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야나가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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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야나가라 제국(칸나다어: ವಿಜಯನಗರ ಸಾಮ್ರಾಜ್ಯ, 텔루구어: విజయనగర సామ్రాజ్యము)은 데칸 고원비자야나가르에 도읍하여 남인도 지역에 영향력을 떨쳤던 드라비다힌두 제국이다. 1336년 하리하라 1세와 그의 동생 부카 등 다섯 형제[2]가 창건하였다.[3] 이 제국은 북인도 지역에서 시작된 12-13세기 이슬람 세력의 인도 침공에 대한 남부 힌두 세력의 반발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생겨났으며, 끊임없이 주변의 이슬람계 왕조들과 싸우며 17세기까지 세력권을 지켰다.[4] 그러나 1565년탈리코타 전투에서 데칸 지역의 술탄국들에 군사적으로 대패를 겪고 난 뒤에 결정적으로 기세가 기울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한 세기를 버티지 못하고 1646년에 멸망하였다. 지역의 사료와 저술 및 중세 유럽 여행자 도밍구 파에스, 페르낭 누네스, 니콜로 데 콘티 등이 남긴 저작은 이 제국의 역사에 중요한 참조 자료가 된다.[5] 고도(古都) 비자야나가르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면서 이 제국이 누렸던 부와 권력이 차차 드러나고 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
ವಿಜಯನಗರ ಸಾಮ್ರಾಜ್ಯ
విజయనగర సామ్రాజ్యము
1336년 ~ 1646년
국기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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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비자야나가르
정치
정부 형태전제군주제
황제
1336년 ~ 1356년
1642년 ~ 1646년

하리하라 1세(초대)
스리랑가 3세(말대)
왕조
1336년 ~ 1485년
1485년 ~ 1505년
1505년 ~ 1570년
1570년 ~ 1646년

상가마 왕조
살루바 왕조
툴루바 왕조
아라비두 왕조
역사
 • 설립

 • 멸망
1336년

1646년
지리
위치남인도
인문
통용어칸나다어
텔루구어
산스크리트어[1]
민족칸나다인
텔루구인
타밀인
말라얄리인

경제
통화바라하
종교
국교힌두교
기타 종교자이나교, 이슬람교
주신비슈누, 시바, 바라하
기타
이전 국가
다음 국가
호이살라 제국
카카티야 왕국
판디아 왕국
레디 왕국
마바르 술탄국
마이소르 왕국
케랄디 나야카 왕국
탄자부르 나야카 왕국
마두라이 나야카 왕국
치트라두르가 나야카 왕국
비자푸르 술탄국
쿠트부 샤히 왕국
진지 나야카 왕국
현재 국가인도 인도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유산들 중에는 남인도에 퍼져있는 많은 기념비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함피의 비이다. 인도 남부와 중부에서 다른 사원 건축 전통이 비자야나가라 양식으로 결합되었으며, 이 양식은 힌두 사원 건축의 건축 혁신에 영감을 주었다 . 효율적인 관리와 활발한 해외 무역은 관개를 위한 물 관리 체계와 같은 새로운 기술을 가져왔다. 제국의 후원으로 칸나다어, 텔루구 어, 타밀어 및 산스크리트어 미술과 문학이 새로운 차원에 도달 할 수 있었으며 카르나타카 음악은 이 시기에 확립화되어 현재 형태로 발전하였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남인도 역사에서 힌두교를 크게 장려함으로써 남인도 지역을 통합하였다.

역사편집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학설이 분분하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제국의 창건자인 하리하라 1세와 그의 동생인 부카 1세가 북인도 지방에서 무슬림 군대를 방어하던 호이살라 제국칸나다인 혈통의 군 지휘관이라고 추정하고 있다.[6][7][8][9] 다만 어떤 역사가들은 이들이 텔루구인들로 호이살라 제국의 쇠퇴기에 제국의 북부 지방을 장악하였던 카카티야 왕국의 영주라고 설명하기도 한다.[10] 이들의 본출에는 상관없이, 학계는 스링게리에 거주하던 성자 비드나란야(Vidnaranya)가 이들을 지지해주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하리하라 1세와 그의 형제들이 남인도의 무슬림 군대를 몰아낼 수 있었다고 여기고 있다.[11][12] 이 당시에 남인도를 여행하였던 방랑객들의 견문록과 최근 비자야나가라 지역에서 출토된 기록들을 통하여, 당시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역사, 요새, 군대, 건축적 성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었다.[13][14]

