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구/보존문서2

동료 평가 개시

재차 알찬 글 등록을 위한 동료 평가가 시작되었습니다 ^^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유민 (話す·奇与) 2010년 2월 7일 (일) 11:27 (KST)답변

{{출처}} 틀이 있던데, 필요한 자료와 연결 시켜주시기 바랍니다.--Digital man (토론) 2010년 2월 9일 (화) 00:31 (KST)답변
제가 기여가 많은것 같아 부끄럽럽사오나 개인적으로도 김구선생 문서는 알찬문서로 추천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100범 (토론) 2010년 2월 9일 (화) 00:42 (KST)답변

가독성도 좋지만 문장이 너무 길어서, 구분해놓은 것을 왜 전부 삭제해야 했읍니까? 문장 긴것이 읽기 불편하지 않을까요? -- 100범 (토론) 2010년 2월 25일 (목) 21:32 (KST)답변

문단이 너무 많아도..

문단이 너무 많으면 가독성을 떨어뜨려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문단이나 문장은 어느 정도 검토해서 줄이는게 어떨까요? --유민 (話す·奇与) 2010년 6월 13일 (일) 18:42 (KST)답변

답변이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본사용자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사용자분들의 의견도 두루 들어보고 정해도 늦지 않을것 같읍니다. --100범 (토론) 2010년 6월 16일 (수) 12:41 (KST)답변

김두한과 면담 관련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던 김두한에게 선친 김좌진 장군이 적색테러의 희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게 되었다.<ref>현대사를 바꾼 전쟁과 정치 : 전사를 통해 진단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김동주, 뿌리출판사, 2004) 67 페이지</ref> [[이범석 (1900년)|이범석]]에게도 "너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공산주의자"라는 소식을 접하였다.<ref>인물로보는 항일무장투쟁사(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71페이지</ref>

계속 이 부분에 대한 삭제를 하시는데 삭제사유가 타당성이 없어 보입니다. -- 100범 (토론) 2010년 6월 16일 (수) 12:42 (KST)답변

그 부분으 2010 년 6월 16일 (수) 12:40 현재 판 부분은 [1] 참고해주세요.--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6일 (수) 12:43 (KST)답변

그리고 사용자토론:판델라‎님 의견에 100범 님께서 남기신 의견에 김두한의 발언에 김구나 이범석에게 들은 사실이 없다는 것은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았읍니다. 삭제사유가 없읍니다. -- 100범 (토론) 2010년 6월 16일 (수) 12:45 (KST) 은 더욱이 삭제해야 되는 부분이죠. 김두한 비롯해 주위 자료에서도 그런 자료는 나오지않습니다. 해당 링크 2개에서도 제삼자식으로 기재되어있습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6일 (수) 12:47 (KST)답변

이범석 김구

이범석 김구 관련 링크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19페이지, 현대사를 바꾼 전쟁과 정치 67페이지 여기서 본문보기 가능하니 확인하세요.

그리고 김두한 노변야화와 이규갑 관련 기사.

  1. (명문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家
  2. 김두한의 노변야화
  3. 김두한 노변야화2

--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6일 (수) 13:01 (KST)답변

김두한 이범석 김구 의견요청

사용자:Tarantius. 사용자:판델라 사용자:100범 세명의 사용자 님께서 김두한 문서와 김구 문서 이범석 문서에서 "김구는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던 김두한에게 선친 김좌진 장군이 적색테러의 희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게 되었다. 현대사를 바꾼 전쟁과 정치 : 전사를 통해 진단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김동주, 뿌리출판사, 2004) 67 페이지 이범석에게도 "너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공산주의자"라는 소식을 접하였다.인물로보는 항일무장투쟁사(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71페이지" <-- 출처라며 삭제하지마라는 주장하는 입장이고요. 사용자:떠돌이 본 사용자는 위 링크는 그런 자료가 없고 내용도 카더라형식으로 있으면 출처 제시를 요구하는 입장입니다.

