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김씨

한국의 성씨 중 하나

김해 김씨(金海 金氏)는 경상남도 김해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수로왕(金首露)을 시조로 한다.

김해 김씨(金海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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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의 종문
관향경상남도 김해시
시조김수로(金首露)
중시조김유신(金庾信)
집성촌전라북도 장수군 남원시 고창군 부안군 김제시
전라남도 진도군 해남군 신안군 영광군 완도군 나주시[1] 무안군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영암군[2] 화순군
경상북도 포항시 김천시 구미시 청도군[3] 상주시 경산시
경상남도 창원시 김해시 진주시 창녕군 사천시 남해군
강원도 인제군 정선군 철원군
충청남도 부여군 공주시 논산시 보령시 아산시
충청북도 청원군 옥천군 괴산군
광주광역시 광산구
남포시 룡강군[4]
함경북도 나진시 경성군 명천군
함경남도 북청군 홍원군
경기도 성남시 수원시 시흥시 용인시 여주시 안성시
주요 인물김무력, 김서현, 김유신, 문명왕후, 김웅원, 김상좌, 김극일, 김영정, 김일손, 김대유, 김치삼, 김완, 김경서, 공빈 김씨, 김예직, 김우항, 김만덕, 김홍도, 김대건, 김두봉, 김상옥, 김원봉, 김준연, 김현철, 김성곤, 김종오, 김동석, 김대중, 김종필, 김지하, 김삼웅, 김주열, 남진, 김홍신, 김부겸
인구(2015년)8,979,800명 (1위)
비고김해김씨

역사편집

가락국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고, 흥무대왕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로 한다.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의 아홉 명의 촌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자주색 밧줄에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합이 구지봉에 강림하고 여섯개 황금 알 중에 제일 먼저 나온 아이를 수로(首露)라 하고 가락국의 왕이 되니 김해김씨의 시조가 된다. 이후 후손들이 가락국이 세워진 김해를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금관가야는 5세기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급속히 쇠퇴하게 된다. 532년(법흥왕 19년)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 귀족이 된 가락국의 마지막 왕으로 김유신의 증조부가 되는 구형왕(仇衡王)은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상등의 작위를 받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받았으며. 그의 세 아들 중 차남 김무력(金武力)이 신라에서 장군이 되어 관산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최고의 관등인 각간(角干)을 지냈고, 신라의 한강유역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아들 김서현(金舒玄)은 백제와 여려번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고, 고구려 낭비성을 함락시키고 각간(角干)으로 제수 받았으며, 김서현의 딸 문희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혼인하여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되었다.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은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달성한 명장(名將)으로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이르렀고,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이후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무열왕계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을 이루면서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번성해 왔다. 이런 신김씨의 위세가 쇠퇴한 계기는 780년 혜공왕김지정의 난 중에 피살당하는 것으로 무열왕계가 왕통이 단절되고 선덕왕내물왕계가 왕위를 잇게 되면서 부터 다른 진골 귀족들로부터도 다시금 경원 당하면서 심지어 6두품으로 추락했다.[5][6]

진성여왕 때에 신라가 혼란하여 김상좌(金商佐)가 왕건에게 위탁해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에 올른 이래 그 후손들이 문무 명신을 배출한 삼한갑족에 속하며, 고려 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 11명 등 숱한 인물을 배출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대게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고려 충신들이 많았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7][8]를 비롯한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역대 정승에서도 숙종조의 김우항(金宇抗) 한 사람뿐이었다. 조선시대 유일한, 그리고 최후의 정승이었다.

본관편집

김해(金海)는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일대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바꾸어 양주(良州: 梁山)의 관할로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고 임해현(臨海縣)으로 다시 강등되었다가 곧 임해군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에 김해안동도호부(金海安東都護府)로 개칭하여 영동도(嶺東道)에 속하였다가 1012년(현종 4) 김해군방어사로 강등되었으나 1018년부터는 의안군(義安郡: 昌原)·함안군(咸安郡)·칠원현(漆原縣: 漆原面)·웅신현(熊神縣: 鎭海)등을 영현으로 삼았다.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1293년(충렬왕 19) 현으로 강등되었다. 1308년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김해부(金海府)로 격하되었다. 1413년(태종 13) 김해도호부로 승격되어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고, 1918년에 좌부면과 우부면이 김해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에는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 되었으며 1995년에는 김해군과 통합하여 김해시가 되었다.