14세기 초에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발흥하기 이전, 데칸 지방에 존재하던 세부나, 카카티야, 판디아와 같은 힌두계 왕국들은 북인도에서 건너온 무슬림들의 침략을 지속적으로 받아오고 있었다. 이후 1336년에는 현재 마하라슈트라주에 속하는 북부 데칸 지방이 델리 술탄국의 알라우딘 킬리지와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에 의하여 점령당했다.[11][15]

한편 데칸 지방 남부에 존재하던 힌두계 국가인 호이살라의 군 지휘관이었던 신게야-나카야 3세는 1294년에 델리 술탄국의 군대가 세부나 왕국을 점령하자[16][17] 공식적으로 독립을 천명하고 카르나타카주 북동부에 캄필리 왕국을 세웠다.[18] 허나 이 왕국은 전시 기간 동안만 짧게 존속하였으며,[16][18] 말릭 자다 사령관이 이끄는 델리 술탄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당했다.[19] 이후 말릭 자다 장군은 왕의 머리에 짚을 채워 델리로 보냈다. 캄필리 왕국이 멸망당하던 1328년에, 무슬림들은 신을 위하여 거대한 대학살을 저질렀고,[19][20] 이후 8년이 지나서야 이 캄필리 왕국의 잔재에서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태어나게 된다.[17]

제국이 창건된 지 첫 20여 년이 지난후, 하리하라 1세는 퉁가바드라 강 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영역으로 포함시키는 데에 성공하였고, 푸르바파쉬마 사무드라디스사바라(동쪽과 서쪽 해양의 군주)라는 칭호를 획득하였다. 1374년 경, 하리하라 1세의 후계자인 부카 라야 1세는 아르콧과 마두라이의 술탄들을 꺾었고, 서쪽으로는 고아까지, 북쪽으로는 퉁가바드라와 크리슈나 강이 만나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21][22] 제국의 본래 수도는 퉁가바드라 강 북부 제방 유역에 있는 아네곤디 성읍이었는데, 현재 이 곳에는 카르나타카가 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부카 라야 1세의 재위기에 수도를 강 남부에 있는 비자야나가르로 천도하였는데, 이는 북부에서 쳐들어오는 이슬람 군대를 더 방어하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23]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점차 거의 제국에 맞먹을 정도로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하였고, 부카 라야 1세의 2번째 아들인 하리하라 2세는 제국의 영토를 크리슈나 강 외곽으로 확장하였으며 남인도 지역 전체를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 데에 성공하였다.[24] 하리하라 2세의 뒤를 이은 데바 라야 1세는 오디샤에 맞서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이끌었고 지역을 요새화시켜 군력을 증강하였다.[25] 당시 인도를 여행한 이탈리아 여행가는 데바 라야 1세를 당대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라고 묘사하였다.[26] 데바 라야 1세는 1424년에 제위를 양위하였으며,[27]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캘리컷 등의 영주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고 스리랑카를 침공하고 미얀마 지방의 소군주들에 대해 지배권을 확립하였다.[28][29][30]

