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유럽의 옛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독일어: Österreich-Ungarn Monarchie 외스터라이히-웅가른 모나르히[*], 헝가리어: Osztrák-Magyar Monarchia 오스트라크-머저르 모너르히어[*])은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중부 유럽에 존재했던 입헌군주제 국가이자 열강 중 하나였다.[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렸으며, 1867년대타협으로 형성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함으로 인하여 해체되었다.

Wappen Österreich-Ungarn 1916 (Klein).pn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스터라이히-웅가른 군주국
오스트라크-머저르 군주국
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
Osztrák-Magyar Monarchia

1867년 ~ 1918년
문장
문장
표어Indivisibiliter ac Inseparabiliter
(라틴어: 갈라질 수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다.)
국가하느님 황제를 지켜주소서
(Gott erhalte den Kaiser)
Austro-Hungarian Monarchy (1914).svg
수도 북위 48° 12′ 동경 16° 21′  / 북위 48.200° 동경 16.350°  / 48.200; 16.350
정치
정부 형태입헌군주제, 동군연합체
카이저프란츠 요제프 1세 (1848~1916)
카를 1세 (1916~1918)
역사
 • 성립
 • 해체
 • 소멸
1867년 5월 29일
1918년 10월 31일
1919년 9월 10일
지리
1914년 면적676,615 km2
인문
공용어독일어, 헝가리어
인구
1914년 어림52,800,000명
경제
통화굴덴 (1867~1892)
크로네 (1892~1918)
이전 국가
다음 국가
오스트리아 제국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여파로 1867년 3월 30일에 맺어진 아우스글라이히로 형성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왕국 양국간의 동군연합이었고 1867년의 재편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은 제국 내에서 동등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양국의 외교부와 국방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명의로 존재하였으나, 이를 제외한 나머지 정부 부처들은 각국에 개별적으로 존재하였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당시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이자 다민족 국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유럽에서 러시아 제국 다음으로 큰 나라였고[2], 세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였으며, 세계에서 4번째로 기계 산업의 규모가 큰 나라였다[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동맹국이었으며, 1918년 패전하여 분할되었다. 헝가리 왕국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제국을 계승한 국가로 여겨졌고, 슬라브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유고슬라비아 왕국,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독립해 나갔으며, 일부는 폴란드 제2공화국루마니아 왕국으로 흡수되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인종적으로, 언어적으로, 종교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집단들이 모여 사는 국가였다. 제국의 주요 민족은 독일인헝가리인이었으나, 그 외의 12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형성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양국 사이에서 맺어진 협약인 대타협(독일어: Ausgleich 아우스글라이히[*], 헝가리어: Kiegyezés 키에제제시[*])은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권력이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으로 실추되고 1866년 프로이센 왕국에게 독일 연방의 맹주 자리를 빼앗기고 점차 제국 내에서의 위상도 떨어졌던 시대적 배경 하에 체결되었다. 대타협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으로 재편되었으며, 헝가리 왕국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잃어버렸던 자주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인 변화의 발생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가 헝가리인들에게 만족스럽지 못하였고,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의 국민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점점 세력을 얻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인들의 오스트리아 당국의 통치에 대한 불만은 1848년에서 1849년까지 전개된 헝가리 혁명으로 나타났고 오스트리아 당국이 이를 탄압함으로써 고조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에서의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대한 반발은 표출되지 않았을 뿐이지 계속하여 제기되어 왔었다.

1850년대 후반, 헝가리 혁명을 지지하였던 많은 수의 헝가리인들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1713년 국사원칙하에서 헝가리 왕국이 완전한 자치를 할 수 있는 한 외교권과 국방권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이 공통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는 헝가리와 제국의 통치를 양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새로운 외교부 장관인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는 교착상태에 빠진 헝가리인들과의 협상을 종결하고 싶어했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데악 페렌츠가 이끄는 헝가리인 귀족들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1867년 3월 20일, 헝가리 혁명으로 사라졌다 페스트에 재설립된 헝기리 의회는 제국을 재편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을 3월 30일까지 통과되게 하기 위하여 의논에 들어갔다. 그러나 헝가리의 지도자들은 같은 해 6월 8일에 새로운 법률이 헝가리 내에서 통과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성 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의 국왕으로써 즉위해야 한다고 통보받있다. 7월 28일, 헝가리의 왕이 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공식적으로 이중제국을 탄생시킬 새로운 법률을 승인하고 공표하였다.