세계도편집

1 태조왕

太祖王

2 도왕 道王
3 성왕 成王
4 덕왕 德王
5 명왕 明王
6 신왕 神王
7 혜왕 惠王
8 장왕 莊王
9 숙왕 肅王
10 양왕 讓王 탈지 脫知
11 세종 世宗 무력 武力 무득 武得
12 서현 舒玄
13 흥무대왕

興武大王

유신 庾信

흠순 欽純
14 삼광 三光 원술 元述 원정 元貞[9] 장이 長耳[10] 시득 施得[11] 반굴 盤屈
15 윤중 允中[12] 윤문 允文[13] 영윤 令胤
16 장청 長淸[14] 암 巖
17 웅원 雄元
18 경주 擎柱[15]
19 성해 成海[16] 成垈 성대
20 정철 挺喆[17]
21 수윤 琇胤[18] 옥윤 玉胤
22 천수 天授[19] 천여 天與[20]
23 상좌 商佐
24 호 浩[21]
25 화재 華齊[22]
26 진유 振酉[23]
27 승의 承意[24] 계의 繼意[25] 진의 進意[26]
28 천정 天精[27]
29 항령 恒齡[28]
30 수성 洙聖[29]
31 상흠 商欽[30] 상현 商賢[31] 상인 商寅[32]
32 성우 成雨[33]
33 일서 一曙[34]
34 광국 匡國[35]
35 종백 宗栢[36]
36 수 繡[37]
37 이탁 以琢[38]
38 서천 瑞天[39]
39 양철 陽喆[40]
40 시추 是秋[41]
41 진국 鎭國[42] 정국 定國[43]
42 규상 奎祥[44]
43 도협 道浹[45]
44 탕우 湯雨[46]
45 만서 萬瑞[47]
46 사맹 師孟[48]
47 상주 相宙[49]
48 방직 邦直[50] 용직 龍直[51]
49 익섬 益銛[52] 관 管

판도판서공파

版圖判書公派

50 주국 柱國[53]
51 절경 晢卿 목경 牧卿

금녕군파

金寧君派

익경 益卿

감무공파

監務公派

분파편집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閼智系)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번성하여 왔다. 특히 김해김씨는 족세(族勢)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파로 분파(分派) 되었다. 그 중 직계종파는 김목경을 파조로 하는 경파(京派), 김익경을 파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김관을 파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가 있다. 여기에 경파, 사군파, 삼현파마다 각각 세부적인 인물을 중조로 하여 총 24개의 공파로 구분되어 있는 등 계보가 복잡하다.

