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옥

명나라의 여장군

진양옥(중국어 정체자: 秦良玉, 병음: qín liáng yù 진량위[*])은 명청전쟁 시기 쓰촨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명나라여장군후작이자 제28대 석주토사이다. 정소(貞素), 시호충정(忠貞), 작위충정후(忠貞侯)이다.

진양옥
秦良玉
엽연란이 그린 진양옥의 초상화
엽연란이 그린 진양옥의 초상화
지위
충정후
재위 1646년 2월 ~ 1648년 7월 11일
남명태자태보
재임 1646년 2월 ~ 1648년 7월 11일
명나라석주토사
재임 1612년 ~ 1622년
전임 마천승
후임 마상린
황제 만력제태창제천계제
명군 사천총병관
재임 1622년 ~ ?
부총병 진익명
이름
진양옥(秦良玉)
정소(貞素)
작호 충정후(忠貞侯)
시호 충정(忠貞)
신상정보
출생일 1574년 1월 24일
출생지 사천성 중경부 충주
사망일 1648년 7월 11일(향년 74세)
사망지 남명 사천성 중경부
국적 남명
성별 여성
부친 진규
형제자매 진민평, 진방평
배우자 마천승
자녀 마상린
친인척 진익명
묘소 스주 투자족 자치현 다허구 아준촌
사당 태보사
군사 경력
충성 남명
복무 명군
근무
최종계급 정1품 중군도독부좌도독
지휘 백간병
참전 양응룡의 난
서훈

진양옥은 양홍옥, 하옥봉 및 전설적인 화목란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전사 중 한 명으로,[1] 이들 중 이례적으로 관작을 하사받고 24사에 기록된 유일한 여장군으로서 명사 열전에 그녀의 이름이 실려있다.

뛰어난 무력을 지닌 동시에 시문을 좋아하는 등 교양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녀는 남편인 석주선무사 마천승과 함께 물푸레나무로 만든 장창인 백간창으로 무장한 백간병을 이끌다 마천승 사후 그의 직위와 부대를 승계받아 전장에 복무하며 명 내부의 농민 반군 및 외부의 만주족과 계속된 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숭정제에게 그 공로를 인정받아 네 수의 시와 충정후(忠貞侯)라는 후작위를 하사받았으며,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고 망명 정권인 남명이 수립된 이후에는 남명에 충성을 바치며 전장에 복무하다 1648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오늘날 충칭시 중현에는 진양옥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충칭시 스주현의 한 박물관에 생전에 그녀가 사용한 무기와 갑옷이 전시되어 있다.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진양옥은 만력 2년(1574년) 사천 충주에서 묘족 가족의 셋째로 태어났다. 과거에 합격해 공생(貢生)의 자리에 올랐던 아버지 진규(秦葵)는 소녀들 역시 소년들과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 아래 그녀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역사와 유교 고전 및 쿵푸를 가르쳤다.[2] 그 결과 진양옥은 다른 형제보다 더 깊이 무술을 배우며 점차 궁술과 승마에 능숙해졌으며, 시 짓는 솜씨로도 유명했다.[3]

마천승과의 혼인편집

만력 23년(1595년) 진양옥은 석주의 선무사[설명 1]직을 역임하던 석주토사 마천승과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좋은 결혼 생활을 했고 마천승은 종종 그녀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2] 진양옥은 성 주위에 수재의 발생을 막고 경작지에도 물을 댈 수 있게 하는 기반시설 역할을 하는 인공하천인 옥대하를 설치하고 축대를 쌓아서 홍수 피해를 방지하는 등 치수에 힘썼다.[4] 또한 진양옥은 군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남편 마천승과 함께 석주에 가뭄의 영향을 덜 받는 옥수수를 심어 자체적인 역량과 보급을 갖추게 하는 한편 자신이 물푸레나무로 만든 창인 백간창으로 백성들이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비상시에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훈련시켜 백간병을 양성하였으며,[5] 진양옥 부부는 이렇게 양성한 백간병을 이끌고 명나라 남서쪽 경계에서 지역 군벌과의 소규모 전투에 동참하였다.