비자야나가라 북부 지역의 강자였던 바흐마니 술탄국은 1407년에 비자야나가라의 데바 라야 1세와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으로 인하여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바흐마니 술탄국에게 10만 훈, 진주와 코끼리 등의 공물들을 매년 바쳐야만 하였다. 1417년에는 바흐마니 술탄국이 제국을 침공하였고,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결국 바흐마니 술탄국에게 더 많은 공물을 바치고서야 이를 피할 수 있었다. 이같은 침공은 15세기 내내 이어졌고, 바흐마니 술탄국은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체납한 공물을 받아내기 위하여 종종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끊임없이 바흐마니 술탄국이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공격해오자,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이에 맞서기 위하여 군력을 크게 늘렸다. 이에 군 지휘관들이 권세를 얻었고, 그들 중 야심이 가장 많았던 살루바 나라심하가 반란을 일으켜 하리하라 1세가 세운 상가마 왕조에게서부터 제위를 찬탈하여 살루바 왕조를 세웠다. 나라심하는 이와 동시에 북부국경을 방어하여 무슬림들이 혼란스러운 제국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노력하였다.[31] 1505년 경에는 또다른 군사령관인 툴루바 나라사 나야카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살루바 왕조를 몰아내고 툴루바 왕조를 세웠다. 1509년에 툴루바의 아들인 크리슈나 데바 라야가 즉위하였고,[32] 무슬림들과 힌두교도들을 모두 영입하며 군사력을 키우고 내치를 안정화하였다.[33] 이후 몇 십년 동안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부흥하는데에 성공하여 남인도 지방의 통제권을 확고히 하고 북부에서 쳐들어오는 데칸 술탄국의 공격을 막아내었다.[34][35]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크리슈나 데바 라야의 재위기에 최전성기를 맞았다.[36][37] 제국은 칼링가를 비롯하여 데칸 북부와 동부 지방을 새로이 얻어내었고, 남부로도 국경을 확장하고 통치를 안정화하였다.[38] 크리슈나 데바 라야는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많은 건물들과 사원들을 세우고, 수많은 법령들을 반포하였다.[39]

크리슈나 데바 라야의 뒤를 이어 1529년에 아츄타 데바 라야가 즉위하였다. 아츄타 데바 라야가 1542년에 사망한 이후에는 아츄타의 사촌인 사다시바 라야가 알리마 라마 라야의 섭정 아래에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다.[40] 알리마 라마 라야는 크리슈나 데바 라야의 양자이자 상당한 권력가였는데, 제국으로 이주해와 황제의 딸과 결혼한 이후부터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것이다. 한편 사다시바 라야가 친정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가 들자, 알리마는 그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데신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감금하고 대신 통치를 계속하였다. 알리마 라마 라야는 자신이 무슬림 군대에 소속되어 있을 시절 친했던 무슬림 장군들을 크게 채용하며 막강한 권력을 부렸고, 자신을 '세계의 술탄'이라고 불렀다.[41]

알리마 라마 라야가 제국의 권력을 휘어잡고 있을 무렵, 제국 북부의 술탄국들이 연합을 맺어 전쟁을 걸어왔다. 1565년 1월, 이로 인하여 탈리코타 전투가 일어났다.[42] 탈리코타 전투에서 원래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승기를 잡아나가고 있었으나, 2명의 무슬림 장군들이 갑자기 전투 도중 변절하여 술탄국의 편에 서자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곧바로 패배하였다. 전투를 지휘하던 알리마 라마 라야는 현장에서 잡혀 술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즉결 처형당했고, 머리가 잘린 채 짚을 넣어 채워 전시용으로 보관되었다.[43][44] 비자야나가라 군대는 알리마 라마 라야의 시신을 보고 경악하였고, 대부분이 전의를 잃고 항복하였다. 술탄국들의 군대는 비자야나가라의 영토를 휩쓸며 막대한 약탈과 살상을 저질렀고, 이 때 약탈당한 도시 상당수는 다시는 옛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45]

탈리코타 전투에서 알리마 라마 라야가 죽은 이후, 티루말라 데바 라야가 아라비두 왕조를 세우며 새롭게 황위에 올랐다. 그는 수도를 페누콘다로 옮겨 국가의 기틀을 다잡고자 하였으며,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잔존 세력들을 모아 다시 중흥기를 열려 시도하였다.[46] 그러나 티루말라는 1572년에 양위했고, 제국의 영토를 그의 세 아들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1578년에 죽을 때까지 힌두교에 귀의한 삶을 살았다. 아라비두 왕조의 후계자들은 계속하여 무너져가는 제국을 다스렸으나, 결국 1614년에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사실상 무너졌고 1646년 즈음에 비자푸르 술탄국의 지속되는 공격으로 결국 멸망하였다.[47][48][49] 이 시기에 남인도 지역에 있는 마이소르 왕국, 케랄디 나야카 왕국, 마두라이 나야카 왕국, 탄자부르 나야카 왕국, 치트라두르가 왕국 등이 거의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되찾았으며, 이후 인도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50]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사원 유적