  • 종파
    • 경파(京派), 금녕군파(金寧君派) - 김목경(金牧卿)[54]
      • 참판공파(參判公派): 김영견(金永堅)[55]
      • 횡성공파(橫城公派): 김영서(金永瑞)
      • 안경공파(安敬公派): 김영정(金永貞)
        • 연천공파(漣川公派): 김첨수(金添壽)[56]
        • 부여공파(夫餘公派): 김증수(金增壽)
        • 참판공파(參判公派): 김익수(金益壽)[57]
        • 의헌공파(毅憲公派): 김예직(金禮直)
        • 아산공파(牙山公派): 김희현(金希賢)
          • 천주교성인공파(天主敎聖人公派): 김진후(金震厚)[58]
        • 청양공파(靑陽公派): 김말수(金末壽)
        • 통덕공파(德郞公派): 김일수(金一壽)
        • 녕변공파(寧邊公派): 김세권(金世權)
        • 승지공파(承旨公派): 김세준(金世準)
      • 석성공파(石城公派): 김영순(金永純)
      • 호참공파(戶參公派): 김진서(金震敍)
      • 참찬공파(參贊公派): 김달문(金達門)
      • 봉상공파(奉常公派): 김현문(金顯門)
      •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김창문(金昌門)
      • 문간공파(文簡公派): 김저(金著)
      • 밀직공파(密直公派): 김수(金秀)
      •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김란(金蘭)[59]
    • 사군파(四君派), 감무공파(監務公派) - 김익경(金益卿)
      • ①생원공파(生員公派): 김련(金鍊)
      • 도총관공파(都摠管公派): 김추(金錘)
      • ②생원공파(生員公派): 김구(金銶)
      • 찬성공파(贊成公派): 김석(金錫)
      • 상서공파(尙書公派): 김감(金鑑)
      • 공간공파(恭簡公派): 김조(金銚)[60]
    • 삼현파(三賢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 김관(金管)[61]
      • ①군수공파(郡守公派): 김건(金建)
        • 선무랑공파(宣務郎公派): 김적(金積)
        • 남창공파(南窓公派): 김현성(金玄成)[62]
      • 집의공파(執義公派): 김맹(金孟)[63]
        • 삼족당파(三足堂派): 김대유(金大有)
        • 문민공파(文愍公派): 김일손(金馹孫)
        • 둔암공파(遯庵公派): 김의경(金義慶)
        • 치오공파(致五公派): 김치오(金致五)
      • 한림공파(翰林公派): 김용(金勇)
      • 진사공파(進士公派): 김순(金順)
      • 녹사공파(錄士公派): 김인(金靭)
        • 판서공파(判書公派): 김경진(金景振)
      • 진의공파(進義公派): 김현(金鉉)
      • ②군수공파(郡守公派): 김익(金益)
      •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김무(金武)
  • 천여(天與)계
    • 첨정공파(僉正公派) - 김덕휴(金德休)
  • 진의(進意)계
    • 운은공파(雲隱公派) - 김대진(金大震)
    • 문경공파(文敬公派) - 김탁(金琢)[64]
    • 부사공파(府使公派) - 김근(金瑾)
    • 한림공파(翰林公派) - 김관(金鑧)
    • 충정공파(忠貞公派) - 김구(金玖)
    • 도사공파(都事公派) - 김련(金璉)
    • 승정공파(承政公派) - 김현(金現)
    • 휴은공파(休隱公派) - 김호(金琥)
    • 장사군파(長沙郡派) - 김선(金璇)[65]
    •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 김득하(金得河)[66]
    • 도총관공파(都總管公派) - 김경신(金敬臣)
      • 축은공파(築隱公派) - 김방려(金方礪)[67]
      • 생원공파(生員公派) - 김계인(金係引)
      • 서강공파(西岡公派) - 김계금(金係錦)[68]
      • 퇴은공파(退隱公派) - 김계희(金係熙)
      • 담헌공파(淡軒公派) - 김극검(金克儉)[69]
    • 판윤공파(判尹公派) - 김경보(金敬輔)
  • 상현(商賢)계
    • 판전공파(判典公派) - 김명택(金明澤)
    • 판서공파(判書公派) - 김불비(金不比)[70]
      • 참봉공파(參奉公派) - 김말손(金末孫)
      • 참판공파(參判公派) - 김중손(金仲孫)
    •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 김만희(金萬希)[71]
    • 참봉공파(参奉公派) - 김인서(金鱗瑞)
    • 충정공파(忠精公派) - 김이장(金以障)
    • 승정공파(承政公派) - 김종정(金宗貞)
    • 부호군공파(副護軍公派) - 김천익(金天翼)
    •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 김을동(金乙棟)
    • 진사공파(眞士公派) - 김문(金汶)
  • 상인(商寅)계
    • 유수공파(留守公派) - 김운(金蕓)
  • 정국(定國)계
    • 판서공파(判書公派) - 김유공(金維公)
    • 부호군공파(副護軍公派) - 김거공(金巨公)
    •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 김지서(金之瑞)
    • 부정공파(副正公派) - 김평(金平)
      • 양의공파(襄毅公派) - 김경서(金景瑞)
    • 판서공파(判書公派) - 김첨검(金添劍)

항렬자편집

  • 경파(京派, 중시조로 1세, 시조로 1세)
  • 사군파(四君派, 중시조로 1세, 시조로 1세)
  • 삼현파(三賢派) 중시조로 1세, 시조로 1세

과거 급제자편집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문과 128명, 무과 536명, 사마시 471명, 역과 59명, 의과 39명, 음양과 15명, 율과 33명, 주학 8명이다.

인물편집

사당편집

  • 숭선전(崇善殿) : 시조 수로왕 보주태후 휘 황옥 배향
  • 숭안전(崇安殿) : 가락 2대 ~ 9대 왕과 왕후 배향
  • 덕양전(德讓殿) : 양왕 양왕후 배향
  • 숭무전(崇武殿) : 흥무왕 왕후 계림김씨
  • 자계서원(紫溪書院) : 절효 김극일, 탁영 김일손, 삼족당 김대유 배향

왕실과의 인척 관계편집

인구편집

  • 2000년 1,295,080가구 4,124,934명
  • 2015년 4,456,700명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성씨이며, 김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41.7%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 서울 81만 5천 783명, 부산 40만 7천 41명, 대구 19만 9천 252명, 인천 20만 7천 736명, 광주 14만 8천 736명, 대전 9만 6천 887명, 울산 10만 4천 627명, 경기 71만 8천 661명, 강원 10만 7천 612명, 충북 8만 6천 978명, 충남 14만 151명, 전북 17만 3천 712명, 전남 26만 8천 525명, 경북 23만 7천 826명, 경남 35만 12명, 제주 6만 1천 395명이다. 부산과 경남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구분편집

신라계 김해 김씨는 김녕 김씨라고 하여 가야계 김해 김씨와 구분한다. 또는 사성 김해 김씨는 우록 김씨라고 하지 않는다.

