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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에 대한 서술편집

정리가 필요할 듯합니다. 너무 수준에 안맞거나 근거없는 내용 혹은 출처가 부정확한 내용이 감정적인 언사로 올라 오고 있습니다.--Alfpooh 2007년 5월 10일 (목) 01:26 (KST)

맞습니다. 원균과 윤두수가 인척이라고만 밝히고 구체적으로 어떤 인척인지는 회피하고 있습니다.
출처 달아놨습니다. 원균과 윤두수 관계 건은 윤두수가 지 입으로 친족이라고 밝혔으니 구체적인 관계는 몰라도 친족 관계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Sielrace (토론) 2010년 3월 20일 (토) 11:31 (KST)
위키백과 문서의 토론란도 위키백과의 일부입니다. 감정적인 발언은 삼가주세요. jtm71 (토론) 2010년 4월 14일 (수) 22:22 (KST)이글 누가쓴거지요.
윤두수가 제 입으로 친족이라고 밝혔더라도, 그 자체가 거짓일 수 있습니다. 착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실록은 진실을 싣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대에 알려진 사실을 싣는 역사서입니다. 오늘날 해평 윤씨파평 윤씨든, 서로를 다른 씨족으로 봅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4월 27일 (일) 14:00 (KST)

원균 행장편집

公諱均, 字平仲, 姓元氏, 系出原州, 高麗太祖, 統合三韓功臣, 兵部令諱克猷, 卽公之鼻祖也, 高祖諱蒙, 贈軍資監正, 曾祖諱淑貞, 贈兵曹參議, 祖諱任, 贈戶曹參判, 考諱俊良, 贈領議政平原府院君, 守慶尙左兵使, 妣贈貞敬夫人, 南原梁氏諱希曾之女, 公以嘉靖庚子正月五日生, 少驍捷有膂力, 登武科, 由宣傳官, 出爲造山萬戶, 討藩胡有功, 超拜富寧府使, 俄移鐘城, 從兵使李鎰, 破時錢部落, 至壬辰, 拜慶尙右水使, 是年四月, 倭賊平秀吉, 傾國入寇, 釜山東萊次第皆陷, 時公手下只有四船, 知勢孤不能敵, 留虞侯禹應辰守本鎭, 與玉浦萬戶李雲龍, 永登萬戶禹致績, 南海縣監奇孝謹, 退保昆陽海口, 遣裨將李英男, 往見全羅左水使李舜臣, 請與合力禦敵, 舜臣辭以所守各有界限, 不聽, 往返至五六不已, 會光陽縣監魚泳潭, 順天府使權俊, 馳詣舜臣力贊下海之計, 泳潭又自請爲先鋒, 舜臣始許焉, 未至, 公已與賊數次合戰, 焚獲賊船十餘隻, 軍聲稍振, 至五月六日, 舜臣領戰艦二十四隻, 與右水使李億祺, 來會于巨濟洋中, 七日黎明, 三道舟師齊進玉浦前洋, 賊船擺列, 望若蟻屯, 公鳴鼓直前, 衝其中堅, 