위 링크가 거짓이라는 주장에 사유중 하나는 인물로보는 항일무장투쟁사를 출판한 역사문제연구소는 2003년 04월 25일에 출간된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역비의책 15)에서 공표한 내용중

(전략) 요즘 우리 역사에서 잘못 알려져 있는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일제시대 때 신문을 뒤적이다가 조선일보에서 보았는데 날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김두한 때문에 종로시장이 철시(撤市)한 기사가 나옵니다. (중략) 김구 선생이라면 우익 민족주의자였죠. 일제 치하 전체를 반공투쟁으로 일관했던 분인데요, 그렇게 반공투쟁에 철저했던 분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김구 선생을 좌익으로 몰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김구 선생이 민족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런 김구 선생이 김두한을 불러서 호부에 견자라고 노골적으로 충고하는 것이 백범어록에 나와있습니다. 이렇게 호랑이 아버지에 개새끼라고 비판받았던 김두한은 미군정하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래서 오키나와 감옥에서 갇혀 있었는데 미군정에서 집행하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이승만 정권으로 넘겼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 그를 사면해서 데려왔습니다. (후략)"[1]

라고 공표를 하였지만, 위 인용문에서 말하는 조선일보에서 그런 철시했다는 기사가 없으며 또, 백범어록에서 김구가 김두한에게 호부견자라며 비판했다는 자료 또한 백범어록에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백범어록,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다음 내용은 반론내용 종로구에서 3대 걸쳐 가장 오랫동안 양복집을 운영한 이경주는 "김두한 씨도 우리 가게 단골이었지요. 다른 곳 불량배나 일본 주먹패로부터 종로의 한국 상인들을 보호했다고 들었어요. 20여년간 우리 가게에서 양복을 해 입었다고 하더군요.”길을 가다가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거나 돈이 궁해 사무실을 찾은 사람들에게 양복, 외투 등을 선뜻 벗어주곤 했다는 것은 김두한의 유명한 일화. 한인 고학생들이 학비를 부탁하러 찾아오면 “전당포에서 돈과 바꾸어 써라”며 입은 옷을 바로 벗어주었다. 때문에 그는 평생 늘 두 벌의 양복을 번갈아 가며 입었다고 한다. 종로구에서 이발사를 운영한 이상희는 야인시대를 보며 실제와 드라마가 똑같다고 느낀 점은 시장 상인들이 김두한을 대하는 태도. 김두한은 상인들로부터의 존경과 지지가 대단했으며, 종로 거리를 걸을 때는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2][3][4] 또한 백범어록은 물론 백범일지에도 그런 내용은 없으며 백범일지에 변절한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에 대해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백범일지’ 619항/ 너머북스 펴냄) 라는 내용이 있다.[5] 안중근 의거 100주년(2009년)을 맞아 국내 학계, 언론이 다각도로 재조명했지만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다뤄지지 않았다. 다만 연합뉴스가 ‘안중근 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2009년 11월 1일자)이라는 제목으로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 의사가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6][7] 실제로 안준생의 관련은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란 책이 출판된 2009년 9월과 10월 그리고 본격적 출판이 된 11월 때 진보 보수 언론에서 기사화하였다.[8]

그리고 1947년 대한민청 사건으로 재판과정에서 1948년 3월 21일 김구가 말한 부분입니다.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9]

판델라 님은 김구, 김두한 문서에서 임의로 삭제하는 사용자:떠돌이님이 이범석과 김구가 전해주었다는 역사문제연구소의 책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을 먼저 입증해야 되지 않나요? 백범어록이나 다른 기사에 없으면 김두한은 그사람들을 만난적이 없다는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기록을 뺐거나 뭔가 비밀스러운 목적으로 비밀리에 만났을수도 있다고 추론할수도 있습니다. 백범어록이나 다른 기사에 기록에 없는 것이 곧 만난적 없다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100범 님은 그 내용 어디에도 김구나 이범석이 김두한에게 김좌진 관련 발언을 한적 없다 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라는 의견을 말하고 있고 본 사용자와 두분의 사용자 님과 계속 이렇게 서로 반복적으로 시간만 버리며 진행이되지않아 (그리고 김구와 이범석이 김두한에게 김좌진의 죽음을 전해주었다는 주장만 하시고 김두한, 이범석, 김구문서에서는 문서 전체를 삭제하며 편집요약에는문서훼손, 복구이런 의견을 말하시네요.) 의견요청구합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8일 (금) 08:33 (KST)답변

