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둥쑨

장둥쑨(장동손, 張東蓀, 1886년 12월 9일 ~ 1973년 6월 2일)은 중국의 철학자, 평론가, 언론인, 사상가, 윤리학자, 교육자, 사상문화학자, 지식사회학자, 인식론 학자이다. 연구계(硏究系), 중국국가사회당, 중국민주사회당의 지도자였으며, 개혁 사상가 량치차오의 제자로도 알려졌다. 《시사신보(時事新報)》 주필, 칭화 대학교와 옌칭 대학교의 인식론, 윤리학, 서양철학, 중국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Who's Who in China Suppl. to 4th ed》(1933)

생애와 활동편집

1905년~1911년, 청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 제국대학 철학과 수료, 사립 철학관 졸업한 후 1912년 1월 쑨원의 중화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13년 량치차오 진보당 톈진용언(庸言)》 주필, 1917년 상하이 연구계 기관지 《시사신보(時事新報)》 주필, 1918년시사신보》 부간(副刊) 《학등(學燈)》 주필, 1919년 상하이 연구계 《해방과 개조(解放與改造)》 주필, 1920년 상하이 · 베이징 연구계 《개조(改造)》 주필, 1920년 상하이 개신교흥화(興華)》 객원 주필 (정론). 1920년 박은식이광수가 주필을 맡았던 상하이에서 출간된 《신한청년(新韓靑年)》 창간호 중국어판에 축사를 기고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같은 해, 천두슈와 중국 사회주의에 관한 논전에서 빈곤에 반대하고 실업 진흥을 주장하였다. 1920년 량치차오의 강학사(講學社)로 영국 철학자이자 길드 사회주의자였던 버트런드 러셀을 중국 각 지역의 강연자로 유치하였다. 1920년대 이후 1940년대까지 상하이 중국 공학, 상하이 자치 학원, 상하이 사립 광화 대학, 베이핑영국미국이 설립한 개신교 사립 옌칭 대학과 칭화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중국 자유주의 격률파 인문학 문철 연구 단체이었던 신월파(新月派)에 고문으로 참여하였고, 1932년 중국국가사회당 《재생(再生)》 창간 발기인. 중일 전쟁 종료 직후 베이핑정보(正報)》 편집인. 1920년대에 량치차오가 이사장을 역임한 연구계 상지학회(尙志學會) 《철학평론(哲學評論)》 창간 발기인 겸 편집 주간, 상지학회 총서 주간, 국민정부 중국철학회 《철학평론》 편집위원, 이사회 이사 등을 지냈으며, 칭화대학교 문철월간사 《문철월간(文哲月刊)》 발간인, 편집인(1935~1937), 태평양 전쟁개신교 옌칭 대학 《옌징학보(燕京學報)》 편집위원(1937~1941). 1930년~1940년대 중화민국 국민정부 행정원 참사, 국방참의회 참정원. 1946년 말 제2차 국공 전쟁을 시작한 장제스에게 반대하였고, 1948년 이후 칭화대의 야권의 학계 · 정치권 지도자의 하나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베이징 정부 성립에 참여하여 중국민주동맹 중앙상임위원 겸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위원, 중국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국 칭화대 총장 대행 등을 겸하였는데, 1951년 이후에는 공적 활동이 전해지지 않는다.

철학과 사상편집

중국의 사회주의(socialism) 논전, 인생관의 논전,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논전 등을 전개하였다. 다원적 인식론 등을 작업하고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관점에서 중국의 사상 문명 전반을 지식사회학적으로 탐구하였다. 역사의 이성론적이고 기술론적인 해석(intellectualistic and technical interpretation of history)을 주장하였다. "사회주의도 '시장(market)'이 있어야 하고, 자유주의도 '계획(plan)'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학계 경력편집

정계 경력편집

수감 경력 (태평양전쟁 기간)편집

대표 저작편집

활동 중단편집

중국 공산당이 중국 인민지원군을 1950년 10월에 전장에 내보낸 후, 간첩으로 조사를 받던 중에 중화인민공화국 칭화 대학 출신의 정치인들의 개입으로 총살을 면하고, 1951년 이후에는, <칭화주간(淸華週刊)>의 편집자 출신의 중국 공산당의 진보 운동계 학생 출신의 장난샹(蔣南翔)이 향후 동 대학 교장 후임을 맡는 조건으로 같은 해 중화인민공화국 내 모든 공적 활동을 중단하고 공직에서 은퇴하였다.

종합적 평가편집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고, 1948년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지지하였으며, 1950년에는 북한대한민국을 침략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 통일의 문제가 중국과 대만의 양안 문제의 논의에 앞선다는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데, 소비에트 공산주의 제국의 정치 군사적 확장의 목적에 의한 북한의 남침에 비록 반대하였다고 하지만, 북한의 성립에는 중국민주동맹 지도자의 하나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에 참여함으로써 간접적인 영향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피아의 이분법적 구분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되, 그가 중국 공산당의 태생적인 좌경 성향이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도록 한 것이 중국이 신시대를 열어가기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판정한 점이 인문학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같이 보기편집