舜臣等, 一時奮擊, 乘銳崩之, 遂焚賊船百餘隻, 燒溺死者, 不可勝計, 所獲賊船中, 得金圓扇一柄, 扇面當中書曰, 六月八日秀吉, 右邊書羽柴筑前守五字, 疑是秀吉付筑前守之物, 而是日所斬賊將卽筑前守也, 公善於突擊, 能以少破衆, 是以所向無敵焉, 八日, 聞大駕去邠, 率諸將西向痛哭, 一軍感動, 公前已遣弟㙉, 獻俘于行朝, 至是, 與舜臣等, 又以捷報, 上大悅特加公嘉善, 㙉宣傳官, 下諭嘉獎, 二十一日, 倭船自唐浦來, 我師出迎海口, 則諸島群倭, 四面齊發時, 舜臣等已還本鎭, 公登陸以避其鋒, 更遣人請援于舜臣, 而移泊露梁, 未幾, 舜臣又以舟師來會, 破賊於昆陽境, 追至泗川洋中, 連戰皆破之, 六月前, 至唐浦, 賊船分泊海岸中, 有一大船, 上設三層樓, 外垂紅羅帳, 帳中一人, 金冠錦衣, 指揮諸賊, 諸將促櫓直衝, 順天府使權俊, 自下仰射, 一箭正中, 金冠者應弦而倒, 餘賊驚散, 自相投水死, 俄而賊船四十餘隻, 從後來襲, 我師回棹力戰, 自已至暮, 賊乘夜遁去, 是日, 全羅右水使李億祺又來到, 先是, 諸將常以孤軍深入爲憂, 至是見億祺至, 無不一倍增氣, 進到東島洋中, 鼓噪蹴戰, 獲賊五將同乘之船, 栗浦加德之戰, 又皆全捷, 公前後捕獲賊船五十五隻, 所斬一百三級, 事聞上, 下書褒諭略曰, 惟卿, 許國肝膽, 間世英豪, 治艨衝於漢水, 公孫畏吳督之威風, 擊舟楫於荊江, 羯胡挫士雅之意氣, 援枹而士卒踴躍, 誓江而日星晦濛, 唐項浦決數十戰, 頭顱塞江, 閑山島焚七十船, 鯨鯢授首, 臨危出奇, 古嘗聞, 其是語, 以少擊衆, 予獲見於今辰, 屹然千尋鐵壁, 儼若一代長城, 周室中興卽有尹吉甫之薄伐, 唐家再造實賴郭子儀之盡忠, 七月六日, 公與舜臣等又會于露梁, 焚賊船六十三艘, 到安骨浦前洋, 遇賊四十餘艘, 我師休番迭攻, 斬獲尤多, 賊不能支, 遁入巨濟釜山, 不復出, 是月二十三日, 有旨曰, 觀卿四次軍功狀啓, 其中尤異者, 爲先論賞, 以示予嘉悅之意, 其時在本職者, 今若超敍, 則遞易非便, 姑仍前職, 只陞其秩, 以爲他日之用, 小錄所付倭物, 卿其於所得人處分給, 以勸後人, 九月, 進資憲, 兼知中樞府事, 又有旨以褒之, 初賊分水陸兩路, 長驅西上, 以爲會于平壤, 侵犯上國之計, 賊將平行長投書恐喝, 有日本舟師十餘萬, 又從海路來, 不知大王龍馭自此何之之語, 至是, 公及舜臣遮遏海路, 不使一賊過去, 以此, 行長久留平壤, 不復西犯, 其後, 國家得保兩湖兩西, 終收匡復之功者, 專賴于此焉, 乙未冬, 除忠淸兵使, 丙申秋, 移拜全羅兵使, 陞辭之日, 上敎曰, 卿爲國盡力, 忠勇之誠, 古今罕比, 予嘗嘉焉, 顧無以報, 今當遠離, 欲相見送之, 適氣不平未果, 仍賜內廐良馬一匹, 時倭人屢敗於水戰, 行長患之, 使小倭要時羅, 往來于慶尙右兵使金應瑞陣, 詐爲致款, 及丁酉淸正之再出也, 時羅密言于應瑞曰, 兩國之和事不成, 專由於淸正, 故行長甚惡之, 今淸正以單舸渡海, 若要諸海中, 可以生擒縛來, 愼勿失機也, 應瑞上其事, 朝廷信之, 遣慰諭使黃愼, 