국명편집

제국의 명칭은 짧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독일어: 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 외스터라이히쉬-웅가리쉬 모나르히[*],헝가리어: Osztrák–Magyar Monarchia 오스트라크-머저르 모너르히어[*])이었고, 정식적인 명칭은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독일어: 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 und die Länder der heiligen ungarischen Stephanskrone 디 임 라이히스라트 페어트레테넨 쾨니크라이헤 운트 렌더 운트 디 렌더 데어 하일리겐 웅가리셴 슈테판스크로네[*], 헝가리어: A birodalmi tanácsban képviselt királyságok és országok és 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이었다. 국제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가장 많이 통용되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k. u. k라는 이름 역시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는 제국이자 왕국이라는 뜻이다. (독일어: Kaiserlich und Königlich 카이저이히 운트 쾨니그리히[*])

제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완전한 명칭은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었다.

다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통용되었던 언어들로 제국의 명칭을 표기한 목록이다.

구조편집

 
1905년 촬영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모습

대타협(독일어: Ausgleich 아우스글라이히[*], 헝가리어: Kiegyezés 키에제제시[*])으로 인하여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 제국("제국 의회에 대표된 영토들", 시스라이타니아)과 헝가리 왕국("성 이슈트반 왕관령", 트란스라이타니아) 양국간의 연방국으로 변하였다. 양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 왕국의 국왕으로써 공통의 군주를 섬겼다. 국제적인 외교와 국방은 양국간의 협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양국은 관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시스라이타니아 내에 존재하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트란스라이타니아 내에 존재하던 크로아티아와 같은 지역들은 자치 지구로써 자율적인 통치가 가능하였고, 개별적인 독특한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문서와,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 문서 참조.)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왕국간의 차이가 심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 공통의 시민권은 없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민들은 오스트리아 시민권자이거나 헝가리 시민권자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왕국은 개별적인 여권을 발급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통 여권 역시 없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권도 헝가리 왕국의 여권도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크로아티아어프랑스어로 작성된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자체적인 여권을 발급했고, 여권에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달마티아 왕국국장이 그려져있었다.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은 또한 귀화와 시민권에 관한 행정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모두 관할하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에서 어떤 여권을 사용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헝가리 왕국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탄생한 이후에도 헝가리 왕국은 항상 별도의 의회를 유지했다. 헝가리 왕국의 행정부와 정부는 1848년 헝가리 혁명 전까지 대부분 오스트리아 제국의 정부 구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헝가리 중앙 정부는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로부터 잘 분리되어 있었다. 프레스부르크에 있었고 이후 부다페스트로 이동한 헝가리 중역 위원회와 에 있는 헝가리 왕실 위원회가 헝가리 왕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헝가리 정부와 헝가리 의회는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폐쇄되었고, 1867년아우스글라이히 이후에 회복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왕국이 공통의 통화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왕국은 국가 재정을 각자 독립적으로 운용하였다. 1527년 오스트리아와의 동군연합이 시작된 이래로부터 헝가리 왕국의 정부는 오스트리아의 정부와는 분리되었고 그 결과 독립적인 재정 및 자율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헝가리 정부의 예산은 오스트리아 정부의 예산과 통합되었고, 헝가리는 1867년대타협 이후에 이르러서야 예전과 같이 독립적인 예산을 확보했다. 1527년부터 1851년까지 헝가리 왕국합스부르크 제국의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세관을 통제하였다. 1867년 이후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관세 동맹 협정이 맺어졌고 매 10년마다의 재협상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은 서로 독립적으로 외국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은 이중제국의 사실상의 수도 역할을 했다.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은 전체 인구의 약 57%을 차지하였고 트란스라이타니아 지역에 비해 경제 자원의 비중이 더 컸다.

정부편집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정부는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다:[4]

  1. 공동 외교부, 국방부, 공동 정책과 육•해군 예산을 담당하였던 합동 금융 정책부
  2. 오스트리아 (시스라이타니아) 정부 (제국 회의에 대표된 영토들)
  3. 헝가리 (트란스라이타니아) 정부 (성 이슈트반 왕관령)

공동 정부편집

각료위원회 (독일어: Ministerrat für Gemeinsame Angelegenheiten 미니슈테라트 퓔 게마인자메 앙겔레겐하이텐[*])가 이끄는 공동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통수권이 있었으며, 외교 정책과 관세 동맹에 대한 권한도 있었다. 공동 정부는 3개의 제국과 왕국 합동 부처로 구성되었다.

