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팔기(만주어: ᠵᠠᡴᡡᠨ
ᡤᡡᠰᠠ
Jakūn Gūsa, 한국 한자八旗)은 청 제국 시대 특유의 제도로, 만주족이 주도가 된 군사·행정 사회 조직이며, 팔기에 속한 사람들을 일컬어 기인(旗人)이라고 한다.

건륭제의 팔기 장병 사열

팔기의 기원은 누르가치1601년에 창안한 니루(만주어: ᠨ᠋ᡳᡵᡠ Niru) 조직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그전부터 니루라는 이름의 수렵 조직이자 전투 단위는 1니루에 성인남성 10인 정도가 포함되는 작은 규모로 존재하고 있었다. 누르가치는 1601년, 무렵 기존의 니루를 성인남성 300명당 1니루의 큰 조직으로 확대시키고, 상시적으로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군사 단위로 재탄생시켰다. 5개의 니루로 구성되는 잘안(만주어: ᠵᠠᠯᠠ Jalan)과 그 상급 단위인 25개의 니루로 구성되는 궈사(旗, 만주어: ᡤᡡᠰᠠ Gūsa)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1601년 니루를 만들 때 함께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에 황(黃, 만주어: ᠰᡠᠸᠠᠶᠠᠨ Suwayan), 홍(紅, 만주어: ᡶᡠᠯᡤᡳᠶᠠᠨ Fulgiyan), 백(白, 만주어: ᡧᠠᠩᡤᡳᠶᠠᠨ Šanggiyan), 남(藍, 만주어: ᠯᠠᠮᡠᠨ Lamun)의 4개 구사가 조직되었고, 정복전을 거치며 건주여진에 복속되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1615년에 양황(鑲黃, 만주어: ᡴᡠᠪᡠᡥᡝ
ᡤᡡᠰᠠ
Kubuhe Suwayan), 양홍(鑲紅, 만주어: ᡴᡠᠪᡠᡥᡝ
ᡶᡠᠯᡤᡳᠶᠠᠨ
Kubuhe Fulgiyan), 양백(鑲白, 만주어: ᡴᡠᠪᡠᡥᡝ
ᡧᠠᠩᡤᡳᠶᠠᠨ
Kubuhe Šanggiyan), 양남(鑲藍, 만주어: ᡴᡠᠪᡠᡥᡝ
ᠯᠠᠮᡠᠨ
Kubuhe Lamun)의 4개 궈사가 증설됨으로써 모두 8개의 궈사, 즉 팔기가 완성되었다. 이 때 누르가치의 통치 하에 들게 된 모든 인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노복까지 팔기의 구성원으로 등록되어 기인(旗人, 만주어: ᡤᡡᠰᠠᡳ
ᠨᡳᠶᠠᠯᠮᠠ
Gūsa-i Niyalma)이 되었다.

팔기는 복속된 기존의 씨족이나 부족을 팔기의 기층 단위인 니루로 변형하는 방식을 통해 조직되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씨족장이나 부족장이 니루의 수장인 니루어전(牛彔额真, 만주어: ᠨ᠋ᡳᡵᡠᡳ
ᡝᠵᡝᠨ
Niru-i Ejen)에 임명되어서 과거에 자신이 관할했던 조직을 그대로 관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이 모든 부족에 동일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누르가치는 자신에 대한 충성도나 반란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부족마다 방식을 상이하게 적용하였다.

동해여진으로 만든 20개의 니루 가운데 본래 씨족이나 부족의 수장이 니루어전으로 유지된 경우는 18개였다. 누르가치의 본래 세력 기반인 건주여진의 니루 편성도 대체로 기존 조직을 기반으로 했고, 니루의 규모도 다른 여진보다 컸다. 그러나 통일 전쟁에서 저항이 심했던 해서여진은 이와 달랐다. 누르가치는 복속된 해서여진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해서여진이 자신들만의 니루를 구성하는 것을 경계했다. 자발적으로 누르가치를 따르거나 과거의 친교관계를 유지해 온 소수의 해서여진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조각조각 분리되어 건주여진 니루에 배속되었다. 팔기를 만든 초기에 총 239개의 니루가 설립되었는데, 96개는 건주여진인이 니루어전이었고, 67개는 동해여진인이 니루어전이었으며, 47개만이 해서여진인이 맡았다. 나머지 29개 가운데 16개는 몽골 니루였고, 13개는 분명치 않다.