密報于統制使李舜臣, 舜臣知賊有謀, 遲疑屢日, 廷議, 以舜臣逗留不進, 致誤軍機, 拿致于朝, 是年二月, 使公代領其任, 公揣審賊以計誑, 我力陳釜洋不可入討之意, 朝廷不聽, 又啓曰, 不已, 則安骨浦留屯之賊, 先以陸兵驅出後, 方可入戰, 朝廷又不聽, 體相李元翼遣從事官南以恭, 促其戰, 七月初, 行長又使要時羅詒應瑞曰, 倭船方連絡渡海, 乘其無備, 以舟師邀擊, 猶可獲利, 都元帥權慄尤信其說, 督戰益急, 公遂至熊川前洋, 遇賊大戰破之, 時賊兵再動, 軍勢甚盛, 公因其勝退師, 請益援兵以爲更進之計, 權慄以公爲逡巡失幾, 拿杖轅門, 公知事必不可濟, 而旣受罪元帥府, 不得已統率舟師, 直趨釜洋, 賊示弱以誘之, 我師乘勢進薄, 銳意急追, 不覺深入賊境, 舟人告以已踰水嶺, 公大驚急回船退歸, 則全羅右水使船已漂向東海而去, 賊見我師失勢, 盡發新舊兵船, 飛騰亂逐, 又潛遣輕船伏于永登浦島中, 我師退至永登, 爭下船急取薪水, 忽然一聲砲響, 賊兵四起, 揮長劍左右亂斫, 我師奪港以走, 退至溫羅島, 西日已沈海, 天昏暝, 追賊蔽海, 軍心益危, 公聚諸將議曰, 事已至此, 天不助順, 今日之計, 惟有一心殉國而已, 是夜, 賊密令小哨舠, 穿入我船之間, 又以兵船潛遶于外, 而軍中未之知也, 至天明, 火發我船, 公急擊鼓鳴鑼以報變, 忽見賊船四面衝突, 飛丸如雨, 喊聲震天, 勢如崩山捲海, 莫可抵遏, 慶尙右水使裵楔擧碇先走, 我師遂潰, 公棄船登岸, 賊追及斬首以去, 是丁酉七月十六日也, 得年五十八, 賊退收屍歸葬于振威余佐洞, 朝家祭賻如禮, 逮辛丑間, 領相李德馨以體察使南下, 上引見曰, 元均敗死後, 謗言至今未已, 予則以爲寃矣, 我國之俗, 見人能一事, 則例以爲賢, 敗一事, 則例以爲非, 此敗豈渠之所爲乎, 觀其時書狀, 則安骨浦賊陣爲先驅出後, 欲爲入討, 而朝廷督戰, 元帥決棍, 非均之自敗, 卽朝廷使之敗也, 德馨對曰, 大槪當初與舜臣相換爲非矣, 上曰, 朝廷使之速戰, 雖不易將, 亦敗矣, 又曰, 兵法云, 亡大將者, 斬副將, 亡副將者, 斬領將, 均旣敗死, 則其管下雖末能盡誅, 査出誅之可也, 癸卯六月, 錄宣武功, 李德馨李恒福等啓曰, 元均初以無軍之將, 參於海上大戰, 而其後有敗衄舟師之失, 難可與李舜臣權慄竝列, 故降錄於二等矣, 上敎曰, 當賊變之初, 均請援于舜臣, 非舜臣自赴, 及其討賊, 均以死自許, 每爲前鋒, 奮勇先登, 捷獲之功, 與舜臣一體, 其所獲賊魁樓船, 反爲舜臣所奪, 及代舜臣, 再三陳啓, 力言釜山前洋不可入討之意, 備局督之, 元帥杖之, 於是, 均明知其必敗, 而離鎭擊賊, 全軍覆沒, 以身殉之, 是均不但勇冠三軍, 智亦至矣, 昔哥舒翰撫膺出潼關爲賊所敗, 楊無敵爲潘美所脅揮淚出戰遂殲於賊, 何以異於此, 古今人物, 不可以成敗論, 憐其命與時乖, 功虧事敗, 心跡不明, 前者, 領相之南下也, 略見均可愍之意, 今日論功之際, 反置於二等, 豈不寃哉, 元均之目, 且不瞑於地下矣, 遂策勳一等第三人, 甲辰四月, 