분가편집

분적설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1. 김해 김씨 문경공파 집성촌
  2. 김해 김씨 사군파 집성촌
  3. 김해 김씨 삼현파 집성촌
  4. 김해 김씨 양의공파 집성촌
  5. 김유신의 적손인 김윤중(金允中)이 성덕왕 때 일반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김유신의 현손 김장청(金長淸) 역시, 집사부의 말단직 집사랑(執事郞)을 지냈을 뿐이다. 김융(金融)의 난과 관련 있어 보인다.
  6. 김웅원(金雄元)이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고 이어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신무왕의 사돈이 된 것으로 보아 몰락하였던 김유신의 가계가 다시 부흥한 것으로 보인다.
  7. 조선 연산군대 탁영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수록한 「조의제문(弔義帝文)」(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내용)을 빌미로 훈구세력에 의해 일어난 사화
  8. 연산조의 학자 성현은 『용재총화』에서「옛날에는 성했다가 지금은 쇠한」씨족을 지적하는 가운데 김해김씨를 하나로 들고 있다.
  9. 관등은 해간(海干) 서원술성의 축성 책임자를 지냈는데, 남의 말을 듣고 고구려 정벌에 공이 많던 구근을 벌주었다가 평생토록 후회하였다.
  10. 관등은 대아찬.
  11. 관등은 대아찬.
  12. 대아찬. 통일신라시대의 재상. 733년 당나라에서 신라에게 발해를 치도록 요구하면서 발해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지목해옴에 따라, 성덕왕은 그와 그의 동생 윤문 등 세 장군에게 군사를 이끌게 하여 발해를 치게 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원정은 이루지 못하였다. 부인은 이씨.
  13. 상장군.
  14. 관직은 집사시랑(執事侍郞)이다. 부인은 중랑장 박회의 딸
  15. 관등은사찬. 호(號)는 경천재(擎天齋)이다. 문성왕 13년 (851년)에 아찬 원흥과 함께 당 사신으로 당 선종(宣宗)을 직접대면하였다. 부인은 월성김씨로서 신라 신무왕의 공주이다.
  16. 호(號)는 해능(海陵)이다. 관직은 도관이다. 고운 최치원과 교재하였고, 당에서 “어초자시집”을 지어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부인은 장씨(청해진대사 장보고의 딸)이다.
  17. 진성왕 5년 (891년) 대도독으로서 견훤의 거병을 막다 전사하다. 부인은 장흥 위씨.
  18. 어사중시랑. 부인은 안산 이씨, 이수자의 딸.
  19. 효공왕 11년 (907년)에 시중으로서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황소의 난으로 작고하다. 부인은 왕씨(왕거인의 딸)이다.
  20. 태보. 부인은 이방철의 딸.
  21. 호(號)는 청암(淸巖)이다. 관직은 지제고(知制誥), 한림학사(翰林學士), 조정대부(朝靖大夫), 첨의부(僉議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이다. 나이 101세에 작고하다. 부인은 평산 신씨 , 신숭겸의 딸.
  22.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음. 부인은 경주 이씨 지주사 이권의 딸.
  23. 호(號)는 지지로(知止老) 또는 퇴휴재(退休齋)이다. 관직은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수문각 대학사(修文殿 大學士),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이다. 광종(光宗)이 과거제를 설치하여 승려 혜거(惠居)를 시험 담당관으로 임명하자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아 사직하고 금마저(현 전라북도 익산)에 물러났다. 부인은 신천 강씨(강조(康兆)의 딸)이다.
  24. 상장군. 혜거를 물리치고자 하였으나 이미 국사로 임명한 광종의 뜻을 거슬러 벼슬에서 물러났다. 부인은 왕광렴의 딸.
  25. 부인은 판전교 민륜의 딸.
  26. 관직은 중서령(中書令)이다. 부인은 여흥 민씨, 민지 (고려)|민지]](閔漬)의 딸이다.
  27. 노년의 중대광과 병부상서 역임. 사신으로 거란에 가서 화친을 청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대랑군 김순의 딸.
  28. 상장군. 부인은 진주 강씨, 평장사 강찬의 딸.
  29. 관직은 중대광(重大匡), 호부상서(戶部尙書)이다. 상원수(上元帥) 강감찬과 같이 요나라 침입을 격퇴하다 전사하였다. 부인은 남양 홍씨, 용호군 교위 홍영의 딸.
  30. 조정대부(朝靖大夫), 첨의부(僉議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 아중대부(亞中大夫), 경차도위(輕車都尉), 금주백(金州伯)을 지냈다. 1010년(고려 현종 원년) 상장군 김훈(金訓)과 같이 왜구를 격퇴하고, 서역 사라센인(大食國)의 사신이 방물을 받치게하는 공적을 세웠다. 부인은 단양 우씨 (우좌원의 딸).
