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군영

오군영(五軍營)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설치된 조선의 수도와 그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조직된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의 5개 군영(軍營)을 말한다. 1881년(고종 18년) 신식 군대로 개편되면서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으로 합쳐졌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수도를 방어하는 군영이며, 총융청, 수어청은 한양의 외곽 지역을 방어했다.
개설 편집
국초의 5위가 유명무실해지고, 그 대신 임진왜란 중에 훈련도감을 설치해서 군사를 양성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3수(三手) 병을 훈련하였다. 이는 중국의 절강병법의 권위자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따른 것이었다. 이 훈련도감을 위시해서 5군영이 숙종 때까지 점차로 설치되어 이후 조선군의 중심 부대가 되었다.
훈련도감 편집
훈련도감 또는 훈국(訓局)은 5군영 중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 선조 때 명나라의 유명한 전략가인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바탕을 두어 임진왜란 이후 무용지물이 된 5위(五衛) 대신 창설되었다. 1593년 유성룡이 주장하여 처음에는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다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점차 상설기구가 되어 갔고 1746년(영조 22)에 상설기구가 되었다. 화포, 총기를 사용하는 포수(砲手), 활을 사용하는 사수(射手), 칼과 창을 사용하는 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운용하였다. 병사들은 쌀 4~9말의 급료를 받으며 한양 인근에 주거하는 장기복무 장병들이었다. 처음에는 1,000여명의 규모였던 것이 병자호란 직전에는 5,000여명으로 증가되었다. 훈련도감은 1882년의 임오군란으로 인해 폐지되었다. 현재의 부사관이다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어영청 편집
총융청 편집
수어청 편집
금위영 편집
같이 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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