賜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之號, 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 明年正月, 遣禮部郞柳惺, 致祭於家, 其後, 李學士選爲之立傳, 發揮公始終事, 甚詳且明, 其略曰, 均所率舟師, 其數甚少, 其勢甚弱, 所以請援於舜臣, 然舜臣未來之前, 已焚破賊船, 以此贈秩, 及與舜臣合勢也, 又必自爲先鋒, 直進搏戰, 所向皆捷, 雖其戰敗之時, 猶破賊十船, 則其忠義功烈亦自卓然, 足爲一世之虎臣, 而後來爲舜臣, 揄揚文字者, 偏攻均無餘地, 均之於舜臣, 成敗之跡小殊, 而死國之節無異, 何其抑揚之太懸耶, 其下逐條卞白, 殆無遺欠, 尤齋先生曰, 崇禎己亥春, 朝廷立忠武公李舜臣碑於露梁廟, 屬筆於余, 其文有元統制均, 軍敗走死語, 盖澤堂李公之所撰諡狀也, 其後乙丑五月, 統制之曾孫舜格, 持統制錄勳敎文及賜祭文來示余, 大與諡狀所記不同, 余謂澤堂世所稱良史, 其立言也必審, 然敎書祭文俱是王言, 當時代言之臣, 亦豈敢一毫虛張哉, 聖朝又何妊諸帶礪之券哉, 其子孫之稱寃宜矣, 嗚呼, 公以忠樸質直之姿【鰲漢稱公之言】, 懷爲國死綏之志, 始自討胡立功, 颺聲朔野, 及當海寇衝突, 列鎭瓦解之日, 奮不顧身, 激勵將士, 要與舜臣同心戮力, 必以勦殪凶徒, 廓淸海氛爲期, 其焚獲捕斬之功, 無讓於舜臣, 迨丁酉再搶, 朝廷爲倭賊所欺, 遂使公終至於喪師殞命, 而身後謗言又不勝其紛紜, 公之心事幾乎掩而不著矣, 惟我宣祖大王深察其寃狀, 前後聖諭不啻丁寧, 而其錄勳之敎, 尤爲明白懇惻, 至引哥舒翰楊無敵之事以比之, 大哉, 王言足爲百世公案, 若使公魂而有知, 想必感泣於泉下矣, 至若李學士之傳, 尤齋先生之說, 又可以取信於當時, 考徵於來世, 昔張巡許遠同守睢陽, 及至城陷又同死於國, 而其時爲巡地者, 亦有貶遠之語, 韓文公爲之作傳, 後敍以明其不然, 而後是非始定, 今公遭謗, 實與遠相類, 而尤齋先生諸人之說, 比諸後敍, 殆有光焉, 則公之毁言, 自此其亦可以止息, 至於聖祖之褒揚伸卞, 又遠之所未得者, 噫, 公於是, 無復有一毫遺憾矣, 夫人坡平尹氏, 進士贈參判彦成之女, 自宣廟朝, 有廩養之擧, 而光海廢之, 仁廟改玉復命給料, 生於嘉靖丁未, 卒於崇禎壬午, 壽九十六, 至是遷公墓改窆, 夫人實祔焉, 無子有一女縣監韓嶷, 側出一男二女, 男士雄, 武科襲封原城君, 女同知李新春, 義信君備, 縣監四男二女, 男碩望, 碩振, 碩臣, 碩良武科防禦使副摠管, 女學生兪楨, 參判南老星, 原城二男, 珌, 琰, 同知一女, 尹安之, 義信六男, 原平令珀, 原溪令瓊, 原興令琚, 原昌令玖, 原陽守珽, 原仁令珞, 珌一男, 舜格, 方主公之尸兒, 舜格有男, 曰震瑞, 以其親意, 來請公狀甚勤, 榦屢辭非其人, 而終不得, 玆敢謹就聖敎及先輩可據文字, 略加點綴, 以歸之庶幾立言君子之財察焉, 司憲府大司憲金榦撰。--Pandira (토론) 2011년 5월 11일 (수) 19:18 (KST)

