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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겸(尹世謙, 1668년 6월 18일 - 1749년 9월 24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자는 여익(汝益), 호는 승옹(繩翁)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향시에 거듭 낙방하다가 40세에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라 경기전 참봉으로 출사하여 장녕전 봉사, 전옥서 봉사, 금부도사, 한성부 판관 등을 지냈다.

1714년 부여현감, 1718년 예천군수, 1722년 순흥부사, 1729년 성주목사 등을 역임했으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윤치호, 윤치영의 5대조이고, 4대 대통령 윤보선, 6대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의 6대조가 된다.

생애편집

1668년 6월 18일 세자익위사 사어를 지내고 사후 증 이조참판에 추증된 윤채(尹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 때의 형제 정승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도재 윤흔의 증손이었다. 선조의 서녀 정혜옹주와 결혼한 윤신지는 윤세겸에게 재종조부가 된다.

아버지 윤채는 네 번 결혼했으나 본처 파평윤씨와 계비 진주유씨, 셋째부인 밀양박씨에게서 자녀가 없고 넷째부인 평강김씨를 얻어 4남 1녀를 두었다. 1671년 4월 3세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고 친척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68세의 고령에 그를 얻었으므로 오갈 곳이 없어 친척들이 그를 돌보았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하고 1707년(숙종 33년)에 음서로 관직에 출사하여 경기전 참봉(京畿殿參奉)이 되었다. 1708년(숙종 34년) 장녕전참봉(長寧殿參奉)가 되었다가 그 뒤 장녕전봉사를 거쳐 전옥서봉사(典獄署奉事), 전옥서직장 등을 지냈다.

1712년(숙종 38년)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의금부도사, 한성부판관을 역임하고 함흥판관으로 부임하였다. 1714년 부여현감 1718년 예천군수, 1722년(경종 2년) 12월 순흥부사로 부임하였다. 지방관으로 재직 당시 선정을 베풀어 부여, 예천, 순흥, 성주 등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순흥 부석면 동구(현 영주시 부석면 동구)에는 그가 이임하자 그를 기린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지기도 했다. 1727년(영조 3년) 7월 선혜청낭청이 되었다가 1729년 다시 성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지방관의 임기는 3년이었으나 1732년(영조 8년) 성주목사에 유임되었다. 1731년1732년 흉작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과 기근에 시달리자 구휼 정책을 잘 펴서 칭송을 들었다. 1734년 다시 선혜청낭청이 되었고, 통훈대부로 승진, 사도사첨정, 광흥창수를 거쳐 1744년(영조 20년) 통정대부로 승진,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747년(영조 23년) 대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특별히 가선대부로 승자,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 1749년 9월 24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 81세였다. 그는 평소에 온화하였고 희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주로 교류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인물로는 족질인 윤순(尹淳)[1] 등 몇인이 있었다.

사후편집

장단군 고매곡(古梅谷) 계좌에 본부인 해주정씨와 함께 안장되었고, 묘비명은 손자 윤득우가 썼다. 소실 김해김씨는 충청도 아산군 둔포면 석곡리에 안장되었다.

서자 윤발은 후에 조선 말의 군부대신 윤웅렬과 육군참장 윤영렬의 증조 할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 윤치호, 대한민국의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윤치영, 4대 대통령 윤보선, 한국의 초기 병리학자이자 해부학자인 윤일선의 선조가 된다.

가족 관계편집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윤두수-윤흔-윤취지-윤채-윤세겸
    윤두수-윤환(尹堧)-윤의지-윤연-윤세희(尹世喜)-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