  31. 병마사. 부인은 김씨.
  32. 안찰사. 부인은 청주 한씨, 간의대부 한규의 딸.
  33. 호는 감림(甘霖)이다. 1033년(고려 덕종 2년)에 평장사 류소와 함께 북쪽 경계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여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부인은 고흥 류씨, 대장군 류청신의 딸이다.
  34. 경차도위. 박양신을 따라 요나라송나라 사절로 파견. 부인은 완산 최씨, 예빈의 최돈의 딸.
  35. 대제학. 부인은 밀양 박씨, 평장사 박구수의 딸.
  36. 호(號)는 란요옹(蘭栟翁)이다. 노년에 곽여(郭輿)와 함께 산수를 즐기며 금주로 들어가 살았다. 그의 전해오는 시에서 ‘강호에서 피리를 부는 노인이 긴 낚싯대를 가지고 금성의 동쪽에서 살아가니 생계는 어려워도 머리카락 빗질하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는구나.’ 부인은 파평 윤씨 (우정승 윤선좌(윤관 장군의 7세손)의 딸)이다.
  37. 호(號)는 설문재(設門齋)이다. 신호위 상장군으로 1126년(고려 인종 4년) 5월 이자겸(李資謙)이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되거라는 도참설을 내세워 난을 일으키니 척준경(拓俊京)과 같이 평정하였다. 1135년(인종 13년) 정월에는 서경의 수령으로 있던 조광의 난을 여러 장군들과 토벌하였다. 부인은 서경 정씨(정지상(鄭知常)의 딸)이다.
  38. 호(號) 청원(淸源)이다. 관직은 사어사(侍御史)로서 1170년(고려 의종 24년) 에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일으켜 시체가 길거리에 가득 차자 시신을 수습하기를 청하였으나 무고한 죄를 씌워 죽였다. 부인은 평리사 신이의 딸.
  39. 원수를 갚고자 벼슬에도 뜻을 두지 않았다. 1178년(고려 명종 8년) 경대승(慶大升)과 같이 모의하여 집안의 노비들을 이끌고 정중부(鄭仲夫)를 살해하여 그 원수를 갚았다. 그 후에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대부, 행예빈경을 지내고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우복야에 추봉되었다. 부인은 순흥 안씨, 안찰사 안영의 딸.
  40. 평장사. 부인은 밀양 박씨 , 박재화의 딸.
  41. 수문전 태학사, 판전리사사, 세자의 스승. 부인 의성 김씨, 삼사사 김오의 딸.
  42. 은청광록대부. 부인은 청주 정씨, 밀직제학 정휴의 딸.
  43. 밀직사사.
  44. 호(號)는 죽오(竹塢)이다. 충선왕 때 나라가 평온하지 않다고 벼슬에 물러나 귀향했다. 후에 다시 한림학사, 조정대부, 첨의부, 좌사의대부,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부인은 언양김씨 (우정승 김문연 (金文衍) (숙창원비의 오빠)의 딸)이다.
  45. 금자광록대부. 부인은 남양 홍씨 , 평장사 홍구의 딸.
  46. 은정광록대부. 부인은 언양 김씨, 직제학 김흘의 딸.
  47. 관직은 동지밀직사(同知密直司),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직제학(直提學)이다. 부인은 고흥 류씨(류탁의 딸)이다.
  48. 대제학. 부인은 파주 염씨, 좌정승 염제현의 딸.
  49. 호(號)는 고봉(孤峯)이다. 관직은 각로(閣老)이다. 1275년(충렬왕 원년)에 왕이 흰옷을 입는 것을 금하게 하라고 명하였고, 1278년(충렬왕 4년)에 또 변발을 하게하고 원복을 입게하라 하라고 명하자, 강력히 간언하였으나 이로서 왕의 미움을 샀다. 부인은 금성 라씨 (평장사 라문옥의 딸).
  50. 대광상서. 부인은 우정승 장원의 딸.
  51. 초휘는 용각(龍角)이다.관직은 사인(舍人)이다. 부인은 함양 박씨 (박충좌(朴忠佐)의 딸)이다.
  52. 상장군. 부인은 평산 신씨, 전리판서 신씨의 딸.
  53. 조정대부, 사정대부, 대제학, 지제고 등 역임. 부인은 해주 오씨, 좌정승 오달문의 딸.
  54.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상소 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55. 조선 세조 즉위시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1471년(성종 2) 전통례원상례(前通禮院相禮)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여러 읍의 실농(失農)을 살펴 흉년을 구제하고 도둑들의 유무와 농민들의 질병을 보살폈다.