기존의 씨족(Hala, 만주어: ᡥᠠᠯᠠ Hala)과 촌락(Gašan, 만주어: ᡤᠠᡧᠠᠨ Gašan) 구조를 깨지 않고 니루로 만들거나, 기존 구조를 깨고 니루를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누르가치는 팔기를 후금의 발전과정에서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핵심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패전해서 통합된 경우, 특히 해서여진은 대개 기존 조직의 구성원들을 분할해서 여러 니루에 분배했다. 니루의 규모는 다양했는데, 자발적으로 복종한 집단은 니루의 정원인 300명에 못 미치더라도 자체적으로 니루를 만들 수 있게 허락했고, 저항했던 집단은 분할하여 니루의 수를 맞추는 데 충원했다. 또한 혈연과 지연의 내부적 결합이 흔들리지 않고 니루로 이어진 경우에도, 니루를 각 궈사에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부족의 결합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외부와 섞이지 않은 자체적인 니루를 갖추었던 동해여진의 20개 니루를 추적해보면, 7개는 양황기에, 4개는 정황기에, 3개는 정홍기에, 2개는 양홍기에, 2개는 정백기에, 1개는 양백기에, 1개는 양남기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설사 부족이 하나의 구사에 소속되었어도 다른 자란에 소속되어서 분리되기도 했다.

누르가치는 이런 방식으로 팔기를 조직함으로써 통일된 여진의 결합력을 강화하고 반란 가능성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팔기만으로 통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636년, 숭덕제는 만주와 몽골의 왕들과 한족 무장들에게 추대되어 세 민족을 주축으로 하는 대청국의 황제에 즉위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만·몽·한의 삼분 체제가 팔기에 적용되어 갔다. 몽고 니루는 1635년에 정식으로 분리되어 몽고 구사(만주어: ᠮᠣᠩᡤᠣ
ᡤᡡᠰᠠ
Monggo Gūsa)가 되었고, 한인 병사는 1637년에서 1642년 사이에 팔기 가운데 한군(重軍, 만주어: ᡠᠵᡝᠨ
ᠴᠣᠣᡥᠠ
Ujen Cooha)으로 조직되었다. 몽고 부대와 한군 부대가 독자적인 구사로 떨어져나가면서 기존의 구사는 만주 구사(만주어: ᠮᠠᠨᠵᡠ
ᡤᡡᠰᠠ
Manju Gūsa)로 불리게 되었다. 1642년에는 만주팔기(满洲八旗, 만주어: ᠮᠠᠨᠵᡠ
ᠵᠠᡣᡡᠨ
ᡤᡡᠰᠠ
Manju Jakūn Gūsa)에 몽고팔기(蒙古八旗, 만주어: ᠮᠣᠩᡤᠣ
ᠵᠠᡣᡡᠨ
ᡤᡡᠰᠠ
Monggo Jakūn Gūsa)와 한군팔기(漢軍八旗, 만주어: ᡠᠵᡝᠨ
ᠴᠣᠣᡥᠠᡳ
ᠵᠠᡣᡡᠨ
ᡤᡡᠰᠠ
Ujen Coohai Jakūn Gūsa)이 더해짐으로써 24개의 구사가 창설되면서 마침내 완전한 팔기제가 완성되었다.[1]


건륭제의 대규모 팔기군 사열식.

청 제국은 1634년부터 1640년까지 흑룡강 유역의 광대한 지역을 원정했고, 투항한 소론(索倫, Solon), 어웡키오로촌다후르와 동해여진의 일부를 만주팔기의 일부로 편제했다. 이때 팔기에 편입된 이들은 새로운 만주라는 의미로 '신만주'(新滿洲, 만주어: ᡳᠴᡝ
ᠮᠠᠨᠵᡠ
Ice Manju)라고 불렸다. 이들 신만주를 제외한 본래의 만주는 자연스럽게 구만주(舊滿洲, 만주어: ᠮᠠᠨᠵᡠ
ᡤᡡᠰ
Ice Manju)로 불리게 되었다[2] 또한 흑룡강 유역에서 포로로 잡은 러시아인타이완에서 투항한 정씨 집단이 각각 니루로 조직되어 만주팔기와 한군팔기에 편입되었다. 건륭 연간에는 위구르 무슬림과 티베트인으로 구성된 니루가 새로 조직되어 만주팔기에 편입되었고, 베트남에서 밀려난 레(黎)씨 왕조의 망명 집단 역시 니루로 조직되어 한군팔기로 편입됐다.[3]