정치편집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지도자들은 호이살라, 카카티야 등의 지배 체제를 참고하여 안정적으로 잘 작동하는 행정 체계를 꾸려나갔다. 황제, 신하, 영토, 요새, 부, 군대, 동맹이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정치를 지배하는 7대 주제였으며, 황제는 국가의 최고 권력가였으며 ‘프라다나’라고 불리는 장관들이 옆에서 조언자로 일하였다. 이 장관들 중 최고 서열은 '마하프라다나'라고 불렸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또다른 최고위 관직들 중에서는 ‘라야스와미’라고 하여 현재의 수석 보좌관과 비슷한 역할을 맡았고, 그 외에 황제 직속의 관리들은 ‘아드히카리’라고 칭했다. 모든 고관대작들은 군사적 훈련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으며, 황궁에서 일하는 서기들은 자신들이 쓴 기록들에 녹인 밀랍을 떨어뜨린 후에 황제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로 도장을 찍어 봉인하였다. 상대적으로 하위 행정 조직들에서는 부유한 봉건 영주들, ‘고우다’들이 ‘카라니카스’라고 불리는 지방관들을 보좌하였다. 황궁 행정 조직계는 총 72개의 부들이 존재하였으며, 이 부들에는 미모를 갖춘 여성들이 몇 명씩 반드시 딸려있어 고위급 귀족이나 관리들을 상대하거나 접대하여 행정 체계가 더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이 여성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훈련받아왔거나 전쟁에서 잡혀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라지야’라 불리는 5개의 지방으로 구분되었다. 각각의 라지야들은 ‘단다나카야’라 불리는 부왕들이 부임하여 통치되었으며, 이 부왕들은 대부분이 왕족들인 경우가 흔했다. 이들은 행정적인 문제로 토착민들의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하였다. 라지야는 또 ‘코탐’, ‘나두’라고 불리는 하위 행정 구역들로 구분되며, 이 하위 행정 구역들에서는 보통 세습 봉건 영주들이 자치적으로 지배하며 제국에 공물을 바치는 형태로 권력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켈라디나 마두라이와 같은 지역들은 특별히 황제의 직속관이 직접 다스리는 경우도 있었다.

전쟁터에서는 황제의 군사령관들이 병사들을 이끌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대규모로 전투를 벌이거나 기습을 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고, 대부분의 군사적 행동들은 요새 1개를 공격하거나 점령하여 소규모의 전투를 산발적으로 벌이는 방식이 많았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인도에서 처음으로 외국인들로 구성된 장거리 궁사들을 실전에 배치하여 사용한 국가이다. 비자야나가라 제국군은 크게 2개의 종류로 나뉘었는데, 하나가 황제 친위군이고 나머지 하나는 봉건 영주들의 자치적인 군대이다. 황제의 친위군은 제국이 직접 전역에서 선발하였고, 10만 명이 넘는 보병, 2만 명의 기병, 900여 마리의 전투 코끼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에 봉건 영주들의 군대까지 합하면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총 군세는 110만 명을 넘어갔고, 심지어는 해군까지 자체적으로 운용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군대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징집 활동을 벌였으며, 궁수와 머스켓병들은 튜닉을 입게하였고 보병들은 칼을 차고 다니게 하여 구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방패병들은 워낙 거대한 방패를 들고 다녔기에 그 무게만으로 충분히 버거워 다른 무장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마들과 코끼리들은 완전무장을 갖추었고, 특히 코끼리의 경우에는 엄니에 칼날을 달아 전투에서 최대한 많은 살상을 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다.

비자야나가르 제국은 군국주의적 국가였고, 모든 정치적 기구는 군사적 요구에 종속되어 있었다. 대규모의 상비군이 유지되었으며, 군사 훈련을 위한 정규 군사 학교가 존재하였고, 포병은 외국인 교관에 의해 양성되었다. 경찰 제도는 아주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는데, 범죄자의 체포보다는 범죄 예방에 목적을 두어 민가에 도둑이 들었을 때는 경찰이 책임을 지고 배상해야 했다. 재판은 몇 단계의 법정으로 나누어 진행되었고 최종심은 황제 앞에서 열렸다. 힌두계 제국이었으므로 카스트 제도는 보편적이었고, 브라만 계급은 병역 의무 면제 등의 특권을 보유하고 국가 및 백성들의 자발적 헌금에 의해 생활하였다.[2]

