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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도(金良圖, ? ~ 670년)는 신라 중기의 귀족ㆍ장군ㆍ관인이다. 김유신(金庾信)을 따라 백제고구려를 칠 때 참전해 공을 세웠다. 관등은 파진찬(波珍湌).

백제를 쳐서 수도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킨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년)에 (唐)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옛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 있던 정림사의 석탑 표면에 새기게 한 『당평제비』 비문에는 "우무위중랑장(右武衛中郞將) 김양도(金良圖)"로 기재되어 있다. 문무왕(文武王) 원년(661년) 2월에는 사비성을 탈환하려는 백제 부흥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당군을 구원하기 위해 편성된 원군의 대당장군(大幢將軍)이 된 이찬(伊湌) 김품일(金品日)의 부장으로서 왕자 문왕(文王)과 함께 참전하였다. 문무왕 2년(662년)에는 김유신을 따라, 평양(平壤)을 포위한 소정방의 당군에게 군량을 가져다주기 위한 임무를 띠고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파견되었다. 문무왕 8년(668년) 6월에 고구려 공격을 위해 편성된 신라군 지휘부의 38총관 가운데 대당총관(大幢總官)으로서 신라군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해 고구려를 멸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둔 것을 계기로 현지에 대한 직접지배를 시도하는 한편, 신라왕에게도 계림주대도독이라는 작위를 주는 등 신라까지 당의 지배하에 넣으려 했다. 신라는 이에 맞서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며 옛 백제 땅에 주둔해 있던 당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나당전쟁). 당이 이를 문제삼자 해명을 위해 문무왕 9년(669년)에 각간(角干) 김흠순(金欽純)과 함께 당나라에 파견되었으나 고종(高宗)에 의해 억류되어, 흠순과 함께 장안(長安)의 감옥에 갇혔다. 이듬해(670년) 당 조정은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했으나 양도는 그대로 억류되었고, 그곳에서 옥사했다.

당대에 문장에 뛰어났다고 알려졌으며, 생애에 모두 여섯 번 당에 파견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어려서 귀신의 장난으로 온몸이 마비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병을 앓았다가 승려 밀본(密本)의 도움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었고, 그 일을 계기로 불교를 깊이 믿게 되어 흥륜사(興輪寺) 금당의 미륵존상과 좌우 보살의 진흙상을 빚어 모시고 그 벽에는 으로 불화(佛畵)를 그렸으며, 두 딸인 화보(花寶)ㆍ연보(蓮寶)를 불문에 귀의시키고 흥륜사의 종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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