  56. 고려 시대의 무신이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려갈 때 호종한 공신이며, 역적을 꾀하는 조일신을 잡아 목을 베어 죽이는 등 조정을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57. 예조참의(禮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의 벼슬을 지냈다. 호남백충청감사(湖南伯忠淸監司), 병조참판가의대부(兵曹參判嘉義大夫), 한성부 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동지의금부사(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
  58. 파의 이름부터가 후덜덜한데, 2002년에 복자 김진후 비오를 시조로 하여 분파하였다. 복자 김진후 비오의 증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해 성인 3명, 복자 2명을 배출하고 십수명의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59. 1362년(공민왕 11년)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로 서북면병마사가 되고, 이듬해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인하여 이등공신이 되었다. 신돈의 장인이므로 신돈이 처형된뒤 공민왕 20년 7월에 처형되었다.
  60. 조선 세종 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61.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켰다. 1289년안향과 함께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안향과 함께 『주자 전서(朱子全書)』를 수록하여 유학(儒學)을 보급하였다.
  62. 광해군 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63. 조선 전기 문신. 평안도 도사, 고령현감 등의 외관직으로 나갔다가 좌익원종공신 3등에 책록된 뒤 의금부 진무에 오르고 이어 오위도총부 경력을 역임했다. 벼슬을 마다하고 부모의 봉양에만 정성을 쏟았으며 성품이 단아, 청렴했다.
  64.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내사문하성에 소속된 종2품), 문하시랑,대제학을 역임하면서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등과 교류하며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일으키는데 크게 공을 세웠으며, 최영(崔瑩)과 함께 기철 일당과 결탁한 최유 일당의 군사를 괴멸 시켰다. 이로 인해 일등공신이 되고 왕은 주석신(柱石臣)이라 칭했다.
  65. 무장 김씨(茂長金氏)의 시조. 고려 공민왕 때 공을 세워 장사군(長沙君)에 봉해졌고, 1375년 공민왕이 서거한 뒤 벼슬을 버리고 장사현으로 낙향하여 정착하였다.
  66. 세종·문종·단종에 이르기까지 집현전의 학사로 있었으며, 단종이 폐위되고 의성 봉강리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단종을 향한 충의를 지켰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으로 여생을 마쳤다.
  67. 1375년 이첨(李詹), 전녹생(田祿生), 정몽주(鄭夢周) 등과 이인임(李仁任)의 친원 정책을 반대하다가 김해 퇴은에 유배되었다. 1388년(창왕 1) 위화도 회군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후에 김해 퇴은으로 낙향하였다.
  68. 증광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지평 · 의성현령 등을 역임하고, 집현전권지학유를 지냈다. 문장 · 행의로 이름이 높았으며, 사림에서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다.
  69. 승문원교리로서 조운사종사관이 되어 경상도 군량미 10만 석을 함경도로 운송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어 홍문관부교리로서《세조실록》,《예종실록》 편찬에 기주관으로 참여하였고, 장령 · 응교 등을 역임한 뒤 외직으로 나가 뛰어난 치적을 올렸으며, 사표로 추천되었다.
  70. 전리총랑(典理總郞)·보문각직제학지교를 거쳐 서해도안무사·성균좨주겸의랑을 지내고 이조판서가 되었다.
  71. 이존오(李存吾)가 1366년(공민왕 15) 신돈 배척 상소를 올릴 때 함께 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후 신돈이 제거되자 복직되어 찬성사를 역임하고 삼중대광 도첨의좌정승까지 올랐으나 사임하고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그는 새로운 왕조 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신정권을 끝까지 반대하자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