양응룡의 난편집

만력 27년(1599년) 파주토사 양응룡귀주에서 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해 마천승은 3,000명의 백간병을 데려왔고 진양옥은 500명을 데려와 등관을 수비하였다. 이듬해 양응룡이 명군 진영에 연회가 열린 틈을 노려 기습을 개시하자 진양옥 부부는 선봉에 서서 그를 물리쳤으며, 그 후 다른 장군들과 힘을 합쳐 양응룡의 난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양옥은 남천로에서 제일 큰 군사적 전공을 거두었지만 궁정에 자신의 전공을 보고하지 않았다.

마천승의 석주토사직 계승편집

만력 41년(1613년) 마천승이 유력 환관인 구성운(邱乘雲)을 모욕했다는 누명을 쓴 채 체포되어 투옥된 후 옥사하였는데, 본래라면 이들 부부에서 난 아들인 마상린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석주의 선무사 겸 토사가 되어야 했으나 당시 마상린이 워낙 어렸기에 어머니인 진양옥이 아들 대신 마천승의 석주토사직과 백간병 부대를 이어받았으며, 만력 43년(1615년)부터 숭정 2년(1630년)까지 사천석주장인선무사를 지냈다.[6]

혼하 전투편집

태창 1년(1620년) 후금누르하치요동을 공격하자 조정에서 진양옥에게 3급 관복을 하사하고 군대를 파견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이에 진양옥은 오빠 진민평 및 동생 진방평과 아들 마상린 등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백간병 3천명을 이끌고 요동을 구하러 출정하였다. 이때 진민평과 진방평은 전방의 요동 전선에 배치되고 진양옥은 후방 전선인 산해관에 배치되어 전방군에게 보급하기 위한 군량과 군마를 모으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천계 1년(1621년)에 후금에게 함락된 심양을 수복하기 위해 혼하를 건너던 진방평과 진민평이 후금군과 만나며 혼하 전투가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진방평과 진민평의 백간병 부대는 후금 팔기군의 공격을 3번이나 격퇴하지만 결과적으로 전투에서 패하며 진방평(秦方平)을 포함한 2,000명 이상의 백간병이 전사하였으며,[7] 진양옥은 혼하 전투에서 살아남은 진민평을 포함한 소수의 백간병들과 합류한 후 후금군이 물러갈 때까지 산해관을 굳게 수비하였다. 이후 후금군이 물러가자 천계제는 진양옥을 칭찬하며 그녀에게 2품의 관직과 관복을 하사하였으며, 그녀가 혼하 전투에서 사망한 동생 진방평과 유족에 대한 보상을 조정에 요구하자 이를 수락하며 진방평이 도독승사로 추증되고 유족에게도 해당 관직이 세습되었다. 그 후 진양옥은 사천성의 병력을 징집하라는 명을 받아 사천으로 귀환하였다.

사안의 난편집

같은 해에 사천과 귀주에서 안방언과 함께 사안의 난을 일으킨 사숭명이 자신에게 항복을 권유하려 사자를 보내자 사자의 목을 베었으며, 천계 3년(1623년)에 오빠 진민평, 조카 진익명, 진전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사숭명에게 대승을 거뒀으며, 이듬해 안방언과의 전투에서 그녀의 오빠인 진민평이 전사하였다. 사숭명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 명나라 조정에서는 진양옥의 공로를 치하하며 그녀를 사천총병관으로 임명하였다.

기사의 변편집

숭정 2년(1630년) 후금군이 명나라 수도 북경을 포위하며 기사의 변이 일어났는데, 이때 각지의 세력이 숭정제의 근왕령[설명 2]에 응하지 않은 채 4개의 성이 떨어지고,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그녀만이 사천성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 수도를 방어하였다. 그 후 진양옥은 숭정제에게 소환되어 그녀의 위업을 기리는 4개의 시를 하사받았으며,[8][9] 황제에게 4성의 회복을 명령받은 채 귀환한 후 수많은 적들을 퇴치하였다.