  1. 역사문제연구소. [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역비의책 15)”] |url= 값 확인 필요 (도움말). 역사문제연구소. 168면.
      |url=에 라인 피드 문자가 있음(위치 36) (도움말)
  2. “김두한 단골 이발사의 기억”. 굿데이. 
  3. CBS. "양복감·재봉틀 짊어지고 피난 가서도 가게 열었죠". 노컷뉴스. 
  4. 곽민영기자. “(외곬)3대째 외길 서울 '종로양복점' 이경주사장”. 동아일보. 
  5. 박 성 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다산칼럼) 김구와 안중근 집안”. 한국경제. 
  6. 이종각. “안중근은 쏘고, 아들 준생은 사죄하다”. 주간동아. 
  7. 김현자 기자. “안중근의 아들은 왜 일제의 '개'가 됐나”. 오마이뉴스. 
  8. 안준생 관련 기사들
  9. 김구.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과감히 정리 - 백:과감의 정신을 발휘하여 다음과 같이 과감히 정리하여 둡니다.

광복 직후 김두한경교장을 방문했다. 김두한과의 면담 중, 그는 김두한을 충고 및 격려하였다.[a 1] 당시 유명한 만담가 신불출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에 관련된 좌익 활동을 하던 김두한은 김구로부터 선친 김좌진 장군이 적색테러의 희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고 한다.[a 2]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 중에는 이범석에게도 "너의 아버지를 죽인 자는 공산주의자"라는 소식을 접한 뒤 좌익이라면 이를 갈게 되었다는 것도 있다.[a 3] 한편, 한홍구는 한 때 부하였던 정진룡과 대립하게 된 것이 김좌진이 우익으로 전향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a 4] 이유야 어찌되었든 김좌진은 우익으로 전향하였으며 1946년 김구, 이승만, 김규식을 명예회장으로 하고 유진산이 이끈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이라는 우익 집단의 감찰부장이 되었다. 대한민청은 해방 공간에서 가장 폭력적인 집단 가운데 하나였으며 좌익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였다.[a 5]

이렇게 정리하여 두는 까닭은 첫째 출처에서도 실제 어찌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명시된 부분은 본문에 그 사실을 정확히 알려두고, 둘째 동등한 신뢰성을 갖는 상충된 자료가 있으므로 이를 모두 기재하며, 끝으로 정황을 알기 힘든 사적인 사건보다는 이후 김두환의 행동이 역사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1. 노변야화. “제43화 김구선생과의 관계”. 동아방송. 
  2. 현대사를 바꾼 전쟁과 정치 : 전사를 통해 진단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김동주, 뿌리출판사, 2004) 67 페이지
  3. 인물로보는 항일무장투쟁사(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71페이지
  4. 한홍구, 대한민국사 1, 한겨레출판사, 2003, ISBN 9788984310858, 〈‘장군의 아들’ 신화는 없다〉
  5.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 1, 현실문화, ISBN 8992214464, 392쪽

Jjw (토론) 2010년 6월 19일 (토) 01:01 (KST)답변

역사문제연구소 답변

6월 18일에 역사문제연구소에 문의하여 7월 5일 오전에 답변받았습니다. 아래 내용은 답변 내용입니다.

안녕하세요? 역사문제연구소 사무국장입니다.



먼저, 답변이 늦어진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도 문의하신 내용에 관해 해박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제가 확인한 바에 의거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의하신 내용 중에 나오는 역사문제연구소 발행의 책들은 대중 강연 내용을 간추려서 나온 책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논문 작성과 같이 정확한 전거를 제시하면서 서술된 것이 아니라 강연주제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설들이나 자신의 경험 등이 언급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김봉우 선생의 글은 김두한이 본래 강연주제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2) 이범석과 관련된 부분은 책의 서술(69쪽/71쪽)과 같이 "일설"일 뿐입니다.