도르곤의 사후 순치제는 도르곤이 기주였던 정백기를 몰수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이로써 양황기, 정황기, 정백기 등 세 구사는 황제를 받들게 되었다. 이후 세 구사를 통칭하여 상삼기(上三旗)라 부르고 나머지 다섯 구사를 하오기(下五旗)라고 불렀는데 순치제는 자신의 지분을 ⅜으로 늘려 조금 더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한 것이었다. 이후 옹정제는 기주의 구사에 대한 지배력을 대폭 약화시켜 팔기 전체에 대한 황제의 장악력을 크게 강화하는 개혁을 단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4]

1871년의 직예총독 이홍장

그러나 19세기 서양 열강이 침공하는 아편 전쟁 이후 잇달은 백련교도의 난태평천국의 난을 거치면서 팔기의 권력은 비정규직 개인 군대의 지휘관들이 조정의 관료로 임명되면서 이들에게로 이동이 촉진되었다. 대표적으로 이홍장1861년에 강소순무로 활동하다가 4년 후에 증국번의 후임으로 청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방 직위인 강소성강서성의 양강총독(兩廣總督, 만주어: ᡤᡠᠸᠠᠩᡩᡠᠩ
ᡤᡠᠸᠠᠩᠰᡳ
ᡠᡥᡝᡵᡳ
ᡴᠠᡩᠠᠯᠠᡵᠠ
ᠠᠮᠪᠠᠨ
Guwangdung Guwangsi Uheri Kadalara Amban)으로 승진했다. 1869년에는 호남성호북성을 관할하는 호광총독(湖廣總督, 만주어: ᡥᡡᡤᡠᠸᠠᠩ ᠨᡳ
ᡠᡥᡝᡵᡳ
ᡴᠠᡩᠠᠯᠠᡵᠠ
ᠠᠮᠪᠠᠨ
Hūguwang ni Uheri Kadalara Amban)으로, 그리고 이듬해에는 직례총독(直隸總督, 만주어: ᡷᡳᠯᡳ
ᡠᡥᡝᡵᡳ
ᡴᠠᡩᠠᠯᠠᡵᠠ
ᠠᠮᠪᠠᠨ
Jyli Uheri Kadalara Amban)으로 승진했다. 그의 형 이한장은 1870년부터 1882년까지 호북성을, 1889년~1895년까지 광동성을 다스리는 등 이들은 군대 지휘, 군법 행정, 군인 봉급의 형태로 보상을 분배하는 권한을 장악하면서 지방 엘리트의 신흥 군사력은 막강해졌다.[5]

국민혁명군 기병대

청 제국이 멸망한 후, 팔기아문은 《황실우대조건》의 일부로 보존되어 중화민국 북경 정부 육군부에 예속되었고, 이 아문에서 기인양은을 지급하는 등 뒷일이 잘 되었지만, 1928년, 국민혁명군이 북벌에 성공한 후 팔기아문을 철거했다.[6] 경성기 외에 동북과 서북의 방비팔기, 예를 들면 후룬베이얼의 소론영(索倫營, 만주어: ᠰᠣᠯᠣᠨ
ᡴᡡᠸᠠᡵᠠᠨ
Solon Kūwaran), 부트하(布特哈, 만주어: ᠪᡠᡨᡥᠠ Butha)의 기, 신장의 시버영(錫伯營, 만주어: ᠰᡞᠪᡝ
ᡴᡡᠸᠠᡵᠠᠨ
Sibe Kūwaran) 등은 역사적 이유로 중화민국 시기에 유지되었다. 1932년, 후룬베이얼 부도통아문과 부트하기 등은 만주국 정부에 의해 폐지되었다.[7] 이후 1938년, 마지막 팔기 조직인 신장의 만주팔기 시버영 대대가 현치로 개편됨에 따라, 팔기는 정식으로 소멸됐다.[8]

18세기 말 이후가 되면 팔기만주, 팔기몽골, 팔기한군 등을 모두 포괄하는 기인에 대한 통칭이 만주족이 되었으며, 20세기 초에는 기족(旗族)이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하였거니와, 오늘날 중국에서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만족(滿族)이란 팔기에 속했던 기인의 후손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팔기제에 의한 민족 정체성의 형성과 지속을 증명하는 것이다.[9]

목차

솔호 니루편집

1616년, 누르가치허투 아라에서 나라를 수립했다. 그 후 후금은 점차 서남, 서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 1621년에는 수도를 랴오양에, 1625년에는 다시 묵던으로 천도하면서 만주 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건주여진의 이러한 국가적인 발전과 대외 팽창은 외족에 대한 납치와 수탈을 동반하고 있었다. 건주여진은 세 차례의 전쟁을 통하여 수많은 조선 병사와 조선인을 전쟁 포로 혹은 피랍인으로 만주 지역으로 끌고 갔다.