실록 자료편집

실록에 나타나지 않으면 무조건 사실이 아닙니까? 그리고 행장 내용을 신뢰할수 없다면 이순신의 다른 행장들은 물론이고 다른 문무신들의 행장도 신뢰할수 없는 내용들이군요? -- Nixten (토론) 2012년 1월 25일 (수) 19:04 (KST)

네 그래서 보통 누구의 행장여부에 관계없이 행장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보통 허무맹랑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애초에 편찬목적자체가 편향되있어서요 Ronain (토론) 2012년 1월 29일 (일) 17:21 (KST)

이 문서는 원균행장 소개 문서가 아닙니다.편집

문서의 전체적인 내용이 원균행장 그대로 따르고 있네요. 이것과 임진왜란 당시를 비교해보면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원균행장록 내용을 소개하는 거면 따로 문서를 만드는 게 낫지 않나요?--Blindbard (토론) 2011년 5월 11일 (수) 22:27 (KST) 거의 문서를 뒤엎는 수준의 수정이 필요하겠는데요. 요시라 건만 해도 이순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 도착했다는 게 실록에 분명히 기록돼 있고 이게 이순신에게 전달된 날짜 역시 난중잡록에 기록돼 있습니다. 대체 이순신이 언제 적의 간첩을 믿을 수 없다고 했는지 모르겠네요. 모두 원균행장에만 기록돼 있는 내용입니다. --Blindbard (토론) 2011년 5월 11일 (수) 22:43 (KST)


교양서적을 참고로 부정확한 내용을 올리지 말기를 바랍니다.편집

문서가 현재 상당히 지저분해져 있습니다. 이는 시중에 나온 교양서적인 원균옹호론을 인용하였다가 반론을 다는 과정에서 내용 전체가 지저분하게 되어있는데요 제발 확인된 1차 사료의 내용으로만 문서를 편집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최소한 문서 편집시 내용을 제대로 확인해보고 편집해주시기 바랍니다. 멀쩡히 증거자료제시하면서 틀렸다고 써놓았는데 왜 자꾸 틀린내용으로 수정하시나요?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61.102.85.45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문서에 대한 대대적인 편집이 필요합니다.편집

현재 이 문서관련 토론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2가지라 생각합니다. 첫째 원균행장록이 인용할 만한 신뢰성이 있는 역사적 사료인가? 둘째 원상웅이 권율에게 죄없이 곤장을 맞았는가? 다음 내용을 보시고 토론에 참여해주세요

1.원균행장록의 신뢰성에 관해서편집

저는 원균행장록이 매우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인용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원균행장록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당대사람이 기록한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도 많은데 굳이 후대사람이 지은 2차사료인 원균행장록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

2.행장자체가 현재의 위인전과 비슷한 성격으로 행장의 주인공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므로 주인공의 과오는 삭제하고 공은 부풀리거나 없는 걸 지어넣는다.