자료로써 확인된 내용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해방 후 김두한의 우익청년단 활동에 비추어 볼 때 이범석과 이규갑, 둘 중에 그 개연성이 높은 것은 이규갑 측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2010년 7월 5일 11시 45분 역사문제연구소 사무국장

그리고 노변야화에 경교장에서 김구를 만난 부분은 좌우합작 방해 이후에 만난것으로 위 사항에 이범석이 김좌진의 죽음을 알려주었다는 일설의 내용과 시기가 다릅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7월 6일 (화) 11:25 (KST)답변

광복직후에 김두한이 김구를 만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잖아요. 왜 계속 되돌리기 하십니까? 일설이라서 전에 다른분이 일설이라고 보기좋게 수정하셨는데 또 임의로 삭제를 하시네요. -- Tarantius (토론) 2010년 7월 6일 (화) 18:40 (KST)답변
김구가 알려주었다는 내용은 이범석이 김두한에게 알려주었다는 일설 내용에 이름만 이범석과 김구 바뀐거고요. 답변내용 안보이십니까? 이범석과 관련된 부분은 책의 서술(69쪽/71쪽)과 같이 "일설"일 뿐입니다. 자료로써 확인된 내용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해방 후 김두한의 우익청년단 활동에 비추어 볼 때 이범석과 이규갑, 둘 중에 그 개연성이 높은 것은 이규갑 측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문서 되돌리기 또하시는데 내용을 확인하고 되돌리기하시죠. 그런 행동은 문서훼손입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7월 6일 (화) 18:45 (KST)답변

출처 있는 내용의 삭제

[2] 부분에 대한 편집삭제가 김구, 이범석 등의 문서에서 반복되고 있는데, 김구나 이범석이 김두한을 만나 같은 내용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없는 시점에서 왜 계속 출처가 명시된 자료에 대한 삭제 등이 반복되는가 이해되지 않읍니다. -- 100범 (토론) 2010년 8월 10일 (화) 12:14 (KST)답변

왜 갑자기 처음 토론 의견 올리시는 거처럼 의견 올리시는지요? 위에 답변 내용 보시죠.--떠돌이 (토론) 2010년 8월 10일 (화) 12:16 (KST)답변

계속되는 편집 분쟁에 부쳐

지금 현재 되돌리기의 반복 등(특정판 삭제 이슈를 제외하고) 내용상의 충돌이 상당합니다. 관련자께서는 상호 존중을 바탕에 둔 토론에 따라서 그리고 위키백과의 정책과 지침에 맞추어 정확하고도 중립적인 내용으로 합의된 내용을 반영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음과 같은 원칙 하에서, 즉

  1. 논쟁이 되는 내용에는 반드시 신뢰있는 출처가 있어야 하며
  2. 위키백과에 내용을 옮길 때는 원출처의 내용을 요약하되 사용자의 주관적 해석이 들어가서는 아니되며 중립적으로 옮기고
  3. 1과 2번을 지킨 내용을 제거해서는 안되며
  4. 1번과 2번을 지킨 내용에 관한 반박을 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신뢰있는 출처를 중립적인 어조와 내용으로 내용을 옮긴다

위의 원칙을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만약 이를 어기고 무작정 되돌리기만 반복하는 사용자는, 위키백과의 기본적인 작업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용자로 보고 장기간 차단하겠습니다. 현대사 인물에 관한 분쟁에 극도의 피로감을 불러 일으키면서 수 개월을 편집 분쟁에 빠져있는 것은 관련자들에게도 이롭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위의 원칙을 반드시 지켜주시고, 편집 분쟁을 자제해주십시오. --hun99 (토론) 2010년 8월 10일 (화) 12:20 (KST)답변

친일파후예 매국단체 뉴라이트 척결하여 민족정기 바로잡자!!!

친일파후예 매국단체 뉴라이트 척결하여 민족정기 바로잡자!!!--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Fdhrtktysfddgf (토론기여)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문서와 무관한 이야기는 삼가주세요--220.75.221.3 (토론) 2013년 11월 12일 (화) 22:38 (KST)답변

알찬글이긴 하나 읽기 좋은 글은 아니네요.

내용이 너무 많아, 페이지를 불러들이는데도 오래걸리고(특히 모바일 환경에서는 불러오는데 10초넘게 걸립니다. 스크롤도 힘들기도 하고요.), 읽기조차 힘든것 같습니다..

김구 문서에는 생애와 주요 업적에 대한 요약적 서술만 하고, 하위 문서를 만들어 각 항목에 대한 세부적인 상세 서술을 하는건 어떨까요? --춤매 (토론) 2014년 1월 4일 (토) 19:45 (KST)답변

그렇다고 그 하위 문서만 따로 만들기에는 양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왕이면 PC 환경으로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아드리앵 (토·기) 2014년 2월 7일 (금) 10:12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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