1619년 후금과 명나라은 만주 지역의 패권을 다투는 사르후 전투를 벌였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고, 이 전투에 오도 원수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 1만 3,000명을 파견하였다. 후금군의 포위에 빠지면서 조선군 좌우영은 일시에 무너지고, 강홍립은 중영을 이끌고 후금 군대에 투항하였다. 투항한 4,000여 명의 조선 군대 가운데서 500여 명이 두 차례에 걸쳐 후금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다. 그 외의 2,700여 명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조선으로 도망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도망하던 산간계곡 도처에는 아사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하였다.[10] 여기서 수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병사가 후금의 포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에서 청군에게 납치된 조선인은 더욱 많았다. 정묘호란에서 평양·엄격(掩骼)·강동(江東)·삼징(三澄)·순안(順安)·함종(咸從) 등 6개 지방에서만 납치당한 자가 4,986명이나 된다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 시기의 상황도 비슷하였다. 수원 지역 격전에서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지원 나온 병사들이 절반 넘게 포로가 되고, 수많은 피란민들도 잡혀서 만주로 끌려갔다. 1637년 인조봉림대군소현세자를 볼모로 묵던에 보내 전쟁 포로와 납치당한 조선인들을 되돌려받으려고 선양관(瀋陽館)에 갔을 때, 묵던성 남문 밖에 몰린 피랍자만 하여도 수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 차례의 전쟁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전쟁 포로 혹은 강압적인 납치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속환되었거나 도망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조선인들은 만주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만주에 남았던 조선인들은 극히 일부분이 팔기군에 편입되고, 대부분은 만주 왕공 귀족의 노예로 전락하였다.[11]

다양한 경로를 거쳐 팔기만주에 들어온 조선인의 상황은 《팔기만주씨족통보》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 사료에는 팔기만주 소속의 1168개 성씨가 종족 출신별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고려, 즉 조선의 성씨 43개가 포함되어 있다.[12]

팔기에 편입된 조선인을 살펴보면, 정황기(正黃旗) 만주통령(滿洲統領) 제4참령 제9좌령은 투항한 조선인 장정들로 구성되었다. 정황기 만주통령 제4참령 제1좌령은 만주족과 조선인의 혼성으로 편성되었으며, 정백기 만주통령 제1참령 제12좌령과 제14좌령 역시 투항한 조선인으로 조직되었다.[13] 강희제 말기에 이르러 이러한 고려좌령은 8개로 증가하였다.

만주팔기에 편입된 조선인을 보면 성씨만 해도 43개, 158호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 김(金)씨 49명, 한(韓)씨 12명, 이(李)씨 12명, 박(朴)씨 7명, 장(張)씨 7명, 홍(洪)씨 6명, 최(崔)씨 7명, 유(劉)씨 5명, 황(黃)씨 5명, 강(岡)씨 4명, 전(傳)씨 3명, 변(邊)씨 3명, 송(宋)씨 3명, 양(楊)씨 3명, 오(吳)씨 2명, 진(陳)씨 2명, 조(曺)씨 2명, 마(馬)씨 2명, 정(鄭)씨 2명이었다. 나머지는 백(柏)·문(文)·손(孫)·정(丁)·임(任)·이(伊)·주(朱)·서(徐)·차(車)·만(萬)·강(江)·곽(郭)·심(瀋)·방(方)·진(秦)·민(閔)·동(佟)·와(瓦)·경(耿)·맹(孟)·전(田)·신(辛)·하(河)·임(林) 등이 각기 1명씩이었다. 이들은 정신기인(正身旗人)으로서 자유민 혹은 기사로 대우받았다.[14]

《팔기만주씨족통보》 권72와 권73에 등장하는 인물 157명 중에서 약 84퍼센트에 해당하는 132명이 보오이 니루(만주어: ᠪᠣᠣᡳ
ᠨᡳᡵᡠ
Booi Niru) 소속이었다. 이는 팔기에 편입된 조선인이 대개 양대 호란 당시 포로로 끌려가 노복 신분으로 팔기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열하일기》를 보면 박지원이 열하에서 만난 귀주안찰사 기풍액이 본래 성이 황씨인 조선인 후예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기풍액 역시 정백기 만주의 보오이 니루 소속이었다.