  • 제국과 왕국 내무부 및 외교부
  • 제국과 왕국 전쟁부
  • 오직 다른 두 부처의 재정을 담당하는 제국과 왕국 재무부

상기에 언급한 3개 부처의 장관 외에 헝가리의 총리, 시스라이타니아의 총리 및 각 지역의 대공들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도 각료위원회에 포함되었다. 이외에 총참모장도 주로 참석했다. 각료위원회의 회의에는 황제가 참석한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 내무부 및 외교부 장관이 의장을 맡았다. 이 각료위원회 외에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의회는 각각 60명의 의원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선출했고, 이들은 각각 따로 만나 양국 정부 공통의 행정 영향력이 있는 각료회의의 지출에 대해 투표했다. 그러나, 장관들은 궁극적으로 외교와 군사 정책의 문제에 있어서 최종 결정권을 가진 황제에게만 상응했다.

공동 부처와 양 부처 간의 중첩된 책임으로 인하여 마찰과 비효율성이 초래되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육군과 해군이 부처의 중첩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공동 정부가 전체적인 군사적 방향과 큰 틀을 결정했지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부가 각각 모집과 보급, 훈련을 담당했다. 각 정부는 공통적인 정부에 대하여 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은 자국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공동 정부의 활동을 방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867년 이후 반세기 동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은 공유된 외부 관세 협정과 공동 재정에 대한 각 정부의 재정 기여에 대한 반복적인 논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1867년의 아우스글라이히에 의해 발생하였는데, 이 대타협으로 공동 예산 중 70% 오스트리아에, 30%는 헝가리에게 할당되었고 이렇게 정해진 예산 분할안은 10년마다 재협상을 통하여 그 분할 비율이 변경되었다. 협정이 갱신될 때마다 정치적인 혼란이 있었다. 1907년, 헝가리인의 예산 점유율은 36.4%까지 상승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은 장기화된 구조적 위기로 1900년대 초에 절정에 달했다. 1900년대 초 헝가리 군부에서 어떤 언어를 지휘 체계의 언어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으로 구조적인 위기가 촉발되었고, 1906년 4월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민족주의 연정이 집권하게 되면서 문제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공동 협정의 갱신은 1907년 10월과 1917년 11월에 있었으나, 1917년의 협상은 이중제국이 1차 대전에서 패전하여 해체되면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행정 구역편집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였던 부분을 시스라이타니아(독일어: Cisleithanien 치스라이타니엔[*]) 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의 대부분이 라이타 강(독일어: Leitha 라이타[*], 헝가리어: Lajta 러이터[*]) 안쪽(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본토 외에도 여러 영토로 구성되었는데, 1915년 이전에는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을 부르는 공식 명칭이 없었으나, 1915년 이후로는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이란 공식 명칭을 사용되었다. 제국 회의(독일어: Reichsrat 라이히스라트[*])는 시스라이타니아의 의회 역할을 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였던 부분 외에 헝가리 왕국이 지배하였던 영토를 트란스라이타니아(독일어: Transleithanien 트란스라이타니엔[*])라고 부르는데 트란스라이타니아도 헝가리 왕국 외의 영토들이 많았고 공식적으로는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 불렸다. 여기서 성 이슈트반은 헝가리 왕국의 첫 기독교도 왕이자 성인으로 추대받은 성 이슈트반 대왕(헝가리어: Szent István király 센트 이슈트반 키라이[*])을 말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

행정구역도 및 구성국 목록편집

시스라이타니아의 구성국
번호 국가 수도
1 보헤미아 왕국

독일어: 뵈멘 왕국 (Königreich Böhmen)

프라하
2 부코비나 공국

독일어: 부코비나 공국 (Herzogtum Bukowina)

체르니우치
3 케른텐 공국

독일어: 케른텐 공국 (Herzogtum Kärnten)

클라겐푸르트
4 크라인 공국

독일어: 크라인 공국 (Herzogtum Krain)

류블라냐
5 달마티아 왕국

독일어: 달마티엔 왕국 (Königreich Dalmatien)

자다르
6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독일어: 갈리치엔 운트 로도메리엔 왕국 (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

리비우
6-1 크라쿠프 대공국

독일어: 크라카우 대공국 (Großherzogtum Krakau)

크라쿠프
7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독일어: 외스터라이히 연안 지대 (Österreichisches Küstenland)

