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한양도성의 내사산 중 하나

인왕산(仁王山)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서대문구에 걸쳐있는 이며 전체 면적은 1,086,696.50m2이다.[1]

인왕산
仁王山
인왕산의 남측 전경
최고점
고도338.2 m (1,110 ft)
지리
인왕산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인왕산
인왕산
인왕산의 위치
위치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대문구
부모 산맥광주산맥

바위산이기 때문에 조망도 좋고 기차바위·치마바위·매바위·범바위·이슬바위·모자바위·선바위·지렁이바위 등이 저마다 기이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다.[2] 산수화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가 유명하다. 동쪽에는 경복궁, 서쪽에는 무악재, 남쪽에는 서대문독립공원, 북쪽에는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있다.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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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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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강감찬 장군이 젊을적에 이 지역 판관으로 부임을 하였는데 인왕산과 북한산 일대에 호랑이가 많아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강감찬은 노승으로 변신해있던 호랑이들의 대장을 알아보고 호통을 쳤으며 호랑이들은 도망을 갔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필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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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명신 필운 이항복이 살던 곳이다.

서울 북한산 묘소에 안장된 박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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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숙종 치세 때의 박태성이라는 사람은 고양군에 묻힌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뵙고 난 뒤에 일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양군에 가려면 무악재를 넘어가야 하는데 어느날부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박태성을 태워줘 아버지의 산소까지 데려다주었고 집으로 돌아 올 때도 데려다주었다고한다. 호랑이는 40년간 박태성을 도왔고 박태성이 죽었을때는 산소 옆에서 같이 죽었다고 한다. 이에 박태성의 후손들은 호랑이를 박태성의 산소 옆에 묻어주었고 제사까지 함께 지내주었으며 묘소는 북한산에 위치해있다.

대한제국 시대의 정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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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시절 대금의 명인이였던 정약대는 매일 인왕산에 올라 대금을 불었으며 한 곡조가 끝날 때마다 나막신에 모래를 한 알씩 넣어 나막신에 모래가 가득차면 돌아갔다고한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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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인왕산 부근에 살았었다. 이를 기념하여 윤동주 시인의 공원을 조성했으며 공원은 자하문고개 근처에 위치해있다. 바로 옆의 청운공원은 서울의 조망명소 중 한 곳이다.

한국 전쟁 당시의 안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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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안병범 육군 대령(사후 육군 준장 추증)은 낙오병 등을 모아 유격대를 결성해 인왕산에서 활약하다가 국군의 참패 소식을 듣고 조국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결하였다.

1968년 당시의 1·21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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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사후 경무관 추서)과 정종수 경장(사후 경사 추서)이 무장공비를 막다가 자하문 아래에서 전사하였고, 경복고등학교의 수위였던 정사영 씨가 살해되었다. 무장공비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 씨는 인왕산에서 생포됐다. 이후 인왕산은 한 25년 넘도록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 이후 부분 개방됐다.

1967년 영화 《대괴수 용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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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1967년 영화대괴수 용가리》에서는 인왕산 용가리가 나와 경복궁, 서울특별시 시청 등의 문화재들을 파괴하는데 해당 영화 극중의 캐릭터인 유광남 우주비행사(배역: 이순재 분)가 이(인왕산 용가리)를 물리친다.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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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왕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 간다.
    • 어떤 한 사람이 잘되어 세력이 커지면 그 덕을 입어 도움을 받는 사람이 많게 된다는 말.
  •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있나.
    • 그 방면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말.
  • 인왕산 중허리 같다.
    • 배가 부른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인왕산 차돌을 먹고 살기로 사돈의 밥을 먹으랴.
    • 아무리 어렵고 고생스러워도 처가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고 싶지는 아니함을 이르는 말.[3]

주변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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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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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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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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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써놓은 글씨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구호를 새겨졌다.[4][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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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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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의 공원[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 글로벌 세계대백과》〈인왕산
  3. 다음 국어사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 황기 2599년(서력기원 1939년)에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南 次郎)가 작성한 것이다.
  5. 인왕산 허리의 높이 39메돌(m), 넓이 40메돌 되는 큰 바위에다 사방이 아홉 자 되는 "동아청년단결"의 여섯 자를 새기기로 한 것이며, (중략) 이 기념문자로 신동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 몸과 마음을 바치는 상징이 되게 하며 이 글씨를 생각함으로써 동아의 오족(族)을 대표한 청년들은 더욱 단결을 굳게 할 것을 맹세하기로 한 것이다.

    — 출처: 매일신보 1939년 9월 17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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