한편 《흠정팔기통지》를 보면 팔기만주 속에 조선 출신만으로 구성된 니루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료에 따르면, 건륭 연간까지 조선 출신으로 조직된 니루는 기분 니루 6개, 보오이 니루 2개 등 모두 8개가 있었다.

조선 출신으로 이루어진 기분 니루는 보통 '조선좌령'(만주어: ᠴᠣᠣᡥᡳᠶᠠᠨ
ᠨᡳᡵᡠ
Coohiyan Niru)이라 불렸는데, 정황기 만주에 2개, 정홍기 만주에 4개가 있었다. 단, '조선좌령'에 속한 사람 중에는 원래 여진인이지만 조선 땅에 살던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한윤, 한택 일족이 정홍기 소속의 '조선좌령' 하나를 대대로 관리하였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인데, 한택의 두 아들은 강희 연간에 전공을 세워 봉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훗날 《청사고》에 그들의 전기가 실리기까지 하였다.

한편 조선 출신으로 구성된 보오이 니루는 둘 다 정황기 만주 소속이었는데, 위의 '조선좌령'과 구별하여 '고려좌령'(만주어: ᠰᠣᠯᡥᠣ
ᠨᡳᡵᡠ
Solho Niru)이라고 불렸다. 두 '고려 니루'는 모두 신다리 형제 일족이 대대로 관리를 맡았다. 신다리 가문은 비록 보오이, 즉 노복 신분에 속하였지만 조선 출신 기인 중에서 최고의 명문으로 성장하였다.

《팔기만주씨족통보》에 따르면 신다리 형제는 본래 평안도 의주 사람으로 정묘호란 때 포로로 잡혀갔다. 처음에 통역으로 일을 시작한 신다리는 병자호란 당시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 '고려 니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신다리의 자손 중에서 가장 출세했던 인물은 그의 손자 긴창밍(만주어: ᡤᡳᠨ
ᠴᠠᠩᠮᡳᠩ
Gin Cangming)이었다.

한자 사료에 '상명(尙明, 常明)'으로 표기되었던 창밍은 조모, 즉 신다리의 처가 순치제의 유모였던 덕분에 어려서부터 궁중에 출입하며 강희제와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는 어전대신, 영시위내대신 등 청 제국의 최고위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성사시키는데 힘을 쓰는 등 조선의 대청 외교에서도 중요한 채널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신다리 형제 일족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은 신다리 형제의 셋째인 산다리의 후손이었다. 산다리의 증손과 고손 세대에는 육부의 상서와 시랑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서 긴갼은《청사고》에 전기가 실려있다. 또한 긴갼의 누이는 건륭제의 후궁이 되어 네 아들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셋은 장성하여 친왕, 군왕으로 책봉되었고 자신은 죽은 뒤에 숙가황귀비라는 시호를 받았다.

나중에 가경제는 긴갼 일가의 소속을 정황기 만주의 기분 니루로 변경하고 '김가(金佳)' 즉 '긴갸(만주어: ᡤᡳᠩᡳᠶᠠ Gingiya)'라는 만주 성씨를 하사하였다. 《청사고》에소 긴갼을 가리켜 '만주정황기인'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 긴갼 일가의 기적(旗籍) 변경은 친왕, 군왕으로 책봉된 숙가황귀비 소생 세 아들의 외가를 보오이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5]

팔기만주에 속했던 조선인들이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중국 허베이성 칭룽현, 랴오닝성 가이현(蓋縣)과 번시현(本溪縣)의 박씨 조선족이 그들이다.[주 1]

허베이성 칭룽현 박씨의 조상들은 청초에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그들은 팔기만주의 양백기에 편입되어 청군을 따라 관내에 들어갔다. 그들은 베이징에 주둔하다가 창리(昌黎) 지방으로 옮겼고, 강희 9년 봄에 다시 지금의 칭룽 현 다장쯔(大杖子) 지방에 기지(旗地)를 분배받고 정착하였다. 1887년 박씨의 후손들은 생계를 도모하고자 타거우촌(塔溝村)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 이듬해에 또 일부 사람들이 멍자워푸촌(孟家窩浦村)으로 분가해 나갔다.[16]