제국의 수도였던 비자야나가르는 물 공급을 전적으로 수도 시스템에 의존했다. 또한 물을 저장하여 쓰기도 하였는데, 이 당시에 만들어진 수도 유적들을 통하여 현재의 고고학자들이 당시의 남인도 지방에서 사용하던 물 펌프 원리를 재구성하고 있기도 하다. 이 때의 기록들과 외국인들의 견문록에는 노예들이 거대한 물 저장소를 건설하였다고 전한다. 황궁과 사원들은 특별한 대접을 받아 도심과는 완전히 별개의 수로, 특히 지하에 묻힌 파이프관으로 만들어진 수로를 따로 사용하였고, 이 물들은 대부분 특별한 예식이나 황궁의 음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잦았다. 다만 공공의 경우에는 이처럼 정교한 수로 시스템이 공급되지 않았고, 현재까지 발굴된 유일한 수로 유적은 우기 기간에 막대한 양의 물들을 저장해 놓았던 저장고들이 전부다. 이 저장고들은 봄이 끝나고 여름이 오면 거의 빠르게 말라버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부유한 자들이나 황실의 일원들의 경우에는 자신들만의 수로를 따로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퉁가바드라 강 근처의 농업 지대에서는 거대한 운하들을 파서 농업용 수로를 따로 만들어 물 문제를 관리하였으며, 이 운하들에는 수문들이 달려있어 물 공급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국가 차원에서 사람들이 우물을 파는 것을 장려하였다.

경제편집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경제는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였다. 건기에는 수수, 솜 등을 주로 길렀으며, 우기 기간에는 쌀, 사탕수수, 밀 등을 주로 재배하였다. 현금 작물로는 코코넛, 아레카속, 베틀후추 등을 주로 키워 팔았다. 특히 솜은 대규모로 생산되는 경우가 많아 제국의 거대한 직물 산업의 원료가 되어주었다. 강황, 후추, 마늘과 같은 향신료들이 말나드 지방에서 주로 자랐으며 무역을 통하여 도시로 공급되었다. 특히 수도 비자야나가르는 상업이 극도로 번성하였으며, 막대한 양의 보석들과 금들이 이 시장을 통하여 오고갔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기본적으로 힌두계 제국이었기에 엄청난 규모의 신전과 사원들을 많이 세웠는데, 이로 인하여 석공, 조각가, 예술가들이 일자리를 얻고 예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에서 토지 소유권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고용된 소작인과 비슷한 신분들이었고, 지주들에게 땅을 빌려 먹고사는 처지였다. 농부들은 농업 외에도 버터와 오일, 등잔 기름들을 만들어 팔아 이윤을 내기도 하였다. 이때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중국과도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여 솜, 향신료, 보석, 준보석, 상아, 코뿔소 뿔, 산호, 향료 등을 팔았다. 이 때 명나라의 환관 정화가 인도를 방문하였는데, 정화는 망갈로어, 바쿠르, 코친, 카나노르, 다르마담 등 비자야나가라 제국에 존재하는 300여 개의 항구들을 순항하며 중국의 제품들을 전파하였다.

상인들이 배를 항구에 정박한 즉시, 관리들이 승선하여 모든 제품들을 측정하였으며 이에 세금을 매겼다. 상인들의 안전은 정부가 직접 보장하였으며, 이 때문에 상업이 번성하여 아랍인, 페르시아인 상인들이 당시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영토였던 항구 도시 캘리컷을 자주 오고갔다. 조선업도 순항하였고, 배수량이 1,000에서 1,200여 톤에 달하는 거대한 배들이 못을 사용하는 대신 밧줄로 묶는 방식을 활용하여 만들어졌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상선들은 홍해의 아덴과 메카, 심지어는 저 멀리 베네치아까지 운행하였으며, 주로 후추, 시나몬, 마늘, 준보석, 진주, 알로에, 도자기 등을 수출하였다. 미얀마 지방에는 솜을 주로 내다팔았으며, 페르시아에는 염료 등을 팔았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주로 구리, 수은, 버밀리온, 산호, 사프란, 벨벳, 장미수, 칼, 금과 은 등을 수입하였다. 페르시아 말들도 수입하여 사용하였고, 중국에서는 비단이, 벵골 지역에서는 설탕이 들여왔다.

