(阿剌克汗)
보르지긴 보디
(孛兒只斤 博迪)
1519년 ~ 1547년
제19대 구덴 칸
(庫騰汗)
보르지긴 다라이손
(孛兒只斤 打來孫)
1547년 ~ 1557년
제20대 자사그트 칸
(札薩克圖汗)
보르지긴 투멘
(孛兒只斤 圖們)
1557년 ~ 1592년
제21대 체첸 칸
(徹辰汗)
보르지긴 보얀
(孛兒只斤 布延)
1592년 ~ 1604년
제22대 링단 칸
(林丹汗)
보르지긴 링단
(孛兒只斤 林丹)
1604년 ~ 1634년
제23대 에제이 칸
(額哲汗)
보르지긴 에제이
(孛兒只斤 額哲)
1634년 ~ 1635년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陳得芝,「關於元朝的國號、年代與疆域問題」,北方民族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2009年第3期(總第87期).
  2. 烏蘭(1990),, 《Dayan與“大元”-關於達延汗的汗號》 , 內蒙古大學學報 1호.
  3. Volker Rybatzki, Igor de Rachewiltz-The early mongols: language, culture and history, p.116
  4. 陳得芝,「關於元朝的國號、年代與疆域問題」,北方民族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2009年第3期(總第87期)。
  5. 珠栄嘎(1991),『阿勒坦汗伝』, 內蒙古人民出版社, 232쪽.
  6. 윤영인; 이용규; 김선민; Allsen, Thomas; Biran, Michal; 테무르; Crossley, Pamela Kyle; 이시바시 다카오.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76쪽. ISBN 9788961871976. 
  7.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143쪽. ISBN 9788958289326. 
  8. 志茂碩敏, 『モンゴル帝国史研究序説』, 東京大学出版, 1995.
  9. 杉山正明(1996), 『モンゴルの帝国の興亡』(上·下), 講談社現代親書.
  10. 杉山正明 (2004). 《モンゴル帝国と大元ウルス》. 京都大学学術出版会. ISBN 4-87698-522-7. 
  11. 김호동(2006), 《몽골제국과 '大元'》, 역사학보 192권 192호, 249쪽.
  12. 황제는 ‘칸’이 아닌 ‘카안’이었다
  13. 《元史》卷7(世祖4), pp.138~139; 大元聖政國朝典章 (臺北, 國立故宮博物院印行, 1976), 卷1(詔令1).
  14. 7) 國朝文類 (四部叢刊初編集部, 上海: 商務印書館 印行), 卷40, p.414.
  15. 김호동(2006), 《몽골제국과 '大元'》, 역사학보 192권 192호, 223쪽.
  16. 《蒙漢詞典》,內蒙古大學蒙古學研究院蒙古語文研究所編,內蒙古大學出版社1999年出版,第243頁。
  17. 陳得芝,「關於元朝的國號、年代與疆域問題」,北方民族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2009年第3期(總第87期)。
  18. Volker Rybatzki, Igor de Rachewiltz-The early mongols: language, culture and history, p.116
  19. 김호동(2006), 《몽골제국과 '大元'》, 역사학보 192권 192호, 223쪽.
  20. 《大元の記憶》, 森川哲雄, 九州大学大学院比較社会文化研究院.
  21. 구범진 (2012).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ISBN 9788937484940. 
  22. 데이비드 O. 모건. 《몽골족의 역사》. 역사 모노그래프. 모노그래프. 28쪽. ISBN 9788998309008. 
  23. 윤영인; 이용규; 김선민; Allsen, Thomas; Biran, Michal; 테무르; Crossley, Pamela Kyle; 이시바시 다카오.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76쪽. ISBN 9788961871976. 
  24.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143쪽. ISBN 9788958289326. 
  25.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136~137쪽. ISBN 9788958289326. 
  26.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138~139쪽. ISBN 9788958289326. 
  27.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140~141쪽. ISBN 9788958289326. 
  28. 김호동(2016), 「울루스인가 칸국인가 ― 몽골제국의 카안과 칸 칭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 중앙아시아연구 21권 2호.
  29.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142쪽. ISBN 9788958289326. 
  30. 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
  31. 원사(元史)』 85권: "벼슬자리 따라 일상 업무가 있었고 직위 따라 정원(定員)이 있었다. 그 수장(首長)은 몽골인이 맡았으며 한인과 남인은 그를 보좌하였다(官有常職,位有常員,其長則蒙古人為之,而漢人 南人貳焉)."단, 우승상(右丞相)을 지냈던 사천택(史天澤)은 예외였다.
    • "ten Han families forced to host a Tartar at home,”
    • “ten families sharing a single kitchen chopper,”
    • “Mongol headman claiming the first night of a virgin set to marry,”
    • “twenty Han families grouped into a household headed by a Northern official,”

    — Hok-lan Chan, Liu Bowen and the Folk Stories “Killing the Tartars on Mid-Autumn Day”[1]

  32.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144~145쪽. ISBN 9788958289326. 
  33. 森平雅彦「世界帝国のなかの高麗王」『モンゴル帝国の覇権と朝鮮半島』(世界史リブレット, 山川出版社.2011年5月) pp.32〜55
  34.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154쪽. ISBN 9788958289326. 
  35. 高柄翊(1961·1962), 「麗代 征東行省의 硏究」(上·下), 『歷史學報』 14·19.
  36. 『元史』 卷209, 「列傳」 96, 外夷2 安南傳 世祖 至元 4年 9月.
  37. 동북아역사재단; 경북대학교 한중교류연구원 (2011).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동북아역사재단. 80~81쪽. ISBN 9788961872386. 
  38.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원대의 문화〉
  39.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원대의 회화〉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몽골의 역사
이전 시대 원나라
~
다음 시대
몽골 제국 북원
중국의 역사
이전 시대 원나라
1271년 ~ 1368년
다음 시대
몽골 제국 명나라
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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