3.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당시의 다른 사료들과 교차검증할시 틀린 내용이 너무 많다.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임진년(1592) 이때 공(원균)의 수하에는 단지 배 4척이 있을 뿐이어서[1] 군사 세력의 부족으로 혼자서는 능히 적을 섬멸할 수 없음을 예측하고 우후(虞侯) 우응진(禹應辰)으로 하여금 머물러 본영(本營)을 지키게 하고, 옥포(玉浦) 만호 이운룡(李雲龍), 영등포 만호 우치적(禹致績), 남해 현감 기효근(奇孝謹) 등으로 하여금 물러가서 곤양(崑陽)을 지키도록 하고,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보내어 힘을 합해서 적을 방어하기를 청하였으나[2] 이순신이 지키는바 각기 한계가 있다 하고 듣지 아니하므로[3] 서로 의견이 5, 6차나 오고 갔다. 이때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과 순천 부사 권준(權俊)이 이순신에게로 달려가서 바다로 나아가 싸울 것을 힘써 권고하니[4] 이순신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공은 이순신이 도착하기 전에 수차 적과 교전하여 적선 10여 척을 불사르고 빼앗으니 군성이 점차로 떨치게 되었다.[5] 5월 6일에 이르러 비로소 이순신이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더불어 거제 앞바다로 모이었고, 7일 새벽에 삼도의 수군들이 일제히 옥포 앞바다로 진격하니,[6] 진을 치고 있는 적선이 개미떼와 같이 몰려 있었다. 공이 북을 높이 올리며 곧바로 진격하여 적의 중앙을 공격하고, 이순신 등이 일시에 승세를 타고 공격하여 적을 무너뜨리니,[7] 불태워버린 적선이 1백여 척이고,[8] 불에 타서 죽은 자와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빼앗은 적선 중에서 둥근 금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부채 한쪽면 가운데에 ‘6월 6일 수길(六月八日秀吉)’ 이라 쓰여 있고, 바른쪽 가에는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 라고 5자가 쓰여 있으니, 이는 필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우시축전수(羽柴筑前秀)에게 준 물길이 확실하며, 이날 목을 벤 적장은 곧 우시축전수가 틀림이 없었다.[9] 공이 적진으로 돌격을 잘하여 적은 병력으로 능히 많은 적을 격파하니, 공이 향하는 곳에는 대적할 적이 없었다.[10] 5월 8일에 선조께서 서울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니 온 군중(軍中)이 감동하였다. 공은 동생인 전(㙉)으로 하여금 행재소(行在所)에 들이게 하였고,[11] 이순신 등이 또한 승리의 장계를 올리니, 선조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공에게 특별히 가선(嘉善)의 벼슬을 더하여 내리시고, 전(㙉)에게는 선전관을 제수하시었으며, 유지를 내려 격려하셨다. 5월 21일에 왜선이 당포로부터 공격하여 오므로 우리 수군이 해구로 나아가서 맞아 싸우는데, 주위의 여러 섬에서 왜적의 무리가 사면으로 일제히 나오는지라 이때에 이순신 등은 본진으로 돌아갔으므로, 공은 육지로 올라가서 우선 적의 선봉을 피하고[12] 다시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고 배들을 노량으로 옮겨 놓았다. 얼마 후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와서 다시 모여서 적을 곤양 근처에서 격파하고 사천 앞바다까지 적을 쫓아가서 이를 모두 섬멸해 보렸다.[13] 6월 당포에 이르니 적선이 바닷가에 나누어 정박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3층 누각이었고, 밖으로 붉은 장막을 드리웠는데 그 속에서 한 사람이 금관과 비단옷을 입고 적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보이므로 우리의 여러 장수들이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공격하였으며, 순천 부사 권준(權俊)이 아래로부터 치쏘아 한대의 화살로 적중시키니 금관을 쓴 자는 활촉 소리와 함께 거꾸러지고, 남은 왜적들은 놀래서 흩어지고 스스로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었다.[14] 조금 있다가 적선 40여 척이 뒤로부터 공격해 오므로 우리 군사가 노를 돌려서 이를 맞아 힘껏 싸워서 오전 10시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이르니 적들은 밤을 타고 도주해버렸다. 이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다시 와서 합세하니[15] 먼저는 여러 장수들이 적은 병력으로 적진 깊숙이 진격하는 것을 근심하다가 이억기가 도착한 것을 보고는 사기가 두 배로 되었다. 동도 앞바다까지 적을 추격하여 북을 울리며 용감하게 싸워서 적장 다섯이 함께 탄 배를 붙잡았고, 율포와 가덕 전투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후 전투에서 공이 붙잡은 적선이 모두 55척이오, 목 벤 적이 모두 103급이었다.[16] 임금이 이 일을 들으시고 글월을 내리시어 칭찬하시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경(卿)은 나라가 허락한 간담(肝膽)이오, 세간에 다시없는 영웅호걸이라.… 당항포에서 수십 차 결전하니 참수한 적의 머리가 강을 막았고, 한산도에서는 적선 70여 척을 불태우니 고래가 머리를 바쳤도다.[17] 위급한 때을 당하여 기발(奇拔)한 계책을 냈다는 말을 옛이야기로 들었더니, 소수의 군사로써 큰 적을 무찌른 일을 오늘에 이르러서 볼 수 있었도다. 의연한 천진 절벽이요. 엄연한 일대 장상(長城)이로다. 주(周) 나라가 중흥함에 있어서는 곧 윤길보(尹吉甫)의 정벌이 있었고, 당(唐) 나라가 재건됨은 실로 곽자의(郭子儀)의 진충(盡忠)에 힘입었도다.[18]” 7월 6일에 공이 이순신 등과 또 다시 노량에 모여서 적선 63척을 불태우고,[19] 안골포 앞바다에 이르러 적선 40여 척과 마주쳐서[20] 우리 군사가 번갈아 공격하여 적의 목을 베고 빼앗은 것이 더욱 많으니, 적은 지탱하지 못하고 거제와 부산으로 도주하여 다시는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7월 30일에 조서(詔書)가 내렸는데 이르기를, “경이 올린 네 차례의 군공장계(軍功狀啓)를 보고 그 중에서 특별히 공이 있는 자를 먼저 논상(論賞)하며 내가 기뻐하는 뜻을 보이고자 하였으나, 그때에 본직에 있던 자를 지금에 와서 승진시키려면 자리를 바꾸고 갈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으니 아직은 본직을 그대로 두고 다만 급수만을 올려 주었다가 후일에 등용하게 하라. 소록(小錄)에 기록한 왜물(倭物)은 경이 노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뒷사람들을 권장케하라.”고 하였다.