인도 동부 해안 지방에서는 무역이 크게 번성하였다. 골콘다 지방에서 쌀, 밀, 담배들이 대규모로 재배되었으며 인디고와 같은 색의 천연 염료들도 직물 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함께 키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칠리파트남은 순도 높은 철 수출의 중심지였으며, 콜루르 지역에서는 다이아몬드 광산이 번성하였다. 직물 업계는 크게 두 가지의 천을 제조하였는데, 하나는 모슬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칼리코였다. 보통 인도네시아 자바나 극동 지역으로 수출하기 위하여 아름답게 색을 입혀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고, 골콘다 지방에서는 순수하게 무늬 없는 직물을 잘 만들었으며 풀리캣 지방에서는 염료를 입힌 직물을 잘 만들었다. 동부 해안 지방의 주 수입품은 가공하지 않은 금속, 도자기, 비단과 사치품 등이었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사원들은 주로 군사적 자금을 대기 위하여 막대한 양의 지주세를 나라에 바쳐야만 하였다. 이 사원들에게 걷는 세금을 ‘스로트리야스’라고 불렀으며, 타밀어로는 ‘조디’라고도 부른다. 그 외에도 제국은 사람들을 강도와 침공에서부터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막대한 양의 세금을 사람들로부터 뜯어갔다. 그 외에도 ‘지바다남’이라고 불리는 세금도 있었는데, 이는 공공지에 가축들을 풀어놓는 대가로 붙는 세금이었다. 유명한 사원들은 방문객들에게 ‘카니케’라 불리는 입장료를 걷었다. 주거세는 ‘일라리’라고 불렸다.

사회편집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당대 사회상에 대하여 가장 잘 알려주는 자료는 외국인들의 견문록이나 비자야나가르 지역에서 발견되는 기록물들이다. 제국에서 카스트 제도는 매우 뿌리깊게 박혀있었으며, 카스트는 세습되어 그들이 소속된 사회 내부에서는 카스트에 맞추어 살아가야만 하였다. 카스트는 크게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이 네 계급으로 나뉘었고, 이 계급들이 또 수많은 단계들로 나뉘어 구분되었다. 각 계층들에는 제국에 의하여 임명된 원로와 장로들이 있어 사람들을 통제하였으며,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독특한 법과 관습들을 만들어 특권층들의 이익을 옹호하였다. 이 때에도 ‘불가촉천민’의 개념이 있었는데, 이 때도 사회의 가장 낮은 카스트에게 속한 고기를 먹는 것은 불결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무슬림들은 카르나타카 지역에 모여살며 자신들만의 사회를 따로 이루어 살았다.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매우 카스트가 고착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만은 예외여서 낮은 카스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군대에 입영하여 공을 세워 큰 관직에 오르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다. 한편 민간에서 브라만들은 단순한 제사 따위나 지내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였는데, 다만 사원에서 재정과 관련된 문제는 브라만들이 아니라 지주나 정치인, 관리들이 맡고 있었기에 재정적으로는 풍요롭지 않았다. 이는 종교적 힘과 부가 분리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브라만들은 거의 사법적, 종교적인 문제에만 관여하는 일종의 명예직으로 변모하였다.