장헌충의 난편집

숭정 6년(1634년) 장헌충이 반군을 이끌고 사천을 침략했을 때 진양옥은 그녀의 아들 마상린(馬祥麟)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귀주에서 장헌충을 격퇴하였으며, 숭정 9년(1637년)에는 장헌충을 격습해 장헌충의 군대에 큰 피해를 입히고 수괴인 장헌충에게는 큰 부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숭정 12년(1640년)에는 나여재의 반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으며,[10] 또 다른 반군 지휘관 중 하나인 동산호를 격습해 그를 포함한 600명의 반군들을 참수하기도 하였다. 숭정제는 진양옥이 명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그녀에게 "충정후(忠貞侯)"라는 작위와 태자태보(太子太保)[설명 3]라는 관직을 수여하였다. 같은 해부터 사천순무 소첩춘과 함께 또다시 장헌충 토벌 작전에 임하지만 진양옥의 계책을 다른 무장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등 여러 요인이 겹쳐 상당한 고전을 겪었으며, 숭정 16년(1644년) 봄에는 장헌충의 군대가 귀주를 공격하자 진양옥은 지원군을 이끌고 명나라 군대를 도왔지만 장헌충에게 수적 열세로 밀리는 동시에 소첩춘의 잘못된 판단이 겹쳐 결국 백간병 대부분을 잃는 대패를 겪었다. 그 후 장헌충이 사천을 장악하지만 자신의 근거지인 석주만은 끝까지 방어해냈으며,[11] 부하들에게 장헌충을 추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12]

말년과 최후편집

같은 해인 1644년에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며 이자성이 반군을 이끌고 명의 수도 북경을 함락하면서 명나라는 멸망하였으며, 이때 잔존한 명 세력이 강남에 남명이라는 망명 정권을 수립하자 진양옥은 남명 정권에 충성을 바쳤다. 석주의 일부를 통제하던 진양옥은 농업 자급자족 정책을 실시해 약 100,000명의 난민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13] 1646년 명목상의 황제였던 융무제로부터 숭정제 시기에 이미 받은 태자태보 직책과 충정후 작위를 재수여받았다.[14] 이후 죽을 때까지 장헌충청군에 맞서 남명 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하다 영력 2년(1648년) 충칭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수여받고 오늘날 충칭시 스주현 다허구 야춘촌에 매장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1. 난리나 재해에 일어난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파견되는 관리로서, 명나라에서는 토사에게 선무사 직책이 세습되는 경우가 있었다.
  2. 황제군이 열세에 빠졌을 때, 황제를 구하기 위해 지방에서 원군을 내는 명령.
  3. 황태자의 교육을 맡는 벼슬.