랴오닝성 가이현 천툰향 박가구의 박씨 조상들은 청 천총 연간(1627∼1628)에 청에 귀부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누르가치 내무부의 보오이였는데, 후에 양홍기 장친왕(庄親王) 왕부에 귀속되어 청 황실의 양곡을 징수하는 직을 담당하였다. 청군이 하이청(海城)과 가이현을 점령하면서 이곳에 농장을 세우자 그들은 가이 현에 분배되어 박가구 일대의 개척자가 되었다.[17]

랴오닝성 번시현 산청쯔향 박씨의 선조들도 후금 시기에 강제로 납치되어 누르가치의 장자인 추옌에게 귀속되었다. 이들은 누르가치군이 탕허(湯河) 강 유역에 농장을 설치하자 그곳으로 옮겨왔다. 추옌이 처형당한 후 그의 셋째아들 니칸에게 귀속되어 300여 년 동안 줄곧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탕허 강 양안을 개간하였다.[18]

상기 3개 지방의 박씨들은 처음에는 팔기만주의 기적에 등록되었다가, 그 뒤로 수백 년 동안 만주족 혹은 한족으로 등록되어 민족 동화 정책을 버텨야 했다. 그러다가 1982년에 마침내 중국 정부가 그들의 역사를 인정하여 조선족으로서의 족적을 회복했다.[19]

오로스 니루편집

 
1900년에 촬영된 오로스 니루의 가족.

오로스 니루(만주어: ᠣᡵᠣᠰ
ᠨᡳᡵᡠ
Oros Niru) 소속의 기인들은 모두 러시아인의 후손이다. 1644년 이전에 청 제국에 유입된 7개의 코사크가 있었는데, 그들은 만주로의 초기 러시아 이민자들 중 일부였다. 1640년대부터 1680년대까지 알바진(약사) 일대를 중심으로 청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1651년, 순치제는 알바진의 러시아 코사크의 거점에 대한 공세를 명령했다.[20] 1653년, 하바로프의 시베리아 원정은 결국 만주인과 코사크인간의 무력충돌로 변했다. 이 분쟁 때 만주군에게 붙잡힌 코사크인들은 청 제국으로 넘어갔다. 현지의 진수흑룡강등처장군(鎭守黑龍江等處將軍, 만주어: ᠰᠠᡥᠠᠯᡳᠶᠠᠨ
ᡠᠯᠠᡳ
ᠵᡝᡵᡤᡳ
ᠪᠠᠪᡝ
ᡨᡠᠸᠠᡴᡳᠶᠠᡵᠠ
ᠵᡳᠶᠠᠩᡤᡳᠶᡡᠨ
Sahaliyan Ulai Jergi Babe Tuwakiyara Jiyanggiyūn)은 이들을 북경과 묵던으로 보내기로 했다. 1668년에 붙잡힌 33명의 러시아 군인들도 북경으로 보내졌다.[21]

1685년에서 1687년 사이에 이루어진 알바진에서의 군사작전은 청-러시아 국경 분쟁의 종말을 알렸다. 청 제국 정부는 러시아 포로들에게 청 황제를 섬길 것인지 물었고, 이때 복무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러시아로 송환되었고 머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북경에 정착했다. 청 정부는 이 이주민들에게 거처와 묘지를 제공했다. 정부는 또한 그들의 결혼을 주선했다.

오로스 니루의 첫 번째 좌령(佐領, (만주어: ᠨᡳᡵᡠ ᡳ
ᠵᠠᠩᡤᡳᠨ
Niru-i Janggin) 오랑각리(伍郎各里)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라다훈(羅多渾)이 그의 지위를 계승했다. 뤄둬훈이 죽은 후, 오로스 니루는 중앙정부의 관할하에 들어왔다.[22]

치구 니루와 마찬가지로 오로스 니루의 구성원들은 관직진출에 제한이 있었는데, 그들은 정5품 이상의 관직으로 승진할 수 없었다.

1949년, 중국의 오로스 니루 출신자의 후손들은 거처에 따라 만주족이나 아라사족으로 분류됐다. 오로스 니루의 구성원들은 정통 기독교 신자들이다.

