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도감

훈련도감(訓鍊都監)은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중 임금의 수도 환궁 직후 명나라 전략가 척계광의 저서인 기효신서를 참고로 창설된 수도방위군으로, 지금의 육군수도방위사령부 격이다. 병농분리의 상설 정규군으로서 5군영 중 가장 먼저 창설돼 조선 중후기 국방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삼수군, 속오군 혹은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이 군사 부대의 군량미 창고로는 남창(南倉)이 있었다. 아울러 훈련도감어영청, 금위영과 함께 지금의 대한민국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한다.

역사편집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전통적 진관체제(鎭管體制)가 무너지자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 류성룡의 건의로 1593년(선조 26년) 임시 설치됐다.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저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중 〈절강병법(浙江兵法)〉에 의거해 만들어진 훈련도감은 예하 군의 자체 훈련은 물론 기민(飢民) 구제 등 대민 지원 임무도 맡았다가 이듬해부터 수도 방위·국왕 호위 임무까지 역할이 확대돼 종래 오위를 대체했다. 이후 5군영 체제가 갖춰지자 어영청·금위영(禁衛營)과 함께 삼군문(三軍門)으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1593년 음력 11월 군사를 좌영(左營)·우영(右營)으로 나눠 이듬해 음력 2월 기효신서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른 군사 조직 체계를 갖췄다.[1] 화포와 총기(조총)를 사용하는 포수(砲手), 활을 사용하는 사수(射手), 칼과 창을 사용하는 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 : 삼수군)으로 짜였고 그 수가 약 1000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래 5위는 양인 개병제도(皆兵制, 일종의 징병제)에 따라 병력을 충당했던데 반해 삼수군은 1개월에 쌀 6말의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으로 모집돼 한양 인근에 주둔했다. 천민들도 지원해 양인들과 함께 운영됐고(속오군) 공의 여부에 따라서는 면천도 가능했다.[2]

1천여 명 규모의 임시 기구였던 훈련도감은 왜란이 끝난 이후 점차 존재 명분을 잃고 유명무실해졌다. 신분상승을 꿈꾸며 들어온 천민 출신들도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라는 왕의 교지가 내려졌다. 규모, 예산 모두 감액 일로였던 훈련도감은 후금이 성장하면서 다시 힘을 얻었고, 소속 포수만 병자호란 직전까지 5천여 명으로 증가됐다.[2] 조선은 호란 직전까지 친명배금정책을, 그리고 호란 후에는 북벌론이 힘을 얻으면서 이를 뒷받침할 군사력 배양의 일환으로 수어청의 창설, 어영청의 증강, 훈련도감 예산 증액 등에 힘썼다. 특히 1625년(인조 3년) 호패법의 강력한 시행은 훈련도감을 증강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3]

양란을 거치면서 상설 기구가 된 훈련도감은 막대한 재정 투입 때문에 조선 현종 즉위 때 감축 논의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10년 뒤 남인의 영수인 허목에 의해 훈련도감 내 훈련별대(-別隊)란 특수 조직으로 오히려 확대됐으며[3][4] 1746년(영조 22년)에 마침내 <속대전>에 의거한 법정 기구가 됐다.[1]

1881년(고종 18년) 군제 개혁 때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조직되자 훈련도감은 무위영에 합쳐져 해체됐다. 그런데 이듬해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에 의해 잠시 부활되나 청나라에 의해 난이 진압되고 대원군이 중국으로 연행되면서 이듬해 10월 완전 폐지됐다.

청사편집

  • 본영(本營) : 훈련도감 청사는 현재 서울특별시 신문로1가 58-1번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경희궁흥화문 밖에 있던 이 청사를 훈국신영(訓局新營)이라고 하였다. 197칸[間] 규모.[5]
  • 북영(北營) : 창덕궁 서쪽 공북문(拱北門) 밖에 있었다. 본영보다 큰 235칸 규모.
  • 군향색고(軍餉色庫) : 북영 남족에 있었던 군수 창고이다.
  • 북일영(北一營) : 북영 남쪽에 있었다. 15칸 규모.
  • 북사영(北四營) : 경희궁 밖에 있었다. 5칸 규모.
  • 남영(南營) :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밖 동쪽에 있었다. 32칸 규모.
  • 서별영(西別營) : 마포(麻浦)에 있었다.
  • 별영(別營) : 마포에 있었다.
  • 동별영(東別營) : 종묘 동남쪽에 있었다. 장용영(壯勇營) 군영으로 사용된다.
  • 양향청(糧餉廳) : 남부 훈도방(薰陶坊)에 있었다. 1666년(현종 7년)에 호조(戶曹) 소속으로 이관되었다.
  • 하도감(下都監) : 훈련원 동쪽에 있었다. 390칸 규모.
  • 광지영(廣智營) : 창경궁 북쪽에 있었다. 115칸 규모.
  • 직방(直房) : 창덕궁 돈화문 밖에 16칸, 금호문 밖에 14칸 반, 경희궁 흥화문 밖에 8칸, 경모궁 근처에 8칸 규모로 있었다.

관제편집

정조 시대의 훈련도감 관직 체계는 아래와 같다. 시기에 따라 일부 정원에 변동이 있었다.

  • 정1품 도제조 1명 : 다른 관원이 겸직
  • 정2품 제조 2명 : 호조판사병조판서가 겸직
  • 종2품 대장 1명 : 등단 장신(將臣) (훈련도감 최고 지휘관)
  • 종2품 중군 1명 : 아장(亞將) (훈련도감 참모장 또는 부지휘관 역할)
  • 정3품 별장 2명 : 좌별장, 우별장
  • 정3품 천총 2명 : 좌천총, 우천총
  • 정3품 국별장 3명 : 절제사, 첨절제사, 방어장, 당상 선전관 역임자를 추천하여 임명 (임기를 마치면 영전 또는 승진)
  • 종4품 파총 6명
  • 종6품 종사관 6명 : 1명은 문관(문과 급제 출신 관원), 2명은 음관, 3명은 호조와 병조의 낭관, 훈련도감 파총 겸직
  • 종9품 초관 34명 : 5명은 선전관 후보 추천자, 2명은 평안도 출신, 나머지는 경력을 갖춘 전직 관원.
  • 지구관(知彀官) 10명
  • 기패관(旗牌官) 20명 : 군졸 중에서 시험으로 선발 임명
  • 별무사(別武士) 68명 : 10명은 중군, 20명은 좌우별장, 3명은 좌우천총에게 분속. 군졸 중에서 시험으로 선발 임명
  • 군관(軍官) 17명 : 5명은 도제조에 속함
  • 권무군관(勸武軍官) 50명
  • 국출신(局出身) 150명 : 무예별감 출신 30명을 할당하고 여기에 20명을 더해 50명으로 장용청이라 한다.

각주편집

  1. 훈련도감 설치 및 운영의 동아시아적 특성 장서각 논문 p.p 33 김종수 著 -2015년 4월 장서각 논문집
  2. 옛사람에게 전쟁을 묻다 '2.훈련도감 꼭 가고 싶습니다' 부분 -도현신 지음, 타임스퀘어 2009년 출판 ISBN 9788993413151
  3. 영조 대의 양역정책과 균역법--장서각조선사 강의2 정연식著,한국학중앙연구원 2015년 1월 발행 ISBN 9791186178096
  4. 훈련도감 소속 정규군 1만 3,700명, 보인(보좌) 수 4만 1,100명
  5. 훈련도감 폐지 후에 대한제국무관학교 건물로 활용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