트리에스테
7-1 트리에스테 제국직할 도시

독일어: 트리에스트 제국직할 도시 (Reichsunmittelbare Stadt Triest)

트리에스테
7-2 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

독일어: 괴르츠 운트 그라디스카 후백국 (Gefürstete Grafschaft Görz und Gradisca)

고리치아
7-3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독일어: 이스트리엔 변경백국 (Markgrafschaft Istrien)

포레치
8 하오스트리아 대공국

독일어: 니더외스터라이히 대공국 (Erzherzogtum Niederösterreich)

9 모라바 변경백국

독일어: 메렌 변경백국 (Markgrafschaft Mähren)

브르노
10 잘츠부르크 공국

독일어: 잘츠부르크 공국 (Herzogtum Salzburg)

잘츠부르크
11 상실레시아-하실레시아 공국

독일어: 상실레시아-하실레시아 공국 (Herzogtum Ober- und Niederschlesien)

오파바
12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독일어: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Herzogtum Steiermark)

그라츠
13 티롤 후백국

독일어: 티롤 후백국 (Gefürstete Grafschaft Tirol)

인스부르크
14 상오스트리아 대공국

독일어: 오버외스터라이히 대공국 (Erzherzogtum Oberösterreich)

린츠
15 포어아를베르크 주

독일어: 포어아를베르크 주 (Land Vorarlberg)

브레겐츠
트란스라이타니아의 구성국
번호 국가 수도
16 헝가리 왕국

헝가리어: 머저르 왕국 (Magyar Királyság)

부다페스트
17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헝가리어: 호르바트-슬라본 왕국 (Horvát-Szlavón Királyság)

자그레브
18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독일어: 보스니엔 운트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Kondominium Bosnien und Herzegowina)

헝가리어: 보스니아 에스 헤르체고비너이 공동통치령 (Bosznia és Hercegovinai Condominium)

사라예보

역대 황제편집

군사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는 근대화에 반대하는 테첸의 공작인 알브레흐트 대공(1817–1895)의 지휘를 받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 체제는 양국에서 모두 유사했으며, 1868년 이후 시민들의 무기 보유의 보편적, 개인적 의무의 원칙에 따라 이어졌다. 그 군대는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와 헝가리 혼베드와 같은 특수 부대와, 별도의 국가 기관으로 구성된 연합군, 그리고 국민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공통군은 합동군사부 장관 직속이었고, 특수군은 각 국방부 직속이었다. 육군의 연간 모집인수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의회가 의결한 군사 법안에 의해 결정되었고, 전체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인구를 기준으로 결정되었다. 1905년에는 103,100명에 달했고, 오스트리아는 59,211명을, 헝가리는 43,889명을 징병하였다. 그 외에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에는 연간 10,000명이, 헝가리 혼베드에는 12,500명이 배치되었다. 복무 기간은 2년(기병 3년), 예비군이 7년 또는 8년, 란트베어가 2년이었다. 현역 군대에 징집되지 않은 병사들의 경우, 같은 기간 동안 다양한 특별 예비군에서 복무했다.

공통의 전쟁부 장관은 오스트리아 랜드베어와 헝가리 혼베드를 제외한 모든 군정의 수반으로서, 두 국가의 국방부에 헌정되었다. 그러나 군대의 최고 지휘권은 명목상 전군에 대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군주에게 주어졌다. 실제로 황제의 조카인 알브레흐트 대공은 그의 수석 군사 고문이었고 정책 결정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주로 해안 방어군이었으며, 다뉴브강의 정찰 소함대도 포함되어 있었고, 전쟁부 해군성에 의해 관리되었다.

징병제를 채택하여, 남자들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병력의 90%가 손실을 입었으며(이 중 대부분이 포로), 이는 참전국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 120만 명이 전사하였고, 36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문화편집

오스트리아는 19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며 오랜 세월 동안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비스마르크소독일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통일독일제국을 수립함에 따라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 자리를 독일 제국에게 내줬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어 여러 나라로 분열됨에 따라 제국의 문화적 유산 역시 국경에 따라 흩어지게 되었다. 기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문화'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것들이 각국의 독립된 문화로 분리되어 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 평가되어 있다.[5]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세기 당시 유럽의 주요국가(유럽 대륙에서 면적은 2위, 인구는 3위)이자 열강으로서 1867년 ~1918년 존속하면서 수많은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철학편집

이 시기에 활동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사상가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비트겐슈타인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을 발전시킴으로써 후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드문트 후설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신칸트학파에 대항하여 독일-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프란츠 브렌타노도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경제학편집

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카를 멩거,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프리드리히 폰 비저가 활동했다.