1881년, 후에 오렌부르크의 주교가 된 니콜라이 아도라츠키는 오로스 니루의 목회 업무를 담당하여 베이징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의 작품 《중국 정교회 선교》에서 오로스 니루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호이서 니루편집

호이서 니루(만주어: ᡥᠣᡳᠰᡝ
ᠨᡳᡵᡠ
Hoise Niru) 소속의 기인들은 원래 야르칸드 칸국 출신이다. 1759년부터 야르칸드 지역의 사람들이 청 제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760년 건륭제의 칙령에 따라 야르칸드에서 온 무슬림 이민자들을 팔기에 편입시키기 위해 새로운 니루가 결성되었다.[23]

호이서 니루의 소속은 팔기 군사 계급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니루의 멤버들은 황제가 직접 지휘한 상삼기 중 하나인 정백기의 보오이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그 구성원들은 실질적인 군 복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대신 치구 니루나 솔호 니루처럼 아이신 교로 황실을 수호했다.

치구 니루 소속의 기인이었던 푸지의 개인 노트에 의하면, 호이서 니루의 멤버 또한 5품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었다.[24]

몽고 니루편집

팔기몽고가 조직된 이후에도 후금에 복속한 모든 몽골인이 팔기몽고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 1622년에 내부한 우루트(만주어: ᡠᡵᡠᡨ Urut)와 1624년에 귀부해 온 바야우드(만주어: ᠪᠶᠠᠭᠤᠳ Baya'ud, 만주어: ᠪᠠᠶᠣᡨ Bayot)는 기존의 사회 조직을 유지하면서 평시와 전시를 막론하고 팔기로 부터 독립된 구사로 존재하였다. 1632년 홍 타이지는 이들의 독립 구사를 폐지하고 ‘구몽고(舊蒙古)’와 함께 행동하도록 하였지만, 1634년 팔기몽고 조직 시에는 이들을 팔기만주에 잔류시켰다. 이들을 포함하여 팔기만주에 잔류한 몽고 니루는 모두 18개였다.[25][26]

조직편집

장정 200명 ~ 300명 = 1니루(牛錄 - 우록)
5니루 = 1잘란(甲喇 - 갑라)
5잘란 = 1구사(固山 - 고산) =1기(旗)

팔기편집

명칭 청 말기 병력 총인구 기주(旗主) 저명인물 비고
쿠부허 솨얀 궈사
(ᡴᡠᠪᡝᡥᡝ
ᡧᡠᠸᠠᠶᠠᠨ
ᡤᡡᠰᠠ
)
양황기
(鑲黃旗)
  84개 니루,
2개 반분(半分)니루,
병력 약 2만6천
약 13만명 황제(황실 친위군) 서태후 팔기의 필두이며, 상삼기(上三旗)의 우두머리
굴우 솨얀 궈사
(ᡤᡠᠯᡠ
ᡧᡠᠸᠠᠶᠠᠨ
ᡤᡡᠰᠠ
)
정황기
(正黃旗)
  92개 니루,
2개 반분니루,
병력 약 3만
약 15만명 황제(황제 친속 부대) 색니 상삼기의 하나, 팔기군 중 최다인구 보유
굴우 샹얀 궈사
(ᡤᡠᠯᡠ
ᡧᠠᠩᡤᡳᠶᠠᠨ
ᡤᡡᠰᠠ
)
정백기
(正白旗)
  86개 니루,
병력 약 2만6천
약 13만명 황제(황실 친위병의 경호군) 도르곤,
용골대,
조설근
도르곤이 자신 휘하의 정백기를 상삼기로 승격하고, 정람기를 하오기로 강등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청 황제가 친히 이끌었다.
상삼기의 하나.
굴우 풀갼 궈사
(ᡤᡠᠯᡠ
ᡶᡠᠯᡤᡳᠶᠠᠨ
ᡤᡡᠰᠠ
)
정홍기
(正紅旗)
  74개 니루,
병력 2만3천
약 11만5천명 예친왕(禮親王)
순승군왕[27]
다이샨 하오기(下五旗)의 우두머리
쿠부허 샹얀 궈사
(ᡴᡠᠪᡠᡥᡝ
ᡧᠠᠩᡤᡳᠶᠠᠨ
ᡤᡡᠰᠠ
)
양백기
(鑲白旗)
  84개 니루,
병력 2만6천
약 13만명 숙친왕[27] 선기(善耆) 하오기의 하나
쿠부허 풀갼 궈사
(ᡴᡠᠪᡠᡥᡝ
ᡶᡠᠯᡤᡳᠶᠠᠨ
ᡤᡡᠰᠠ
)
양홍기
(鑲紅旗)
  86개 니루,
병력 2만6천
약 13만명 극륵군왕(克勤郡王)
장친왕(莊親王)[27]
진비(珍妃) 하오기의 하나
굴우 라문 궈사
(ᡤᡠᠯᡠ
ᠯᠠᠮᡠᠨ
ᡤᡡᠰᠠ
)
정람기
(正藍旗)
  83개 니루,
11개 반분니루,
병력 2만6천
약 13만명 예친왕(豫親王)
예친왕(睿親王)[27]
숭기(崇綺) 처음에는 상삼기의 하나였으나, 정백기가 승격된 뒤 하오기로 격하됨
쿠부허 라문 궈사
(ᡴᡠᠪᡠᡥᡝ
ᠯᠠᠮᡠᠨ
ᡤᡡᠰᠠ
)
양람기
(鑲藍旗)
  87개 니루,
1개 반분니루.
병력 2만7천
약 13만5천명 정친왕(鄭親王)[27] 서태후(양황기로 이적) 하오기의 하나