[1] 왜적이 쳐들어오자 본인이 지레 겁을 먹고 배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이야기는 빠뜨리고 있다.

[2] 부하들이 그렇게 하기를 청하여 마지못해 응했던 것이다.

[3] 사실이 아니다.

[4] 어영담과 권준이 아니라 송희립과 정운이다.

[5] 전혀 사실이 아니다. 4척의 배로 10여척을 무찌른 일은 전혀 없었다. 이 당시 원균은 자신휘하의 판옥선을 전부 불태운후 도주해 수전을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이 사실은 당시 김성일의 상황보고 장계를 보면 확인할 수 잇다.

[6] 우수사 이억기는 6월 4일 당포항 싸움 후에 처음으로 합류하였다.

[7] 사실이 아니다. 원균은 싸울 때 제대로 된 전력을 보유하지 못해 항상 이순신의 함대 뒤를 따라다니는 처지였다.

[8] 제1차 출전에서 불태운 적선의 수는 42척이었다.

[9] 이것은 6월 2일 당포 싸움에서 이순신의 부하 장수 이후 이몽구(李夢龜)가 왜장의 배에서 획득한 것인데 이것을 마치 원균의 공로인 것처럼 속이고 있다.

[10] 전형적인 과장된 포현을 쓰고 있다.

[11] 사실이 아니다. 당시 포로는 전부 이순신이 관리하였고, 적의 수급만 보냈지 포로를 행재소에 보낸 일은 전혀 없었다.

[12] 왜적의 배가 쳐들어오자 그는 이번에도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는 이야기이다.

[13] 곤양 근처가 아니라 사천포에서의 전투이고, 이것은 5월 29일에 있었던 일이다.

[14] 비록 엉성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이것은 당포가 아니라 6월 5일에 있었던 당항포 전투에서의 일이고 또 원균의 전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15] 이억기 함대는 이날 처음으로 참전하였다.