건축학편집

건축가 오토 바그너가 대표적이다. 그는 유럽 근대 건축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음악편집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활동하였다.

미술편집

'입맞춤' 등이 대표작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 나라 출신으로서, 빈 아르누보 운동을 이끌었다.

문학편집

프란츠 카프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 출신이다.

과학편집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인 란트슈타이너에 의해 ABO식 혈액형과 Rh인자가 발견되었다. 그는 1930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민족 관계편집

민족 분포
민족 인구 비율
독일인
헝가리인
체코인
폴란드인
루테니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이탈리아인
24%
20%
13%
10%
8%
6%
5%
4%
4%
3%
3%

체코인 (보헤미아, 모라바,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의 다수 민족) · 폴란드인 · 우크라이나인(갈리치아), 슬로베니아인(카르니올라, 카린티아, 스티리아 남부),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이스트라의 슬로베니아인은 각각 시스라이타니아의 정치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트란스라이타니아에서의 헝가리인(머저르인) 지배는 트란실바니아바나트 동부의 루마니아인, 오늘날의 슬로바키아 영토의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과 달마티아 왕국(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영토)·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보이보디나크로아티아인세르비아인의 도전을 받았다.

루마니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은 또 새로 세워진 독립국 루마니아(1859년-1878년)와 세르비아의 동족들과의 합병을 원하였다.

종교편집

국교는 로마 가톨릭이었다.

종교 전체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로마 가톨릭 76.6% 90.9% 61.8% 22.9%
개신교 8.9% 2.1% 19.0% 0%
동방정교회 8.7% 2.3% 14.3% 43.5%
유대교 4.4% 4.7% 4.9% 0.6%
이슬람교 1.3% 없음 없음 32.7%

국기 및 국장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기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를 사용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를 국기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부터이며,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해군기는 패턴이 현재의 국기와 같으나 가운데에 문장이 들어있는 기를 사용하였다.

국기편집

황기편집

1915년 이전편집

1915년 이후편집

군기편집

장군 및 제독의 기편집

장군의 기편집

제독의 기편집

국장편집

1915년 이전편집

1915년 이후편집

육해군 휘장편집

대외 관계편집

대한 관계편집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기 전까지의 조선은 서양과의 수교를 강경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1876년에 맺어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서양 열강들과 수교하게 되었다. 1892년 6월 23일에는 오스트리아와도 조오수호통상조약(朝奧修好通商條約)을 맺으면서 양국간의 정식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다.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민영익이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1900년 6월 이진범이 참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일본 제국에 빼앗기면서 양국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대 독일 관계편집

독일(당시 프로이센)과는 같은 민족이지만 경쟁 관계였다. 그래서 프로이센과 전쟁을 했지만 지고 말았고, 1914년에 전쟁을 준비하던 독일과 삼국 동맹 (1882년)을 맺으며 관계가 회복됐다.

대 러시아 관계편집

러시아와의 관계는 양호하여 1848년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에 원군을 요청하여 헝가리군을 진압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1854년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의 기대와 달리 비우호적이었으며, 항구를 찾아 발칸 반도로 남하하려는 오스트리아와 범슬라브주의를 기치로 든 러시아는 점차 대립하게 된다.

대 루마니아 관계편집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국에 가담하여 한때 전 국토가 동맹국에 유린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연합국이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얻어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McCarthy, Justin (1880). 《A History of Our Own Times, from 1880 to the Diamond Jubilee》. Harper & Brothers. 475-476쪽. 
  2. Headlam, James Wycliffe (1911). “Austria-Hungary”. 《위키문헌》.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12.02에 확인함. 
  3. Schultz, Max-Stephan (1996). 《Engineering and Economic Growth: The Development of Austria-Hungary's Machine-Building Industry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Peter Lang. 226쪽. 
  4. Kann, A History of the Habsburg Empire: 1526–1918 (1974)
  5. 오스트리아는 19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며~: Wiliam M. Johnston 지음,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신사와 문화사의 재발견》 (원제: The Austrian Mind: An Intellectual and Social History, 1848-1938 ), 글항아리, 2008, ISBN 978-89-546-0531-1 6쪽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