출처주편집

  1. Louise P Edwards (2001). 《Men and Women in Qing China: Gender in the Red Chamber Dream (Sinica Leidensia)》. University of Hawaii Press. 87쪽. ISBN 978-0824824686. 
  2. Peterson 2000, 306쪽.
  3. Peterson 2000, 307쪽.
  4. “중국학 위키백과 진양옥 문서”. 《chinesewiki.uos.ac.kr》. 
  5. “중국학 위키백과 진양옥 문서”. 《chinesewiki.uos.ac.kr》. 
  6. 《清文淵閣四庫全書本》〈四川通志〉,11卷 ,3303
  7. “長城英烈:女英雄秦良玉”. 《《渤海内刊》2016年07總第31期》. 2017년 7월 24일. 2021년 5월 7일에 확인함. 
  8. Belsky 2005, 127쪽.
  9. ^ 第二首のみを記録したものとして、『明詩綜』巻一、荘烈愍皇帝、賜石砫土司秦良玉の条などがあげられる。「蜀錦征袍手製成、桃花馬上請長纓。世間不少竒男子、誰肯沙場萬里行。」 詩全体についてはいくつかのバージョンがあり、これを記録したものを成書年代順に列挙すると次のとおりである。明・王世徳『崇禎遺録』。「四川石砫土司女帥秦良玉帥師勤王、召見賜綵幣羊酒銀牌御製四詩旌之。学就四川八陣図、鴛鴦袖内握兵符。古来巾幗甘心受、何必将軍是丈夫。西蜀征袍自剪成、桃花馬上請長纓。 世間多少奇男子、誰肯沙場万里行。露宿饑餐誓不辞、飲将鮮血帯臙脂。凱歌馬上清吟曲、不是昭君出塞時。慿将箕帚掃妖奴、一派歌声動地呼 。試看他年麟閣上、丹青先画美人図。」乾隆『石柱廳志』、承襲志。(以下全て秦良玉史料編纂委員会編『秦良玉史料集成』(四川大学出版社、1987)143-145頁より転載)「一曰:学就西川八陣図、鴛鴦袖里握兵符。由来巾幗甘心受、何必将軍是丈夫。二曰:蜀錦征袍自剪成、桃花馬上請長纓。世間多少奇男子、誰肯沙場万里行。三曰:露宿風餐誓不辞、嘔將鮮血代臙脂。北来高唱勤王曲、不是昭君出塞時。四曰:憑将箕箒作蝥弧、一片歓声動地呼。試看他年麟閣上、丹青先画美人図。」道光『補輯石柱廳新志』、芸文下、第十二。「明荘烈帝賜秦良玉詩四章。学就西川八陣図、鴛鴦袖里握兵符。由来巾幗甘心受、何必将軍是丈夫。 蜀錦征袍手制成、桃花馬上請長纓。世間多少奇男子、誰肯沙場万里行。 露宿風餐誓不辞、嘔將心血代臙脂。北来高唱勤王曲、不是昭君出塞時。憑将箕箒<三字缺>、一派歓声動地呼。試看他年麟閣上、丹青先画美人図。」 これ以外に、郭沫若が「関于秦良玉的問題」において示した別バージョンも存在し、『石柱庁志』『補輯石柱庁新志』よりも『崇禎遺録』に近しい部分もあるが、独自の部分もあり、郭はそれらの部分の典拠を示していない。「明思宗平台賜良玉詩四首。学就西川八陣図、鴛鴦袖里握兵符。由来巾幗甘心受、何必将軍是丈夫。 蜀錦征袍手剪成、桃花馬上請長纓。世間多少奇男子、誰肯沙場万里行。胡虜飢餐誓不辞、飲將鮮血代臙脂。凱歌馬上清吟曲、不是昭君出塞時。憑将箕箒掃虜胡、一派歓声動地呼。試看他年麟閣上、丹青先画美人図。」
  10. 王萦绪《石砫厅志》载:“(崇祯)十三年五月,流贼罗汝才等复犯夔州,闻良玉兵至,反走。良玉先锋将谭稳已潜出贼后马家寨击之,斩首七百三十三级。都司秦篆又邀之留马垭,斩其魁东山虎,生擒贼三十三名。裨将秦永祚伏兵水口遮击,斩首五百余级,未渡者北遁。秦翼明会别将张令追至谭家坪,斩首一千一百七八十级,贼披靡逃窜,贼首小秦王过天星皆降。”
  11. “중국학 위키백과 진양옥 문서”. 《chinesewiki.uos.ac.kr》. 
  12. 《明史》列传第一百五十八:张献忠尽陷楚地,将复入蜀。良玉图全蜀形势上之巡抚陈士奇,请益兵守十三隘,士奇不能用。复上之巡按刘之勃,之勃许之,而无兵可发。十七年春,献忠遂长驱犯夔州。良玉驰援,众寡不敌,溃。及全蜀尽陷,良玉慷慨语其众曰:「吾兄弟二人皆死王事,吾以一孱妇蒙国恩二十年,今不幸至此,其敢以馀年事逆贼哉!」悉召所部约曰:「有从贼者,族无赦!」乃分兵守四境。
  13. Peterson 2000, 311쪽.
  14. 佘惠敏 (2004年1月1日). 《《仕女‧第九章 封侯將軍秦良玉:鴛鴦袖里握兵符,何必將軍是丈夫》》 (중국어). 中華人民共和國: 山東畫報出版社. 第156頁쪽. ISBN 9787806038062. 2022年6月22日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清順治三年(1646年),福州的隆武帝派使節到石柱,加封秦良玉「太子太保忠貞侯」爵,賜「太子太保總鎮關防」印,征秦良玉所部兵馬抗清。年過古稀的秦良玉毅然接受隆武政權的封號,舉起了「復明抗清」的旗幟。即清世祖順治將啟行時,福州失陷,隆武政權滅亡。 

참고 문헌편집

  • Belsky, Richard (2005). 《Localities at the center: native place, space, and power in late imperial Beijing》. Harvard University Press. 
  • Peterson, Barbara Bennet (2000). 《Notable Women of China: Shang Dynasty to the Early Twentieth Century》. M.E. Sharpe. 
  • Edwards, Louise P (2001). 《Men and Women in Qing China》. Hawai'i Press. 
  • 장정옥 (1739). 《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