당시 비자야나가라에서는 남편이 죽었을 시 부인이 함께 따라 죽어야 하는 사티 풍습이 만연하였다. 학계에서는 이 풍습을 두고 ‘종교적인 관습’, ‘부부간의 애정’, 혹은 ‘순교’ 등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학설들이 나오고 있다. 다만 이를 두고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여성의 인권이 이전 국가들에 비해 낮았다고 여기면 안되는 것이, 이전 세기에 ‘링가야티즘’이라는 사상이 등장하여 더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불어넣었고 여성 권리를 신장시켰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비자야나가라의 여성들은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금기시되어 왔던 관습 대부분을 뛰어넘을 수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많이 참여하였다. 특히 인도에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행정, 사업, 무역, 예술에도 많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유명한 여성 작가로는 티루말람바 데비, 강가데비 등이 있는데, 이들은 산스크리트어로 많은 아름다운 여성시들을 남겨 주목받았다. 여성들은 사원에서 머물며 아예 예술 활동에 종사하기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데바다시라고 칭한다. 당시 기록에는 여성들이 모여 사는 하렘이나 세라글리오 등도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부유한 남성들은 ‘페타’라고 불리는 긴 터번을 걸쳤다. 이 터번은 비단으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많은 인도 사회에서와 같이 당시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팔찌, 반지, 목걸이, 귀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보석을 많이 걸쳤으며 특히 축제 기간에는 꽃으로 만든 장식물이나 장미수 등으로 만든 향수들을 뿌리고 나와 거닐기도 하였다. 보통 평민들이나 빈자들은 소박하게 살았던 것에 비하여, 황족이나 귀족들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하여 수없이 많은 보석들과 금붙이들을 걸치고 살았다. 여황제나 공주들은 수많은 비서들을 두었는데, 이들조차도 많은 보석들로 몸을 꾸미고 다녔으며 워낙 그 수가 많았기에 이 비서 개인이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신체적인 활동이 장려되었으며, 레슬링은 남성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인기있었던 스포츠 종목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여성 레슬러들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고 전해진다. 상당수의 도시들에서는 자체적인 체육관도 자주 발굴되었으며, 평화시에도 군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이 곳에 모여 신체 단련을 했다는 기록이 발굴되었다. 황궁과 시장판에서는 특별 경기장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 곳에 모여 닭싸움이나 양싸움, 여성 레슬링 등을 구경하고 돈놀이 등을 하곤 하였다. 비자야나가라의 도시들을 발굴해본 결과, 이 시기에는 수많은 유희 활동들이 존재하였으며 특히 사원이나 시장 등이 인기 많은 도박장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이 활동들 중 일부는 아직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혼수는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 모두에게서 볼 수 있는 문화였다. 비자푸르의 술탄 아딜리 샤의 누이가 아흐메드나가르의 니잠 샤와 결혼할 적에, 그는 숄라푸르 성읍을 결혼 혼수로 주기도 하였다. 칼링가 지역 왕의 딸이 결혼할 때에도 몇 개의 마을들을 잘라 주기도 하였다. 15세기와 16세기에 쓰여진 기록들에 의하면 평민들 사이에서도 혼수 문화가 흔하였고, 특히 신부 측 가정에 신부의 대가로 지불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브라만 계급들이 이 혼수 문화가 이슬람교에서 건너온 문화라고 단정, 이를 배척하기 위해 1553년에 칙령을 내려 그 어떠한 종류의 금품이나 돈도 결혼 기간 동안 줄 수 없다고 지정하기도 하였으며, 따르지 않는 자는 엄벌을 내리겠다고 하여 이 혼수 문화를 폐지하려 하였으나, 결국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종교편집

 
비슈누의 신상

비자야나가라 제국은 모든 종교에 대해 대단히 관용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외국인 여행자들은 적었다. 다만 황제들은 ‘고브라하마나 프라티파라나차르야’와 ‘힌두라야수라트라나’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각각 ‘모든 소와 브라만들의 보호자’와 ‘힌두 신앙의 보호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같은 칭호에는 힌두교 신앙을 지키고 국교로서 보호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던 것이다. 다만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황실 문화는 북쪽의 이슬람 문화에게서 매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의복, 예식 등에서도 큰 변화를 겪었다. 제국의 창건자인 하리하라 1세와 부카 라야 1세는 자신들이 시바 신을 모시는 사제들이라고 자칭하였으나, 스링게리에 있는 비슈누 신을 모시는 비드야란나를 자신들의 성자로 삼기도 하였고, 비슈누의 화신들 중 하나인 바라하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기도 하였다. 고고학자들은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역에서 이슬람교도들이 모여 살던 구역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중앙아시아의 티무르계 왕국들의 귀족들이 비자야나가라 제국으로 오기도 하였다. 이후 살루바 왕조와 툴루바 왕조 출신의 황제들도 비슈누 신을 섬겼으나, 삼신일체의 일환으로 시바 신을 함께 모시기도 하였다. 크리슈나 데바 라야 왕이 집필한 산스크리트 기록인 ‘잠바바티 칼야남’에는 비슈누를 ‘카르나타카 제국의 보호석’이라고 묘사하였다. 황제들은 신들을 모시는 사원들에 토지, 현금, 작물, 보석, 재정 지원 등의 형태로 막대한 양의 헌금들을 내며 종교계가 자신들을 지지해주기를 바랐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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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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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