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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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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 회의(Paris Peace Conference)는 1919년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이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 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 회의이다. 회의는 1919년 1월 18일 개최되어 1920년 1월 21일까지 간격을 두고 지속되었다.  이 파리 강화 회의는 1920년 1월 21일에 열린 국제 연맹의 첫 의회 취임식과 함께 끝이 났다. 

목차

독일의 식민지 문제편집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베르사유 평화 회의라고도 알려진 파리 평화 회의는 연합 승리군들의 만남이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패전 동맹국가들을 위한 평화 협정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파리 강화 회의의 중심 이슈는 독일의 해외 식민지들의 배치였다. (오스트리아는 식민지가 없었고, 오스만 제국은 별개의 문제를 제시했다.) 영국의 지배자들은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그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원했다. 호주는 뉴기니를 원했고 뉴질랜드는 사모아를 원했다. 그리고 윌슨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패전국에 적용되는 민족 자결주의를 원했다. 독립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을 때까지 모든 독일 식민지들이 그들의 나라를 스스로 통치하길 원했다. 결국에는, 승전국들이 독일의 식민지를 비롯해 엄청난 영토를 가져가게 되었다.

By Thomashwang at the English language Wikipedia,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389813

이 지도는 세계 제1차 대전 참가자들을 그린 세계 지도이다. 협상국들 (승전 연합군 ) 과 그들의 식민지 소유물들은 녹색, 패전한 동맹국과 그들의 식민지 소유물들은 주황색, 중립국들은 회색으로 표현하였다. 이 지도를 보면 승전국들이 엄청난 식민지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섯 개의 평화 조약편집

파리 강화 회의의 주된 결정은 국제 연맹의 창설, 그리고 주축국이었던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을 포함한 다섯 개의 평화 조약인데, 가장 중요한 베르사유 조약에서 제 231조는 독일 및 동맹국들의 침략 전쟁에 대한 죄책감을 낳았다. 이 조항은 독일에 굴욕적인 것으로 판명되었고, 독일이 전쟁 도발 책임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1931년에 배상금 지불이 끝날 때까지 조금밖에 지불하지 않았음) 파리 강화 회의의 주요 권고 사항들은 이러한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체결되었는데, 이는 15장과 440개 조항을 포함한 독일과 다른 국가들을 위한 조약이었다.

5개의 강대국편집

5개 강대국(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 일본)이 회의를 관장했지만, "빅 파이브" 중에서 일본은 작은 역할을 했고, 위에 언급했던 빅 4의 지도자들은 비공식적으로 많은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일본을 뺀 빅 4의 지도자들은 프랑스의 수상 조지 클레멘츠, 영국의 수상 조지 로이드 조지, 미국의 대통령 조지 로이드 윌슨, 그리고 이탈리아의 초대 대통령, 그리고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올란도 총리였다. 그들은 비공식적으로 145차례나 만났고 모든 주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파리 강화 회의에 대한 평가편집

파리 강화 회의의 세계 지도자들은 세계 2차 대전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여러가지 중대한 갈등을 낳았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민족 자결 주의의 원칙이었던 윌슨의 14개 조항은 10월 혁명과 전쟁 종식을 위해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여러 혁명에 영향을 끼쳤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의 관계편집

신한청년당1919년 1월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1]

윌슨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기대를 하였고, 김규식도 1918년 윌슨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전범국 처리를 논의하던 것이었다.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강화회의에서는 답을 주지 않았고, 1919년 7월 14일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가 끝난 다음에 왔다. 이때 심한 두통으로 눈이 안 보일 정도까지 갔다.[2][3]

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 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 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2] 8월 9일 김규식은 김복, 여운홍과 함께 뉴욕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김규식은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쉬지않고 타이프를 쳤다 한다.[2]

중국의 산둥 문제편집

파리 평화 회의에서 중화민국 대표는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에서 강탈한 제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7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4]: (1) 중국에 설치된 세력범위의 포기, (2) 중국에 주둔하는 각국 군대의 철수, (3) 각국이 중국에서 경영하는 우편전보사업의 폐지, (4) 영사재판권의 철회, (5) 조차지의 반환, (6) 조세의 반환, (7) 관세 자주권의 승인.[4] 그리고 여기에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취한 각종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조목이 부가되어 있었다.[4] 이 요구 조건 속에는 패전국인 독일이 산둥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적 권익을 중국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 앞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강조하여 중화민국의 요구를 찬성, 지지함으로써 중국 국민에게 큰 기대를 주었다.[5] 그런데, 일본은 21개조 요구 가운데 산둥 문제에 관한 것과 돤치루이 정권이 1918년에 일본과 교환한 산둥 문제에 관한 공문을 근거로 산둥 문제는 중·일 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문서상의 증거가 있었던데다가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이 1918년의 중일협약을 지지해주기로 일본과 약속했었으므로, 4월 21일의 회의에서 결국 일본 측의 주장이 승인되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와의 비밀협정을 통하여 이에 구 독일 권익은 완전히 일본에 양도하기로 되어 있었다.[5] 물론 우드로 윌슨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굴복하게 되었고 중국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것이었다.[5] 산둥 반도 문제에 관한 파리강화회의의 결정을 알리는 전보가 1919년 4월 30일 베이징(北京)에 퍼졌고, 이어 5월 1~3일 베이징의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과 그 이유가 보도되었고, 이는 5·4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5·4 운동)

베트남의 청원편집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베트남의 청년 호찌민이 찾아왔다.[6] 그는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으로 이루어진 《베트남 인민의 요구서》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6] 그러나 조선의 대표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요구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찌민은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6] `

각주편집

  1. 신한청년당은~: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2. 한국사 인물 열전 3(한영우 지음 | 돌베개 | 2007) 266페이지
  3. 강만길,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2008) 414페이지
  4. 김하룡, 《신 중국정치론》나무와숲(2000) 23쪽 ISBN 89-88138-13-9
  5. 동서양문화사, 학문사(1996), 312쪽 ISBN 89-467-8113-0
  6.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세계사교과서2/완결: 21세기, 희망의 미래 만들기》휴머니스트(2005) 46쪽 ISBN 89-5862-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