관련 문서편집

참조 문헌편집

노트편집

  1. 허베이성 칭룽현의 350여 명, 랴오닝성 가이현의 277명과 번시현의 1, 234명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1982년에 민족을 한족에서 조선족으로 바꾸었다.


각주편집

  1.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ISBN 9788994606514. 
  2. 劉小萌, 「關於淸代“新滿洲”的幾個問題」, 『滿族研究』, 1987, 3쪽
  3.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215~216쪽. ISBN 9788937484940. 
  4.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111~112쪽. ISBN 9788937484940. 
  5.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356~365쪽. ISBN 978-89-9460627-9. 
  6. 中国社会科学院近代史研究所政治史研究室 (2011). 《清代满汉关系研究》. 社会科学文献出版社. 553~556쪽. ISBN 9787509725917. 
  7. 《鄂温克族自治旗概况》编写组 (2008). 《《鄂温克族自治旗概况》》. 民族出版社. 32쪽. ISBN 9787105085972. 
  8. 佟佳江 (2009년 11월 13일). “清代八旗制度消亡时间新议”. 国家清史纂修工程. 2017년 11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9월 23일에 확인함. 
  9.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107~108쪽. ISBN 9788937484940. 
  10. 李民寏, 「柵中日錄」, 遼寧大學歷史系 編,. 『淸初史料叢刊』第8, 9種, 25쪽.
  11. 재외동포사 총서 13, 《중국 한인의 역사》 (상)
  12.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107~108쪽. ISBN 9788937484940. 
  13. 『八旗通志』券4, 旗分志, 38쪽; 같은 책 券16, 旗分志, 3쪽닫기
  14. 재외동포사 총서 13, 《중국 한인의 역사》 (상)
  15.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107~108쪽. ISBN 9788937484940. 
  16. 劉秉虎(1987), 「河北省靑龍縣朴氏朝鮮族社會歷史調査」,. 『朝鮮族硏究論叢』1, 연변대학민족연구소, 84∼85쪽.
  17. 姜龍範(1987), 「遼寧省 蓋縣 陳屯鄕 朴家溝村 朝鮮族社會歷史調査」,. 『朝鮮族硏究論叢』1, 40 ∼43쪽.
  18. 孫春日(1987), 「遼寧省本溪朴堡村朝鮮族社會歷史調査」,. 『朝鮮族硏究論叢』1, 53쪽
  19. 재외동포사 총서 13, 《중국 한인의 역사》 (상)
  20. Adoratsky, Nikolai (2007). 《200 years of Orthodoxy in China》. Guangzhou: 廣東人民出版社. ISBN 9787218055602. 
  21. Zhang, Danhui (Winter 2009). “清初雅克萨战役之始末”. 《清史所》. 
  22. Feng, Fuge (1997). 《聽雨叢談》. 中華書局. ISBN 9787101016987. 
  23. General annals of eight banners.vol.7
  24. Fuge 福格 (1997). 《Tingyu Congtan 聽雨叢談/听雨丛谈》 (reprint). 中华书局. ISBN 9787101016987. 
  25. 張晉藩, 郭成康(1988), 《淸入關前國家法律制度史》 瀋陽: 遼寧人民出版社, 263~269면, 284~291면.
  26. 楠木賢道(2009), 《淸初対モンゴル政策史の硏究》, 東京: 汲古書院, 31~44면, 48~56면.
  27. 杜家驥. 《八旗與清朝政治論稿》. 人民出版社.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