[16] 제2차 출동 때 원균이 거느리고 참전한 전선 수는 3척에 불과했다.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이 첫 출동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동안 그는 뒤에서 죽은 적의 시체를 찾아다니면서 목 베기에만 열중하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적선 55척을 붙잡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17] 그저 허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허무맹랑한 내용이다.

[18] 중국의 史書를 읽은 것이 죄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19] 이것은 이순신의 <견내량파왜병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불태운 것은 약 58척이고, 7월 8일의 일이다.

[20] 마주친 적선은 59척이다.


이렇게 사료자체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가득한데 어떻게 신뢰성이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원균행장록을 인용하시려면 원균행자록이 납득할 만한 신뢰성있는 자료라는 구체적 근거를 제시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원사웅의 곤장 부분편집

이것은 관련사료를 전혀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실록에 기록된 내용은 단순히 권율이 원균을 불러들여 곤장을 때렸다는 것 뿐입니다. 이런 부분은 상대방에 대한 비판에 해당되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도 없이 제시한다면 단순한 유언비어일 뿐입니다. 원사웅이 곤장을 맞았다는 납득할 만한 출처를 제기해주세요 사료 어디어디를 보니 그렇게 기록되어 있더라 이런식으로요

위 내용을 읽어보시고 납득이 안가는 부분에 대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지적이 없으시면 며칠후 문서를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Ronain (토론) 2012년 1월 29일 (일) 17:21 (KST)

문서를 좀 수정하였습니다.편집

문서내에 사료들과 맞지 않는 부분을 수정하였고 해전부분은 관련자료가 도착한 후 수정할 예정입니다. 문서를 보시고 의견을 남겨주세요 Ronain (토론) 2012년 2월 3일 (금) 11:34 (KST)

모순된 내용편집

그러나 그의 아들이 1597년 6월 19일 칠천량 해전에서 아버지 원균을 보호하다가 전사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때 전사하지 않고 1646년에 사망하였다.[43] 부인 파평윤씨는 1642년 6월 홍성군 홍주에서 사망했으나 시신을 거둘 이 없었는데, 그해 7월 호노(戶奴)인 백종(白從)이 왕에게 상소를 올려 예장하였다.

위 내용은 원균 본문의 일부입니다. 이 내용이 옳다고 보고 기록하셨겠지만, 저것은 중대한 오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인의 친아들이 1646년에 죽었다는 그 사람입니다. 원사웅이 아들이라고 되어 있으니, 저 사람이 원사웅이겠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시신을 거두지 않았다는 말이네요. 이거, 아주 악질적인 모독입니다. 원균도 졸장부지만, 원균 아들은 아주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더구나 주석 43번은 십구공신회맹록인데, 내용도 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이유에서 원사웅이 그 친모의 시신을 거두지 않았는지 밝혀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원사웅의 1646년 사망 기록과 그 친모의 1642년 사망 기록은 서로 모순이 생깁니다. --123.111.182.4 (토론) 2014년 5월 22일 (목) 20:25 (KST)

담배와 담뱃대편집

담배는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왔지만, 담뱃대가 그 뒤에 생겨나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담뱃대는 원래 담배가 아닌 연초를 태우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고, 연초는 고려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즉, 요즘에 담뱃대라고 부르는 물건이, 당시에는 다른 이름(또는 같은 한자를 쓰지만, 현대어 해석에서 "담뱃대"로 될 뿐인 물건)으로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원균#묘(墓)와 사당(祠堂) 부분에서 "그러나 이 묘는 가짜로 원균사망당시는 담배가 도입되지 않은 시기니 위에 나온 일화는 불가능하다."라고 밝힌 출처를 제시해 주십시오. --Knight2000 (토론) 2016년 2월 5일 (금) 00:07 (KST)

일단 해당 문단에 {{출처}} 틀을 추가하였습니다. --BIGRULE (토론) 2016년 2월 5일 (금) 07:06 (KST)

외부 링크 수정됨 (2018년 11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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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수정됨 (2019년 4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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