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조창호 (군인)

조창호(趙昌浩, 1930년 10월 2일 ~ 2006년 11월 19일)는 대한민국군인으로, 한국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포로로 납북되어 전사자로 처리되었다가 43년만인 1994년 대한민국에 귀환한 인물이다.

Picto infobox military.png
조창호
趙昌浩
출생일 1930년 10월 2일
출생지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사망일 2006년 11월 19일(2006-11-19) (76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
본관 한양(漢陽)
종교 개신교(예장통합)[1]
정당 무소속
배우자 윤신자
자녀
친척 남동생 3명, 누이동생 3명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50년 8월 10일 ~ 1994년 11월 26일
최종 계급 중위.JPG 대한민국 육군 중위
근무 육군본부 포병여단
육군 수도연대 포병 제101대대
지휘 관측장교, 소대장
주요 참전 한국 전쟁 강원도 인제 한석산 전투
서훈 내역 보국훈장 통일장
1995년 2월 연세대학교 명예 학사 학위장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1930년 10월 2일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2] 지난날 한때 1932년 일가족과 함께 경기도 인천 제물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934년 일제 강점기 경기도 시흥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1936년 가족이 일제 강점기 경성부(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로 본격 이주하였다. 경성 경기고등상업학교졸업하고 1950년 연희대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국군 자원 입대편집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연희대학교 교육학과를 중퇴하고 1950년 10월 대한민국 국군에 자원 입대, 육군종합학교를 수료하고 1951년 4월 포병장교로 임관하여 육군본부 포병여단 관측장교를 거쳐 육군 수도연대 포병 제101대대 관측담당 소위 및 소대장으로 참전하였다가,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 한석산 전투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끌려갔다.

포로 및 강제 억류 생활편집

이후에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으나, 1952년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부에 발각되어 '월남기도'와 '반동분자'의 혐의로 13년간 황해북도 서흥군, 평안남도 덕천군, 함경남도 함흥시,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읍, 자강도 강계시 광산 등지의 강제 노역소에서 복역하였다.

13년 동안의 강제 노역소 생활을 마친 후에는 자강도 자성군에 광부로 배치되어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오랜 광산에서의 노역을 통해 지병인 규폐증을 얻게 된다. 후일 그의 증언에 의하면 하루 약 10시간여의 중노동에 동원되었으나 일일 식량 배급량은 300그램 정도였다고 한다.

탈북 및 대한민국 귀환편집

규폐 증세가 심해져서 자강도 중강군 중강진면의 산간촌으로 보내지게 되는데 이 때에 알게 된 중화인민공화국 상인을 통해서 귀환을 결심하게 되어, 결국 압록강 기슭에서 목선을 타고 중국을 통해 북조선을 탈출, 해상을 표류하다 1994년 10월 23일 새벽 대한민국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되었고, 병원에 입원하여 가족 상봉을 하였다. 이후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지고,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입원한 병실을 찾아온 이병태 국방부 장관에게 귀환을 보고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에게 귀환을 보고하였다. 11월 25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을 손수 지웠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 실종 처리되었다가 1977년에 전사자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군 중위로 진급하고, 군인 정신에 귀감이 된 점을 높이 평가받아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다. 다음날 11월 26일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짐으로써 44년 3개월이라는 최장기록의 군생활[3] 을 마감하였다.

그는 한국 전쟁 당시에 포로로 잡힌 많은 국군포로들이 여전히 북조선에 생존하고 있음을 증언하였고, 이는 북조선에 생존해 있을 많은 국군포로들과 강제 납북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참혹한 인권환경에 대한 논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말년에 그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북한에 남아있는 국군포로납북자들의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2006년 11월 19일, 북한에서의 오랜 노역으로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사망하였으며, 11월 21일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군인 정신의 귀감편집

그는 1994년 11월 26일 전역식에서 길고 참담했던 포로생활을 이겨낸 힘은 전쟁터에서 배운 군진수칙이었다고 회고하였다.[4]

한국 전쟁 당시 국군 포로 가운데 약 320여 명이 북조선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여 전향했다는 점에서, 43년만에 이루어진 예비역 육군 중위 조창호 선생의 귀환은 '진정한 군인 정신의 귀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학력편집

대중 문화편집

1996년 그의 귀환을 모티브로 하여 영화 《알바트로스》가 제작, 개봉되었다. 이혁수가 감독하고, 차인표, 이정재, 이휘재, 강리나 등이 출연하였다.[6]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학생 시절부터 서울 새문안교회에 출석했고 귀환 후에도 해당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 자료 1 Archived 2016년 2월 15일 - 웨이백 머신 보도 자료 2
  2. '영원한 국군' 조창호 중위, 하늘나라에 영원히 잠들다
  3. 전사자로 처리되었을 뿐 전역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귀환 순간에도 현역 군인의 신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대위 이하의 정년은 43세로 정한다는 대한민국의 군인사법 규정에 따라 중위 진급 후 바로 전역하였다.
  4. 趙昌浩씨 귀환인사
  5. 1994년도 전기 학위 수여식 - 조창호 동문 명예학사학위 수여 박사 119명, 석사 1,013명, 연구 85명, 학사 3,766명 배출
  6. <새영화> 차인표 이정재 주연의 '알바트로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